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19화 (119/157)

00119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그럼, 어디 보자. 나도 할 일이 있고 하니 이만 용건으로 들어가지요. 날 만나는 걸 기대했다고?”

“……예.”

다른 생각을 하다가 대답할 때를 놓쳤다. 기다리는 시선들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느릿느릿 대답하였다. 그에 알드리히는 산뜻하게 웃었다.

“반역죄로 공작가를 싸잡아 날리려 하니, 그대들 열세 가주들께서 다들 날 찾아올 것 아닙니까? 그때 같이 해요, 누이. 열세 명 따로따로 받아주면서 머리싸움 할 마음은 아니거든, 내가. 아, 데스챔프가 빠지면 열두 가주인가.”

“…….”

“어차피 3황자 날리는 것에는 아무런 불만도 없지요?”

냉정한 비아냥이 섞인 따돌림이었다.

나는 입술을 슬며시 벌려 낮고 뜨뜻미지근한 한숨을 쉬었다.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3황자가 남아있는 편이 우리에게는 좋다. 그러나 역의가 있었다는 게 명명백백히 증명될 수 있는 지금, 3황자를 어떤 식으로든 옹호하는 건 미련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를 포함하여 열두 아무도 3황자를 보호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글쎄, 무어라 해야 하나…….

지금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대귀족 가문 가주들은 나중에 한 번에 몰려와 항의하라 하는데 그렇다 치고.

내 눈이 베르덴을 향하자, 그것을 보았을 알드리히가 나를 도왔다.

“발리앙 후작은 다른 용건이 있어서 내가 부른 겁니다.”

베르덴이 말한 ‘겸사겸사’에 역시 알현도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비교적 간단하게 알게 되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덤으로 베르덴이 알현을 청한 게 아니라, 알드리히가 부른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

국혼의 혼담을 위해서일 것 같지는 않다. 직전에 시드니와 쥰을 가지고 연적 운운하기도 하였으니.

“그럼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아. 잠깐.”

물러나기 위해 인사한 나를 알드리히가 잡았다. 어차피 이 인사는 마친 참이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손을 내렸다.

황제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내가 누이에게 준 선물은 어쩌렵니까? 돌려주는 것으로 허락하렵니까, 계속 가지고 있는 것으로 거절하렵니까?”

“…….”

내 웃음이 묘해졌다. 눈썹이 멈칫 구부러졌다가 돌아왔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고 묻지 않은 건, 내가 당황은 하였으나 익숙하게 혀를 내리누른 덕분이었다. 여태 살아오며 당황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게 드러내놓고 적대적인 귀족들은 찾기 힘들지만, 이권을 위해 치밀한 거래를 청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들의 공격 아닌 공격의 내용에 때때로 당황하였던 바 있으며.

내가 아무리 무능하고 미련하다 하여도, 당황하자마자 냉큼 입을 열 만큼 훈련받지 않은 적 없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소양은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만큼 기다려 주던 알드리히가 피식 웃었다.

“뭐야. 아직도 못 정했어요? 난 누이가 돌려줄 때를 대비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

“일단 두고 본다고 했잖아요. 어디까지나 ‘일단’이라는 조건 하의 말이었으니, 너무 길게는 못 기다립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거든. 웬만하면 며칠 안에 대답해줘요. ……내게.”

……아.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형체 몇 개를 잡아낼 수 있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실마리다.

아리엘의 살기를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황제를 향해 양 입꼬리를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보냈다. 두 기사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이리 살기를 발한다는 것은, 아리엘이 살의로부터 발현되는 살기를 알지 못하거나 극심한 살의로 인하여 미처 조절하지 못하였거나.

베르덴은 저 살기를 당연히 느꼈을 텐데도,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한 번 멈칫하지도 않았다.

그에 반해 알드리히는 내게 화답하는 표정이 아주 조금 변해서.

그는 숙련된 무인은 아니나, 이 정도 살기는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최소한의 훈련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그도 베르덴도 내 반응을 살핀다고 나를 특별하게 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올라갔던 알드리히의 눈썹이 내려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베르덴과 아리엘에게 눈짓으로 인사한 후에 뒤돌았다.

