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나는 그 눈을 마주하고, 어설프게 구부리고 있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상관이 있되, 상관이 없었다.
시드니가 지켜보아도 상관이 없되, 그러나 상관이 있었다.
그는 결국에는 내게 충성을 맹세한 라이네의 사람이 아닌 타인에 불과해서. 이리 나를 막아서는 걸 보니, 전과 같이 내 친구가 아닌 것 같아서.
손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충동뿐이었던 이 자리의 포기였다.
발리앙의 뿌리를 뽑을 마지막 일은 오늘 같은 충동으로 망칠 것이 아니다. 계획대로 해야지. 르네가 얼마나 인내심 깊게 계획을 끌고 왔었는지 보고 겪었으면서도 이런다. 내 불명예스러운 죽음과 흔들린 라이네에 대한 복수가 차지하는 지분은 채 삼십도 되지 않았다. 이번 시간에서는 얌전했다면 높은 경계를 할지언정 잠시라도 두고 보리라 생각하였건만, 그들은 저번과 그리 다르지 않은 계획으로 나를 몰아가고자 하였다.
미래를 겪은 적 있다고 그 미래가 필히 또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일단은 두고 보겠다는 생각이었으나, 그들은 전과 다르지 않게 일을 꾸며가며 내게 확실하게 일의 전말을 가르쳐주었다.
기억을 찾고 오드리나로 돌아온 다음 날이었던가.
내 침대 옆에서 잠든 쥰을 보며 다짐하였던 바.
‘아리엘은 내 손에 반드시 죽는다.’고.
사랑을 이유로 사람의 삶을 파탄 나게 한 것이라면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함이라고.
그리고 이제는 확실하게 덧붙일 수 있었다. 르네. 르네 발리앙. 그 역시 값을 치러야 한다. 둘 다 매장을 시켜야지. 그렇게 뽑을 뿌리다. 그렇게, 발리앙에 반드시 사회적으로 타격이 있어야 했다. 베르덴이 혹 배후를 눈치채더라도 내게 칼을 겨누지 못하도록 힘을 빼두어야 하므로.
지팡이에 의지하여 재활하고 있는 쥰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이는 결코, 이 기회를 놓아 보내려 하는 핑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 표정만은 잠시 흐리게 일그러졌다. 날카롭게 갈린 돌바닥을 기어가는 것처럼 몸 어딘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내 앞을 막은 이가 다른 이도 아닌 시드니라는 사실 때문일까.
단정한 얼굴과 흔들림 없는 표정이 내 심기를 몹시도 비틀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분노도 발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던 행동은 결코 당당한 것이 아니기도 하였으며, 나는 항시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어떠한 마법진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일 따름이다.
나는 그저 한 마디 물었다.
“무얼.”
“…….”
“경이 무얼 말리는 건지 모르겠군.”
눈을 파낼 것처럼 그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 대꾸를 들은 시드니의 눈이 조금 접혔다. 시선에 금이 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눈을 조촘 찌푸렸다가 폈다.
손 하나 든 것을 막아선 것도 그렇고, 내 딴전에 보이는 반응도 그렇고. 기묘하다. 어쩐지 그는, 내게 기억이 돌아온 걸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조금 전은 경이 섣부르고 무례하였네. 비켜서게.”
“저것은.”
시드니는 비로소 나직하게 말했다. 한 마디를 끝내고 잠시 끊긴 말에 내가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도 잠시, 그는 제대로 문장을 완성했다.
“당신이 지으실 죄가 아닙니다.”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으려 했냐고 모르는 체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음성을 끌어올릴 힘이 일순에 바닥을 친 것처럼 뱃속이 비었다.
내가, 지을 죄가, 아니야?
……그럼 다른 자가 지을 죄라고 말하는 건가, 이 사람.
아니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단순히 잘라 말하는, 건가.
그러자 무언가가 심장에 와서 박히는 기분이었다. 일순. 떨어진 심장이 허망한 공간을 간직한 채로 명치에서 뛴다. 생각 자체로 자해였다. 나는 욕지기 어린 시선을 허탈하게 보냈다.
그러니까, 그의 말뜻이 어느 쪽이었든간에, 아리엘과 르네를 끝장내는 게 죄라고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나의 끝을 보았을뿐더러, 아마도 내 사후 라이네가 어찌 되었는지를 보았을 이 사람이. 아리엘을 뿌리 뽑는 게 죄라고 여긴다…….
마침내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옅게 미소했다.
