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CHAPTER 알드리히. 수선화의 재 =========================
그는 전염성이 있는 모종의 병일지도 모른다며 말리는 기사들과 귀족들을 헤치고 베르덴의 시신으로 나아갔다. 황실을 위한 의사 몇 중 하나가 달려와 그것을 살피는 동안, 가까이에서 그것을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가 무어라 입 열려 하자 몸을 굽혀 어깨를 잡았다. 닥쳐야지. 여기서 소리 높여 말하면 안 된다.
발리앙 후작이 자연사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은, 시신의 현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육안으로도 구별되는 독살이다.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데 자연사는 무슨.
그렇다면 자살인가? 그렇다면, 그게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질 줄 알고?
라이네 공작의 죽음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이 죽기까지 사랑했다는 추문에 휩싸이면 어쩌려고?
어떻게 발리앙은 에본느의 끝까지 이렇게 더럽히려 하나. 자살이든 독살이든 이 처형 자리는 최소한이나마 존중해주면 아니 되었나.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의사의 귓속말을 들은 알드리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발리앙 후작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발표하였다. 아마 친우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라고 일부러 덧붙였다. 후에 발리앙에서 기어이 반박을 하여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 이상, 이 발표는 번복되지 않을 터.
의사는 제 입에서 나온 것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황제의 입에 담기자 잠시 당황한 모양이었으나, 표정을 잘 갈무리 지었다.
알드리히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타기 전, 시드니의 텅 빈 얼굴을 보았다.
그 날 저녁 황제는 쥰을 은밀하게 황궁으로 불러왔다. 그리고 에본느가 체포되던 밤에 맡겼던 봉투를 내밀었다.
누님. 나의 누님.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당신. 존재의 이유. 당신이 있어 제가 숨 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있어 제가 살았어요. 누님.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가지 마십시오. 살려 주세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습니다…….
그가 건넨 유서를 품에 안은 쥰 라이네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반복되는 그 고백은 기도처럼 절박하였고, 미친 사람의 날궂이처럼 정신없었다. 눈물 없이 메마른 두 푸른 눈은 떨리는 울음 그 자체였다.
그 절절한 기도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쥰을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잘 지켜보다 돌아오라 기사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미 막연하게 예감 했었던 것도 같다.
“라이네경이, 자진하였습니다.”
새벽, 에본느의 목이 잘린 바로 그곳에서 쥰은 죽었다.
알드리히는 그 부고에 이어 쥰 라이네가 자진할 때 독을 썼음을 듣고, 누이가 어째서 바깥에서 죽어야 했는지를 깨달은 게 틀림없을 그 젊은 기사를 짧게 애도하였다.
그러나 부고를 들은 것치고는 멀쩡하였다.
쥰 라이네가 이 세상에 더는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끝까지 그 청년을 위하여 보호를 안배해놓았던 에본느의 노력이 그녀 사후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아니, 수 시간도 되지 않아 무용하게 되었다는 게 그에게 아팠다.
쥰의 누이이기 이전에 라이네의 가주라 하던 에본느의 말을 몇 번 들은 적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는 그녀는 라이네의 가주이기 이전에 쥰의 누이, 쥰을 몹시도 사랑하고 아끼는 보호자였다.
대부분의 대귀족들은 라이네가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수면 밑에서 퍽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드리히도 에본느에게 황제 시해 미수이니 뭐니 하는 죄를 물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니, 에본느가 저택 내에서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기필코 구명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마법사라는 토설을 하고 감옥으로 스스로 들어왔던 까닭.
그대로 저택 내부에서 쓰러져 죽었다면 라이네는 또 다른 독살의혹에 시달리게 될 테고, 쥰이 그 용의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이 라이네 공작이 되고자 했다는 둥, 독살을 한 이유를 대라 하면 몇 개 정도 꽤 사실처럼 들리는 이유도 있어서.
아직 라이네에 덧씌워진 혐의들이 많았고, 그에 따른 조소 어린 눈초리들이 매서웠다.
죽은 발리앙 후작은 가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손 하여도, 아리엘 발리앙은 무슨 속셈이었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제정신으로. 그 여자는 제정신으로 그따위 생각을.
-폐하께서 필르 발리앙을 사랑하셨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용기를 끌어 모아 흘린 고백의 끝은 그리하였다. 그를 향한 원망.
-제가 폐하의 마음을 일찍이 알고 폐하의 곁에서 멀어졌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 자신을 향한 원망.
-저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폐하. 폐하의 그 감정 때문에 제가 이렇게 죽습니다.
다시, 그를 향한 원망.
고통과 독약으로 사리분별 흐려진 그녀는 속을 날것으로 내보였다. 어떻게든 향신료 같은 웃음을 치거나, 묶은 리본 같이 잘 다듬은 문장을 사용하던 에본느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 자신을 잃거나 버렸다.
