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20화 (120/157)

00120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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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르네와 아리엘을 자연스럽게 둘러 보았다.

‘오랜’ ‘친구들’과 갖는 간만의 티타임이었다.

짬을 내어 갖는 휴식이라고도 혹자는 말하겠고, 혹자는 내가 발리앙에게 보낸 두 개의 청혼서를 떠올릴 것이다. 베르덴은 아직 쥰과 아리엘의 혼담에 대해서도 거절의 뜻을 공식적으로는 전해 오지 않았다. 내 청혼도 쥰의 청혼도 오늘 어떻게든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어제도 말해두었고.

베르덴은 필히 나와의 대담을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도, 급한 일이 생겼다며 보좌를 통해 사과를 전한 후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더라.

따라서 이 자리는 베르덴이 의도한 자리는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의도하지 않게 보이도록 꾸몄을 수도 있고.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응접실로 나를 만나러 온 르네와 아리엘을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베르덴이 올 때까지 같이 차를 마시자는 내 제안에 아리엘이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 갑작스러운 티타임에 대한 당황은, 베르덴의 보좌가 하였다.

기사 출신인 내 보좌와 다르게 오롯이 문사인 그는 표정 관리는 잘하였지만, 호흡과 손끝 여물기가 무인에 비할 수 없었다.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이나, 그가 주로 상대해야 하는 가주들은 무술에 익숙한 자들이 아니었다. 나나 베르덴, 시드니, 기요트 변경 백작이 특별한 경우라서.

베르덴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십 대 후반에 다다른 후에야 주섬주섬 검을 잡기 시작했었다.

……이번 시간,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이번에는 십 대 중반에 이미 기사가 되어 내 호위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마는.

“각하.”

“음?”

내내 조용하던 자리에서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인은 나를 보며 조금 눈치를 보는가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라이네경은……, 좀, 괜찮나요?”

“아. 아, 그렇군. 그 아이가 쓰러진 후에 만난 적이 없겠습니다.”

“예에.”

“이야기를 들어 알겠지만, 아직은 회복되지 않은 곳이 있어 재활 중입니다.”

“그러니까, 회복, 되는 거지요?”

회복, 되겠느냐고.

다른 이들에게 여러 번 들은 질문이고 그에 따라 여러 번 회답한 바 있었지만, 들을 때마다 등허리가 타오를 듯 뜨겁게 되고 만다. 나는 눈을 굴렸다. 그리고 천정을 힐끗 보고 숨을 가다듬는 모습까지 보여준 뒤, 다시금 웃었다.

“지켜보아야겠지요.”

현재 그 아이의 상태. 인즉, 내 무능.

내 미련함.

내 죄.

나의 어떤 후회.

내 동생은 저들에 대적하는 나를 위하여 스스로 중독되었고, 결국 지금은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내 죄다. 더 빠르게 뿌리를 찾아내지 못한 내 죄.

따라서 이제는 빠르게 치워버려야지.

내 속을 모를 아리엘이 사려 깊게 염려를 보탰다.

“심려가 크시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적당히 화답했다.

기도하겠다는 말이 인사치레로 들리면 좋겠건만, 아리엘이 마법사임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이 여자도 혹 독실하여 나처럼 에녹의 검을 가지게 된다면, 그건 또 웬 난장판인가.

다시 잔의 고리를 손가락으로 휘감고 들어 올렸다.

앞으로 기울었던 허리를 펴 등을 기대고, 한 모금 마시기 전 주제를 돌렸다.

“아리엘과 르네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아리엘은 요즘 폐하와 자주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을 축였다.

아리엘이 수줍게 웃었다.

“네에. 감사하게도 폐하께서 시간을 할애해주시네요.”

“좋은 일입니다. 어제 두 분 산책하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이 다 기뻤습니다.”

“어머나, 감사해요. 폐하께서도 자주 각하의 이야기를 하세요. 같은 친구를 두었다며.”

“그렇습니까…….”

