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이해할 수 없는 반목이었다. 알드리히는 웃으며 사람을 조종하는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시드니는 다정하지만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던 바.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기사가 되었음에 책임을 느끼고, 다른 대가문 가주들과 다르게 황제를 확실히 주군으로 여기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랬다.
지금의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드리히처럼, 다른 가주들처럼, ‘당연한 것’을 행동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그날 미로골목에서…….”
부슬부슬 메마른 입술을 멈추고, 침을 삼켜 목구멍을 적셨다.
“있었던 일에 쥰이 참여했다는 말인가.”
“……폐하께서 각하께 말씀드렸습니까.”
“그래. 말씀하셨지. 경이, 폐하의 명에 반하여 움직이고 있다고. 폐하께서 내 이야기를 않으시던가.”
시드니에게 내 말을 전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던 건 협박 같은 허풍, 혹은 질문으로 포장한 허풍에 불과했을까.
기다렸으나, 시드니는 아무 것도 대답치 않았다. 나는 기도실 구석에서 화륵 흔들리는 촛불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그림자가 따라 흔들렸다. 파랗게 식은 기도실 내의 어둠도 함께 이지러진다. 고요한 이 정적이 문득 불안해지고 말았다.
이만. 가야겠다.
가서, 쥰을 보고, 그리고 집무실로 가야겠다. 그리고 책상 앞의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자……. 몸에 조금이라도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잠간이라도 좋다. 나는 코트 목깃을 파고든 손으로 턱 아래의 목을 만지작거리고, 입을 열었다.
“용건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말하겠네. 경.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우연히 나를 만나면 하려고 했다는 건 말이 안 되네.”
아까 일단은 넘어갔던 문제를 되살렸다. 그러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 공격할 생각 또한 없다. 최소한 짚고 넘어가야 할 점만 짚을 요량이었다.
나는 입가를 움질움질 웃을락 말락 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사람을 내게 붙여 내가 이 신전에 있는 걸 정확히 알았든지, 애초에 경은 정말로 우연히 여기서 나를 만났고, 따라서 본디 하고 싶었던 말이 없었든지, 있었어도 그런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든지.”
“…….”
“경이 내게 한 경고는 여느 가벼운 충고와는 무게가 다르다는 걸 알아. 그런 말을 하려면 각오도 필요하고, 내가 그 위험한 말을 폐하께 일러바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필요하다는 것 역시 아네. 하여 나도 어느 정도 솔직히 말하고자 해.”
“…….”
“경의 행보가 내게는 몹시 수상하게 비쳐지네.”
나는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이 자리에서 시드니를 발리앙과 관련된 일에서 제외하기를 원했다.
내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진정 나를 돕기 위함인지, 아니면 다른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그가 물러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그냥, 아, 모르겠다. 쥰과 발리앙의 일을 생각하기에 벅찼다. 남의 안전을 생각할 여유가 지금 당장은 없어. 아무리 시드니라도, 아무리 포르타라도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나, 그럼에도, 진심이 다량 섞인 모진 말을 늘어놓는 건, 이런 말로라도 물러나주면 좋겠다는 이유였다.
“한 가지, 단적인 예를 들어보지. 경은 필르 발리앙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내게 해 주더니, 이제는 그녀와 혼인을 목표하고 있네.”
“…….”
“경이 무얼 원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녀와 관련된 어떠한 일에 나를 이용하려 했던 거라는 생각도 드네. 굉장히, 불쾌하고, 경을 경계하게 하는 생각이기도 하지.”
도대체 몇 살까지 살다가 시간을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도록 살다 와서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에 대한 우정 같은 건 전부 잊었을 수도 있었다.
……이것 봐. 시드니가 쥰을 어떻게 토벌 작전에서 제외했는지, 어떻게 아버지를 구하려 했는지, 다 들었으면서도 그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기에 그리 했는지 의심하는 이 꼴을 봐. 이 꼴이 온당한 이 자리에 앉아서, 소중한 동생이 죽을 것처럼 누워 있음에도 정치를 하려 하는 나를 봐.
“여기까지 나를 어떤 경로로 보러 왔는지, 본디 내게 하려던 말이 있다면 그 말이야말로 무엇인지 말해줄 게 아니면 지금 여기서 우리가 대화를 지속할 이유가 없네.”
“…….”
“말 할 건가.”
“…….”
