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107화 (107/157)

00107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다음날 오전, 라이네는 발리앙으로 두 개의 청혼서를 보냈다.

하나는 쥰 라이네로부터 아리엘 발리앙에게.

하나는 에본느 라이네로부터 르네 발리앙에게.

적어도 쥰과 아리엘의 혼인에 대해서는 내가 납득한 줄 알았을 베르덴이 얼마나 황당해했을지 눈에 선했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거의 확정된 것처럼 여겨지니 아직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실수다.

그러나 내 청혼은 아마도 베르덴에게 어떤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밤에 발리앙을 방문하였을 때 대화를 나누며, 나는 분명 르네를 향한 베르덴의 경계를 보고 느꼈으므로. 르네가 한 짓을 알면서도 내게 치우려 들 정도로 베르덴이 파렴치한인지는 두고 보아야겠고.

어찌 되었든 공작의 청혼이 공식화된 이상 더는 섣불리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그가 시간을 끌수록 르네는 초조해질 터.

그 초조함을 내가 기다리는 것처럼 베르덴 역시 기다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기다린다면, 그건 르네를 어떤 식으로든 처리할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쓸모없는 기다림에 불과할 테니까. 그토록 가문과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던 베르덴이 이제 와 무슨 결단을 내릴 확률이 높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를 이해한다.

발리앙을 사랑하는 발리앙 후작인 그를 나는 이해한다.

우리가 나누었던 언젠가의 문답이 떠올랐다. 내가 르네에게 청혼할 생각이라고 속삭이자, 그는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많아. 좋으니까.

-저는 이해가. 인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람 자체를?

-아니, 라이네 공작의 반려로 이만큼 적당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인데.

그 떨떠름함.

-어때?

-……상냥히 보이려 노력하신 것 같긴 합니다.

-나는 르네에게 항상 상냥했네.

-결정권은 제게 있으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떨떠름함.

나는 입 꼬리를 올렸다. 어디,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 르네도, 베르덴도. 이번 시간, 함정과 덫을 뿌려두고 지켜보는 사냥꾼은 어디까지나 나다. 올봄에 쓰려 하였던 내 청혼이라는 패를 지금 쓰는 값어치가 있기를 바라.

손 안에서 돌린 펜으로부터 잉크가 푹 흩뿌려졌다. 손목이 검게 젖었다.

*

비정기 작전을 위해 쥰이 오드리나를 떠나고도 열하루가 지난 날.

그러니까, 라이네의 청혼서들이 오드리나를 들썩이게 만들기 시작한 날로부터 열하루하고도 나흘이 더 지나서, 보름째 되는 날의 깊은 밤. 별과 달도 뭉그러진 그 깊은 밤에, 라이네 저택에서는 사람이 살해당하게 되었다. 장소는 공작의 방.

나의 침대.

“…….”

벽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거리는 불티에 맞추어 빠르게 숨을 들이켠 자객이 칼을 치켜들었다. 내 몸 뉘는 곳. 이불 안으로 칼이 찔러 들어간다.

나는 깊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숨이 멎는다. 그대는, 그렇게 이 자리에서 간다. 내 손 바로 옆에 있던 문고리를 잡고 열자, 복도의 빛이 잔잔하게 새어 들어와 나를 비추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자객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환영하네.”

보통 저들의 자진은 칼을 목에 찔러 넣음으로 이루어진다. 입 속에 독을 상비하는 둥 그리 부지런한 절박함을 지닌 자객들은 애초에 미로 골목에 모여들지도 않아. 끝까지 살고자 발악할 자들이며, 따라서 그 발악을 위해 일정 정도의 고문을 가해주면 아낌없이 입을 털어줄 자들인 것은 좋은 일이다.

내 오른 얼굴에만 국소적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던 주홍 촛불 빛은 이내 이 방을 완전히 밝혔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기사들은 지체 없이 자객들과 맞붙기 시작했다. 나는 문 옆에서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목을 문질렀다. 그리고 위험하다고 속삭이는 할리에게 동의했다. 몸을 비틀어 일단 방을 나왔다.

등 뒤, 작은 비명조차 순간적으로 묵직하다. 누구 한 명은 생명을 잃었겠구나.

나는 오른 발을 들어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찍으며 뒷목을 쓸었다.

“문 열어준 시녀는.”

“확보하였습니다.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죽였으나 이번에는 가만히 두었던 그 시녀. 죽이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호흡하는 길이 잠간 답답했다. 어떻게 하녀도 아니고 시녀가.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아니, 아니다. 시녀이기에. 가문이라는 뿌리가 있는 시녀이기에.

쥰이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입 안에서부터 안개가 새어나오듯, 희부연 한숨이 흘러 나와 흩어졌다.

“개판이군.”

“…….”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란 숙부부터 시작해서 개판이야.”

아버지 세대. 아니면 그보다 더 전. 물밑에서 이어져 온 난장판일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일신하겠으나, 여태 수 년, 수십 년간 실로 개판이었다는 건 변치 않을 사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등허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정적이 푹 내려앉았다.

