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14화 (114/157)

00114 -CHAPTER 알드리히. 수선화의 재 =========================

“…….”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누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능하기 짝이 없어. 자객의 입에서 나온 헛소리를 새어나가게 두었고, 필르 발리앙의 그 가볍고 악의적인 입을 제지하지도 못했고, 결국 끝까지…….”

말하다 보니 어느 부분은 저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말하려 했던 부분이 저와 비슷하다는 것을. 그는 말을 끊었다.

아하. 베르덴 그 자는 후작 될 사람으로 자라난 후작이다. 해야 할 바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응당 선택하고 마땅히 행해야 하는 걸음걸음이라는 뜻이다.

비슷하게 알드리히는,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위를 거머쥐고 비로소 황제가 되는 길을 거치긴 하였으나, 어찌되었든 황태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자라왔다. 그리하여 이 상황에 이르러서는 남자와 황제 중 황제를 택하였으며.

따라서 차라리 알드리히의 머리로는 베르덴을 깊이 이해하고, 시드니를 그다지 이해 못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시드니를 먼저 이해하고 있었고, 베르덴을 이제야 깨닫는 중이었다.

이제야.

아마도 마음 하나의 차이다.

예를 들어, 시드니 개인적으로는 기사단 단장에서 물러나야 했을 뿐더러, 포르타는 대귀족에서 제외해야 마땅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로서는 멍청하고 미련한 짓을 했기 때문이다.

알드리히는, 그럼에도 그 멍청한 짓을 전부터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해 불가해야 하는 바에 대하여.

심지어 발리앙 일가를 죽이고 싶어 속을 끓이는 중이기도 하였다. 그보다 훨씬 발리앙을 적대해야 할 사람은 얌전하게 웃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아직도, 발리앙을.

“헌데. 누이는 아직도 발리앙을 믿네.”

“…….”

믿는데.

알드리히의 입에서 내려앉은 말에, 시드니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알드리히는 에본느의 그 당시 표정을 더듬었다. 과거로 되돌린 뇌리에 그녀의 웃음 역시 함께 떠올랐다. 항시 능글맞아 가끔은 보는 사람이 슬퍼지기까지 하였던 그 방어기제.

누이. 꽃 같이 처연하던 당신의 가면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기억을 되살리니 목하 이리도 서글프다.

안구가 피곤한 것처럼 시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유 없는 입을 조금 더 움직였다.

“발리앙 후작을 옹호해. 그가 그랬을 것 같지 않다고, 추포되기 직전에 그리 말했어.”

그리고 그 말에 흔들린 황제는 격분하였었다. 이 꼴이 되고서도 그자를 믿느냐며.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다른 많은 가주들과 마찬가지로 가주가 될 사람으로 태어나 가주가 되었음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미련한 믿음을 말하는, 미련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이유가 있다면 다른 사람을 엎드러뜨리는 것도 주저치 않던 이가.

정을 준 친구에게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다정하였다.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을 그녀밖에 두지 않은 알드리히로서는 이해가 가능하기도 하고, 이해가 가능하지 않기도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무얼 말해보았자 에본느의 상황이 달라지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어깨가 펴졌다. 그는 그렇게 자세를 바로 세우고 시드니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그다지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에본느와, 에본느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시드니 양측에게 날을 들이민 윤허였다. 당연히, 포르타 백작은 제 청이 받아들여졌음에도 처참하게 보였다. 예를 갖춘 후 물러가려 하는 남자를 알드리히는 불러 세웠다.

시드니에게 주는 늦은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을 고르지 않고, 속에서 끓는 대로 기사에게 말하였다.

“누이는. 살고 싶어 하지 않네.”

“…….”

“알고 있게. 그건.”

훗날, 아니,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먼 옛날에 다다르거들랑, 에본느에게서 큰 증오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마지막 경고이자 일깨움이었다. 그리고 부디, 받으라.

“그리고. 조만간 면회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네. 짐을 제외하면 경이 첫 면회자군.”