“그럴 줄 알았네. 이 무례는 기억해두지.”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를 지나쳤다. 우리는 남들 눈이 있는 곳에서건 없는 곳에서건 참 멀다. 그를 지나치며 목부터 귀까지 오르기 시작한 예민한 열이 나를 덥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문에 다 왔을 즈음,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춰 서서 왼 발을 구십 도 정도 뒤로 빼어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신전이 마음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라 여겼던 분이
그냥 지나치는 말로 여긴 줄 알았더니 이제 와 떠오를 것은 무언가. 내 마음 속에 나도 모르는 새 걸려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그가 말했던 그 사람. 이 신전이 마음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라 여겼다 하는 그 사람.
-마음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습니다.
우리, 이 신전에서 조금 전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바.
아득해졌다.
아마……, 아마도, 산책 이야기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전후 대화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산책이었던 것 같다. 그래, 그것이다. 시드니가 라이네 저택에 들러 내 행방을 물었고, 사용인들이 대답하기를 산책을 가셨다 했고, 그래, 거기서 신전을 떠올렸다고.
그렇군. 이 신전이었다…….
내가 뒤돌기 전부터 이미 나를 보고 있던 시드니를 보다가 떨리는 숨을 쉬었다.
“…….”
전과 같은 말을 하지 않고도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굳이 입에 담은 건, 대신관의 이름을 물은 것과 같은 취지일까. 아니면 무심코 한 말일까. 후자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선택지에 넣고 만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조금 더 왼 편으로 돌려, 오래 전 나와 그가 서 있던, 연단 바로 앞, 이 복도의맨 앞을 보았다. 우리는 저 곳에 서 있었다.
왼 발을 조금 더 뒤로 뺐다. 몸의 정면이 벽을 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던 직전보다는, 비스듬하지만 훨씬 시드니 있는 쪽을 향해 돌아갔다. 나는 그 상태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망설임이었다. 어쩌면 이 질문에 한해서만 마지막 남은 이성 찌꺼기가 나를 망설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써늘하게 경고하고 지나친 내가 설마 돌아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시드니. 그럼에도 나를 보고 있던 나의 옛 친구. 친구. 나의 편안함이었던 친구여.
나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 작은 호흡마저 꿈결에 섞여드는 듯 하였다.
“……하려던 말은 내 안위에 대한 질문이었나, 혹시.”
아니라 하더라도 민망치는 않을 것이다.
나와 얽혀있던 그의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아마도 내 코, 입 부근이다. 끄덕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한 것도 아니고. 긍정일까, 부정일까. 그를 지켜보는 나는 차마 미소도 짓지 못했다. 그나마 일어났던 힘도 이제 전부 사라진 탓이다.
“경. 만일 그런 거라면, 우리가 안부인사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낯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염려도 그렇지. 정도를 지나치지 않은 염려라면 괜찮아.”
이번 시간에서 우리는 전처럼 막역지우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친구, 약간 거리감이 있는 친구 정도로는 지내왔다. 그 정도 안부인사는 괜찮다. 그런데도 왜 이리 어렵나. 우리는 왜 이리 서로에게 조심스러워.
아,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군데군데 지펴진 촛불로만 밝혀진 이 넓은 기도실이 지나치게 버거웠다. 달도 뜨지 않았던 하늘, 그 어둠에 잠긴 이곳에서 둘만 있는 게 버겁다. 나는 피곤을 숨기지 않고 흐리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폐하에 대해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경고해준 것, 고맙네.”
그는 내가 그를 황제에게 고발할 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음에도 내게 경고해주었다. 감사는 온당했다. 내 시선은 다시 한 번 예전의 나와 그가 서 있던 곳에 잠간 향했다가, 몸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완전히 건물을 나왔다.
다음날 오전, 나는 감사하게도 황제를 다시 한 번 알현할 수 있었다.
알현이 다른 귀족에 비하여 자유하게 이루어지는 건 큰 행운이다.
알드리히의 집무실에 입실한 나는, 작전을 다녀온 쥰의 몸에 침을 맞은 자국이 있고 실제로 독에 중독되어 쓰러져 있음을 고하고, 작전과 관련하여 해명을 요청하였다. 그 정도는 당연한 권리였다. 쥰은 황제의 서임을 받은 기사이지만, 현재로서는 라이네 공작인 나와 가장 가까운 혈육이기도 하였다.