“이런. 이것 참.”
“…….”
“내가 무얼 하려 하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끓는 숨이 명치보다도 깊은 곳에서 기어 올라왔으나 씹어 삼켰다. 이 자리에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과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웃어지더라.
참, 신기하게도, 피로에 잠겨 있어 오래도록 짓지 못했던 웃음이 지어지더라. 수십 년 버릇 되었던 가면은 단단하게도 내 얼굴에 달라 붙어졌다.
“폐하의 기사로서 경계심 높은 건 칭찬할 만하나, 당치 않은 의심을 당한 모양이라 나로서는 몹시도 불쾌하네.”
“…….”
“비켜서시게.”
웃으며 차게 말하였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이런 말을 당하고서 내가 그를 피해 걸어가는 건 옳지 않았다.
그러나 내 불쾌함 섞인 말을 듣고도 시드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얼 말할 듯 흐트러지기 시작한 숨이 들렸다. 그러나 또 무엇을 들으랴. 또 무엇을 듣고, 마음 상하랴. 나는 서서히 웃음을 지우고, 그에게 다시 한 번 명령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경…….”
그리고 닫았다.
시드니의 시선이 내게서 돌려졌다. 나도 옆을 보았다. 우리를 향해 측면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는 베르덴이었다. 어째서 오느냐 묻는 건 무의미하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고, 저기 아리엘을 데리러 왔을 수도 있으리.
베르덴은 다가오며 나와 시드니를 향해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였다. 나는 그에게 내 말이 들릴 때쯤 되자 스르르 웃었다.
“……발리앙후. 간만이군.”
“격조했습니다. 포르타경도 오랜만이군.”
“격조했습니다.”
나는 인사를 나누는 짧은 순간, 그들 두 사람을 면밀하게 살폈다.
작년에 쥰과 아리엘의 혼담 관련하여 베르덴을 방문하였을 때의 대화에서 내가 느꼈던 위화감 탓이었다. 당시 베르덴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으나.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내가 신경 써야 할 만큼 친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기실 이들 두 사람이 친한 교류를 가졌던 건 어린 소년 때의 일이고, 이후로는 거의 교류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예의만 차린 인사가 오히려 당연한 일.
하지만, 지금 어색하다 하여 당시 내가 느꼈던 기묘한 친근함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당초 매사 가면을 쓰는 것에 숙달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살피는 눈을 일단 갈무리한 내게 베르덴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
……이건 지나친데. 나는 눈을 슬쩍 찌푸리고 한숨 쉬듯 웃었다. 다른 자도 있는데, 굳이 내 건강을 입에 담는 저의는 무엇인가.
최측근의 기밀로 다루어져야 할 내 건강이다. 설마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할리가 베르덴에게 전했을 리 없어.
그러나 베르덴은 나를 만나기 위하여 라이네저택을 방문했음에도, 급작스레 만남이 불가함을 듣고 떠났던 일이 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리 만무. 그렇다고 내가 오드리나를 급히 떠난 것도 아니니 건강에 이상이 있었으리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베르덴은 내 몸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인정을 할까. 그게 무슨 말이냐 해볼까. 손을 들어 턱 끝을 살살 쓸었다. 나는 인정하기로 하였다. 나의 약한 모습이 발리앙에 들어가는 건 좋은 일이다. 일문의 가주가 보이는 모습으로는 옳지 않으나, 그 정도 부끄러움은 감수할 만하였다.
나는 멋쩍은 척 웃었다.
“그게 또, 그렇게 짐작이 가능했겠군 그래. 민망하이.”
도무지 웃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최근. 의무를 눈앞에 두니 웃을 수 있었다.
약속 파기를 사과하는 밀서에, 다음 약속은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나보고 정하라 하였던 그 답신도 이제 이해가 가능하였다. 내 건강이 회복된 후를 기약하였었나. 그 정도는 걱정해 줄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있었던 거라면 급한 용건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괜찮네. 걱정을 끼쳤군.”
“다행입니다. ……라이네경은 어떻습니까?”
“쥰은.”
나는 잠시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미소 역시 부드럽게 깎았다.
“알고 있겠지만, 재활 중일세.”
내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며 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던 내 동생. 각하께서 눈을 못 뜨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씀도 못 하시고 각하의 곁에만 머물러계셨다 하는 보고.
나는 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따위 짓 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미래에 내가 불안해 보이거든 또 그따위 짓을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쓰러져 눈 뜨지 않았던 것으로, 쥰에게는 무언가가 도달했으리라 생각했다. 내 할 말은 그뿐이었다.
