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베르덴은 오늘내일 중에 시신과 함께 발리앙령으로 떠날 테니까…….
그도 경황이 없을 텐데 지금 가서 위로하는 게 과연 마땅한가. 작금의 베르덴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상관이 없다. 보는 눈들이 보기에 마땅한지의 문제이지.
심지어 나는 바로 어제 청혼을 거절당한 사람이었다.
“…….”
거절.
나는 아까 술을 따라둔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군. 거절이란 말이지…….
술을 넘기기 위하여 고개를 조금 젖히자 시야 역시 올라갔다. 난리를 치느라 바싹 마른 목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머리도, 마침내, 떠올려야 하는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모금씩 넘어가는 동안 입술과 잔은 떨어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조금 내려가 안계가 좁아졌다.
청혼을 거절한 직후 일방이 자살하면. 라이네를 향한 시선이 분명 떨떠름하리라.
거절 후의 자살은 어찌 되었든 같이 진흙탕에 끌고 들어가게 한다. 르네는 라이네 공작을 사랑하였으나 발리앙 후작이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비관하였다는 생각이 반드시 나올 터. 어쩌면 나 역시 르네를 사랑하였다는 말도 붙어 다닐 수도 있겠다.
그에 반해, 청혼을 받아들인 직후 자살하였다면, 르네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다는 둥 그런 떨떠름한 시선만 생겼을 테고.
……어, 잠깐.
잔이 비었다. 남아있는 얼음 한 개가 도르르 굴러 내려와 내 윗입술을 때렸다. 잔을 내리고 고개를 바로 하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내가 생각했지만 어이가 없는 가정이다. 그럴 리가 없지. 끝까지 발리앙과 두 동생을 보호하였던 그 사람이?
-가주인 저를, 이해하십니까?
……그럴 리가.
-가주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설마 그가 그랬을까.
-아낍니다. ……정말.
“…….”
손가락을 느르적느르적 움직여 잔의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듯 쥐고, 천천히 책상에 올려두었다.
르네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베르덴은 친한 친우인 나를 외면하기까지 이르렀던 사람이다.
나는 베르덴이 동생들을 처리할 사람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나만 해도 반드시 필요하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조용히 쥰을 죽일 인간이라서. 그건 황제와 수많은 가주들이 그렇다. 끝까지 가족을 지키려 들겠지만 다른 수가 없다면 가족도 버릴 자들.
그러나 베르덴이 르네를 죽였다고? 전과 무엇이 변해서?
문득 시계를 보니 살롱에 나가려 했던 세 시까지 한 시간 남았다.
아무렇지 않게 나갈 것인가. 아니면 충격받은 척 하루 이틀 칩거할 것인가.
기별 없이 베르덴에게 들러 상황을 살필 것인가, 들르지 않을 것인가.
*
나는 그날의 모든 일정을 평범하게 소화해냈다. 그래봤자 어제의 일이다.
살롱에 들렀다 귀가한 뒤 라이네령에서 올라온 봉신 자작 하나와 저녁 만찬을 가졌다.
르네 발리앙이 죽었지만 그건 발리앙의 일이다. 다른 귀족들이 침통해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살롱에서 각자가 후원하는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었으며, 후원하는 연구가들의 성과를 살피거나 더 많은 연구비를 부탁받았고, 후에는 우리끼리 사담을 나누었다.
그 사담의 자리에서 르네의 사망과 관련한 질문을 직간접적으로 세 번 들었다. 첫 질문을 묵살했는데, 그자가 다시 물었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자도 그자를 도운 탓이었다.
세 질문의 주요 골자 모두 나와 르네가 연인이었느냐는 것이더라.
그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자네들이 대답해보게. 내가 연인을 사귀어 그와 한가롭게 노닐 시간이 있었는지.
내 다정한 반문에 그들은 더 묻지 못했다. 급도 되지 않는 자들이 어디 감히 라이네 공작에게.
남녀관계의 소문이 그들에게 나를 친근하게 만들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치적으로 중대한 일도 아니고 남녀관계에 불과하니, 이 기회를 틈타 나나 다른 대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느 쪽이건 내게 몹시도 불유쾌한 일이었다. 르네는 마지막 죽음까지 라이네에 피해를 주었다. 그 개자식은 죽어서도 지치지 않는지.
이게 혹 베르덴이 유도한 피해일 수도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청혼서의 반환이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진 탓이다.
하여 정말, 정말 베르덴이 르네를 죽인 거라면, 그가 르네를 이리 빠르고 급하게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정원을 거닐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초점 흐릿해진 눈에서 알갱이 큰 흙 부스러기가 흩어졌다. 오늘은 하늘이 파랗게 날이 좋다. 여행하는 이들에게 좋은 배경이 되어주리라.