“어제 두 분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폐하께서 각하께 자주 선물을 하사하시는 것 같던데.”

나는 이번에는 입술을 적시고자 잔을 입술에 대었다.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잔을 기울여 아랫입술에 찻물을 적셨다.

지나치게 젖은 건 적당히 훑어냈다. 나는 그리 하고 나서야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챙겨주고는 하십니다.”

“그렇군요……. 폐하께 돌려주신다기에 조금 놀랐거든요.”

아리엘의 객쩍어하는 웃음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듣는 편을 선호하는 평소 성정과 같이 조용히 있는 르네와 한 차례 눈을 마주한 후, 다시 아리엘을 보고 대답했다.

“중요한 의미가 담긴 선물을 하사하신 터라.”

“어머. 중요한 의미요?”

아주 자연스러운, 아주 좋은 질문이다. 이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가늠하며, 느릿느릿 입을 움직였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르네,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잿빛 안개처럼 흐린 분위기의 청년은 제게 돌려진 화살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나는 그 놀란 얼굴을 보고 흐리게 웃었다.

딱 맞추었다. 내내 열려 있던 문간으로 나타난 베르덴의 소리가 났다. 르네는 연 입을 우뚝 다물었다.

나는 그걸 못 본 척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을 슬쩍 올렸다.

“안녕하신가. 늦으셨군.”

“각하.”

베르덴은 단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하였다. 그리고 쌍둥이 동생들을 말없이 훑어보았다. 두 남녀는 지체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정정한다. 아리엘은 곧바로 일어났으나, 르네는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내게 보내고 나서 일어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내 눈에는 묘하게 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더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알고 있는 덕분, 일까. 나는 재미있어하며 싱글싱글 웃으며 두 청년을 배웅하였다.

두 사람이 나가고 베르덴의 보좌가 문을 닫았다.

베르덴은 조금 전까지 르네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으며 사과하였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두 친구와 좋은 시간 보냈네, 덕분에.”

“차를 더 따르라 하겠습니다.”

“괜찮네.”

한두 모금 분량의 찻물이 남아있는 내 찻잔을 보고 하는 말에, 베르덴을 만류하였다. 이 정도면 우리 담소를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르네와 아리엘이 있을 때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베르덴과 나눌 사담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놀러 온 것도 아니라 따로 준비해온 주제도 없고.

양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 보자. 먼저 경 용건부터 듣는 편이 좋겠지. 날 만나려 했던 이유가 무언가.”

“아……. 라이네경 소식을 들어서. 경도 걱정이 되고, 각하께서 평소 그 사람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알기에 각하도 염려가 되었습니다.”

“아. 그런 거였나? 고마워라.”

우리, 어찌 되었든 아득바득 친구처럼 지내고 있긴 있는 모양이지.

아니면, 동생들이 한 짓인 줄 알고 내 기색을 살피러 왔던 것뿐이든지.

나는 잠시 베르덴의 얼굴을 보다가 말갛게 웃었다.

“경 삼 남매, 얼마나 사려 깊은지 몰라. 아까 르네와 아리엘도 쥰을 걱정해 주더군.”

“…….”

“좋은 친구가 있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이럴 때마다 문득 생각하곤 해.”

행운이지. 말도 못할 행운. 단지, 발리앙 삼 남매와 나는 서로 좋은 친구가 아니라 안타까운 일일 따름이다. 만나지 않아야 했던 인연의 단적인 예시가 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 말을 듣고도 베르덴은 묵묵하였다.

생각에 잠기는 것 같이 그의 눈길이 조금 내려간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마냥 희지 않은 저 얼굴은 그야말로 바깥에서 구른 적 있는 무인의 얼굴이다. 내 곁에 오기 전, 내 곁에 서서 나를 지켰던 때, 내가 그를 내친 후. 이번 시간의 그는 긴 시간 검을 들었다. 긴 시간, 누이인 여주인공의 든든한 편이 될 거라 생각하여 끝 있는 우정을 나눠온 친구였고, 그럼에도 헤르조와 함께 내게 많은 위안을 주어왔던 사람이었다.

