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방금 작전에서 귀환한 기사를 또 쓰겠다고?”
괴물에 익숙한 기사단은 시드니 휘하 최정예 기사단 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반수로 나누어 작전을 다녀올 만큼 능한 기사들인 만큼, 이번 작전에 투입되지 않은 나머지 반만 외성 밖에 나가면 될 텐데.
도대체 수도에 접근 중인 괴물들이 얼마나 위협적이면 기사단 전부를 집결시키려 하나.
“돌아갔나.”
“아직입니다.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명령 받은 바가 없으니 각하께 왔습니다.”
아니면, 쥰이 중독된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걸 어떻게든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러 이런 명령을 내렸나.
눈가를 움찔 찌푸렸다 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본능적으로 가슴과 배, 바지를 더듬었으나, 어디에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도 괜찮았다. 밖은 죽도록 어두웠다. 나는 반쯤은 홀린 듯이 의자로 다가가, 넥타이와 쥐스토코르의 밑에서 코트를 빼냈다.
“경은 가서, 쥰의 상태를 말하고 복귀불가하다고 전해. 그리고 말을 준비해. 달려가게. 빨리.”
코트를 걸치며 하는 명령에 할리는 내 심중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그는 오른 발을 옆으로 움직여 좀 더 안정적으로 서고는 고개를 경련하듯 저었다.
“안 됩니다.”
“…….”
“수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게 벌써 두 번째입니다. 위험합니다. 안 됩니다, 각하.”
쥰이 쓰러진 걸 본 직후라 그런지 반응이 전에 없이 격하고. 무례하다.
나는 쥰을 본 이후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코트 안으로 베스트의 단추를 잠그며 다가간 베르제르에서 장갑도 집어 들었다. 리본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못 가도록 잡는답시고 내게 손댈 시, 그때부터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장갑을 끼고 가볍게 손목을 앞뒤로 돌렸다.
걸음을 옮겼다.
할리는 내가 저를 지나치기 직전 손을 말아 쥐었으나,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늦지 않게 가서 쥰에 대해 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저택을 나서기 전에 쥰의 방에 먼저 들렀다.
쥰을 보고 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돌아온 나를 보고 의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새 와 있는 마법사의 인사에 짧게 화답하는 동안 나는 미소 짓지 않았다. 신관은, 실은 대신관인 클레멘트는 쥰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기도하는 중이었다. 오드리나에 올라와 있었나.
슬쩍 주었던 눈길을 거두었다.
부러 내 외출을 말할 필요 없다. 아직까지 이들은 괴물들의 접근을 모르고 있다.
오드리나 가까이에 괴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수도의 성스러운 보호가 흔들렸다 하는 것뿐이다. 보호가 어째서 또 흔들렸는지는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전과 같다면, 그 흔들림은 또 나로 말미암은 것일 터.
그 짐작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은 없었다.
쥰이 저리 쓰러졌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나.
오드리나는 황제의 직할령과 같고, 이 수도에 사는 이들은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이들도 아니었다. 이 나라 전부를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이상론, 지극히 이상적이던 나의 막연한 목표 같은 건, 내 것이 아니게 된지 오래다.
나는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만을 지키면 되었다.
늙은 귀족들처럼 점점 닳아가는 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비스듬히 입 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수고하네. 쥰을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각하.”
“회복은. 가능하겠나.”
정확한 결과가 아직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가늠한 것만이라도 좋았다. 나는 조용히 의사와 마법사를 번갈아 보았고, 잠시 후 의사가 대답했다.
“아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숨 끝, 어딘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을 올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움직인 건 그 다음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
“살리게.”
침을 삼킨 두 사람이 내게 예를 갖추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쥰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것도, 하지 못했다.
*
전투는 격렬했다.
달도 보이지 않아 사방이 껌껌한 밤. 성벽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횃불들과 빛을 발하는 몇 개의 마법구에 의지하며 기사들은 생사를 걸었다.
나는 성벽 위에서 괴물들의 지옥을 내려다보았다. 모여드는 괴물들의 수가 꽤 많았다. 지금 내 눈이 닿는 땅 끝은 황무지이지만, 이 황무지만 넘어가면 곧바로 산이 있다. 그럼에도 수도의 보호 때문에 산에서 나오지를 못하던 괴물들인데.
