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CHAPTER 알드리히. 수선화의 재 =========================
알드리히는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참, 조용하게 삼킨 기막힘이었다. 그의 심장이 나무라면, 푸른 잎 무성했던 가지에서 한순간에 노랗게 물든 낙엽이 모이는 중이다. 쌓이고 쌓이다 그것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엇 하나만 그가 밝혀도 상황은 바뀔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의 정치적인 자살이 되리.
이제 와 드러낼 것이라면 지금까지 에본느를 진창에 끌고 내려와 끝끝내 잡고 늘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비에르가의 일처럼, 그가 행한 일들이 이런 식으로 밝혀질 때를 대비하여 에본느를 그의 앞에 세워두었던 게 맞다.
그와 에본느는 참 많은 일을 함께 하여 왔고, 그의 손에 의해 그녀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하여 에본느는 말했다.
-제가 선택한 겁니다.
그녀는, 상냥하지 않은데 상냥한 사람이다. 항상 그랬다.
-저는 라이네의 소공녀이고, 제가 거부했다면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저를 그런 일들에 억지로 동참시키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바보가 아닌데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결국에는, 전하와 함께 제가 지은 죄입니다. 그뿐이니 미안해하실 것도 없습니다.
-미안해한 적 없어요.
-그럼 거기에 그런 말을 쓰지도 마십시오.
멍한 와중에 한 낙서가 ‘미안합니다 누이’였다. 하필이면 어떤 일을 마무리한 직후라, 다른 뜻으로 얼버무릴 수도 없었던 낙서.
끈적끈적한 죄로 엉망인 피 웅덩이를 함께 구른다는 만족감도 아마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유대를 에본느는 포르타 영식이든, 발리앙 영식이든, 라이네 영식이든, 그녀와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는 그 누구와도 가지지 못했을 테니까. 오로지 그였다. 오로지 알드리히. 오로지 그와, 에본느. 그의 유일한 친우인 에본느.
사랑하게 될 것을 몰랐기에 그랬다.
그녀를 은애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참 많이 늦어버렸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에본느에 대해서만큼은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했던 덕분, 이다. 에본느는 그와 걸어온 길 때문이든 그게 아니든 많이 지쳐서, 웃음도 전과 같지 않았었다. 아, 그런 피로가 보였다. 어쩌면 살인자의 피로다.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가식적이라 오히려 몹시도 밝게 보이는 싱글벙글.
황태자가 된 후에 인지한 사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채였다.
깨닫지도 못하고 있던 마음은 그 사이에 홀로 자라고 홀로 성숙해서 홀로 꽃핀 채로, 그에게 왔다.
그래서 그는 씩 웃는 에본느에게 아무 고백도 하지 못하였다. 역설적이다.
-누이 오늘 뭔가 피곤해 보이네요.
-설마요.
당신을 사랑해요.
-음. 차라리 좀 자고 갈래요?
-몰골이 그렇게 말이 아닙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전하께서 이러실 정도면…….
정말 사랑해.
-아, 그, 왜, 있잖습니까. 예에전에 발리앙 영식이 누이한테 했던 거. 구운 아스파라거스 닮았다고.
-예에…….
-사람이 아니라 한 번 데친 채소 같네요. 안색이 좋지 않은 게.
-전하께서는 스콘 같습니다. 그, 쩍쩍 갈라진 표면이,
-그거 맛있지. 고맙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렇게 가겠지.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이대로 항상 놓고 있을 거야. 당신에게 더 짐을 지게 할 수가 없어서.
환장하겠다는 얼굴이 된 그녀를 보던 그는, 실은, 눈물을 흘릴 뻔 했던 적도 있었다.
알드리히는 사람을 죽이는 계획을 짜며 웃는 사람이고, 벌벌 떨며 비는 사람을 피식거리며 내려다보는 사람이고, 죽은 시신을 숨기고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미쳐있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며, 어쩌면 그 미쳐있는 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감정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실은 그토록 미치게 냉혹한 사람인데, 에본느만은 오래도록 사랑해오며 에본느에게만은 감정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내내 더러운 유대를 지닌 친구로 함께 해 왔고, 누구 한 명은 이제 반쯤 자진하여 들어간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알드리히는 제 앞에 서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누이, 당신에게 지게 한 내 몫의 짐, 내가 다시 돌려받을까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야. 그러나 나는 결국 끝끝내 황제로 앉아있는 중이고, 당신의 친구 중 하나는 이제 내 앞에서 간구하고 있네요.