뿌리는 현실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들의 입이 소문의 출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 라이네가 당했던 것처럼.
묵묵히 듣고 있던 알드리히는 내 말이 끝나자 슬며시 묘한 웃음을 짓고 응답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중독되었습니다.”
나는 케이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왼 손을 말아 주먹 쥐었다. 침이 목을 넘어가다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어제 시드니가 경고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겠지. 그의 경고를 듣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걸 그는 몰랐을 터다.
성벽에 가기 전, 미로 골목에 들러 들었던 것. 별 것이라면 별 것이고, 별 것이 아니라면 별 것이 아닌 것. 알드리히가 찾아왔던 새벽에 시드니가 미로골목에 잠입하여 했던 일에 대해서였다.
내가 찾아와 목숨을 구걸하였던 괴수의 무리 중, 내게 독침을 놓았던 자들과 그 외 몇이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괴한들이 그를 찾아와 목에 칼을 겨누고, 그의 무리에 있는 자들 중 독을 써서 사람을 암살하는 자들의 행방을 특별히 물었고, 그는 당연하게 팔아넘겼다.
나는 그가 분해하며 이가는 그 고백을 들으며, 나 당했던 부위와 비슷한 곳에 침이 찔려 있는 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어쩌면 쥰에게 독을 주입한 게 시드니일 수도 있겠고, 알드리히일 수도 있겠다고, 그리 짐작을 하였다. 또한, 만일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쥰의 동의하에 진행한 일일 수도 있겠다고, 그런 짐작도 함께 하였던 바…….
알드리히의 얼굴을 똑바로 향하고 있던 눈길이 추락했다.
“……폐하. 사전에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네요.”
“쥰이, ‘그날’ 새벽에 외출하였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도박이었다.
시드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용하느냐. 믿지 않느냐. 쥰의 외출을 나도 몰랐고, 보고를 들은 것도 없었다. 우리 가문 내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함은 사실 여부를 확정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함과 동위 명제였다.
새벽의 긴 고민을 거쳐, 나는 믿는 편을 택했다. 미친 짓이었다. 시드니를 웬만해서는 드러내지 않으려 하니 정말이지 미친 짓.
그러나 역시 그는 사실을 말했던 모양이었다. 알드리히가 침묵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읽어낼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유도하였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날 폐하의 기사들은 따로 시중드는 사람 없이 응접실에 따로 모여 있었고, 쥰의 방을 특정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날 지나치게 자극적인 주제들로 대화를 이끄셨고 그것은 제 주의를 흐트러뜨릴 목적으로 쓸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런, 누이. 말, 조심해요. 누가 들을라.”
*
긴 알현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가엘과 할리를 세우고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 힘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어찌 이토록 무겁나. 팔걸이에 늘어져 있는 두 팔도 좀처럼 가누지를 못했다. 의자를 옆으로 돌려 가만히 앞만 보고 있자니, 눈앞은 뿌옇게 되었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였다.
분명 이 의자에 앉기 전까지는 멀쩡하게 걸어왔던 것 같은데.
내가 마치 잿더미로 변해 가는 것만 같았다. 산들바람에도 흩날릴 것 같은 검은 재. 쥰이 쓰러진 이후에도 멀쩡히 서서 일을 하나하나 정리해 갔던 내가 나를 모두 소진한 것 같다.
알현을 다녀온 예복 차림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불편하게 눌려있는 머리 묶은 부분에 턱하고 오른 손을 올렸다. 고개를 살짝 앞으로 하고 리본을 풀자 머리칼이 떨어졌다. 나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머리를 다시 등받이에 댔다. 손이 떨어져 팔꿈치 아래의 팔뚝이 팔걸이 모서리에 부딪혔다.
아팠다.
아프긴 아픈데, 그 통증이 흐렸다. 오래도록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라이네가…….”
나, 깨어있는 것은 맞나.
부석부석하게 말라서 부서져 떨어지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물기도 없었다. 점점 낮아지고 흐너졌다. 정신을 깨우고자 눈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깼다.
현실이었다.
“……오래 전 한 번, 공국으로 독립할 기회가 생긴 적이 있었는데.”
“…….”
“그런 가문이 이토록 쉬이 다루어도 되는 가문은 아니지.”
