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24화 (124/157)

00124 -CHAPTER 베르덴. 너는 변하지 않았다 =========================

베르덴 외전. 너는 변하지 않았다.

베르덴에게는 헤르조보다 더 잘 맞는 친구가 분명 있었다. 헤르조에 앞서 사귄 친구이기도 한 사람.

헤르조를 배려하여 베르덴과 친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교류는 얕게 하였다. 헤르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베르덴으로서는 헤르조와 함께 있을 때의 에본느와, 친구를 배려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조용하게는 퍽 깊고 친근한 관계를 이어왔다고 생각한다.

가끔이나마 밖으로 드러내던 친분이 완전히 베일 뒤로 가려진 것은 그와 친구가 열일곱이던 해의 일이었다. 발리앙 영주성인 카펜셔성을 친구와 함께 방문했던 때.

그의 모친과 두 동생은 두 사람을 언제나처럼 환영해주었다. 안온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말, 좋았다…….

“나는 저하 가까이에도 있고 싶고. 무엇보다 에본느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단 말이야. 나 없는 새 둘이 더 친해지면 어떡해.”

꽃 흐드러진 아름다운 후원에 두 동생이 있었다.

편하게 앉아 어여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아리엘과 그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며 쌍둥이 동기를 받아주고 있는 르네가.

새 지저귀는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 풀잎 부딪히는 소리 따위에 가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하여 베르덴은 그들을 부르기 위하여 입을 열었고, 친구는 그 입을 막았다.

친구는 오래전부터 검을 잡아 와서 청각이 베르덴에 비해 훨씬 날카로웠다.

잘 다듬어진 수목 뒤로 두 사람은 몸을 숨기고 섰다.

동생들이 앉아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지 않았다. 외려 쌍둥이가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거리가 가까웠기에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소중한 친구인 에본느를 향한 해맑은 살의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우리 그냥 수도로 올라가면 안 돼?”

“아리엘.”

“르네는 내 마음 몰라. 정말 얼마나 더 사람을 보내야 죽는 거야…….”

우울하게 말하는 그의 작은 여동생. 너무나도 잔혹하였던 그 울먹임.

두꺼운 책을 턱 덮는 소리가 나더니 르네는 아리엘을 부드럽게 달랬다. 울지마. 응? 그리고 엄하게 동기에게 말했다.

“나는 네 동생이라 듣고도 모르는 척 해 주는 거지만, 어디 가서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는 거지?”

“알아. 알고 있어.”

“포르타 영식도 있으니까 더 조심해야지.”

“으응……. 그래도 난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답답해서.”

여태 베르덴의 입을 막고 있던 친구의 손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있다가, 대화가 ‘정상’적인 주제로 돌아가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베르덴에게는 충격받은 가슴을 진정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의 옆에는 지금 저 참혹한 대화를 함께 들은 사람이 있었다.

친구이지만 다른 가문의 후계자인 사람이.

주의했어야 했는데!

“……에브에게 말할 거야?”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친구가 잠시 그를 보다 나직하게 물었다.

“말하지 않길 바라나?”

“…….”

“그렇게 해서 필르 라이네가 사망하면. 그대로 조용히 묻히길 바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니었다. 에본느가 죽는 걸 바란 적 없다.

그러나 저 대화가 어떤 형식으로든 밖으로 새어나지 않기를 또한 바랐다.

그는 내내 무덤덤한 얼굴로 있는 친구를 보았다. 대화를 듣기 전과 들은 후, 변함없이 차분하게 있다는 무의식적인 감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상은 떠오르자마자 깨졌다. 친구는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듯 양 관자놀이를 눌렀고, 베르덴은 그 손이 잘게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항시 침착하던 친구가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친구가 보이는 충격은 베르덴에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평소와 같이 별 반응 없이 받아들였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냉철하던 친구마저 충격에 젖어 떨게 만드는 저 대화, 저 비밀. 친구가 차후에 어떤 일을 벌일지 미치도록 불안해졌다.

친구의 부친에게 알리려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은 겉잡지 못하게 커질 확률이 높았다. 그의 어린 동생이 죽어 나갈 수도 있었다. 발리앙이 흔들릴 것은 자명했다. 극심한 조갈증이 왔다. 일단, 어디 앉아서 차분하게 친구와 대화를 나누어보아야 한다.

베르덴은 조금 전 본 그 손 이외에는 약간의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 친구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본관 입구로 인도했다. 그러면서 나누어야 할 대화와 그가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이 성에는 그의 부친이 없다. 오드리나에 올라가기 전에 입막음을 위한 대화는 그가 해야 했다.

그는 두 동생이 한 말 중 빠져나갈 구석이 있는지 다시 되짚어 보았다.

“…….”