그렇게 뒤돈 나의 왼편에 약간 물러나 있는 시드니와는 자연스레 시선이 엇갈렸다.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였고, 나 역시 기어이 그 눈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화답하고 지나쳤다.

*

집무실로 돌아와 가장 먼저 연구 보고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몇 장 되지 않는 짧은 보고서다. 이미 읽은 적 있던. 난 그것을 세 번, 천천히 정독하였다. 그중 나를 가장 사로잡은 문장은 단 하나였다. ‘내게 대답해주세요.’

오늘 이 보고서를 꺼내 들게 된 근거이기도 한 이 문장.

-며칠 안에 대답해줘요, 내게.

알드리히의 말이 특별하게 음미하듯 느려졌던 곳이다. 덕분에 그저 일상적으로 지나칠 수 있었던 말이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물론, 아무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이 보고서를 연상한 상태이므로, 한 번 정도 살펴본다 하여 나쁠 건 없었다.

알드리히가 내게 준 선물 중 근간에 우리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검밖에 없기도 하였었고.

보고서를 책상에 놓고 내리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삐딱한 자세 탓에 뒤로 휘어져 있던 등받이가 작은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쥰이 쓰러진 날 이후 다시 살펴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 꺼냈다. 자물쇠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집어 올렸다.

-돌려주는 것으로 허락하렵니까.

‘내게 대답해주세요.’

-계속 가지고 있는 것으로 거절하렵니까.

‘내게 대답해주세요.’

오른손으로 검병을 잡고 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역시 화려하다. 눈부신 검이야.

번쩍거리며 날카롭게 제련되어있는 첨단을 물끄러미 보았다. 검과 도를 포함한 칼이라는 건 칼 주인이 불어넣은 의미를 둘로 나눠본다면, 수호하고자 하는 칼도 있겠고, 죽이기 위한 칼도 있겠다. 예를 들면 주군을 지키기 위한 기사의 검과 살해를 즐기는 살인자의 검처럼.

하여 내가 이 검을 알드리히에게 다시 돌려줄 때 이 검은 무슨 의미를 지니겠느냐 한다면.

-그 검, 하나하나, 구석구석 다 잘 살폈어요?

‘내게 대답해주세요.’

-하나하나 의미를 잘 살폈느냐는 말이야.

‘내게 대답해주세요.’

-떠넘길 기회요.

‘내게 대답해주세요.’

알드리히의 의미심장하였던 그 말들이 떠올랐다. 이어서는 조금 전 읽은 세 번을 내리읽은 보석말이었다. 내가 알드리히의 회귀를 잠시나마 생각하게 만들었던 보석말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되살아나는 생명. 과거와 미래의 변화. 그런 건.

하지만 나머지는 막연하게나마 어떻게든 엮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결백함을 믿음. 수호. 보호. 당신의 앞길에서의 장애물 제거.

내게, 대답해주세요.

“…….”

검병을 잡은 손의 악력이 강해졌다.

내 시선은 겨울에 맨손으로 눈이라도 쓸어내리듯 떨떠름하고 써늘하게 검을 훑어내렸다. 몸을 돌려 공간을 확보하고, 나는 천천히 검을 하늘부터 베었다. 아주 천천히. 느렸다.

그리고 내 목이 있는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멈춰섰다.

잠시간 그렇게 있다가 팔을 접었다. 첨단은 다시 호를 그리며 허공을 베고, 되돌아갔다가, 다시 베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상대를 찌를 것처럼 겨눈 채로 멈추었다.

“…….”

입을 벌리고 숨 쉬었다.

-난 누이가 돌려줄 때를 대비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몇 달 전부터 유독 아리엘과 자주 시간을 보내는 알드리히.

“…….”

나는 내가 무얼 상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게 혹, 살인을 알드리히에게 떠넘길 기회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내가 정말 누굴 죽이는 것을 알드리히에게 맡길 거라 생각했다면, 알드리히는 정신이 나간 것이다. 그가 정적을 죽이고 처리하는 걸 나와 의론하였다고, 나 역시 그리 할 것이라 생각하였나.

내 약점이 될 것을 정말로? 정말 황제와 논하고 나눌 것이라고?