그때도 그러했다. 내 몸이 건강하여 저택 안에서 버틸 수만 있었다면 다른 가문들에 의하여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혐의가 풀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 풀리기에 몹시 어려웠을 테지만. 하여 내 죽음과 라이네의 무너짐은 어느 정도는 시간의 문제였다. 또한 어느 정도는 알력 싸움의 문제였으며, 또한 어느 정도는 정도가 없이 내달린 자가 존재한다는 문제였다.
내 무능은 따로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에 모두 대비하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게 내 마땅히 할 일이었으므로.
내가 바비에르를 무너뜨린 것처럼 그렇게 쉽게는 무너뜨리지 못할 이 라이네를, 르네가 무너뜨릴 수 있었던 건, 그가 정도를 모르고 일을 진행한 덕분이었다. 내가 다른 가문 무너뜨리는 방법을 몰라서 못 무너뜨리는 게 아니었다. 다른 가주들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가문들이 어지간하면 함께 존립해야 함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느 가문 하나가 무너지는 걸 서로 쉬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가 무너지면 힘의 분배를 다시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고단하고 험난한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가문이 나타나면, 그 외의 가문들은 격렬하게 반감을 가질 터.
물론, 현상유지만 하면 고인 물이 썩어갈 수도 있다. 데스챔프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권력과 명예를 작금보다 더 얻기 위하여 반역에 슬그머니 손을 뻗는 데스챔프의 경우가.
그들도, 시간만 있었다면 전복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라이네 공작이 무너지는 걸 데스챔프와 페레즈가 은근슬쩍 지원하였었고, 그리하여 라이네 공작이 무너졌었다. 나만큼 드러내놓고 황제에게 호의를 보인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 아무도 없던 그때, 나를 쳐내면 알드리히의 큰 기반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우리 둘, 애초에 친구가 되었던 것은, 나의 아버지와 선황의 합의 하에 교류를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던 바.
내가 시드니와 베르덴과, 혹은 베르덴과 헤르조와 교류 시작하였던 것과 이유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알드리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반발을 반드시 살 일을 어찌하여 유도하였나.
유도한 것을, 어찌하여 내게 토설하였나.
그 답지 않다.
참, 답지 않아.
팔걸이 밖으로 비껴나간 손끝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듯 움직였다. 나는 그 움직임을 느끼다가 손을 말았다.
“쥰은. 어떻다던가.”
“삼십여 분 전 확인한 바로는 회복 가능하리라 확답 받았습니다.”
그에 느린 숨을 들이켜자 어깨가 올라왔다.
뜨뜻하게 데워진 숨이 흩어졌다. 한 줌, 긴장이 끊어졌다. 방금 눈 깜박임의 끝에 다시 눈앞이 희게 번졌다. 몇 번을 다시 천천히 깜박이자 도로 시야가 닦였다. 말았던 손을 놓쳤다. 손가락이 펴져 늘어졌다.
굳이 되 말지 않았다. 나는 늘어진 손끝에 몰리는 감각을 느끼다가 입을 열었다.
“후유증은.”
“신관의 말로는 다리로 흘러들어간 게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합니다.”
“……팔이 아니라?”
“예. 다리로.”
“…….”
팔, 다리 어느 쪽이든 문제가 생기면 무술 연마한 사람으로서는 치명적이다. 뒷목이 뻐근해져왔다. 가슴에 답답하게 더위가 차올랐다. 입술을 옴질옴질 움직이다가 굵은 한숨을 토해냈다.
쥰에게 드는 분노는 일어나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한다.
한 마디. 한 마디라도 내게 상의를 했어야지.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 위협은 잘도 받아들였으면서, 내가 잘 주도해가고 있던 상황은 보이지를 않더냐. 쥰. 어찌 상황을 이 지경을 만들어. 네 몸을 왜, 이렇게 섣부르게 버려…….
-누나는 내 전부입니다.
-절 놓지 마세요.
우리 서로 누가 누굴 놓는다면, 그건 네가 나를 놓은 어제의 일이구나, 쥰. 내 눈꺼풀이 내려갔다. 홍채와 동공이 완전히 가려졌다.
이건, 황제가 말한 것처럼, 쥰이 내게 만들어준 기회 같은 게 아니었다. 긴 시간 지속되었던 알현 중에 있었던 대화를 곱씹다가 입 꼬리만 올려 알드리히와 나를 향한 비웃음을 보냈다.