베르덴은 어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신의 출발은 아마도 오늘.
장례를 위하여 베르덴이 발리앙령으로 내려가면, 데스챔프의 처리를 논하기 위한 대귀족 회의가 늦추어지거나 황제가 베르덴의 양해를 받아 그가 불출석한 회의를 열 것이다. 본디 나의 예정으로는 그날에 아리엘을 황궁으로 불러 황제암살미수죄를 씌우려 했고.
그러나 반역모의로 인한 데스챔프의 몰락은 우리 대귀족들의 힘이 아주 많이 약해진다는 것과 동일하다. 증좌가 넘치는 만큼 회의가 혹시라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우리는 한동안 숨죽이고 있어야 하리. 우리 입장으로는 한 사람이 아깝다. 다른 가주들이 베르덴 없는 회의를 용인할 리 만무했다. 황제가 아무리 회의를 독촉해도.
따라서 회의는 아마도 늦춰질 터…….
만일 아리엘도 이번에 발리앙령으로 간다면 차후의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계획이 엉켰다.
어느 순간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이제부터는 실로 내가 모르는 일들만이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맹세컨대, 죽이리.
사심 어린 복수심인 것을 인정하고 난 후 죽음과 살해라는 생각을 함에 아마도 거침이 없었다. 나는 아리엘 발리앙이라도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달아오른 한숨을 길게 내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본관 입구에 거의 다 와 있었다. 저택 부지를 한 바퀴 다 돌았다. 이제 쥰의 재활운동과 기분 전환을 위하여 산책을 나갈 때다. 그런데 계단이 가까워질수록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구별되었고, 하여 나를 웃게 했다.
나는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와 있었구나. 이제 네 방에 가려 했는데.”
그러자 쥰이 수줍어하는 듯 웃었다. 씁쓸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웃음이다. 다행이었다.
어제 아침의 난리 이후 산책을 같이 나가지 않았고 식사도 따로 하며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에, 어제의 짧은 저녁 인사부터 오늘 아침 인사, 함께한 아침 식사까지 쥰은 나를 살피는 기색이어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 자체가 민망하여 그의 걱정을 전부 모르는 척 묵살해 왔었다.
산책 때도 그런 팽팽한 분위기라면 어찌 달래야 하나 했는데 다행이지.
나와 쥰은 시간에 맞추어 준비되어있던 마차에 향했다. 쥰을 먼저 들여보내고 내가 이어 마차의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가서 내 장갑을 가져오라.”
마차의 문을 잡아주고 있던 하인을 보며 명령하자, 그는 즉시 문을 놓고 달려갔다.
지나가는 시종이나 시녀, 할리에게 적당히 부탁하겠지. 마차에 올라 쥰의 맞은편에 앉았다. 뒷목을 주무르며 눈을 감는데 아이가 물었다.
“들르실 곳이 있습니까?”
“그래. 발리앙 저택에. ……산책 전에 들러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하다.”
게슴츠레하게 뜨도록 멈춘 눈꺼풀을 완전히 내리며 사과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발리앙과 쥰을 함께 생각하면 마음이 상당히 격동한다. 한 시도 필요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격한 감정이었다. 지금은 차분하게 생각을 하고자 하지, 감정에 휘둘리고자 하지 않았다.
쥰이 나 대신 장갑을 받고, 마부와 마부 옆에 앉아 있는 기사에게 발리앙 저택에 먼저 들르도록 말을 전하라 하는 걸 들으면서도 나는 묵묵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라이네 저택에서 발리앙 저택까지는 다행히 아주 멀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서 내가 눈 뜬 것은 대충 발리앙에 다 왔겠다 싶을 때쯤. 정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잠시 멈춘 마차가 다시 가기 전에 나는 문을 열고 내렸다. 내 위험천만한 행동 덕에 대경한 마부에게는 마차를 옆으로 치워두라 일렀다. 발리앙으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 때문인지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방해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 기사들을 통과하여 직접 본관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누군가는 이리 접근하는 나를 보았을 테고, 누군가는 베르덴을 부르러 급히 떠났을 터.
전반적으로 색 어두운 차림의 청년이 본관 현관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 몰아 쥐고 있던 장갑을 끼며 나는 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베르덴이 점점, 가까워진다.
너는 살인자인가.
너는, 내 것을 앗아간 살인자, 인가.
나와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가……, 위로를 전하네.”
