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설마 작전에 나가 있는 쥰에게 저들의 손이 뻗어질까 했다. 동료 기사들과 함께 있는 데다, 약하지도 않으니 작전에서 건강하게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돌아온 후, 이 저택에서는 내가 안전하게 지켜 주리라, 생각했다.
쥰의 청혼이 쥰의 동의 없이 보낸 것이란 말이 나올까 하여, 쥰이 작전을 떠나기 나흘 전이면 마침 딱 좋다하는 계산도 모두 마치고 청혼서를 보냈었는데.
헌데 그 나흘은 저들에게 쥰을 죽이려 들 시간도 함께 주었던 모양이다.
그 나흘이 아니었더라도, 쥰이 오드리나를 떠나있던 시간 모두가 저들이 쥰을 죽이려 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있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던 생각 전부가 틀린 것. 내 실책이었다.
어떻게든 사람을 붙였어야 했나. 시드니에게 정신 나간 양해를 구해서라도 사람을 붙였어야 했나…….
위험한 골짜기까지 왔으면서도 판단이 물렀다.
나는 핀을 쥔 오른 손으로 왼 손의 장갑을 당겨 벗었다. 땀이 식어 미묘하게 축축한 손을 뻗으며 허리도 함께 굽혔다. 쥰의 이마에 닿았다. 마법사에게 줄 피를 뽑고 있던 의사가 멈칫했으나 이내 계속했다.
쥰에게서는 아직도 바깥 냄새가 났다. 황무지. 모래. 살기 끄트머리. 피. 쥰의 피.
“…….”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괴물들에게 접근하여 독을 건넨 것은 전적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도대체 어떻게 실력 좋은 최정예 기사들을 뚫고 암살자가 접근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 같은 독이라면.
그렇다면 어째서 쥰은 즉사하지 않았나.
“…….”
독을 주입 당하고도 즉사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나는 특이한 경우였다.
설마 쥰도 나처럼 독에 시달려왔다는 멍청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의사가 뽑아내는 피가 내 것처럼 검은 빛이 돌지 않는 것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내가 없는 편이 마음 편히 치료에 집중하기에 좋을 터.
방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 할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걷는 동안만이라도 비우길 바랐다. 꺼멓게 도말한 뇌리에 깜박하고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나를 보며 울던 쥰의 얼굴이다.
잠시 사라졌을 뿐이다. 내가 꺼내고자 하면 얼마든지 꺼낼 수 있어.
그래서 집무실에 들어서서 몇 걸음 걷다가 우뚝 서자마자 꺼냈다. 죽어가던 머리가 되살아났다.
책상에 가깝지도, 문에 가깝지도 않게 집무실 안 어딘가에 서서, 하얗게 식은 왼 손을 올려 허리를 짚었다. 잘게 흔들리는 숨만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게 아니었다.
왼 손의 장갑과 빗 핀을 쥔 오른 손도 다리 옆에 늘어져서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허리도 함께 숙였다. 오른 손을 뻗어, 잡히는 베르제르의 등받이에 올렸다. 손아귀 안에서 빗핀이 손바닥을 찔러댔다.
그러나 나는 의자를 지팡이 대신 삼아, 토할 것처럼 그렇게 몸을 굽히고 서서 바닥만 보았다. 붉은 케이프 일부가 앞으로 흘러내렸다. 눈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허리춤에 기대었던 손에 더, 더 힘이 들어갔다. 손 안에서 옷이 밀리고 뭉개졌다.
살의와 함께 살기가 폭발하고자 악을 지르는 것을 억누르고 억눌렀다. 구기고 밟았다. 뱃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라. 쓸모없다. 폭풍우 부는 바다, 그 파도, 그 분노.
식은땀이 피처럼 떨어졌다.
웃을 것처럼 이를 보이며 입 꼬리가 올라갔는데, 나는 그 안에서 이를 악물었다. 훅, 흐느끼는 숨이 터졌다. 흐느끼는 웃음이 터졌다.
마땅히 해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에 멀쩡한 낯, 멀쩡한 걸음으로 걸어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마땅히 해내야 하는 일이었지만, 오다가 주저앉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다.