어찌 되었든, 작전지에서 이제 막 귀환했던 기사들도 불러내야 할 만한 전투이긴 했다.
전황을 보며 묵묵히 그렇게 기다렸다. 때때로 묶지 않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지면 한 번씩 꾹 눌러서 가라앉혔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괴물의 시신 몇 개가 놓였다.
나는 여장 밖으로 내민 손을 폈다. 손아귀에 잡혀 있던 주머니가 떨어져 내렸다. 총 다섯 개. 흩어져도 상관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작은 주머니들이 괴물과 함께 발견되는 것뿐이다.
후에 발견이 되건 되지 않건 상관은 없었다.
할 일을 마친 후 나는 주변을 살피고 텔레포트 했다.
성벽 아래, 오드리나 안, 열린 문을 통해 바깥에서 뛰어다니는 기사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낡은 로브를 벗어서 없앴다. 그리고 적당히 틈을 봐서 사람들의 시야 안으로 들어간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차림에 격식이 없게 보일 수도 있고, 혹은 더 심하여 남루하게 보일 수도 있었으나, 이런 코트는 평민은 입지 않는 것이라 기사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나를 건들지 않았다.
일반 민간인들은 이미 이 주위를 떠나 있거나 조용히 건물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고요해야 하는 밤공기는 잠잠한 와중에 살기와 비명성만이 격렬했다.
“…….”
끼이익, 괴물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찢어졌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사람이 있었다.
“혹시 라이네 공작 각하십니까?”
멀찍이 서서 문 밖을 보고 있던 눈길을 돌렸다. 몸을 틀어 뒤를 보자, 과연 이런 곳에 올만한 사람이다. 나는 눈 깜박임과 함께 고개를 까닥였다.
“오랜만이군. 기요트 변경백.”
“이런 자리에 오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내 옆에 다가와 서는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상경해서까지 이런 자리에 오게 된 그대는 어떻고.”
“그렇지 않아도 내일 내려가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고 있습니다.”
천생 무인이면서도 정치에 능한 이 사람. 감정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옥에 갇히기 전 가졌던 마지막 대귀족 회의에서 나를 도왔던 바. 그것에 대해서는 고마우나, 이미 옛일 같은 미래의 일이라 지금 내가 감사를 표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여, 굳이 좋은 편 나쁜 편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쁜 편이어서. 떨떠름하다고 하는 게 차라리 옳은 표현일까.
그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두 청년을 일별하고 다시 성문을 보았다.
“해서,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오드리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벌써 두 번일세. 걱정이 되어서. 그대도 같은 이유로 여기에 온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현장은 위험하니 다른 가주들처럼 들어가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묘하게 말이 많다.
무례하다면 무례하고, 아니라 하면 아니다. 받아들이기 나름. 나는 부러 한숨을 흘렸다.
“내가 걸음 하는 곳을 일일이 그대에게 챙김 받아야 하나.”
“물론 아닙니다. 때가 때이고, 장소가 장소인지라 의아하여 이럽니다.”
“사촌아우가, 오늘 작전에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쓰러져 의식불명일세.”
횃불 하나가 떨어졌는지 불길이 확 일어났다. 괴물 시체에 기름이라도 발라져 있었는지 크게 타오른다. 급한 대로 대기 중이던 마법사 하나가 작은 물벼락 진을 연거푸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정말 기름 부어진 불이라면 저런 적은 물로 꺼질 리가 없다.
다른 시신으로 옮겨 붙지 않게 하는 게 지금 당장은 최선의 수일 터.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으로 뒷목을 문지르며 무덤덤하게 말하자, 저 불길에 닿아있던 시선이 나를 향한 게 느껴졌다. 강렬했다. 그러나 문 밖만을 보며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후에 기요트 변경 백작은 절도 있는 발음으로 내게 말했다.
“라이네경이 속한 기사단은 원칙적으로 폐하의 윤허 없이는 아무 것도 발설하지 못합니다.”
“아네.”