베르덴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저 무덤덤했다. 그렇다고 그가 진실로 아무렇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저 평정은 가면이리라 당연하게 생각하며 베르덴은 슬퍼하고 있을 것이라며 막연히 생각하겠지.
보이는 표정이 항시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적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을 것이다.
베르덴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리엘은.”
“르네의 죽음과 관련하여 곤란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보다 아주 조금 늦게 말을 이은 탓에, 마치 그가 내 말을 무시한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무시했다.
내 질문에 대해 무슨 반응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거든. 일단 참아주기로 하였다. 동생을 잃어 평소답지 않게 정신없어야 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그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명확히 발리앙이 끼친 폐이니 제가 움직여야 하는데, 곧 오드리나를 떠나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곧 사그라질 걸세. 르네를 위해서도 빨리 그래야 하고.”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귀경하겠습니다.”
“하여, 아리엘은 어떤가. 충격을 많이 받았……을 텐데.”
말하는 도중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현관 위에 나타났다.
내 눈동자는 반사적으로 베르덴의 귀 옆, 그 뒤를 보았다가 그 여인이 아리엘임을 인식하고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베르덴도 몸을 틀어 그쪽을 보았다.
아리엘의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창백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많이 울었는지 얼굴도 조금 부어 있다.
그러나 진하지 않은 화장이 제대로 되어 있었고, 표정은 의연했다. 나와 베르덴은 보폭 작은 걸음으로 또박또박 다가오는 아리엘을 잠잠히 기다려 주었다.
그녀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각하.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는 저의 친구이기도 하였으니까요.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바쁘고 어수선할 텐데.”
“아니에요.”
내게 보이는 미소는 상냥했다. 아리엘을 잠시 살피다가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엘도 영지에 내려갑니까?”
“예. 르네의 마지막인데, 가능한 곳까지는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객관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쌍둥이 동기를 잃은 사람이니 아주 슬플 것이리라고 제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무어.
그 슬픔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나. 르네 발리앙을 살려 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측은하게 여겨주겠다. 그러나 그게 아니질 않은가.
훗날의 일을 위하여 미리 말을 남겨두는 것은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이다. 아리엘의 고통 같은 건 진심으로 배려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바닥으로 천천히 깔려 들어가는 낮은 한숨을 쉬고 용건을 꺼냈다.
“이걸 전할까 말까 생각했는데, 이걸 제안할 때 르네도 옆에 있었기에 혹시나 아리엘에게 힘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예?”
“돌아오면, 아리엘, 같이 솔체궁의 정원에 가겠습니까?”
“…….”
아리엘은 한참 나를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웃는 것처럼 눈가가 움찔거리다가 멈추고, 울 것처럼 초점을 흐렸다가 멈추고, 눈길을 아래로 완전히 떨어뜨렸다가 올렸다. 그녀의 몸이 쓰러질 것처럼 한 번 주춤거렸다. 베르덴은 아리엘을 단단히 부축했다.
나는 물 적신 붓으로 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시선을 옮겨 그 부축을 보았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발리앙인 베르덴은 아리엘의 옆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바.
아리엘을 베르덴이 부축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 부축에서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까닭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였다.
아리엘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꼭 가요.”
“…….”
“꼭 가요, 각하…….”
메말라 떨리는 목소리가 가닥가닥 갈라졌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인사했다.
“잘 다녀와요, 아리엘. 경도. 도울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베르덴과 악수를 나누었다. 직후 뒤도는 내게 그는 나직하게 인사하였다.
“감사합니다.”
“…….”
반쯤 돌았던 몸을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까닥인 후 완전히 돌아섰다.
쥰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베르덴을 만나러 올 때만큼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걷는 박자를 순간적으로 잃기도 했다.
그렇게 수 분을 걸어나가 마침내 마차에 도달했다.
마차에 오르는 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쥰에게 나는 빙긋 웃었다.
“괜찮아. 유감을 전한 것뿐이야.”
“음. 예.”
내가 자리에 앉고 등 뒤의 벽을 두드리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우리가 산책을 시작하는 곳은 유동인구가 적당한 번화가였다. 불편한 몸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할까 하였는데 번화가를 먼저 고른 이는 쥰이었다. 사람 활기가 넘치니 기분을 전환하기에 좋고, 다리가 이리된 것은 결코 부끄럽지 않다며. 어차피 이겨내야 할 시선들이라며.
그가 걱정한 건 나였다. 혹시 몸 불편한 저로 인해 평민들이 누님 계신 라이네를 우습게 보지는 않겠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번화가로 결론을 내렸다.
