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11화 (111/157)

00111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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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기가 힘들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손은 모으지 않았다. 당장 기도할 생각은 아니었다. 먼저 숨부터 고르고, 먼저 마음부터 추스르고,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이 피로부터 먼저 풀고. 짧은 휴식이었다.

저택에서는 쉬어도 결국에는 쉬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수백 명은 너끈히 수용 가능할 만큼 넓은 중앙 기도실 안에 나 홀로 앉아서, 식은 몸에 식은 공기를 맞으며 조용히 숨 쉬었다.

얼마나 길어진 호흡이었을까. 나는 스르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나였나.”

“예.”

클레멘트가 잔잔히 대답했다.

……그래. 그렇군. 정말 나였다.

쥰은 쓰러져 있고, 나는 이 수도의 성스러운 보호마저 흔들 정도로 정신이 나갔었던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그대로 멈추었다. 부푼 가슴과 복부를 유지하다가 입을 열고 조금씩 흘렸다.

“이제는 겁이 나는군. 나는 평생 흔들려서는 아니 되나 하여.”

“아닙니다.”

연단 구석의 문 가까이에 있던 대신관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부정했다. 촛불 몇 개가 흔들린다.

“에녹의 검으로 돌아오신 분이 역사상 각하 한 분만 계신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그분들 평생에 한 번도 불안정했던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

“각하의 경우가 특이하여 이레님의 수호와 연결된 것이고, 인간이 살아가며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이레님이 모르실 리가 없음에도 이리 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에녹의 검과 관련하여 나와 하였던 대화를 다 잊는다 하더니,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잊는다 하였으니 잊었었을 것을 믿는다. 신을 믿기에 그의 종인 신관들을 믿는다. 내가 수하들을 믿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믿음이었다. 나와 대화를 하는 이가 잠시 대신관의 몸을 빌린 신의 영일지는 또 누가 아나.

시간도 되돌아 온 마당에 그 무어라고 실행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신께.

나는 턱을 들고 연단 벽, 높은 곳에 걸린 이레의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물었다.

“내 경우가 특이하다는 건 내 손으로 죽지 않았던 일을 말하는 건가?”

“예. 따라서 성스러운 보호가 흔들리는 건 결코 각하의 탓이 아닙니다.”

“그대, 시드니경의 탓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리네.”

그를 보지 않고 무덤덤하게 한 말에 신관은 작게 웃었다.

“각하는 에녹의 검을 쓴 마법사들 중 가장 준비가 덜 된, 가장 마음이 여린 분이십니다. 각하께서 다시 살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지요. 각하께서 이곳으로 돌아오길 원했던 분은 당사자인 각하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드니였다.

“선택을 하신 분은 그분이고, 예, 하여 이건 각하의 탓이 아닙니다. 그분의 탓입니다.”

“……이리 될 걸 그가 알았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걸세. ‘탓’이라 하지 말게.”

“각하께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으시기에 하시는 말씀이지만, 저는 그분의 생각을 알기에 ‘탓’이라 하였습니다.”

내 앞에 있는 자는 대신관이되 대신관이 아니다.

나는 은연중에 그리 느꼈다. 문장에서 눈을 내려 클레멘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짓고 있는 미소 덕분인지, 이런 대화마저 힘겨운 내 깊은 피로 때문인지,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연한 억울함, 막연한 슬픔이 화닥닥 올라오더라.

신의 속성에는 내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미래에 틀린 길을 반드시 선택할 것을 알고 있어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그 사람이 그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결국에는 틀린 길을 선택한 그 사람에 슬퍼하면서 징계하는 것 같은.

전지전능과, 인내와, 기다림과, 사랑과, 공의였다.

시드니의 ‘탓’이라 할 거라면, 되돌아오는 일을 처음부터 막아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

내 입 꼬리가 연하게 올라갔다.

그랬다면 쥰이 쓰러지는 일, 없었을 텐데. 생지옥 같은 이런 눈물에 잠길 일도 없었을 텐데. 눈물 흘리지도 못하는 이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얼굴이 뜨거워졌다. 끓는다. 더웠다. 싸늘한 두 손을 들어 온 얼굴을 덮고 꾹 눌렀다. 그 냉기에 좀 정신이 차려지면 좋겠는데, 외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갑갑하게 막히기 시작했다. 죽겠군. 돌아버리겠다. 즉시 손을 떼고 고개를 젖혔다.

뒷목이 접히며 벌어진 입으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천정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숨과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이 대화, 잊을 건가?”

“예.”

“내가 어찌하면 되겠나.”

“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어찌해야 오드리나의 보호가 흔들리지 않겠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야 없다.

눈꺼풀을 열고, 고개를 내려 바로 했다. 모른다 하지는 않았으니 방법을 알 터. 그러나 말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를 들들 볶아가며 답을 얻어낼 정도로, 오드리나의 수호에 대해 절박하지는 않았다.

이미 흔들렸다 하는 일들과 나의 관련성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까봐 염려가 될 뿐.