아니, 아니야. 알드리히와 나 사이의 믿음과 우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알 텐데, 알드리히 당신도. 우리 관계는 그리 깨끗하고 이상적인 게 아니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 비하면 훨씬 단련되지 못한 팔은 이 검의 무게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떨며 내려가는 걸 굳이 버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곧 문이 두드려질 터.

허락을 구하는 할리를 입실토록 하였다.

멀거니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나를 본 할리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블린성에서 서류가 도착하였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일상이다. 나는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옮기게.”

“그리고, 각하, 총집사의 건강이 불안한 모양입니다. 정식으로 서신을 보내온 것은 아니나 기사에게 말을 전해달라 하였다 합니다.”

“아직은 괜찮다는 거겠지, 그럼.”

태연하게 말하고 훅, 옅은 숨을 떨었다.

할리는 말없이, 내가 벗어 던져둔 케이프와 겉옷들을 가리켰다. 치워도 되겠느냐는 소리 없는 질문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 움직임에 땀방울이 턱을 타고 뚜룩 흘러내렸다. 집중하여 검을 다루었다고 그새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어서.

검집을 든 손의 손등으로 턱의 땀을 훔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경.”

“예.”

“폐하께서 나 대신 사람 하나를……, 죽여주겠다는 허락의 증표를 보내오셨다면. 물론 만약의 이야기일세.”

아직 알드리히에게 확인받지 않은 생각에 불과하기에. 한 걸음 발을 빼는 것처럼 들려도 상관은 없었다.

할리는 크게 동요치 않고 대답했다.

“예.”

“그런 허락, 함부로 남발하실 분도 아닐뿐더러, 아무리 상대가 나라 하여도 쉬이 대신해줄 일도 아니야. 나는 요구한 적도 없는 일이고. 설령 내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누구 한 명 처리해 달라 하여도 그건 내 약점이 될 테고. 내가 그리 경계할 것을 모를 분도 아니시지.”

“…….”

“상징적인 허락이라 하여도 필요 없어. 훗날 어떤 형태로 내 약점이 될지 모르는데 내가 그 증표를 계속 지니고 있겠나. 당연히 반납할 걸세.”

“예.”

“이 모든 걸 모를 분이 아니신데 어째서 주셨을까.”

내 겉옷들을 적당히 정리하여 자기 팔에 걸치는 것까지 마친 보좌는 잠시 멈춰 서서 침묵하였다.

나는 그가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하여 상체를 조이는 베스트가 많이 답답하게 느껴지게 되었을 즈음, 할리는 분명하게 불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주신 윤허입니까?”

“……으.”

무어라 대꾸하려고 열었던 입이건만, 잡혀 죽을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다가 닫혔다. 새어나간 건 내가 제어할 수 없었던 신음이었다.

대가.

뜬금없이 내게 주어진 허락.

무언가를 알아차리게 될 듯 아닐 듯 심장이 조금씩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느린 변화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허락 자체도 뜬금없었으나, 그런 허락이 있음을 알리던 밤도 뜬금없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내게 느닷없이. 실로 느닷없이, 급작스럽게. 그는 내게 와서, 설명하였다. 허락도 설명도 생뚱맞은 때에 내게 도달하였었지. 아, 그랬다. 쥰을 빼내기 위해서 내 신경을 흐트러뜨리려 하였다 하더라도 아무 말이나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대가라…….

나는 치른 기억이 없는 대가. 검을 든 손을 올렸다.

“그렇군. 나에 대한 호의로 주기에는 너무 중대한 허락이지.”

“…….”

“…….”

“……각하. 대가를 다른 이가 치른 것이 아닙니까?”

보석으로 번쩍거리는 검신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물으려 했다.

“누가 그.”

“…….”

묻기 시작한 직후, 할리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차린 탓에 중간에 부러뜨리고 말았지만.

나는 표정 없이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할리는 전에도 내게 시드니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말했던 적이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새자마자 밑으로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아졌기에, 힘겹게 침을 삼키고 입술을 움직였다.

“나가게.”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말했는지는 알고 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경고했던 바. 그 돌려 말하였던 경고를 잊었다면, 애초에 조금 전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였으리.

