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終焉 =========================
CHAPTER 10. 반디의 밤, 종언
-챕터9 마지막회 알현 부분과 연결됩니다.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누이. 말, 조심해요. 누가 들을라.
알드리히가 웃으며 내게 다정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숨을 한숨처럼 짧게 내보인 후, 말을 잇는다.
-이를 인정하시면 폐하의 정치적인 자살로 가는 일보입니다. 알고 있으므로, 저는 폐하께 감히 답을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음을 상언하는 겁니다. 폐하, 쥰에게 제가 상대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실마리를 주셨습니까.
-……누이는 참 자기 사람 잘 챙겨. 그렇지 않습니까? 덕분에 누이가 내게 이렇게 거친 말로 따지는 날이 오네요.
-…….
-난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말해주어야겠네요. 라이네경이 누이와 같은 곳에 침을 맞고 쓰러져준 덕분에, 누이의 일이 한결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걸, 말이라고. 말이라고!
거기에서부터는 꿈이 꿈이 아니게 되는 듯하였다. 현실처럼 나는 또 다시 분노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라, 실은 현실이었던 알현이다.
속으로는 분기탱천하였음에도 나는 입술을 길게 늘였다. 윗니가 슬쩍 보이는, 정갈한 웃음이었다.
“정 필요했다면, 쓰러진 척만 하여도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확실치 않은 일은 싫습니다. 증거가 있는 편이 좋아요. 알잖아.”
“해서……. 그럼 쥰의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닙니까?”
결국 거칠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요가 극심했다. 오른손을 들어 두 눈과 이마 일부를 눌렀다. 거기에 대고 알드리히는 선선히 대꾸했다.
“예. 누이 목숨보다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이가 없어 허, 허으, 하며 떨리는 헛숨을 뱉다가, 나는 마침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흐. 후흐흐. 푸흐. 흐흐. 온몸이 곤두섰다. 눈에서 손을 떼자 희부옇게 흐려진 시야에 그의 두 무릎이 들어왔다.
“나는, 누이, 누이에게 자객이 닥친 것에 대해,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빠요.”
“제 일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럴 땐 또 누이가 라이네 공작인 게 기쁘게 되네요, 간사하게도. 나는 감히 내 측근이기도 한 라이네 공작에게 손을 쓰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게 참 기분 나쁩니다.”
“가만히, 두고 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애초에 내 약속은 믿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말이 나오긴 합니다 그래. 뭐, 그래요, 어쨌든. 가만히 있기로 했지. 그래서 가만히 있잖아. 가만히 그자들을 놔두고 있잖아요.”
“…….”
발리앙은 가만히 두고 보기로 약속했으나, 그 외의 것에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쥰을 그런 식으로 움직이게 하나. 나와 상의 한 마디도 없이.
그러나 알드리히는 결코 쥰의 중독을 유도했다는 걸 제대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내가 이미 말했듯, 그에게 있어 정치적인 자살로 가는 한 걸음이기에.
물안개처럼 피어있던 나의 미소에 통증이 달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휘어잡고 있던 입가의 근육이 그리도 아팠다. 이를 보이는 웃음 속, 입 꼬리가 움찔움찔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마지막으로 웃음은 자취를 감추었다.
알드리히는 내 불경하다면 불경한 시선을 말없이 받아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이, ‘우리’가 정적을 죽이지 않는 건, 죽이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잖습니까. 독이든, 자객이든, 그 무엇이든, 밝혀질 경우의 후폭풍이 두려워서고, 보통은 나와 상대가 정적인 걸 이미 다른 자들이 이미 모두 알게 된 상태에서 저 자식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지. 상대를 죽이면 그 즉시 의심받게 되는 건 나니까. 범인 밝히기가 정말 쉬워. 그렇지요?”
“…….”
“그래서 나는 라이네의 적, 누이의 적이 참 머리를 잘 썼었다고 생각해요. 그리도 서로 호의적이니 웬만해서는 발리앙을 의심하지는 못하겠지. 물론 이 모든 일의 처음에 한해서만 말하는 겁니다. 이제는 라이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발리앙은 당연하게 의심 받게 되잖아. 누이가 참 잘 엮어주었어요.”
