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1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좋아. 이쯤 되면 정말 이상하다. 쥰이 독에 당하여 쓰러졌을 때도 나는 서 있었다. 전투하는 외성에도 다녀왔으며, 황제를 만나 협박을 듣고 협박을 하였다. 그런 평정은 내가 특별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베르덴도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세였다.
내가 아는 그는 아주 유능한 젊은 후작이, 었, 고.
……아.
나는 작은 불씨에 덴 것처럼 손끝을 멈칫 오그렸다. 그렇군. 아, 그랬다.
후작이‘었’지.
나는 베르덴이 나 돌아오기 전에 비해 후계자 교육을 받은 연수가 짧은 것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를 속이기 위해 깔기 시작한 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물론 놓지는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선명한 눈을 들여다보기를 일 분 정도. 결국 베르덴이 먼저 주제를 바꿨다.
“이제 괜찮다면 혼담에 대해 논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리하지.”
하마터면 목멘 음성으로 답할 뻔했다. 나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 차를 모두 마셨다.
그리고 들은 결론은 간단하였다.
“라이네경과 아리엘의 혼담, 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거절하겠습니다.”
“…….”
“그리고 각하께서 르네에게 넣어주신 혼담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그는 두 쌍둥이 동생들이 내게 한 짓을 알고 있으므로 양심이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바 있으나, 이리 들으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썼다.
쥰과 아리엘의 혼인은, 확실히 시드니와 아리엘이 혼인하는 경우에 비해 얻는 이익이 적다. 그러나 라이네 공작과의 혼인은 발리앙이 쌍수 들고 환영할 혼인인데. 우리의 상황이 평범하였다면 발리앙은, 허락을 기꺼이 했을 텐데.
베르덴이 라이네와 더 끈끈한 인연을 엮는 것을 기피 하는 건, 르네를 내 옆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가 안다는 반증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나는 내심 ‘안타까움’을 향해 비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쥰을 거절한 이상, 시드니와 아리엘의 혼인은 진행되리. 알았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장할 쌍둥이다. 데스챔프에 대해 논하기 위해 모이는 대귀족회의가 있는 날.
나 당하였던 그대로. 팔걸이 끝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나는 흐리게 미소했다. 그래, 그날, 아리엘부터 처리.
“결정이 바뀔 가능성은 없나?”
“없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내로 공식적으로 청혼서를 반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손을 올려 뒷목을 쓰다듬었다. 뭐, 예상했으니까. 씁쓸할 뿐 다른 타격은 없다. 손이 떨어졌다. 나는 빙긋 웃었다.
“아니. 괜찮네. 어쩔 수 없지.”
“…….”
“나는 이만 일어나겠네. 한가로이 한 잔 나눌 자리는 아닌 것 같군 그래.”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으로는 팔걸이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안에 시종이나 보좌가 없기에 베르덴이 직접 옷걸이에서 내 프록코트를 빼내어 건네주었다. 도움 없이 그것을 입자 옷 끄트머리가 오금을 스치며 흔들렸다.
앞섶을 잡아당겨 대충 정리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좌는 우리를 보자마자 앞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내 말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일 터.
현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방금 후작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공작이다. 다른 후작에게 정상적인 뜻으로 넣었던 혼담 같으면 자존심에 금이 갔을 입장.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층 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
계단에서 바로 옆으로 내려다보이는 곳, 인즉 홀의 한구석에 놓인 긴 의자에 르네와 아리엘이 앉아있었다. 중앙문으로 가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그들의 머리통을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내 옆에 있는 베르덴에게 물었다.
“내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무언가.”
청혼을 거절한 이유를 나도 여태 묻지 않았고, 베르덴도 내가 묻기 전에는 굳이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쥰과 아리엘의 경우처럼 발리앙의 권익을 위해서라고는 말하지 못할 테니, 거절한 까닭을 대기가 아주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서.
베르덴은 그의 침묵을 잠시 후 부수었다.