그는 내쳐졌고, 에본느도 그 말을 하며 스스로 자신을 내쳤던 것이다.
알드리히는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드물게 마주치던 아리엘 발리앙의 얼굴이 그를 볼 때 어떻게 밝아지는지 느끼고 있었다. 눈치 없이 지낸 시간이 없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에본느가 말하기 전까지, 그 감정이 에본느의 일과 관계있을 거라고는 호리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 모든 일이 상식선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건, 그건 지나치게 그의 상식 밖이라서.
그러나 에본느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발리앙 후작이 된 아리엘로부터 청혼서가 도달하였다……. 에본느의 원망이 형상을 갖추고 드러난 것이다.
그 날 알드리히는 말없이 그 서류를 보다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무리하게 오후 산책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 산책길에서 본 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아리엘이 황궁 후원에서 꽃송이 하나를 떠오르게 하고, 그걸 옆에서 르네 발리앙이 보고 있는.
“…….”
알드리히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법이 끝나고 나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한참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입 꼬리를 올렸다. 올리고, 올려서, 점점 웃는 모양이 커졌다. 그러다 일그러졌다.
소리 없는 웃음이, 일그러졌다.
정말…….
정말, 누이. 나 지금, 절망스러워서 숨이 막혀요.
그를 향해 독물이 쏟아지기 직전 나타났던 아리엘이 떠오르자, 정말이지 숨이 막혔다. 심장이, 마음을 더듬지도 못하게 추락하였다. 그저 절망. 절망. 절망.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실은 다리가 떨려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도 하였다. 쓰러질라. 하여 저들이 눈치 챌라.
한참 후 몸을 돌린 알드리히는 시드니를 보고 멈칫했다.
“…….”
자색 섞인 검은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떨어졌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광경이다. 그럼에도 알드리히는 저 눈물에 공감하였다. 그의 눈시울도 붉어졌으나 끝끝내 참아내고, 황제는 기사를 지나쳤다.
그 다음 날 시드니는 급사했다. 집행인이 되기를 청하던 날에 그가 예고했던 대로였다. 정확히 말하면, 예고 중 하나대로였다.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고, 죽을 지도 모른다 했더랬다.
이미 그의 사랑하는 누이는 시간을 되돌아 가 있을 것이다. 되돌아 가 있으리라고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에 찬 희망일랑 전부 없어지고 마니까.
그리하여 먼 훗날, 에본느가 그 시간에서 천수를 누리고 죽으면, 사후에야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드니도, 저도.
알드리히는 꽃송이를 만지다 피식 웃었다. 그는, 그들은, 이제 결코 이 세상에서 에본느를 만나지 못할 테고, 에본느를 위해 처음부터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에서의 제 자신은 지금과 변함이 없겠지만, 이 생의 기억이 있는 에본느의 변화에 무엇 하나는 영향을 받으면 그렇게 그 자신도 무언가는 바뀌게 될 것이다. 그 변화들이 모여 종국에는 에본느를 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시간에서는 후회할 일이 이토록 커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 이제 털어낼 때가 되었다.
그는 황제이므로 결국 사랑하는 사람도 버린 바 있었다. 그 죽음마저 명예로워질 수 없도록 이용하였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렇게 있어야 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황제가 마땅히 할 일일뿐더러, 그 개인적으로 에본느에게 할 수 있는 속죄다.
이제 와서 한 평범한 남자로 돌아가 버린다면 에본느가 죽은 의미가 없어.
그럼에도 눈앞이 흐려졌다.
그의 손에서 꽃이 떨어졌다. 단단한 초록 줄기가 테이블에 부딪히고, 풍성하게 피어 있던 붉은 꽃송이가 한 바퀴 테이블 위를 굴렀다. 비스듬하게 잘린 줄기 끝에 물이 떨어졌다. 에본느가 죽었을 때에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리고 시드니의 죽음으로부터 닷새 후, 포르타 백작이 된 헤르조 포르타와, 션 포르타가 소산식을 위해 포르타 영지로 내려가 오드리나가 비었던 중.
르네 발리앙은 아리엘 발리앙을 팔아넘겼다. 버렸다.
아리엘이 베르덴을 죽인 것에는 물증이 없었고, 그저 하인의 증언뿐이었다. 그러나 증언으로 시작된 소문들에 몰렸던 라이네 공작이 있었다. 고신을 받다 처형당해 죽은 라이네 공작이. 그 선례, 실로 막강하여 이 상황을 쥐고 흔들었다.