그에게 이런 칭찬을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고, 알드리히는 눈을 가늘게 접고 아련하게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그런데도 이번에 누이는 자객을 받았고……. 상황 파악을 못하는 걸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제 일입니다. 폐하.”
“맞습니다. 누이의 일이에요. 부정치 않겠습니다. 다른 일이었다면 누이가 처리할 것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건 아닙니다. 내 다음 가는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것을 누이의 선에서 처리하도록 놓아두자니, 누이에게는 오드리나에서는 사법권이 없거든. 나 보기에 족한 처벌을 못 해. 기밀리에 잡아서 기밀리에 처리하지 않는 이상. 그런데 상대는 귀족이고. 따라서 족한 처벌은 어찌 되었든 공개적으로는 못 하지.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어도 말입니다. 그럼 이 건에 대해서 결국에는 내게 올라오게 될 텐데…….”
“…….”
“그럼 누이, 그때 내게 제출할 증거 있습니까? 증인 말고, 물증이요.”
“…….”
“없지?”
“…….”
“그럼 그들을 죽이지도 못해. 심증과 증인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거든. 그럼 그들을 풀어줘야 하고. 그럼 다른 귀족들도 똑똑히 보게 되는 겁니다. ‘죽여도 별 일 없네.’”
“…….”
“예, 누이. 본보기입니다. 난 저들을 반드시 잡아넣을 거예요.”
그 말을, 생사 불투명한 내 동생 앞에서 하라 하면, 아아, 그렇다. 알드리히는 하리라. 그런 사람이다.
그나마 이 정도로 설명을 듣는 것은 내가 그와 가깝기 때문, 가까운 덕분이지만, 우리 사이의 그런 거리도 알드리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때가 있었다. 차라리 우리가 멀었다면, 더 멀었다면, 이런 일은 그도 쉬이 못했을 텐데.
그는 한시도 황제가 아닌 적이 없었다. 살아남은 황자, 황태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정치싸움이든 무엇이든,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건 아니 될 말입니다.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게 되면 다음도 있게 됩니다. 그게 마침내 황실을 향할지 누가 압니까. 나를 향할지 누가 알아. 이 자리, 이 나라의 주인을 노릴지 누가 알아. 누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이네 공작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황제와 라이네 공작,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라이네 공작은 황실과 가장 가까운 가문의 주인입니다. 누이가 앉아 있는 자리의 의미를 생각해봐요.”
나는 턱을 조금 더 들었다. 눈을 홉뜨고 천정을 보았다. 말라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벌어진 입으로 작은 숨을 마셨다. 그에 맞추어 어떤 상실감이 달라붙었다.
“나는 이따위 미친 짓은 용납 못 합니다. 무엇이든 본디 처음이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처음을 잘라버려야지요.”
“…….”
“만일 이런 일에 휘말린 사람이 데스챔프 공작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비슷하게 분노했을 겁니다. 취한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돌겠군. 이리도 악몽 같다.
나는 뜨겁게 느껴지는 가슴께와 짜증스럽게 곤두선 목 뒤를 애써 무시하며, 묵묵히 대답을 골랐다.
그런데 말을 마치고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킨 황제가 먼저 덧붙였다.
“……이리 말도 안 될 정도로 깊게 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나는 기쁘면서도 무섭습니다.”
지금까지 내게 박은 것들을 마무리 짓는 말로는 몹시도 감상적인 말이었다.
나는 힐끗 눈을 내려 그를 보았지만, 그게 내려다보는 것처럼 되고 말았음을 깨닫고 고개도 바로 했다. 그리고 책상에 기대듯 걸터앉아서 나를 상대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살피다 나직하게 물었다.
“미로골목의 죄인들을 폐하께서 데리고 계십니까.”
“감옥에 있습니다.”
“황궁의.”
“예. 황궁의.”