작전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시드니에게 물으러 왔다면 잘못 온 것이라는 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퍼질 것은 다 퍼지는 게 문제지만. 그들의 입이 아니었다면 예전에 킨들 라이네 산맥에서 쥰이 무표정이었네 어쨌네 하는 그런 말이 퍼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얼굴 위에서 불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밤이 깊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일별하고 다시 문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어떤 일을 하다가 그리 되었는지 보는 걸세.”
“…….”
그 말은 거짓이 반이었으며, 진심이 반이었다.
토벌 작전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본 바 이미 여러 번 있으며, 토벌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다만 이번 시간의 일이 아니라 이 변명이 통할 수 있다.
나는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 그가 달가웠기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불어 닥친 칼바람에, 여미지 않은 코트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머리칼도 뒤로 휘날렸다. 바람이 뭉텅이로 고여서 얼굴을 덮친 탓에 숨이 막혔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나는 왼손을 들어 귀 위의 머리를 눌렀다.
점점 살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간다.
내색할 수 없는 인지였다. 대외적으로 이 시간의 나는 살기를 능히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자리를 뜰까 잠시 고민하는데, 그간 조용히 있던 백작이 또 내게 말을 걸었다.
“성벽에 올라가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글쎄.”
아버지께서 요양으로 포장해주시긴 했으나, 그 ‘요양’한다는 기간에 내가 오드리나에 없던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우연이라도 반드시 한 번 이상은 피 튀기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고.
그런 처참한 상황에 질려했다면 그리 꾸준히 오드리나를 나갔을 리도 없다.
따라서 나는 적당히 고민하는 체 하다가, 적당히 고른 말로 제안을 넘겼다. 나와 그는 조용히 서서 성문을 통해 바깥 상황을 주시하고 가늠하다가, 전투가 완전히 종료되고도 조금 더 지나서 수습을 시작했을 때에야 몸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면, 지휘관인 시드니와 눈이 마주친 직후에.
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온 그에게 다가간 한 기사가 무어라 말을 했고, 그에 답하려 하는 것 같던 그와 우연히도 눈이 마주친 것이다. 시드니는 나를 보고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보았다.
굳이 와서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기요트 변경 백작도 손을 들어 그의 접근을 막았다.
지휘 체계상 이곳의 통제권은 시드니에게 있지만, 우리가 더 있으면 서로 약간 멋쩍어질 것이다. 나는 이만 자리를 떠야할 필요를 느꼈다. 충분히 보았다. 충분히 보고, 충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야겠군.”
“예. 일단은 마무리된 것 같고……. 이제 신관들이 바빠지겠습니다.”
“수 년 간격으로 벌써 두 번을 뚫렸으니 여러모로 심란하겠지, 그들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성한 보호였다.
대신관에 의하면, 지난번 오드리나의 수호가 흔들린 것은 나의 흔들림 때문이었으며, 어쩌면 오늘의 흔들림도 나 때문일지 모른다. 누군가가 어찌 건국 이래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수도의 수호가 흔들렸느냐 하며 이유를 묻는다면, 이유를 아는 대신관이 나를 토설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장이 답답하다.
신관의 입을 막을 생각은 감히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이며, 신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신관들에게 손을 뻗었다가 무슨 분노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차할 시에는 죽여야겠다는 이 모순적인 다짐.
입가를 움찔거리며 흐리게 비웃었다.
그리고 기요트 변경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서기 전, 백작이 기묘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시드니에게 눈을 주었다. 내가 쥰과 관련하여 시드니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이니, 어지간해서는 괜찮다.
그는 피가 튀어 있다 못해 흠뻑 젖어 있었다. 직접 움직이는 와중에 때때로 물러나 지휘도 해야 했을 기사의 행색이 저 정도이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자연스럽게 훑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내렸다.
흉갑조차 입지 않았나. 흐트러져 있는 차림은 제복이다. 이 강추위에 겉옷을 입지 않고 잘도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 망설이는 척 하다가, 훅 한숨을 쉬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백작은 나를 좇지 않았다.
나는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사이에 묶어두었던 말을 찾아, 어렵지 않게 올랐다. 사방이 어두워 속도를 내지는 못했으나,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말을 몰다 보니 어느새 저택에 다다랐다.
다시 만난 의사도, 신관도, 쥰의 회복에 대해 여전히 확답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던 오늘 분량의 업무를 보면서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던 나는 그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결국 신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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