참. 끝이 있기에 의미 있었던 우리의 시간.

그리고 오래 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외면으로 끝날지 몰랐던 우리의 시간.

어느 쪽이든 아슬아슬하게 찬란했던 우정이다. 지금은 어디까지 썩어갈 수 있는지 경주를 하는 것만 같은 관계이지만.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손끝을 조금 말았다.

“경. 혹시 무슨 일 있나.”

“…….”

베르덴이 눈을 올려 나를 보았다.

나는 손을 올려 검지로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베르덴의 눈이 커졌다.

마냥 희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얼굴보다는 훨씬 하얀 저 얼굴은 분칠을 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여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었을 옅은 화장은, 내가 기억하는 그의 안색과 달라서 알 수 있었다.

말했잖은가. 아슬아슬하게 찬란했던 우정이라며.

나는 어제 햇빛 아래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경이 오늘 늦기도 하였고.”

혹 어제도 화장을 하였다면 하루 사이에 생긴 문제가 아닐 터. 그러나 어제는 어떠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볕 아래에서 그런 걸 구별하기는 어려워서.

베르덴은 장갑 낀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납니까?”

“잘 안 나네. 걱정할 건 없고. 하여, 정말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픈 건가?”

걱정하는 것처럼 물었으나 베르덴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 바쁜가?”

“예. 저야 바쁜 거지만, 각하야말로 푹 주무시고 계십니까?”

……내가 약을 먹어야 그나마 푹 잘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그리 물으면, 걱정인가, 공격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이만 닥치라는 것일 테지. 그러나 괘씸하다. 내가 생각하기로 베르덴은 내 앞에서 죄인이고, 설설 기어야 마땅했다. 단지 그런 생각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생각이고, 양심이 무어라 말하든 저리 단정하게 앉아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감상은 한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당연히 가문의 주인으로 생각해야 하고.

깊이 얕은 한숨을 쉬고 씁쓸한 척 대답했다.

“쥰이 저 상태인데, 잘 자게 되었더라도 못 자게 되었을 법하지 않나?”

“하긴 그렇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쌍둥이가 다치면 마음이 상당히 무겁겠지요.”

“그렇지? 그게 큰누이나 오라비의 마음이라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십니까?”

나는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그럼 경은 다른 생각인가?”

“……가주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

무어라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베르덴은 내게 묻고 답하는 내내 조금 웃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목소리도 잔잔하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쥰의 누이이기 전에 라이네의 가주로 행해야 하고, 쌍둥이의 오라비이기 이전에 발리앙의 가주로 행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을 완전히 버리고 산다는 건 아니었다.

몸 다친 동생을 걱정하는 것은 가주보다는 가족으로서 할 일이다.

팔려가듯 가는 정략혼을 해야 하는 급 낮은 한미한 가문이라면 모를까, 우리 두 가문, 최고위 귀족이지 않은가. 우리가 가주를 승계하며 저절로 방계로 빠지긴 하였으나 그래도 가주와 가장 가까운 방계인 우리 동생들은, 몸에 상처가 나더라도 값싸지는 상품 같은 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주로서 염려할 것도 딱히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베르덴과 얽힌 시선을 유지했다.

그를 대체로 이해해왔으나,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족히 의미심장하고 수상한 말이기도 해서 경계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베르덴은 내 시선을 맞받아치다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발언이었습니까?”

“아……. 어……. 조금 그렇네. 나는 경이 두 동생을 몹시 아낀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동생이잖아. 경은 장남이고.”

“아낍니다.”

내 얼떨떨한 말에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벌려 숨을 들이켜며 천정을 힐끔 보고, 눈을 내 얼굴 옆 허공으로 떨어뜨린 뒤 덧붙였다.

“정말.”

파하, 하고 울음을 토해내는 것 같은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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