그리고 베르덴에게 할 말도.
“그 아이를 독살하고자 했던 자가 누구든, 죗값은 치러야겠지.”
결코 그 희생을 이용치 않겠다 하였던 다짐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뭉개졌다.
베르덴을 향한 경고는 태연하게 나갔다. 대외적으로 나는 발리앙이 라이네에 한 짓을 조금도 모르는 상태이지 않은가. 이번 일의 범인이 쌍둥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있어야 하는 베르덴은, 그러나, 표정이 변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그 놀랍지 않은 철면피에 대고 나는 빙긋 웃었다.
“하여간에, 간만에 벗끼리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건 어떤가. 회포를 풀 때도 되었지. 혼담도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의론할 때가 되었고.”
“그렇군요.”
“내일 어떤가? 아니면 오늘?”
며칠 간의 준비 기간도 없이, 오늘이나 내일.
베르덴이 무슨 까닭으로 날 방문하려 했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쥰이 쓰러진 다음 날 청하였던 만남. 급히 청했던 것 치고는 목적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여태 잠잠히 내 회복을 기다릴 수 있었던 용건. 이왕 이리 만난 김에 물어도 되겠으나, 지금은 시드니가 있었다.
베르덴은 내 제안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을 함께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군. 내가 그쪽으로 가지.”
“르네와 아리엘이 간만에 각하를 뵐 수 있겠습니다.”
경이로운 말솜씨다.
경이로운 양심이고, 경이로운 대처다. 내가 베르덴의 입장이더라도 저리 말했으리. 나는 낮게 웃었다.
“아리엘이라면 저기에도 있네. 하지만 르네는 확실히, 오랜만에 보겠군.”
“아.”
베르덴은 그제야 여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떠올린 것처럼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알현을 위함이 틀림없을 그의 예장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리엘을 데리러 온 게 아닌가?”
“겸사겸사.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보세. 아, 술도 가져갈까? 좋은 것도 있네. 엄청 좋은.”
“……아침부터 술, 말씀이십니까?”
“……그, 왜, 거, 표정 관리 좀 해 주면 안 되겠나. 나도 상처받거든.”
천하제일 쓰레기를 보는 표정 같다.
나는 상처를 받아 일그러진 표정을 해 보였다. 베르덴은 오늘 내가 본 중 가장 선명하게 감정 실린 얼굴로 몹시도 떨떠름하게 사과한 뒤에 몸을 돌렸다. 거 참 감동할 만큼 성의 없는 사과라고 한 마디 더 날려주려 했으나, 베르덴이 몸을 돌리며 시드니를 일별하는 것을 보았기에.
여태 대화에서 빠져 있던 시드니에게 남기는 인사 같지는 않았다.
예사롭게 스치고 지나간 눈길이었다. 그 짧은 시선을 마지막으로 베르덴은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걸음을 옮겼다. 내 웃음도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나를 보고 있는 시드니에게 눈을 돌렸다.
“……나도 이만 가봐야겠네.”
더는 비켜서라 할 것 없겠다. 베르덴을 맞이하느라 조금 틀어진 자리 탓에 이대로 일직선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덴을 괜히 먼저 보냈나 싶다. 어차피 나도 알드리히 쪽으로 가야 했는데.
베르덴을 대한 끄트머리에 남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내 미소를 수월하게 회복시켰다. 기사에게 미소를 보내고 지나치려는 찰나, 시드니가 입을 열었다.
“건강,”
“…….”
“…….”
문장이 곧장 완성되질 않았다. 그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대답해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잠잠히 망설이던 시드니도 끝내 말문을 접어 들였다.
“실례하였습니다.”
이미 알드리히의 고개는 우리를 향해 있었다.
시드니가 옆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나는 한 점 시선도 주지 않고 냉랭하게 그를 지나쳤다. 황제와 아리엘, 베르덴이 서 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거창한 인사는 없었다. 왼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가벼운 예의를 차린 인사를 알드리히에게 올리고 아리엘을 향해 옅게 웃었다.
“폐하. 아리엘.”
“누이. 연락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알드리히가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맞았다. 쥰의 일로 알현하였던 날 이래 그가 나를 부른 적 없고, 나 역시 입궁한 적 없으니 우리는 실로 간만에 서로를 보고 있었다.
상대를 협박하던 마지막 만남은 기억에도 없는 것처럼, 표정은 자연스러웠다.