몸이 떨리는 것은 그래도 이렇게 가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
온몸이 저리다. 잇새로 새는 숨이, 날뛰는 살기로 아직도 거칠었다. 그러나 진정시켜야 함을 잊은 적 없었다. 쥰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모든 걸 이성적으로 보고 듣고 묻고 처리한 후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책임지는 자는 매 순간 이성적이어야 했다.
자, 보라. 우선순위가 있다.
쥰의 일신보다는 라이네의 존립과 라이네의 미래가 앞선다. 따라서 나는 목하 냉철하게 생각해내야 할 것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나는, 멀쩡하다.
이미 웃는 모양이었던 입에서 이제는 흐느끼는 한숨이 허, 흐, 허, 새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대신하는 숨결이었다. 빠르게 진정되어 가는 것 같은데, 마른 눈이 금세 건조해졌다. 안압이 높아졌는지 눈알이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팔에 힘을 주고 의자를 밀어내며 몸을 세웠다.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안개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살의의 자리에, 오롯이 채워 넣어야 할 냉정이 한가득 기다리는 중이었다.
충격으로 질려 떨고 있는 양손은 아직 여전했다.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른쪽. 천장. 왼쪽. 바닥. 다시 왼쪽. 아래. 모서리. 벽. 정면. 검.
라이네의 검.
사로잡힌 듯, 혹은 나 스스로 옭아 매인 듯 그것을 응시했다. 저것을 뽑아 발리앙을 향해 휘두를 일이 과연 있으랴.
시선을 접었다. 하늘하늘, 숨이 떨어졌다.
나를 지탱해주었던 베르제르로 두 걸음 다가가, 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앉는 곳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오른 손의 장갑도 이참에 벗어 그 위로 던진 후 다른 베르제르에 앉았다.
아주 잠시 멍하게 앞을 보다가,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눈이 아프다. 피곤했다.
속이 답답했다. 호흡이 원활하지 않았다. 입을 벌려 몰아쉬듯 숨을 쉬다가, 결국에는 손을 들어 엄지로 가슴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리의 두피에 다닥다닥다닥다닥 소름이 돋는 것처럼 무언가가 곤두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밖에 서 있는 할리는 필시 내 살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좋은 기사였고, 아까 나는 한순간이라도 살기의 원천인 살의를 억누르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었던 바.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이 어떤 정도로라도 놀랐을 보좌를 다독여야겠다. 어차피, 보고도 들어야 한다.
쥰이 쓰러질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일에 바빠 킴을 내게 보냈었을 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양 팔꿈치를 양 다리에 대고 서로 느슨히 깍지 낀 손 위에 이마를 기댔다. 눈을 내려 감자, 말도 못할 정도의 시린 통증이 눈동자를 휘감았다. 진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심중은 점차 고요해졌다.
내게 쥰은 내 목숨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중요도인지라, 공적인 자리에서는 내보일 수 없는 애정이었다. 내 건강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네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듯, 라이네 공작의 생명은 라이네에 속한 그 어떤 생명보다도 중요하다.
동생 아닌 동생을 내 몸보다도 더 애지중지한다 하면, 아, 감정적인 통치를 하고자 할 때야 좋겠지. 저리 사랑이 많으신 가주도 있다고 영지민들이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생각들이 오드리나 내에서 다른 가주들에게 약점 잡히는 것들을 감수할 정도로 귀중하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영지민들을 책임지고 있으나 동시에 정치가였다.
자기 목숨도 때로는 가치 있는 패로 삼아, 칼날 세워진 길 위를 평생 평온하게 밟아 걸어가야 하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실오라기 같이 가는 약점이라도, 의도하여 내보이는 경우 이외에는 결코 보일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일. 쥰이 독에 맞아 쓰러진 일. 통제력을 잃을 일이 아니었다. 평생, 통제력 잃을 일이 없어야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수하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 된다. 집사를 잡아내던 날, 토사물에 젖었던 이불과 놀라 나를 잡아주던 할리를 떠올린 나는 애써 입 꼬리를 올렸다.
자아……. 이만 되었다. 이 정도면 남을 만날 만큼 정리되었어.
“들어오게.”
간단한 허락에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살며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는 감은 눈을 뜨지도, 기댄 이마를 떼지도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말해. 쥰에 대해 보고하려는 게 아닌가.”
“……귀환하였다는 인사를 드리러 각하께 올라가시던 중에, 계단에서 쓰러지셨다 합니다.”
“…….”