바람에 어딘가의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숨을 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대,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좋겠네.”

그러자 신관은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하겠습니다.”

나누고픈 대화는 더 없다. 감길 듯 아니 감길 듯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눈을 다시 완전히 감았다.

내 곁에서 대신관이 물러나는 기척을 곧 잊고, 잠잠히 호흡했다. 아찔한 느낌이 들 때마다 눈을 떠 시야와 두통을 정돈하고 도로 감았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은 오로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어둠이었고, 머릿속도 그러했다.

“…….”

그러다, 글쎄, 얼마나 지났을까. 오싹한 기분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귓가에서 공기가 손톱 정도만한 크기로 작게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겨울의 찬 공기에 서늘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의 기척이나 시선에 의해 느끼는 서늘함. 그리고 사람에게 묻어 온 바깥바람의 냉기.

사람이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내가 느끼지 못한. 경계할 만 하다.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누구냐.”

혹 살기를 발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객이라면, 이렇다 할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어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자가 대답했다.

“포르타입니다.”

……포르타?

시드니?

일어나며 절로 숙여졌던 허리를 세우고, 다리도 펴서 완전히 바로 섰다. 뒤를 돌아보자, 의자들 사이로 길게 나 있는 복도 같은 길, 내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가까스로 농을 했다.

“기척을 내지 않으면 내가 놀라잖은가.”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늦은 사과는커녕 입술 달싹거림도 없었다.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시드니가 굳이 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며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거 민망해 해야 하는 상황인가. 나는 쥰이 쓰러진 이후 처음으로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미안. 소리 냈었나?”

“죄송합니다. 충분히 크게 내지 않았습니다.”

‘크게 내지 않았던 모양이다’도 아니고, ‘크게 내지 않았다’는 단정이었다. 내게 민망한 상황을 제 탓으로 깔끔하게 돌려버리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힘주어 올리고 있던 입 꼬리가 자꾸 내려가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두었다. 왼 손을 올려 이마를 옆으로 쓸어내린 후 나는 내게 족한 무표정이었다. 의자의 앞에서 몇 걸음 옆으로 벗어났다. 그는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묘한 정적이다.

그러나 내 휴식이 끝났다는 것은 명백했다. 오늘 여기에서 기도하기는 글렀다. 우리 사이는 전과 달라서, 그가 있어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쉬는 건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가 있기에 더 편안해질 수 있던 것도, 가능하지 않다.

나는 풀어 헤쳤던 코트 양 자락을 여미는 척 모으고 손을 떼었다. 조금 전보다야 훨씬 단정한 선을 그리는 앞자락이, 코트 안의 셔츠를 약간 내보이며 흔들렸다. 시간이 늦었다. 누구 시드니를 따라온 사람이라도 있으면 귀찮아진다. 그와 신전에서 밀회한다는 의심이라도 당한다면.

단지, 어째서 이 밤중에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시드니는 예전에는 굳이 신전을 찾아올 정도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물어야 할 정도로 의문이 깊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말을 골랐다.

“오늘, 이 아니군, 어제는 수고하셨네.”

그 치하는 주머니에서 쑤셔 넣어 놓았던 장갑을 꺼내며 하였다.

입 꼬리를 올려 웃음을 보였다 지우고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정말, 좋았을 것이다.

“라이네경에 대해 보고 받았습니다.”

그의 팔 옆, 내가 갈 길만을 향하고 있던 눈길이 그에게 돌아갔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기를 원했다. 내가 차라리 직접 황제에게 물을 테니. 그러나 시드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덤덤한 목소리로 쥰을 말했다.

눈알을 덮고 있는 눈꺼풀 끄트머리, 눈동자 가장자리에 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시야가 한결 선명해졌다. 내가 해야 할 말도 함께 선연하다. 나는 미소 없이 냉랭하게 받아쳤다.

“염려해주는 거라면 고맙게 받지. 수습하느라 그렇잖아도 분주할 텐데, 기도하러 왔으면 기도하게. 나는 이만 가겠네.”

“여쭙지 않으십니까.”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팽팽히 당겨졌던 턱 근육이 풀릴 때 바르르 떨렸다.

“무얼.”

“…….”

“물으면 경은 대답이 가능하나.”

“…….”

“경. 쥰이 쓰러지자마자 폐하께 달려갈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건, 알현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폐하께 능히 정보에 대한 윤허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였네. 우선순위가 그렇지. 경에게 달려가는 게 아니라 폐하께 달려가야 해. 경은 내가 물어도 폐하의 허락이 없이는 대답을 못하거든.”

“…….”

“헌데 내가 무얼 경에게 물어야 하나. 아무 것도 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무얼…….”

나는 내가 그를 봐왔던 중, 지금 이 순간만큼 철저히 타인 보듯 그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정이든, 미련이든, 걱정이든, 그를 향해 남아있던 감정이 항상 그를 내 친구, 혹은 옛 친구로 보게 해 왔었으나, 지금만큼은 그토록 차가울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까 성벽에 가기 전 들렀던 미로 골목에서 한 대화 때문일 것이다. 성벽 앞, 피에 젖은 시드니를 볼 때 그를 향한 내 시선이 이미 침통하고 비참했다.