십여 분 정도를 달린 마차가 진입할 수 있는 곳까지 진입한 뒤에 멈추었다.
내가 먼저 내려 쥰의 하차를 도왔다.
“날씨가 좋네요.”
“그러게.”
쥰의 상태도 나쁘지 않다.
마냥 어여쁜 아이를 한 번 쓱 살피고 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아이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기사를 돌아보고 시선을 주고받은 뒤 쥰의 옆을 천천히 따랐다. 마부석에서 내린 기사는 아직 서 있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을 때 따르기 시작할 것이다.
앞을 보면서도 내 온 주의는 쥰에게 쏠려 있었다.
걸음은 괜찮나. 호흡은 괜찮나. 힘겨워하지는 않나.
여기부터 라이네 저택까지 걸어가는 산책인데, 첫날은 도중에 몇 번을 쉬어야 했다. 요즘에는 속도는 느릴지언정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나날이 상태가 좋아지는 건 느껴진다. 그러나 중독되기 전의 몸상태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시드니에게 양해를 받아 기사단을 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양해받은 기일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알드리히에게 바친 서임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쥰도 많이 조급하리라고 생각한다.
쥰에게 집중하며 걷다보니 발리앙의 일은 서서히 잊혔다.
지친 채로 더 지쳐가던 심신이 그 상태 그 정도 그대로 멈추었다.
숨이 쉬어진다.
하여 넋을 잃어갔다.
나는 마침내 쥰도 놓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생각이랄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는 길 그대로 머릿속에 복사되어 나타나기만 하였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이 시리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다.
우리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오는 아리엘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리엘인 것을 알면서도 아리엘이라는 인지를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상태였다면 그대로 지나쳐,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필르 발리앙.”
내가 정신을 반쯤 차린 건 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내 눈이 멍하게 가늘어졌다. 아리엘은 우리를 열 걸음 정도 앞에 두자 우뚝 멈추었다. 아리엘. 눈이 시려서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동안에 갑작스레 살기가 폭발했다.
누군가 내게 달려드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쥰이 내 앞을 급하게 막고자 움직이고 있었고, 하여 나는 내 앞을 막은 그의 팔을 낚아채 뒤로 당겼다. 본능이었다.
.
“…….”
번화가의 활기는 모두 죽고 숨죽였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어떤 여자와 어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나와 쥰은 누가 보아도 귀족이기 때문이리.
그러나 그 비명을 듣고 내 숨이 깨어났다.
……그렇군, 현실이다.
나는 나를 찌른 아리엘의 사납게 죽은 눈을 응시했다. 죽으라고 발악하는 온 눈동자. 칼을 빼려 하는 아리엘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다. 이걸 이대로 빼면 내가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아리엘은 차분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오라버니가 르네를 죽였어요. 그 아이는 잘못이 없는데. 아세요?”
“…….”
“놔.”
“…….”
“놔요, 각하. 죽어야지.”
아리엘은 르네가 무슨 일을 꾸며왔는지 아마도 모를 터다. 그럼에도 르네 발리앙의 죽음을 말한 이유는 아무래도 르네와 함께 해 왔던 내 살해를 마무리 짓겠다는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빼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 탓에 환부가 더 커졌을 것이다. 고통으로 떨리는 턱을 참아보려 이를 악물었다.
나는 빈손을 들어 아리엘의 목을 움켜잡았다. 한 손으로 능히 숨 못 쉬게 할 수가 있다. 점점 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결국 아리엘은 내 손에서 해방되고자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내 팔과 손이 마구잡이로 긁히고 꼬집히고 잡혔다.
어쩌면 내 마지막 힘이다.
난 여기서 아리엘을 죽일 수가 있다. 죽여도 된다.
한데 눈앞에 어른거리는 게 아리엘의 얼굴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아프게 숨 쉬었다. 폐에 구멍이 난 것 같지는 않다. 아,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찌르면 이 자리에서 죽어갈 것도. 내 앞에 푸른 눈의 강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베르덴. 나는 끝까지.
나는 아직도.
너를.
“내내 미련하지 않게 일을 진행해왔으면서 이 무슨 미련한 짓인가, 필르 발리앙.”
신경 써서 보니 오늘도 얼굴에서 화장기가 보였던 너를, 베르덴.
넘어가려는 호흡을 조절하며 느릿느릿, 목소리를 눌러가며 나무랐다.
베르덴. 너를 향한 증오는 진심이었는데. 너를 향한 내 위선은 진심이었는데.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는 너를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아리엘의 목을 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단도가 박힌 환부 주변에 손을 올리고 숨 막히는 신음을 버텼다. 극한까지 조였다가 놓인 숨통 탓에 아리엘은 목을 잡고 죽도록 괴로워하고 있었다. 목구멍을 갈퀴로 긁은 것처럼 기침이 거칠었다.