“르네는 각하의 옆에 서기에 부족합니다.”
“……전 후작과 같은 말을 하는군.”
픽 웃고 그리 한 마디 남겼다. 그리고 나를 보는 베르덴을 무시하고 홀을 밟았다. 문을 향해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까.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두 사람을 그제야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각하. 오라버니.”
“아리엘. 르네.”
“무슨 일이지?”
베르덴은 우리가 훈훈한 인사를 주고받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직한 음성으로 묻는데, 싸늘하다 싶을 만큼 표정 없는 얼굴이라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애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쥰이 약점이 될까 하여 다른 이들 앞에서는 쥰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만일 경계심의 발로라면 상당히 날 세운 경계심이다. 놀랍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게 내보이다니 무슨 생각인가.
내가 호의적인 웃음을 버티고 있는 사이, 아리엘이 상냥하게 웃었다.
“각하께서 떠나실 때 배웅을 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야기는 잘 끝났습니까?”
르네가 옅은 미소를 짓고 물었다. 속은 꽤나 초조할 텐데도 어조는 조곤조곤, 차분하다. 아름답고 생기 있는 아리엘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의 느낌은 더더욱 흐리고 옅었다. 나는 새삼 등허리에 싸늘하게 돋은 소름을 견뎌냈다.
아, 정말이지, 겪을수록 이 청년은 만만치 않게 새롭다.
그리고 그만큼, 무섭다.
저들을 뿌리 뽑는다는 건 저들의 목숨 역시 앗는다는 것으로 확실히 결론 내린 이유였다. 살아있으면 무얼 할지 모른다. 나는 이 영리하게 숨죽이고 있는 청년이 두려웠다. 쌍둥이 누이를 전면에 앞세워 자신은 안개처럼 감추고 있는 이 청년이.
가장 가까운 피붙이마저 이용하다 버리는데 무얼 버리지 못하랴.
능력이 되고 그 능력을 감당할 성정까지 가지고 있으니, 평범한 머리를 가진 나로서는 실은 당해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내 기억이 있어 내가 선전하고 있으나.
나는 흘끗 베르덴을 보고 르네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소리 내어 대답하지는 않았다. 웬일인지 베르덴도 이렇다 할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걸음을 옮기자, 바로 오른쪽에 붙어 묵묵히 배웅을 위한 걸음을 계속했다.
그 사이 내 왼쪽에 살갑게 선 사람은 아리엘이었다. 난 눈을 접어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보냈다.
“고맙습니다, 아리엘.”
“당연한 일인 것을요.”
“르네도, 고맙습니다.”
“…….”
아리엘의 옆에 선 르네는 미소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저 단정하고 부드러운 인상. 부러울 만큼 매끄럽다, 정말. 단순한 정적이었으면 오래도록 내 옆에서 나를 괴롭혔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손을 올려 타이 매듭을 움직였다. 답답할 만큼 가슴 속에 불이 붙은 탓이다. 정수리에만 국소적으로 화닥닥 열이 올랐다.
머리 뚜껑에서 지글지글 끓던 분노는 금세 사라졌다.
온전히 평온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괴물을 앞에 둔 자리보다는 이성적이라고 느낄 즈음, 나는 차라리 이 자리를 이용할 것을 떠올렸다.
하여 턱을 당기고 아리엘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 요즘 황궁에 자주 가는데, 솔체궁 후원에 가본 적 있습니까?”
“아……. 거기는 폐하께 윤허를 받지 못해서…….”
알드리히에게 허락을 받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나와는 다르다. 그래, 노렸다.
나는 은근하게 웃었다.
“그곳이 봄에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며칠 후에 함께 가보겠습니까? 선물도 돌려드려야 하고 회의도 있을 것 같고 해서, 입궁하게 될 것 같은데.”
“예?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괜찮을까요?”
“알현하면서 여쭤보면 되겠지요. 지속적으로 드나드는 건 허락하지 않으셔도, 한 번 입장하는 건 이해해주실 겁니다. 아니면 제가 오늘 먼저 여쭤보고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럼 선물도 오늘……?”