내 사람, 괜히 죄책감에 질리게 할 필요 없다. 나는 경련하는 것만 같은 목구멍에 침을 적시고 미소했다.

“그게 아니야. 괜찮으니 나가게.”

그렇게 할리를 내보낸 후 내 손에서는 검집이 떨어졌다.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진 것만 같은 왼손을 들어 검의 몸을 받쳤다. 내 손 살갗도 저며 나갈 것 같이 날 서 있는 이 무기.

이것의 모양.

알드리히는 날 찾아왔던 새벽, 이것에 대해 언질을 남기기 전 장황하게 내게 묻고 물었었다. 오로지 한 사람. 집중되어있던 그 화제. 나는 정말 오래도록 검을 보다가 천천히 오른 입꼬리를 올렸다. 보석의 화려함, 검의 화려함, 보석, 음각.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이 순간 내게 의미가 있는 건 검의 전체적인 모양이…….

“…….”

그러니까, 이, 이 형상이…….

애써 올렸던 입꼬리가 마찬가지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니까. 이 검의 모양이……. 비치던 내 눈동자가 흩어졌다. 이어 떨어져 고이는 것에, 살짝 보이던 내 코도 흩어졌다.

이게 지금.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칼몸에 고여있던 것들이 굴러떨어졌다. 보석들의 가장자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또, 날을 타고 손톱만큼 기어가다가, 그리고 바닥에 뚝. 뚝. 입술을 물었다가, 그것이 부족함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힘이 들어간 턱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젖혔다. 얼굴이 천정을 향하자, 도무지 그치지 않는 눈물은 눈꼬리에서 귓불을 건드리고 목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헐떡거리지도 못한다. 소리는 당연히 낼 수 없다.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멈추기 위하여 애썼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가 가까스로 할 수 있던 건 오로지 버티는 것뿐.

한 사람을 떠올리니, 알드리히와는 연결시키지 못했던 다른 보석말들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다시 살았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보석말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목을 잘랐던 검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 그렇다.

에녹의 검이다. 에녹의 검이었다.

나타난 에녹의 검을 클레멘트에게 맡긴 이후로 처음으로 입에 담아본 그 이름이 내게는 어색했다. 발음하는 것조차 위화감이 있었다. 그 정도로 그 검은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 아름다웠던 모양만이 물안개에 가린 듯 막연하게 기억에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 검이.

이것이.

이것이 내 기억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입술이 열리고, 악물고 있던 이가 드러났다. 짧은 숨이 파드득 날갯짓을 하며 토해졌다. 눈물을 억누르는 신음보다 다른 소리가 잇새를 뚫고 나왔다.

“시…….”

에녹의 검과 똑같이 생긴 이 검에 하나하나 박혀 있던 그 의미들이 마침내 나를 이해시켰다. 알드리히는 말했다. 떠넘길 기회의 허락이라며.

그리하여 이 자리, 나는 해석했다.

“시,”

-그럼 당신은 그때 또다시 내 친구가 되렵니까?

-죄송합니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목과 옷깃이 차게 젖어 들어갔다. 나는 이만 고개를 바로 세웠지만,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어흑.”

억누르다 비어져 나온 단 한 번의 울음이다. 빈손으로 가슴께의 옷을 움켜쥐었다. 몸이 빠르게 지쳐가는 듯,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당신과 멀리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살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귓전에 울리는 그 말이 놀라우리만큼 무거웠다.

경. 2년 전 알드리히를 통해 검을 건네준 사람. 당신입니까? 알드리히에게 허락을 받아낸 사람. 당신, 입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알드리히에게 얽혀서, 나와 알드리히가 함께 움직인 일들이 이상하게도 전에 비해 적어지게 하여 우리 둘 사이가 전보다는 덜 더러워지게 하였던 사람.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알았다.

당신,

이구나.

깨달음은 강렬했다. 나는 전율하여 떨리는 숨을 꺾었다. 아직도 까닭을 알지 못하는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당신이 지으실 죄가 아닙니다.

알드리히에게 이 허락의 대가를 치러둔 사람.

벌린 입에서 젖은 숨이 떨며 나왔다. 경. 처음부터 당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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