“…….”
에본느와 알드리히가 협의한 바. 그 내용을 거의 다 짐작하고 와서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 직속 최정예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무슨 일에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저처럼, 알드리히는 이 사람은 저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는 감상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그는 에본느를 앞에 두고 언성을 높였고, 그리고 이 사람도.
“경이…….”
이 사람도 깊이 상하여 죽어가는 눈으로 서 있다.
잠시 다물었던 입술을 도로 열었다.
“경이 집행인이 되겠다고…….”
그리고 중얼거렸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에본느를 변호하다 위태로워진 사람이 이제 와서 에본느를 죽기를 기뻐할 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저런 눈을 한 채로 그럴 리가.
그러나 표정은 무감정하여, 저 사람의 평소를 몰랐다면 저 사람도 발리앙 후작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저 눈빛, 죽어간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저 사람을 많이 보아 왔고, 하여 죽이고플 정도로 질시해온 덕분이었다.
알 수 있기에 그는 입을 움직였다.
“왜.”
이를 갈지는 않았지만, 그러기 직전의 증오를 욱여넣은 채로 황제는 웃지 않고 물었다.
음성은 거칠고 싸늘했다.
그것은, 에본느를 죽이는 역할을 자진하여 맡겠다 하는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글쎄, 왜일까. 너무 많은 게 섞여서 이런 음성의 이유를 그 자신도 명확하게 짚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죽어야 한다면 내 손으로 죽이리라’ 따위의 집착 어린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의심을 함으로써 알드리히는 오히려 제 미치광이 같은 속내가 드러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외면하고파서, 그런 수치스러운 감정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려 하는 걸까.
그럼 나는 끝까지, 누이보다는 나 자신을 우선하는 건데.
명치에 뜨거운 김이 서려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향한 기막힘이다. 이 상황에 대한 기막힘이기도 했다. 아. 그는 그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이제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이토록 무능력한 저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능력함이 수치스러웠다. 하여 감추고, 하여 변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선순위 명백한 감정인가.
……저 남자와 다르게.
알드리히는 핏발 선 시선으로 시드니를 쏘아 보았다. 에본느를 죽이는 최전방에 어째서 서려 하느냐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에본느를 위함이리라.
나서서 에본느를 위하는 저 언행과 기운은 담대하다기보다는 태연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잔잔하다. 그는 할 수 없었던 바를 저토록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있는 그의 눈에는 질시가 반이요, 수치가 반이었다.
시드니는 다섯 계단 위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알드리히의 어깨 즈음을 응시하며, 대답하였다.
“저는. 그분이 살기를 원합니다.”
저 말을 하는데, 감정적으로 절박할 수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건조할 수도 있었다. 후자는, 라이네 공작이 건재하기를 바라는 다른 대귀족 가문들의 가주들이 되겠다. 한데 시드니, 저 사람도 건조했다.
버릇, 습관인가. 아니면 이미 심각하게 앓으며 다 깨져왔기에 절박함이라곤 남은 게 없는 건가.
혹은, 절망하여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저것과 비슷한 담담함을 거울 속에서 본 적이 있고, 아직도 매일 같이 보고 있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떠올린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남에게는 보이지 못할 그 동요, 어차피 황제의 어깨를 보고 있는 저 사람은 보지 못할 터.
에본느가 살기를 바란다는 기사의 메마른 음성이 다 부서진 모래가루처럼 흩어졌다. 황제의 손이 팔걸이 끄트머리를 움켜잡던 때, 기사는 말을 이었다.
“신이 허락한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신?”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설마 신 운운하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신앙은 이 세상 곳곳에 스며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독실하고 아니 하고는 개개의 선택이다. 알드리히는 결코 신을 깊이 믿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시드니도.
그러나 괜한 소리가 아닐 것이기에.