-얼마나 더 사람을 보내야 죽는 거야.

그러나 지독히 명확한 발음이었고, 지독히 명확한 주제였다.

잘못 들었다고 발뺌을 하는 것도 불가했다. 에본느에게 말할 거냐고 이미 친구에게 물어버렸다. 베르덴은 제 치명적인 실수를 자책하면서, 친구가 보지 않게 한 손을 말아쥐었다. 빌어먹을.

-얼마나 더 사람을 보내야 죽는 거야…….

자객 같은 것이리라.

부친과 그가 오드리나에 있는 사이 이 성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저하 가까이에도 있고 싶고.

아리엘이 만난 ‘저하’라고는 한 사람뿐이다. 작년에 에본느와 함께 왔던. 베르덴은 지난번에 여기에 왔을 때 모친의 걱정을 들어 아리엘의 살의를 알고 있었다. 하여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에본느는 황자와 아리엘이 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리를 피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화살이 에본느에게 돌아갔나.

열네 살 소녀의 연심이 저렇게 미친 것일 수가 있나.

-나는 네 동생이라 듣고도 모르는 척 해 주는 거지만

열네 살 소년의 우애가 저렇게 미친 것일 수가 있나.

에본느는 종종 베르덴에게 아리엘과 르네의 안부를 묻고는 하였다. 저런 줄을 모르고.

-얼마나 더 사람을 보내야

모친이 우연히 들은 쌍둥이의 대화를 전해 듣긴 하였었으나, 실제로 움직였을 줄은 몰랐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에본느는 이미 자객들을 여럿 상대했을 텐데, 그런 낌새와 위화감을 그는 느낀 적이 없었다. 다치지 않았던 건가? 하지만 그녀는 암살자를 물리칠 수 있는 무위가 없을 텐데.

생각할수록 초조해졌다. 심장이 추락한 것 같다.

그녀가 다친 적이 없다면, 그렇다면 빠져나갈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그리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손을 올려 배꼽 오른쪽의 배에 올렸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가, 구부렸다가, 펴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구부린 채로 걸었고, 그대로 멈추었다.

“…….”

이거……. 이거……구나.

그는 두 걸음 정도 앞선 곳에서 저를 따라 멈춰선 친구의 얼굴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가끔 에본느의 움직임이, 자세가…….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면 탈이 났다고 의자에 드러누워 버리던 그게 이것이었구나.

그가 사랑하는 이해자는 이미 홀로 앓고 있었다.

“…….”

그의 눈길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나 이 앞에 있는 친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친구가 들은 발리앙의 추악한 면면이 족히 많았다. 약점을 더 알려주어 어쩔 건가. 그래, 그리고 이건 단순히 그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착각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살의를 가진 건 아리엘이지만 실제로 계획을 세워 움직이고 있는 이는 르네라는 사실은 친구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아리엘이 죽더라도 르네는 지킬 수 있을 터.

그날 베르덴은 이 일을 발설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동생을 반드시 막겠다고. 친구의 꺼먼 시선이 한참을 차게 머물렀다.

“너는 내게 친구라는 명목 하에 그런 것을 부탁하는데, 그럼 필르 라이네는 네 친구가 아닌가.”

“…….”

베르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에본느를 향한 죄책감이 컸다. 단지, 가족을 향한 사랑과 가문을 향한 의무감과 책임감이 더 컸을 뿐.

친구는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어찌 입을 막아야 하나. 그의 머리가 어지럽게 분주할 무렵, 친구는 베르덴에게 말했다.

“……그 사람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면 되겠지. 외면만이 이 가문과 네 가족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베르덴은 그 말, 그 기회를 숙고했다.

애당초 숙고하고 싶지 않았더라도 숙고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자리였다. 막연한 깨달음을 주는 말이라면 응당 장고해야 하리. 친구가 카펜셔성에 이틀을 더 유하는 동안 베르덴은 결정하였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는 검을 들기로 하였다. 책임감이었다. 저런 동생들을 둔. 발리앙을 지켜야 한다는.

혹시 모르니까.

정말, 혹시 모르니까.

정말 아리엘이 에본느의 목숨을 노리는 게 맞다면. 그렇다면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착각일 것이다.

친구는 그 결심을 듣고 긴 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첫 걸음으로 좋겠지.

베르덴은 친구와의 친분이 바깥으로 드러나 좋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의 됨됨이를 알지만, 정치는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내고 열 번을 만날 것을 한 번을 만나고, 조용히 열 번을 만날 것을 열아홉 번을 만났다. 그들의 교류 자체는 여전했다.

그는 일단 입 다물어 주기로 말없이 동의한 ‘것 같은’ 친구의 입을 수시로 단속해야 했으므로. 그러나 그런 괘씸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친구가 이런 교류를 어째서 수긍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에본느 열다섯 살.