나는 그가 스스로 희생하여 만든 이번 일을 어떠한 기회로도 삼지 않을 것이다. 오기는 아니었다. 이용해야 한다면 돌아가신 내 부친, 모친의 명예도 이용하였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오기를 부리랴. 이번 일은 황제가 황제의 일을 위하여 내 동생을 저리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일에 나도 한 손 보태고 하나의 이득이라도 얻을 일, 결코 없으리.
“가엘경은……, 앞으로 데스챔프를 살핌에 있어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일세. 어쩌면 황제의 기사들이 그들을 살피고 있을 수도 있겠어.”
“받듭니다.”
가물어가는 음성이 끝나자 중년의 기사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할리경은. 따로 보고할 것 있나.”
“발리앙 후작에게서 오늘 내로 방문하고자 한다는 은밀한 급신이 왔습니다.”
베르덴에게서.
내가 어제 기요트 변경 백작에게 일부러 흘렸던 말도 있고, 쥰의 일에 대해 따로 입 다물라 관리하지 않았으니 말이 흘러나갈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오늘 황제도 만나고 왔고. 발리앙이 혹 쥰의 일에 대해 무언가를 들었다 하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쥰의 일로 나를 방문할 이유가 있나, 그 사람이……?
설마 저희 쌍둥이가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손을 세웠다. 팔꿈치가 뾰족하게 팔걸이를 내리눌렀다. 허리를 옆으로 구부리자, 쩍쩍 벌린 차가운 손에 머리카락이 휘감겼다. 손바닥 뿌리 일부에 관자놀이의 살갗이 닿았다.
달아오른 온기에 싸늘하게 식은 손이 녹는다. 그저 내리 감았던 눈이 이제는 노곤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감은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정하고 말했다.
“만나겠다고 답신을 보내.”
“예.”
“이외에는.”
“없습니다.”
“다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보고하고.”
“그리하겠습니다.”
할리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몇 차례 끊어져 났다. 인사다. 소리를 가늠해보다가, 그들에게서 신경을 거두었다.
내가 눈을 뜨고 고개를 바로 한 건 문이 닫힌 후였다.
뒤통수가 등받이에 닿았다. 세워져 있던 손은 또 다시 팔걸이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건조하게 마른 눈을 느리게 떴다 감기를 서너 번, 나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눈꺼풀을 떨어뜨렸다. 파르르 떨며 내려앉은 그것에 힘을 주어 더 지그시 감았다.
흐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루 이틀 새 많은 일이 있었다.
의연하게 잘 서서, 만날 사람을 만나고, 싸워야 할 것들과 싸우고, 주장해야 할 것들은 주장하고, 맞서야 할 사람에 맞선 후에 지내고 있는 이 시간.
아직도 햇빛 아름답게 내리는 정오.
저녁에나 느낄 법한 상당한 피로에 잠겨서,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제와 나눈 날선 대화들을 잠시 되감아 보다가, 알드리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짧게 입 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필르 발리앙을 만날 시간입니다.
그 회상 중, 어느 순간 잠에 들은 모양이었다. 잠결에 할리의 부름을 들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몹시도 무거웠다. 쌓인 피로의 무게인가. 쓰러진 쥰의 모습을 보고도 유지해야 했던 평정의 이면에서 잠잠하도록 억눌렀던 충격의 무게일 지도 모른다.
나의 기사가 말했다.
“발리앙 후작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발리앙 후작이 누구더라.
“각하.”
각하, 라 함은 나를 부르는 건가.
“각,”
부름은 도중에 부러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거칠었다. 아, 알겠다.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 나는 살아 있으며, 이 방의 문이 열렸다. 얼마 있지 않아 내 몸이 흔들렸다. 각하. 각하! 눈 뜨지 않았다.
“누님. 제발…….”
시간이 지나 애절한 간구가 언젠가 들렸다. 몸을 옥죄는 그 음성에,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악을 질렀다.
“살았어?”
“……누, 님.”
“살았어?”
발버둥을 치며 발악도 하였다. 파들파들 떨며 허공에서 파닥거리는 손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나는 그에 더 발악하며 외쳤다.
“살았구나…….”
하면 나도 아직 숨 쉴 수 있겠다. 다행이야. ‘우리,’ 살 수 있으리.
============================ 작품 후기 ============================
이번편 참고는 에본느 외전입니다.
챕터9 끝입니다.
다음은 알드리히 외전입니다. 자정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