“어디 아파보이지는 않으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겨울비처럼 찬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에게 주입된 독이 내가 맞았던 독과 같다면, 쥰은 독을 맞은 자리에서 즉사해야 했네. 내가 아는 한 그 아이는 나나 아버지처럼 독을 견딜 다른 독을 체내에 가지지 못했어.”
“……그럼 독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 독이 아니거나. 다른 독이거나.”
이마를 손에서 뗐다가 투둑 두드리듯이 다시 기댔다.
“주입한 놈들도, 나 때와 같은 새끼들이거나. 아니면 그 새끼들을 흉내 낸 다른 무리의 새끼들이거나.”
거칠게 쓴 단어지만 내 스스로 죄악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종종 썼던 욕설이기도 했으며 그들은 아직 내게 인간 취급 받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다시 이마로 손을 두드렸다. 툭 튀어나온 왼 손 엄지의 뼈마디가 눈썹 사이에 몇 번이고 날카롭게 박혔다.
아직 할리에게는 미로골목의 세 괴수 중 하나가 내게 접근했던 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접근을 알아차린 다른 무리가 그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움직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접근을 다른 자들이 정말 알고 있다면 내가 몹시 곤란한 귀찮음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미로골목 내에서 세력 싸움이 일어난 걸까요?”
“아니, 그럴 여유 없을 걸세.”
시드니가 아무리 조용히 움직였다 하더라도 알음알음 말이 퍼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공통된 적이 생긴 이상 서로를 물어뜯고 지낼 시간은 없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예를 들면, 홀로 살아남으려고 대귀족에게 붙은 자가 나타났다든지.
“전자라면, 그럼. 의뢰를 받아서……?”
“지켜봐야겠지. 약하게 조제한 독을 썼든 강한 독을 썼든 독을 쓴 건 변하지 않아. 나와 진정 반목하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즉사를 시키는 편이 나았을 것이네.”
쥰의 목숨을 논하는 음성은 땅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처럼 가지 무성하게 창창했다. 흔들리지도 않고 매끄럽다.
의자들을 헤치고 기어이 내 옆에 다가와 선 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은,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그의 기묘한 침묵을 인지했다. 그렇지. 그러고 보면 수하들에게도, 사이좋은 남매로 보일 법한 정도 이상으로 애정을 표현한 적 없다.
아침 출근길을 배웅하고, 식사를 같이 하고, 수시로 얼굴을 보며 인사를 하고 받고, 티타임을 함께 하고. 그 정도야 ‘남매가 사이좋아 보기 좋다’는 감상에서 끝낼 수 있는 정도다. 이제는 이복 남매가 아니라 사촌 남매인 것이 알려졌고, 사촌임을 일찍이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쥰을 향해 보였던 우애를 근거로 쥰과 관련된 어떠한 결정에 대해서든 많은 분량의 의심을 피해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때도, 생각해야 할 때도, 나는 이 저택 내에서 쥰을 챙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낯으로 쥰의 죽음을 말하는 내 모습이 할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나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주군에게 충성한다 하여 주군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닐 터. 그리고 수하에게 일일이 이해를 바라는 자가 외려 이상한 자다. 이제부터 물을 것은 더더욱 이해를 바라지 못할 질문이며.
나는 다시 미간을 엄지의 뼈에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경.”
“예.”
“저 아이가 혹 스스로 중독 당했다면, 그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나.”
많은 것들을 가정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발리앙의 일에 한정해서가 아니었다.
쥰이 쓰러진 시점이 하 수상하여 어쩔 수 없다. 미친 언어처럼 들리는 이런 가정도 당연히 해야 했다.
할리가 작게 숨을 들이켠 직후 천천히 반문했다.
“도련님께서 스스로, 말씀이십니까?”
“혹시, 라고도 분명히 조건을 달았지. 두 번 말하게 말게.”
“……도련님께서 각하께 해를 끼치려 하였다는…….”
“아니, 그런 걸 말한 게 아니야.”
숨 막힐 정도로 맹목적이라 느꼈던 그 아이의 애정이다. 내 앞길을 방해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하는 아이가 내게 해를 끼치려 했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할리에게 물은 건 그 밖의 상황이었다.
나는 몹시도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은 할리를 느끼고 손의 아래에서 한숨을 쉬었다.