이 시간과 같은 에본느와의 관계는 먼 옛날 깨져버리고, 부디 그녀로부터 증오를 받으라.

알드리히는 남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자신을 속인 적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노라. 황제는 포르타 백작이 싫다. 시드니를 미친 듯이 질시하고 있었다. 그는 옛 과오와 황좌에 앉아있다는 입장으로 인하여 설 수 없는 자리 가까운 곳에, 저 사람은 서 있기에.

아, 그렇다. 누이는, 자기 마음도 몰라. 내 눈에는 보이는데, 자기는 몰라. 당신 사랑하는 내 눈에는 보이는데, 누이, 당신 스스로는 몰라요.

그래서 그는 미칠 정도로 저 사내가 싫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가문마저도 버리고, 에본느를 살리려 하는 저 사람이 싫었다. 가주로서는 최악으로 무능한 저 사람이야말로 그의 수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는 이란 부, 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서 끝까지 설득해봐.”

부디.

끝에 덧붙일 수 없던 말은 삼켜서, 발 붙이고 있는 바닥 밑으로 내려 보냈다. 담백한 애원이라 하면 애원이고, 명령이라 하면 명령이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녀의 죽음으로써 그가 이룰 수 있을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위선인, 그러나 진심인 명령을 했다.

죽지 않기를 바라나, 죽어도 어쩔 수 없다. 죽으면 죽는 대로 알드리히는 상황을 꾸려나갈 것이다. 표면적으로, 라이네 공작의 죄는 죽기에 충분한 죄였으므로.

그는 불완전한 심판권을 가진 황제였다.

‘라이네 공작의 사형 집행인을 공작의 절친한 친우인 포르타 백작에게 맡겼다.’ 이는 황제가 라이네 공작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공작에 대해 감정이 상했다는 말과 아주 다르지 않게 들렸다.

그 칙령을 공표한 대귀족회의가 파한 직후, 알드리히는 베르덴 발리앙에게 남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접견을 위하여 알현실로 자리를 옮길 마음은 들지 않아 회의실, 앉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하여 모두 빠져나가 휑하게 빈 회의실. 황제는 얼음장 같이 싸늘하게 식은 웃음을 웃었다.

“그대와 이 일에 관련하여 할 말은 더 없지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네.”

청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양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베르덴의 무표정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리엘 발리앙의 증언을 들은 이후 타오르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노여움에 갑자기 불씨가 붙었다.

그래도 알드리히는 웃음을 꺼뜨리지 않았다. 물었다.

“그대와 라이네 공작, 둘 사이에 우정은 있었나.”

베르덴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동요를 허락지 않겠다는 저 시선과, 선이 드러나도록 정돈된 몸가짐이 여느 가주와 다르지 않다.

하여 그는, 베르덴이 감상적인 말을 입에 담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답이 얼마나 감상적이었느냐 하면, 한순간 그가 귀를 의심할 정도. 빌어먹을 발리앙 후작은 황제에게 상답하였다.

“라이네공을, 저는 마음에 담았을 지도 모릅니다.”

“담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 그거. 은애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

“……하.”

이 모든 일을 수습하고자 이렇다 할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웃기지 말라고 말하려다, 비웃음을 먼저 터트렸다. 그러나 그는 그게 곧 저가 한 일과 비슷함을 깨달았다. 피식피식 흘리던 웃음이 멈추었다. 벼락을 맞은 듯하였다. 그의 눈가가 서서히 구겨졌다.

사랑한다 하며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사람.

그였다.

발리앙 후작이 발리앙 가주로서 일을 하고 그가 황제로서 일을 한 것과 같은 것. 잠시 가만히 있던 알드리히는 손을 휘저었다.

“알았네. 가보게.”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베르덴이 회의실에서 나가자마자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욕지기가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이해한 바와 행한 바가 달라서, 그는 시드니를 이해하며 베르덴처럼 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 급작스러운 자각이 골을 울리게 하였다. 감히 저 사람을 비웃지도 못했다.