어지간해서는 내게 넘겨주지 않을 죄인들이다. 그들을 어찌 할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것들을 증인으로 쓸 생각은 어제부터 이미 접은 상태였다. 이 질문은 이것으로 되었다. 쥰에게 독을 건넨 자들이 황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선뜻 알려준 건 내가 황공하게 여겨야 할 그의 호의였다.
그러나 그 외 알드리히는 그 무엇도 깨끗하게 인정할 일 없고, 나는 쥰이 저대로 죽어나간다 하더라도 눈에 띄게 황제를 적대할 일 없을 것이다. 나는 알드리히의 최측근이므로 알드리히의 입지가 약해지면 나와 라이네의 꼴이 우스워지기 때문에. 그러나 어디까지나 ‘눈에 띄게’에 한해서다. 우리의 입지가 약해져봤자, 라이네를 잃은 황제만 할까.
고개를 한 차례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물었다.
“쥰은, 죽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 역시, 한 번의 끄덕임. 현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이 사안에 대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어차피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다.
눈알 표면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지금 눈을 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거슬리는 느낌에 대하여 짜증 섞인 분노가 무섭게 올라왔다. 순식간에 열기로 달아오른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알갱이 몇 개로 생사가 갈리는 독도 있으니, 독을 건넨 죄인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면 쥰은 죽을 수도 있었다. 애당초 계획은 건강하게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러므로 모른다 하는 저 말이 옳았다.
몸이 끓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숨 한 번 몰아쉴 수 없다. 잔혹하고 몰상식하기까지 한 이 일처리가 알드리히에게는 쉬운 해법이었을 터였다. 그는 내가 입 다물고 기어이 참으리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는 멀었어야 했다.
-우리 사이가, 조금만 더 멀었어도, 나는
그때보다는 멀어진 지금도 부족하다. 더, 멀었어야 했다. 베르덴을 보며 후회했던 것처럼, 우리는 친구이지 말았어야 했다.
알드리히. 폐하. 당신은 나를 더 존중하셔야 했다.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지 황제의 호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건 그가 지나쳤다. 발리앙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최대한 바짝 엎드려 입 다물고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아니다. 도대체 무얼 믿고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을 유도한 건지도 모르겠다. 생명. 생명이다. 내 동생의 생명. 라이네의 생명.
라이네를 잃고 다른 대귀족 가문의 가주과 새로 관계를 쌓기 시작한다 하여도, 알드리히는 상대를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이며 상대는 과연 얼마나 알드리히의 뜻대로 움직여줄 것인가.
혹 일이 최악으로 어그러져 발리앙이 황제의 편에 선다면. 하, 좋다. 해 보아라.
차분한 비웃음마저 심중에 고였다. 새벽, 한잠도 자지 않고 생각하고 생각으로 대비해보았던 수많은 가정 중 하나일 따름이다.
나는 눈꺼풀을 내리고 지그시 힘을 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원칙적으로는 폐하의 서임을 받은 기사라 가문보다 폐하를 우선해야 하는 사람일지언정, 실질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깐은 조금 다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잠시 멈추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내 말이 멈추기 직전부터 웃기 시작한 상태였다. 의연하게 서 있긴 하지만, 몸이 많이 지쳐 있는 나와 달랐다. 깊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폐하, 라이네가 그의 근본임을 부정하는 일은 폐하가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방계로 가지 쳐 나갔다 하나, 라이네 공작과 가장 가까운 혈육임을 잊으셨습니까? 제 아우의 생명을 폐하의 손에 붙인 적 없습니다.”
그러자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말, 조심해요.”
“지난날, 제가 폐하께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어느 한 가주가 당하는 모욕이, 저희 열 세 가문 가주들 모두가 당하는 모욕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헤아려 주시라고. 이를 잊으셨습니까?”
“누이.”
“무엇 하나 잊으실 분이 아닌데 제 아우를 그런 식으로 유도하신 것은, 저와 라이네를 가벼이 보지 않으면 하실 수”
“그만.”