“아니요. 그건 회의가 있는 날에.”
“그럼 제가 내일이나 모레 공작저에 들러도 될까요? 답이 어찌 왔는지 들을 겸 각하와 시간도 보내고 싶고…….”
볼을 발갛게 붉힌 얼굴을 보고 내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속을 알고 이리 적극적인가. 아니면 이미 내게 들이댈 심산이었나. 내 생각지 못한 권유가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회였을 지도 모른다.
살살 약을 올리며 하는 제안을 거절할 만도 한데,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잡는 이 꼴을 보면.
내가 아는 르네와 아리엘은 이리 멍청하지도, 이리 급한 행보를 보이지도 않는다. 나를 끝장낼 수 있는 치명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던 최후의 때를 생.
나는 소리도 나지 않게 얕은 콧숨을 뚝뚝 끊어 흘렸다.
……그 최후의 때를 생각해보라…….
겉옷 주머니 옆에 떨어져 있던 손이 천천히 움츠러들었다.
“…….”
입안이 말랐다.
우묵하게 웃음이 패였다. 나는 이를 살짝 보이며 눈웃음을 살랑거렸다. 이거야 원.
이거야, 원…….
“물론입니다. 제가 폐하께 답을 받으면 전갈을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지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옆에서 베르덴이 부스럭거렸다. 눈길을 주니, 손을 올려 조금 전의 나처럼 앞섶을 정돈하고 있었다.
세 발리앙은 본관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대기 중인 내 말까지 함께 나와 주었다.
나는 등자에 발을 넣기 전 베르덴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잠깐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왔다. 통상적인 악수보다 조금 더 길었고, 조금 더 아팠다. 지그시 가해지는 악력을 잠잠하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손을 내치려 하면 서로 모양이 우습게 되고 만다.
그는 뒤에서 기다리던 아리엘이 의아해하며 그를 부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가주인 저를, 이해하십니까?”
이제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의 발리앙은 어딘가 교묘하고 교활한 구렁텅이 같은 느낌이다. 평소답지 않은 것들이 넘친다. 평소의 아리엘이라면 하지 않을 말. 평소의 르네라면 보이지 않을 멈칫거림. 평소의 베르덴이라면 결코, 결코 묻지 않을 말.
나는 그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이해하냐고?
이럴 때 올바른 반응을 계산해보았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끈지게 잡은 손은 우리 서로 도무지 놓을 것 같지 않게 단단히 얽혀 있었다. 작게 숨을 털어냈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자네를 언제나 이해하네, 후작.”
가주인 그를 이해한다. 죽어가면서도 이해했고, 여전히 이해한다.
나를 집요하게 감던 베르덴의 눈동자는 어느 순간 스르르 가렸다. 내려온 눈꺼풀은 방향상 내게만 보였다. 나는 눈을 굴려 베르덴의 뒤로 보이는 르네와 아리엘을 보았다. 위쪽으로 볼록한 호를 그리며 도로 후작에게로 시선을 박는데, 그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그는 나와 비슷하게 숨을 훅 털어냈다. 눈 뜬다.
그가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본 중 가장 환하고 다정한 웃음인지라 외려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러나 나는 올린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을 이해하였듯, 이 사람도 나를 이해하리.
필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베르덴의 작금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내 속에 웅크려있는 것은 라이네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적인 살의이므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순간에 상대를 놓았다.
뒤돌아, 얼얼한 손으로 전교를 잡고 등자에 발을 올렸다. 훌쩍 오른 말 위에서 고삐를 넘겨받고 길이를 조절하였다. 그들 세 사람은 나를 향해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마지막이었다.
정말 마지막.
그날 저녁이 되기 전 두 청혼서를 되돌려 받았고, 다음 날 아침, 밤잠을 대신해 의자에서 잠시 눈 붙이던 중, 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는 발리앙 삼 남매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
르네 발리앙의 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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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