알드리히는 그렇다 쳐도, 나는 베르덴 효과가 상당하다는 것에 내심 감탄했다. 나는 내가 웃는 시간이 줄어들고 웃는 횟수 역시 줄어들었음을 어느 순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웃는다는 행위 자체에 들어가는 체력이 실은 상당하였다는 것도 또한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일을 진행하고 관리하느라 여러모로 피로해지니, 굳이 웃는 데에 신경을 쏟지 않고 걸어왔는데 베르덴을 마주한다는 사실 하나로 수십 년의 타성에 젖은 가식과 가면은 올라왔다. 그리고 여태 유지되는 중이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안타까운 효과다.
나는 눈웃음을 짓고 대답하였다.
“알현할 수 있다면 행운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데스챔프?”
“예.”
그것 말고 알드리히를 만나러 입궁할 일은 아직 없었다. 살롱에 가서 귀족들과 환담하고 교류하며, 저택에서 방문자를 맞이하고 영지의 일을 돌보는 와중에 발리앙과 데스챔프, 3황자를 지켜보았으니 할 일이 이미 많았다.
불쾌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진 황제를 용건도 없이 구태여 먼저 찾아가 납작 엎드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 뒤로 도착한 시드니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낸 알드리히가 나직하게 웃었다.
“하긴 그렇습니다. 저쪽 무너지면 라이네가 곤란해지긴 하지요. 무게차가 어떻든 라이네를 제외하면 유일한 공작가 아닙니까.”
“…….”
그런 이야기를 진실로 이 자리에서 할 것인가.
알드리히의 옆에 서 있는 아리엘을 의식적으로 힐끔 보았다. 이미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고 다시금 알드리히를 보았다. 내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황제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케이프에 가린 내 왼손 끝이 움찔했다.
……말했듯, 장차 황후 될 사람이니 이 정도 이야기는 여기서 듣게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라면 알드리히는 정신이 나간 것이다. 나와 라이네는 그런 황제, 그런 황태자, 그런 황자를 모신 적이 결단코 없었다. 하여 저런 말을 구태여 입에 담는 저의를 아직 알 수가 없어 불안할 뿐.
그러나 나는 수긍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발리앙 후작과 내일 대담하기로 하였습니다.”
“더 늦기 전에 혼인으로 동맹을 굳히려는 겁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건 몰랐지만, 이미 넣어두었던 혼담입니다. 이미 너무 오래 끌었지요. 더 끌면 제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고 이 사람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건입니다.”
“…….”
“슬슬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베르덴을 보자 그가 시선을 마주하며 덤덤히 고개를 한 차례 까닥였다. 그러자 알드리히는 소리 내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 재미있게도 되네요. 그럼 포르타경과 라이네경이 연적이 되는 건가.”
“…….”
“어머나……. 폐하…….”
아리엘이 적당하게 반응했다. 고운 장갑을 낀 손이 올라가 가볍게 입가를 가렸다. 곤란하다는 것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녀에게 알드리히는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미안합니다. 당사자가 옆에 있는 걸 잊었네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셔요, 폐하.”
다만 사과 내용이 그다지 정중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옆에 있는 걸 잊었다는 저 헛소리는 또 뭐야. 방금 아리엘이 있는 자리에서 이 정도 대화는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저 헛소리를 시드니와 베르덴이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고, 마찬가지로 잘 교육받고 르네와 함께 나와 라이네를 그 지경까지 몰아갔던 아리엘이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세 가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아리엘도 아무 위화감 없이 다정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 정도도 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잘 넘길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알드리히는 사과를 받아들여 주어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만 우리 세 사람에게 주의를 옮겼다. 비중을 두는 순서로는 우리가 앞서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역시 어쩐지 묘하다. 아리엘을 존중하는 것 같다가 아니 그러는 것 같다가.
장난질이라면 지나친데 알드리히는 생각 없이 장난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에는 항시 이유가 있었다. 죽이기 위해서든, 이용하기 위해서든. 약 반 년을 암살 관련하여 알드리히에게 이용당하다가, 미리 이야기를 듣고 지켜보던 내 손에 죽임당함으로써 끝난 사람도 있었다.
알드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꺼풀이 조금 내려갔다. 접힌 시야를 보충하기 위하여 턱이 올라갔다. 황제는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상하다.
============================ 작품 후기 ============================
ahddl0610님, mqcetus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되도록 4월 안에 완결낼 수 있도록 달려보겠습니다.
부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