“없었던 일입니다. 제가 폐하의 방패로 나서 있으니 쥰도 그렇게 이용하여도 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만 해요.”
“폐하를 위해 제가 지은 죄들은 명백히 저와 폐하의 약점입니다. 폐하를 향한 제 깊은 호의와 제 이해관계에 따라 기꺼이 짓긴 하였으나 거기에서 폐하를 배제할 수 있는 건 제가 입을 다물고 폐하를 엮지 않을 덕분일 뿐임을 아실 겁니다.”
“누이.”
알드리히의 웃음은 마침내 완전히 부서졌다.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저 여유가 내게 족했다. 노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 하나 능히 받아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이 정도 흔들었으면 되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이제는 그를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이번 쥰의 일과 관련하여 증좌를 웬만하면 찾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설령 사망한다 하더라도 제가 폐하께 원망을 쏟을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널 협박하고 널 흔들었으나, 그 이상은 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한 번도 씨근덕거리지 않은 숨을 몇 번이고 들숨 날숨 반복하고 나서, 공기가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몸도 무거워지고 나서야 나는 우리 둘이 더 나눌 말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고개를 조금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혀도 약간 말라 있었는지 입술에 충분히 침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입이라도 열었다.
“허락하신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른손을 올려 심장 위에 올렸다. 그리고 케이프를 내리누르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정중한 통보였다. 손을 내리고 왼발을 뒤로 뺐다. 그 순간 황제는 물었다.
“나를 원망합니까?”
“…….”
나는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원망하느냐고? 그런 원색적인 단어를 쓸 줄은 몰랐다. 황제를 원망하느냐 물으면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하나. 알드리히는 자신이 황제임을 잊은 적이 없을 사람이다. 듣고 싶은 답을 유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잠시 망설였다.
이미 그에게 맞선 수위가 높았다.
알드리히의 시선은 내가 느끼기에 싸늘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저 짙다. 나는 그 선명한 눈을 보다가 생각했다.
내가 르네만큼 영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모든 일을 겪어 오며 다시 새삼 느낀 것인데, 나는 명철했던 적이 없었다. 차라리 아둔한 편이라 생각한다. 이만큼 걸어온 것도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던 교육과 훈련, 죽기까지 겪었던 바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제를 상대로 맞설 수 있는 것도 내가 황제만큼 명석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맞서서 라이네의 존립과 라이네의 명예와 라이네라는 이름의 무게를 지키는 것이 의무이기에 그리 하는 것뿐.
아, 그렇군. 발리앙이 간여한 일이 끝난 후에는 어디까지고 처음 걷는 길일 텐데, 거기부터 난 또 아둔하게 걸어가고 있을까. 상상하자 벌써 끔찍하여 두려웠다.
그러나 내색 않고, 고르고 고른 말을 혀에 걸었다.
“포르타경을 가지고 절 저울질하시더니, 이번에는 쥰을 추로 두고 저울질하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알드리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 같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나도 종종 저런다. 경련이 일어난 눈꺼풀. 내 의지를 벗어난 경련이라, 중요한 자리에서는 당황스럽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못 본 척 묵살하고 간단하게 덧붙였다.
“저는, 제게 해를 끼치려 하신 의도도 폐하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왜.”
벌리는 입에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 직후, 그는 그 벌린 입을 움직였다. 내가 왜. 그를 주시하였다. 조금 기다리자 알드리히가 이었다.
“누이에게 해를 끼칩니까?”
“…….”
“그겁니까? 가질 수 없다면 부수겠다? 그런?”
……아, 사랑 이야기인가.
방금 말하며 그쪽은 생각 않고 있었다. 알력 싸움만 생각하였지. 나는 얼떨떨하게 가만히 있다가, 슬쩍 웃음을 보이며 눈을 조금 찡그렸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가 왜 나오나. 내 묘한 기색을 느꼈을 텐데도 알드리히는 기대어 있는 책상에 손을 내리며 나직하게 말하였다.
“……은애라는 게 미친 감정이긴 합디다. 해보니까.”