그 고통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서 사라져. 네 오라비를 배려해라.”
아리엘이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아리엘이 뒤집어쓸 죄 역시 나를 죽이려 했다는 죄, 혹은 나를 죽인 죄가 아니다.
솔체궁 정원으로 약올린 것도 나중을 위해서였는데 오늘 반응을 하면 어쩌나.
금일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묵과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자마자, 나는 떨리는 신음을 끅 흘리고 말았다. 복부에 올리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리엘의 목을 잡고 있을 때 우리 옆에 도착한 기사는 쥰을 부축하기보다는 아리엘을 경계하는 것을 우선했다. 우선순위는 그게 옳다.
실제로 아리엘은 포기하지 않고 마법으로 공격해왔다.
아직 멈추지 않은 기침을 하면서도 진을 그리고 흘렸다. 독물의 진이었다. 기사가 내 앞으로 와서 그것을 쳐냈다. 그사이에 나는 환부 주위를 누르며 허리를 아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아직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버티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이 몇 개가 더 오는 사이 기사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아리엘을 돌려보내고자 했던 바를 따르기 위해서이거나, 내가 그의 옷을 잡아 아리엘을 제압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귀가 윙윙 울린다.
나는 말 대신 목을 긁는 신음을 흘리며 손을 움직였다. 내가 잡힌 기사의 옷이 풀려났다.
처음부터 몸을 숨기고 마법으로 공격했으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마법이 너무 약하여 나나 쥰이 당연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제 그녀가 이 자리에서 내게 다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끝끝내 버티고 있는 까닭.
나를 죽이다 죽을 것이라 각오를 했든지, 눈이 돌아가서 앞뒤가 보이지 않든지.
어찌 되었든 제 발로 떠나진 않을 것 같기에.
아리엘, 너도 내 뜻대로 되어주지를 않는다. 나는 포기했다. 이미 지쳐있던 마음과 단도가 박혀 고통스러운 몸이 그 포기를 이상하리만큼 쉽게 만들어주었다. 르네의 죽음을 향한 허무감의 여파. 내 꿈. 나의 복수.
내 피.
내 눈물.
반드시 후회할 이 결정.
끝이다.
“……제압하게.”
기사는 즉시 달려갔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을 매만졌다. 숨이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한 음성이었다. 들은 적 있다. 내 목에서 나는 이 목소리를.
아리엘이 손쉽게 제압되는 것을 확인하고 뒤로 더듬더듬 돌았다.
내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던 쥰이 주저앉은 그대로 아무말도 못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수많은 작전을 통해 괴물들만을 죽여온 그는 사람이 사람을 찌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터다.
나는 그 옆에 천천히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쥰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동공이 안쓰러워질 만큼 커진, 바들바들 떨리는 눈이었다. 나는 옅게 웃었다.
“……숨 쉬어. 괜찮다. 숨, 쉬어.”
너를 발리앙의 일로 또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배를 마지막으로 누르고 손을 떨어뜨렸다. 나는 피 묻은 손을 내 허벅지에 올리고 숨을 헐떡였다. 출혈량이 아직은 많지 않아 정신이 있었지만 아주 조금 아득한 기미가 있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일어나서 아…….”
차분하게.
넘어오는 피를 삼키고 이었다.
“아리엘을 네가.”
참을 만한 고통이야. 괜찮다. 버틸 수 있었다.
“끌고 와야 한다.”
피 같은 것을 연이어 세 번 삼켰다. 그것이 피인지 위장 내용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역류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웃으며 벌벌 떨었다.
“아르센경이 나를 부축해야 하니까. 할 수 있겠지?”
쥰은 경직되어 나를 보다가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
우리의 옆으로 아리엘을 끌고 온 기사가 쥰에게 손을 내밀었다. 쥰은 그 손을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어 한 손 밖에 쓸 수 없다고 해도 수 년을 기사로 지내온 청년에게서 아리엘이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한결 안심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누……!”
“…….”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왈칵 시원하게 쏟은 한 줌 피로 보건대, 내장이 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객에게 상했을 때 며칠을 앓다가 일어났더라. 이번에야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가누려 애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나를 안게.”
아르센은 두 팔로 나를 안아 들었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혼비백산한 의사는 신관이 도착할 때까지 단도를 뽑지 않기를 선택했고, 나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나는 달려와 온화하게 웃는 클레멘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