베르덴은 더는 ‘착각’이라 말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어느 밤, 라이네 저택 밖에서 그와 친구가 자객 둘을 처리했던 그 밤. 오래도록 침묵해왔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건가.”

“…….”

피 묻은 검이 검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이 소름이 돋았다. 묵직한 압박이었다. 그와 친구의 관계는 약 2년 전의 카펜셔성 여행 이후로 한 번도 동등한 적 없었다. 적어도 베르덴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이런 중대한 비밀을 함께 감추고 있으니, 친구라고 완전히 안전한 입장은 아니었다. 친구의 입이 열리는 날 베르덴은 친구도 함께 추락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매사 침착하여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친구를 두려워해 왔다.

베르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친구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후의 낮, 베르덴은 에본느의 새 모친을 주로 모시는 시종이 라이네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받아들이고 지나치려 하였으나, 시종은 단 한 번 실수를 하였다. 작은 나뭇가지를 저가 밟아놓고 흠칫 놀라는 실수였다.

그런 행태 역시 평범하게 받아들일 법 하였다. 단지 베르덴의 눈에 시종의 어깨며 전반적인 자세가 긴장해 있는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기색이 자못 수상했다.

따라가 보니 미로골목이었다. 차라리 영리했다. 설마 낮에 그따위 짓을 하고 있겠냐고 누가 의심하고, 누가 따라가겠나.

미로골목의 죄인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살상을 의뢰하는 이들이다.

또한 단순한 하인이나 하녀가 아닌 시종이다. 귀족의 피를 잇고 주군을 섬긴다는 자존심이 있는 자. 저택 내에서도 수가 많지 않은 존재. 따라서 미천한 죄인들을 괜한 이유로 찾을 리도 없으며, 모시는 이의 허락 없이 장시간 외출을 다녀오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저 시종은 제 원한을 풀기 위해서 주인에게 거짓을 아뢰고 빠져나왔든지, 주인의 명령을 받아 여기에 왔든지.

쥰의 존재가 드러난 게 바로 작년이다. 베르덴은 저 시종이 쥰의 모친의 명을 받아 걸음한 게 아닌가 하였다. 잠시 기다리자 시종이 골목에서 나왔고, 그는 끝까지 따라갔다. 라이네저택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에본느의 절친한 친구였다.

베르덴은 시종의 품에서 나온 병이 하녀 하나에게 넘어가는 것까지 똑똑히 목격했다.

다음날 헤르조가 간만에 귀경하였다는 소식이 와서 베르덴은 또 라이네 저택에 방문하였다. 에본느는 수척해진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아파?”

“뭘 잘못 먹었거든.”

“저런. 또 뭘 주워 먹었으면.”

깐족거리던 헤르조가 지리서로 얻어맞는 걸 보면서 베르덴은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제의 병은 어쩌면 저것이다.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결국 떠올랐다. 에본느는 라이네의 명예를 위해서든 무엇을 위해서든 친구인 그들에게마저 말하지 않고 견뎌내고 있었다. 차라리 쥰의 모친에게만 시달리고 있었다면 그는 끝까지 모르는 척 하고 있었을 텐데.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분량의 살심을 감당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면 되겠지. 외면만이 이 가문과 네 가족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를 짓누르고 있던 친구의 말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가족에 대한 제 책임을 다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자존심 높은 그에게는 그러한 사실 역시 위안을 주었다. 친구의 압박을 받기는 했어도 어찌 되었든 그는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기로 결정했기에.

베르덴은 동생과 발리앙 가문을 위해 에본느의 기사가 되었다.

여전히 가족을 향한 책임감은 죄책감보다 더 컸다. 어느 쪽도 소중하지만 에본느보다는 동생이 더 소중했다.

그가 에본느의 기사가 된 이후로도 암살 시도는 끊이지를 않았다. 그의 친구가 틈날 때마다 바깥에서 처단한 자객들이 많았고, 심지어 오드리나 바깥의 영지에서 들어오려 하는 자객들도 있었다.

그러나 기묘할 정도로 친구는 아리엘의 처분을 요구하지 않았다. 입에 담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인내하는 듯하였다.

============================ 작품 후기 ============================

mqcetus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참고는 저번 베르덴 외전이랑 본문 곳곳.......입니다.

베르덴이 전과 다르게 에본느의 기사가 된 이유가 나왔습니다.

저기 위에서 베르덴의 친구(...)가 손을 떨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건, 설마 이 나이부터 에본느가 자객을 받고 있는 것은 몰랐기 때문에. 그런데 저걸 들은 게 과연 우연일까.

저는 이만 뒷편 쓰러 갑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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