아하, 맞아. 맞다. 그랬다. 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방금 한 말은 조금도 포장하지 않은 날 것에 가까웠다. 지나쳐.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다면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터.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되뇌던 건 다 어디 갔나. 나는 손끝으로 이마를 꾹 누르고 있다가, 그를 보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말이 험하게 나갔군.”

“…….”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보세.”

“사적인 대화를 청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프다.

눈머리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건조하게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 신전을 찾아온 게 날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말을 듣고, 내 어찌 반응해야 하나. 받아치는 공격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이 신전에 있는 건 어찌 알고.”

잘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사람을 붙여둔 거라면, 그 사람은 나와 내 기사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다. 그러나 붙여놓은 사람이 그런 실력자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내게 사람을 붙였다는 말을 쉬이 토설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토설한 것과 마찬가지인 말을 하긴 하였으나.

오드리나에 있는 십여 개의 신전 중, 이곳만을 특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신전은 라이네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신전도 아니고.

그러나 시드니는 동요치 않은 음성으로 덤덤히 대답했다.

“이 신전이 마음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라 여겼던 분이 계셨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 여기면 다른 사라…….”

말을 도중에 그만두었다. 그를 마주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내 소모되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지친다.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하여 용건은. 무엇인가.”

“얼마 전 폐하께서 라이네 저택을 왕림하셨던 날, 그날 그 시, 라이네경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목소리 자체는 나직한데, 기도실을 왕왕 울리는 바람에 크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오른 편을 보다가 입을 벌렸다. 앓는 소리가 내 의지를 거스르고 새어나왔다. 눈을 가렸다.

알드리히가 찾아온 날의 새벽, 알드리히는 분명 시드니가 미로골목을 쓸어버리는 중이라고 했었다. 나중에 알아본 바로, 그 말은 절반쯤 사실이었고.

그런데 쥰이 그 새벽에 어딜 가……?

당시 방에서 자고 있었을 아이가 갑자기 왜 이 주제에서 튀어 나와. 도대체 언제 저택을 나가서.

시드니는 내가 미로골목의 일을 안다는 걸 모를 테니 신중히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을 시드니에게 전해도 되겠느냐 물었던 알드리히의 말도 떠올라서 갈팡질팡한다. 이미 흘려버린 신음을 생각하다가 짧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 라이네경 관련하여 말씀 여쭈실 때 부디 조심하십시오.”

잠깐 그의 목 즈음까지 내려갔던 내 시선이 홱 올라갔다.

방금 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질문을 조심히 하라 하는 충고, 괜찮다. 계급차가 계급차인지라 무례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충고다.

그러나 그 충고가 쥰과 알드리히와의 연결고리 같은 것을 말해준 직후라면, 느낌이 달라질 밖에.

나에게 알드리히를 경계하라 말하는 게 아닌가. 감히 황제를. 저 충성스러운 기사가. 불현듯 멈췄던 숨이 터지며 입을 뻐끔거리다 천천히 신음처럼 그를 불렀다.

“경.”

-재미있는 것 말해줄까?

물기 없이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다.

앓는 소리처럼 목소리마저도 조절치 못했다. 혹은, 조절치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를 부르고 망설였지만 기어이 묻고야 말았다.

“폐하를 믿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나한테 충성 안 해.

알드리히와 나누었던 대화가 나를 이제 와서 섬뜩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알드리히가 했던 말로 가득 차서 버겁다.

시린 피로가 말라붙은 눈을 끔벅거리지도 못했다. 눈썹을 찌푸리다가 멈추고, 찌푸리다가 멈추고. 내 이성은 지금, 온전한가. 여덟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시드니를 보던 나는 어느 순간 꿈꾸는 것처럼 머리가 흐려졌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시드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

“…….”

그는 기막힌 것을 보았을 때처럼, 혹은 말하려던 게 얼마나 기막힌 건지 스스로 깨달았을 때처럼, 입을 닫고 눈을 닫았다. 겉옷 옆에 늘어져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려다가 마는 게 보였다.

손까지 내려갔던 시선을 올리자, 도로 뜨여 있던 깊은 밤에 내가 담겼다. 그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저를 믿으시는 만큼 믿습니다.”

“그래…….”

나는 납득한 체, 이해한 체 하며 입 꼬리를 올렸다. 가늘어진 눈앞이 번졌다.

-내게는 내 형제만큼이나 위험한 사람이야.

시드니는 알드리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까. 알고서도 저런 말을 하나. 그러나 모른다면, 알드리히를 경계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가 실각하길 원하니까.

알겠다. 저 두 사람은 이미 갈라섰다.

함께 움직일지언정 이미.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자정에 올렸다가 직후 삭제했던 편입니다. 그때 읽으신 독자님들께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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