“경을 괴롭히려 물은 게 아닐세. 어려우면 굳이 생각할 것 없어.”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도 없고.”
간단히 만류한 뒤 다시 한 번 쉬었다. 수초 후 또 한 번. 한 번 더. 운동 직후 몰아쉬는 숨처럼. 실은 안정된 호흡임에도 불안정한 것처럼.
숨에 마음을 담아서 바깥에 풀어놓았다.
몸속에서 퍼내고 퍼내어 바깥에 버렸다.
그리하여 그럭저럭 전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무렵이 되어서야 두 손을 내렸다.
“조금, 쉬어야겠어.”
갈라졌다.
눈을 뜨자 촛불의 주홍색 빛과 죽어가는 노을빛이 버겁게 눈동자를 조였다. 그러나 터질 것 같았던 느낌은 완전히 가셨다. 족하다.
“보고할 게 생기면 언제든 오게.”
“예, 각하. 쉬십시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앞만 보았다. 그리고 할리가 나가자마자 일어났다. 쉬어야겠다 하는 말은 진심이었으나, 일단, 이 불편한 차림부터 어찌 해야 해서.
책상에 브로치를 내려놓고 케이프를 풀었다. 어깨에서 끌어내린 큰 천을 건성으로 접어 브로치 옆에 놓았다. 그 다음으로는 창가로 걸어가며 코트와 쥐스토코르, 넥타이를 차례로 벗어 업무용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두었다.
여태 꽁꽁 껴입고 있다가 차림이 한결 가벼워진 탓인지 아주 잠시 냉기마저 올랐다. 방 안은 충분히 따뜻하다. 내 몸은 곧바로 방 안 온도에 적응했다. 꽉 조이던 베스트의 단추까지 풀자 상체는 완전히 답답한 긴장에서 풀렸다.
창턱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묶은 리본도 풀었다.
구불거리는 골이 생긴 갈색 머리채가 쏟아졌다.
끝나가는 노을. 이파리 없이 가지만 앙상한 나무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몸을 끊임없이 식히며, 이미 식어있던 뱃속도 더 식히고 있었다. 양 손을 들어 반대쪽 팔꿈치를 감쌌다. 오른 손에 휘감긴 리본이 손가락 사이로 늘어졌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휘감긴 하는데, 어디서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낱말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겨났다가 뭉그러졌다. 생겨나다가 사라져버려 나도 내가 무얼 떠올렸는지 도무지 모를 단어들도 있었다. 그러다 종착점 같이 다다른 곳에서 스르르 눈을 떴다.
잠깐.
“…….”
쥰이 쓰러져 있는 건, 그러니까, 꿈이 아닌 거지.
팔꿈치를 감싼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눈을 굴렸다. 꿈인가? 방금 잠시 졸지 않았나? 눈을 감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긴 꿈을 꾸었을 지도 모른다.
노을은 간 데 없었다. 어느새 완전히 검어진 바깥을 향해 틀어져 있던 고개를 돌렸다.
집무실 안. 고요하기가 마치 여느 평범한 날과도 같아서. 나는 한참을 눈을 깜박여야 했다. 현실감은 천천히 돌아왔다.
쥰은 독에 맞았고, 쓰러져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아이를 보고 왔고, 아…….
새어 들어온 바람에 맞아 차게 식은 팔뚝의 셔츠를 어깨 근방에서부터 주무르며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손목을 주무르고 손은 팔에서 떨어졌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 넘기고, 창틀에 기댄 장골을 떼었다.
그렇군,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빠르게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며 내가 깨어 있음을 완전히 인지했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딱 맞추어 문이 두드려졌다.
들어오라 허락하자 할리가 들어왔다. 1층부터 여기까지 달려왔을 법하게 숨이 약간 거칠었다. 나는 피곤에 발을 담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란인가.”
“긴급 복귀 요청이 왔습니다.”
또 눈이 아프다. 양 눈머리 사이의 코를 짚고 눌렀다.
다급한 이런 음성, 다급한 이런 용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듣지 않을 수가 없어. 뿌옇게 흐려진 눈앞을 견디며 손을 내렸다.
“무슨 복귀 요청.”
“오드리나에 괴물들이 접근하는 중이라 합니다.”
“…….”
“최대한 빠르게 무장하여 수도 외성으로 집결하라는 요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