알드리히는 섣불리 비웃음을 새기지 않았다.
집행인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부탁을 들어주도록 설득하고자 한다면, 걸맞은 설명을 곁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드니는 ‘걸맞은’ 설명을 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믿지 못할 만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라이네 공작이 죽을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하여 착란을 일으킨 게 아닌 이상, 믿어야 할 설명이기도 하였다. 신화에 가까운 예언. 그 이야기.
지나치게 환상 같은 이야기라 도리어 현실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가정이나 짐작으로 정치를 꾸려나가고 있으나, 그것들은 대체로 현실에 기반을 둔 예상들이다. 현실을 생각하기에 바빴다, 그는. 이 같은 하늘 위의 이야기에 신경을 쓴 적이 없어.
하여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연한 혼란, 안개, 그 속에 빠져 있는 그에게 날 세워야 할 어름을 잡아준 사람은 또 다시 기사였다.
“공작을 구명할 노력을 끝까지 멈추지 않겠지만, 그 모든 수가 실패한다면, 저는 공작을 다른 방법으로라도 살려야겠습니다.”
살리려 합니다, 도 아니고 살려야겠습니다, 라고.
숙려하느라 자연스레 내려갔던 눈길이 비쭉 올라갔다. 칼날이 돋았다. 파르스름하게 적대감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받아도, 청년은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이라도 갈고 싶은 걸 참고, 한 차례 질끈 이 악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빈정거렸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리기를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짐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러자 시드니의 어둑하게 시든 눈이 천천히 반응하였다. 잔바람에 스친 잎사귀처럼 검박한 반응이되, 그럼에도 누군가는 압도될 움직임이었다. 기사는 나직하게 대답하였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잘라 말하는 그 말이, 참, 차암……. 잘라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 말이지…….
알드리히의 눈꺼풀이 절반 내려갔다. 입 꼬리가 올라갔다. 기어이 우는 것처럼 짓고 만 웃음이었다. 그는, 황제는, 저런 말을 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녀가 죽고 나면 그 죽음마저 이용할 생각인데, 저런 말을 어찌 해. 무슨 낯짝으로 저걸 혀로 만들어 내.
하여. 내 마음은, 저 사람의 것에 비해 부족한가?
“경이 자기를 죽인다는 걸 들으면, 심지어 집행인 되기를 스스로 청했다는 걸 들으면, 누이는 무어라 생각할 것 같은가? 미워하고 증오하진 않을까?”
“…….”
끓어오르는 질시였다. 참 못났다.
저 방법이라도 가져와 준 바에 대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자기 수치 가리기에 급급하여 이 무슨 멍청한 짓인가. 알드리히는 스물여덟 해 살아오며 이 순간만큼 저 스스로에 소름끼친 적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저 사람이 동요하길 바랐다. 에본느의 마음일랑 조금도 모르고 이 자리에서 동요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온전히 누굴 사랑하는 남자가 될 수 없는 못난 남자의 발악이다.
그에 시드니는 눈을 감았다 뜨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답을 들은 알드리히는 하, 탁하고 더운 숨을 끌어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렸다.
괜찮지 않은 주제에 괜찮다 한다.
괜찮지 않을 걸 그 자신부터가 알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는 건 이런 것을 말하리라. 그는 에본느가 저를 증오한다 하는 입술 움직임을 떠올려 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이 따위로 끔찍해할 여유는 있다. 그녀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원한 적 없으나, 결국에는 그녀를 감옥에 쳐 넣은 건 황제의 명이었다.
팔걸이 끝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상황을 기어이 이 지경까지 끌고 온.
너희.
“……발리앙 후작은,”
특히, 에본느 라이네가 황제를 향해 마법을 쓰는 것을 보았다 증언한 아리엘 발리앙.
-라이네 공작 각하께서 손을 움직이시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셨고, 손이 멈춘 직후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그 순간 빛이……. 독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말아 올린 눈시울이 슬며시 떨렸다.
“따로 나서지는 않으면서도 짐에게는 와서 어떻게든 누이를, 라이네 공작을 구해달라고 했네.”
============================ 작품 후기 ============================
ahddl0610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이번편은 31-32회 꿈에서의 시드니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