베르덴 역시 그의 수치를 비추는 거울임을 깨달아서.

알드리히의 힘이 들어간 눈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이리 역겨웠나. 언과 행이 다름이 이토록 역겹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두 번째 회의감이었다. 에본느를 사랑함을 인정하였던 그때 들었던 첫 번째 회의감에 이은.

그날 밤, 그는 사흘 만에 에본느를 찾았다.

걸을 수 없어 기어야 하고, 인두로 지진 눈 하나는 뜨지 못하고, 팔 하나도 사라져버린, 그의 세상에서 특별하게 의미 있는 사람. 이리 되는 걸 막지 못한, 막지 않은 황제여…….

어느 정도 이상의 고통은 어떠한 인간도 견디지 못한다 하는데, 에본느는 버티고 있었다. 고신이 이어져도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황제를 시해하려 한 적 없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 버텨내고 버텨내며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알드리히는 철창 너머, 바닥에 몸을 뉘이고 쉬고 있는 에본느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굽혔다. 철창에 등을 기대고 앉자 녹슨 차가움이 옷을 뚫고 등을 얼렸다.

들리는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고통 어린 신음이다. 기감 예민한 무인이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잘 정도인데 무어 이상한 일 아니다. 꿈에서도 편하지 못한 사람을 등지고, 황제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첫 고신을 받은 후의 모습을 보고 기함한 그에게 그녀는 말했었다.

-바비에르가의 일은, 저는 몰락시킬 수는 있어도 라이네는 정도 이상으로 건들 수 없었습니다.

-…….

-추포되기 전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저는. 다른 어떠한 살인이라면, 예를 들어 바비에르가의 일이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겠으나, 황실만은 아니 됩니다. 그러면 라이네는 몰락합니다.

-짓지도 않은 죄 가지고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그냥. 제발, 어떻게든, 빨리 말을 끌어낼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줘요. 미안합니다.

죽이라 하는 말을 끌어낼 테니까, 죽일 때까지만 버텨 달라.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여인에게 한 말이 그것이었다. 황제의 사랑은 대체로 온전히 간직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국혼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이 황제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행운이리.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이번 대 황제의 마음은 지나치게 참혹하……, 아니, 아니, 아니다. 이게 아니다!

알드리히는 멈칫 기겁하고 말았다.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제 마음이야? 이 무슨 자신 밖에 모르는 미친 생각인가.

그는, 그래, 스물여덟 해를 ‘살아남는 것’과, 황위를 쟁취하는 것과, 따라서 국가와 정치와 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최악이다. 최악이다, 정말.

이후, 끝은 기어이 왔다.

알드리히는 처형장에 모욕적으로 꿇어앉혀진 에본느를 보았다. 온전한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분명 숨을 쉬는데, 안색은 이미 시신인 것 같았고, 사지 갈기갈기 찢겨 짐승에게라도 먹혀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새벽, 그가 저 형상을 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저 불쌍한 사람에게, 미안하다 하였다. 고신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꺾이지 않은 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사죄하였다.

위선이었다.

목이 단숨에 잘려 데구르르 굴러갔고, 처형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황제부터가 너무도 빠르게 끝난 저 죽음이 현실인지 일순 헛갈려 했을 지경이라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이 푸르죽죽하게 얼어붙었다.

“…….”

검은, 그 순간 흩어졌다.

시드니는 차마 숨도 쉬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흩어져서 공중에 섞여버리는 검의 흔적을 보고 있었다. 그 흔적, 종국에는 남지도 않았는데.

할 일을 다 한 검이다.

저 비현실적인 일에 정신을 빼앗긴 많은 사람 가운데, 쏟아진 검은 피로 도로 눈길을 돌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인 시드니가 몸을 굽혀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에본느의 목을 향해 뻣뻣하게 굳은 손을 뻗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때.

베르덴 발리앙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털썩 쓰러진 몸을 급히 살피던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멀어진 사람들,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곧 발리앙 후작이 죽었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알드리히는 멍한 웃음을 피식 웃었다.

미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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