라이네 공작에 대하여는 소문을 믿었으면서 아리엘에 대하여는 외면할 것이냐는 의견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의견이 의견에서 그칠 수 없었던 것은, 르네가 아리엘을 정말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알드리히와 에본느의 관계처럼. 이런 일이 터지면 아리엘이 모든 것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리엘은 르네의 배신을 예상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새 발리앙 후작은 우왕좌왕하였다. 이 모든 것은 모함이다.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 말에 힘이 실리지 않자, 후작은 끝끝내 스스로 처절하게 입을 놀렸다. 이 모든 것은, 르네가 시킨 일이다.
그 말을 뒷받침할 증거.
없었다.
르네는 한 번도 아리엘에게 직접적으로 이리이리하라 말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유로 당황한 것 같은 아리엘은 거짓 증언조차 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역으로 팔아넘기려 하였던 르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르네는 몹시도 유감이라는 흐린 얼굴로, 아리엘이 라이네 공작을 어떻게 모함하였는지 설명하였다.
그런 증언을 하면 발리앙의 명예가 얼마나 실추될지 모를 리가 없는데.
그 영식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기를 쓰는 다른 귀족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르네가 말하기를, 처음엔 소중한 쌍둥이 누이의 악행과 그 악한 감정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였다. 알드리히와 몇몇 대귀족가문의 가주들은 부러 그 증언을 아리엘 발리앙이 있는 자리에서 들었다. 아리엘이 충격에 질린 눈으로 제 쌍둥이를 보았다.
알드리히는 그 증언을 모두 듣고 난 후에,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웃어서는 아니 되기에. 추운 헛웃음이 입 속에서 방황하였다. 누이, 보고 있습니까? 여기 당신을 죽인 자가 곧 숨이 질 것 같습니다.
라이네가 다시 재기할 발판이 보강된 것과 다름없다. 직계가 남아있지 않아 에본느의 조부 대에 방계로 떨어져 나갔던 자의 후손이 자리를 이은 공작가는, 남아있는 데스챔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만 없었어도 이미 백작가로 격하되었을 터다.
그런데 이리 기회가 생긴다.
어차피 곧, 에본느 죽기 전에 상의하였던 대로, 데스챔프를 붙잡아 흔들어 라이네의 명예를 보호해 줄 예정이었는데.
그러나 그런 일과 별개로 알드리히는 르네를 싸늘하게 응시하였다. 저것의 행보가 몹시 수상하였다. 이런 자가 명예로운 가문의 가주임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이런 큰 죄를 짓고도 죄를 받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정의감? 노블레스 오블리주?
혀에 기름칠을 듬뿍 한 듯 매끄럽기 그지없는 저 말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인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안다. 아마 저 자도 알리라.
알면서도 입 다무는 것이다. 이쪽도 저쪽도. 에본느가 누명에 씌워졌다는 걸 알고, 권력의 균형을 위하여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누명’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알드리히는 통찰하였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 르네다.’
안개 같이 흐리나 정갈한 저 표정을 보아라. 도저히 흑막을 꾸민 자로는 보이지 않는 저 얼굴. 그럼에도 직감하였다. 아리엘 발리앙이 지난번에 르네를 고발하였던 바와, 지금 당장 보이고 있는 아리엘 발리앙의 당황도 그 직감에 한몫 하였다.
아, 그렇다. 아리엘도 가문 내에서 죽이면, 더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야말로 남의 손을 빌어 죽이고자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에본느가 죽은 건, 어디까지나 아리엘을 치우기 위해서라고…….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이 잘게 떨렸다.
안 돼.
안 된다. 그러면 죽은 그 사람이 뭐가 되나.
독물이 쏟아지는 걸 기사들이 치워낸 직후의 순간, 그와 눈 마주쳤던 에본느의 경악한 표정이 떠올라 속이 떨렸다. 이게 뭔가. 이게, 뭐야. 누이. 어떡해요. 저 새끼를 죽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알고 보니 마법사였던 아리엘 발리앙의 짓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아리엘은 죽었다.
깊은 흉터가 진 발리앙가라도 물려받은 르네를 언젠가 만났는데 낯빛이 좋아 보였다. 속이 비틀리더라.
그러나 훗날 알드리히는 역모를 꾀한 3황자, 3황자의 모친, 데스챔프는 치웠으나, 그들과 엮어 저것도 함께 치우는 것에는 실패. 르네 발리앙 후작은 오래도록 건재하였다.
============================ 작품 후기 ============================
알드리히 외전 끝입니다.
씁쓸하지만 악이 항상, 기필코, 멸망하는 건 아니기에 지난 시간의 발리앙은 그런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집니다.
물론 본편은 에본느의 해피엔딩입니다:D
지난 나흘, 숨 가쁘게 함께 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주말에 쉬고, 월요일에 돌아오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항상 사랑 듬뿍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