“…….”
“그런데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미친 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그보다 더 미친 건, 사랑을 위하여 남의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권력과 자리를 지나치게 바랐던 르네가 혐오스러울 만큼 괘씸한 건 둘째치고, 누가 내게 르네와 아리엘 중 이해할 한 사람만 고르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르네를 더 이해한다 고르리. 내 가치관으로는 그쪽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베르덴을 이해하는 것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멈출 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생각을 그쯤에서 이만 멈추고 접었다. 그 와중에도 알드리히가 말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의미심장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나,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신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물어야 한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폐하. 제가 포르타경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에 알드리히는 부드러운 웃음을 보였다.
“이번 작전 인솔자는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절이었다.
“…….”
“누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짐작이 갑니다. 내가 이야기를 해 주지요. 작전 중에 기사들 사이를 파고든 침입자가 있었느냐. 없었다 합니다.”
“…….”
“따라서, 귀가하는 중에 독을 든 자와 만난 거라 생각됩니다. 쓰러진 것도 귀가한 직후라 하였지요?”
아니면 홀로 주입하였거나.
내가 전에 독을 맞았던 부위는 내 손으로 침을 찌르기에는 미묘하게 어려운 부위였으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부위는 아니었다. 이번에 쥰이 찔린 부위는 나와 비슷한 날개뼈 아래라 하였고.
그러나 황제가 저리 말한다면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인 고로.
나는 눈길을 잠시 내렸다가, 몸을 다시 그에게 향하게 하고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았다 뜨는 눈꺼풀이 또 무거웠다. 옷에 감싸 안긴 온 살갗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일단, 일단, 어서 귀가를 하자.
알드리히는 나를 또 잡았다.
“포르타경이 주관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공들여 조각한 것 같은 질문이었다.
기어이 이 자리에서도 전처럼 그 사람을 잡고 넘어져야 했나.
나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폈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바로 세워지는 내 자세가 나를 특별하게 환기해 주었다.
내가, 기억을 되찾고 처음 시드니를 보았을 때, 그러니까, 신전 앞에서 말이다. 그를 믿지 말아야 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내 친구로 묵묵히 남아있어 주었다는 것은 깊이 느끼고 있었던 그때 그 당시를 기억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시드니가 그간 무얼 해 왔는지를 더 잘 알게 되었음에도, 그때에 비하여 훨씬 그를 멀리 외면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를 더 믿지 못하게 되는 것도, 그에 따라 더 믿게 되는 것도, 하여 더 외면하려는 것과 더 믿지 않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모순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러는 중이었다.
쥰의 모친 관련하여 쥰을 사랑하되 미워하게 되어, 하룻밤 새 그 미움 가라앉히려 애썼던 것처럼.
나는 온전히 그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쥰에게 있어 온전히 그 아이의 누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언제고 시드니를 내 입으로 옹호하게 될 일이 정치 아닌 일에선 없을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웃을 수 있도록 잿더미처럼 끌어올린 힘이었다.
“제가 어찌 생각한다 생각하십니까?”
그의 질문을 이번에야말로 내 쪽에서 질문으로 받아쳐 주었다.
그에 오래도록 나를 보던 그가 어느 순간 책상 모서리를 움켜잡는가 싶더니 나직하게 대꾸했다.
“……필르 발리앙을 만날 시간입니다. 가봐요.”
그 이름에 동요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황제가 갑작스레 한 여인과 전보다 자주 만남을 가진다는 걸 모르는 가주가 이 오드리나에 있으랴. 내 앞에서 굳이 그 말을 한 심보가 고울 것 같지는 않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이는, 누워있던 나흘간 꿈에서 반복되었던 나의 알현.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악몽이었다.
============================ 작품 후기 ============================
여기저기 부딪히고 다치고 다니는 중입니다. 하루에 커피만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버텨야 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밥 해 먹다가 불에 덴 곳은 곧 물집 올라올 것 같아요. 지금 뭐라 후기 쓰는 지도 모르겠는데 아, 자고 싶다[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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