셔츠 깃에 피가 묻은 가엘이 나와 진압을 보고했다. 나는 웃으며 검지를 들어 가엘을 한 번 가리킨 후 내 목깃을 두드렸고, 가엘은 손을 들어 제 깃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지금 당장 어떻게든 조치하라고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엘과 할리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기사들이 이미 곳곳의 초에 불을 붙여둔 상태였다. 기특하다. 촛불들을 한 바퀴 둘러보며 낮게 웃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객은 총 다섯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죽어, 살아있는 자는 넷. 시신만이 천장을 보고 있는 지라 희게 초점을 잃은 뜬 눈이 보였다. 나는 목이 베여 죽은 그것에게로 다가갔다.

피가 밟혔다. 밑창 전부, 피 웅덩이 속이다. 질척이는 액체를 밟은 채로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벽을 기어 올라오느라 수고 많았어. 높았을 텐데. 물론, 우리 시녀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사람도 수고 많았네.”

아까 못다 한 인사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들었다. 맨손에 피가 묻었다.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으리. 칼끝을 아래로 향했다. 조금 힘을 주자 시신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고개를 고정해.”

손이 비는 기사들이 몸을 굽혔다. 엎드려 있는 자객들의 턱과 머리를 잡고, 분명히 나 하는 행동을 볼 수 있게 고정했다. 나는 그것들이 눈을 감든지 감지 않든지 상관치 않고 천천히 검을 긋기 시작했다.

살이 썰리기 시작했다. 복부가 갈린다. 퓩, 피가 몇 방울 튀더니, 이내 흘렀다.

배를 다 열었을 때, 검을 일단 뺐다. 그리고 다시금 그 안을 후비듯 파고들어 무슨 긴 내장 하나를 검 끝으로 들어 배 밖으로 끄집어냈다. 선홍색. 붉기도 하지. 그래도 인간이라고.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자도 한 번쯤은 실눈을 떠서라도 그 내장을 보는 것을 확인했다. 네 명 모두 보았다. 나는 이만 내장을 놓았다. 그리고 시신 위로 칼을 꽂았다. 무거운 시신이 일순이라도 들썩일 만한 단호함이었다.

나는 꽂힌 검의 검병을 거꾸로 잡은 채로 몸을 굽히고 앉았다.

몸이 열린 시신이 내 눈과 가까워졌다. 물끄러미 내장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자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매일을 누워 있다가 간만에 깨어나서, 그 연약해진 몸으로도 나 잘 준비를 하겠다고 내 침구를 정돈하다가, 자객에게 죽은 내 충성스러운 집사의 목숨 값은 어찌 받아야 할까.”

수식어는 많지만, 간단히 말하면, 내 충성스러운 집사를 죽인 네놈들은 각오하라는 소리다.

침구를 정돈하기는커녕 내 침대 위에 기절한 채로 누워 있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그 노인은, 지은 죄에 비하여 곱게 죽였다. 그렇게라도 가라. 그대, 일생을 라이네를 위하여 봉사하며 일생을 라이네를 증오하였던 그대, 증오하는 라이네를 위하여 죽어라. 상벌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죽음으로 집사는 끝났다.

그것은, 눈금 맞추어 재단된 내 증오이자 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자객 하나의 입에서 토사물이 뿜어져 나왔다. 역하고 비릿한 게 장갑에 묻어도, 그 죄인을 잡고 있는 기사는 눈만 살짝 찡그릴 뿐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안타까운 기사에게 그자를 놓으라 하였다.

자객은 즉시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쏟아내고 쏟아내었다. 가리지 못한 목에 핏대가 섰다.

나는 그 모양을 보다가 오른 무릎을 내려 시신에 대고 눌렀다. 이번에는 시각적인 고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어나기 위해서였다. 검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몸을 폈다. 잠시 쪼그려 앉아 있었다고 몸이 뻐근하다.

“다 했나?”

“어억…….”

“그럼 다시 먹어서 치워. 누가 내 방을 더럽히라 했나.”

물러 나 있던 기사가 다시 다가가 자객의 머리털을 잡아 토사물에 얼굴을 박게 했다.

여태 버티던 다른 자객에게서 짓눌린 욕지기 따위의 반응이 나왔다. 죽음보다 현실적인 고문인가. 나는 비릿한 냄새가 도는 공기를 맡으며 입을 열었다.

“집사도 집사지만, 저 자리에서 죽어야 했을 사람이 실은 나일 텐데…….”

안타깝다는 한숨을 후우 쉬었다.

“그 죄는 집사를 죽인 죄보다 커.”

“…….”

“너희들이 몰라서 그랬을 지도 모르니 알려주겠는데, 내가 실은 라이네 공작이네.”

라이네 저택에 와서 공작의 방을 찾아 들어왔는데, 죽일 사람이 당연히 라이네 공작이지, 그럼 누구이겠나.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해주는 말이다.

복부에 꽂혀 있는 검을 빼서, 자객들의 얼굴 가까운 곳에 있는 시신의 손부터 손가락 한 개 한 개 찍었다. 새끼손가락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약지가, 떨어져 나갔다. 중지가 떨어져 나갔다. 검지, 떨어져 나가다가 어느 자객의 이마에 날아가 부딪혔다. 공포로 동그랗게 질린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집사를 죽인 죄만 물어줄 수도 있거든, 내가. 죽일 사람이 라이네 공작이라는 걸 몰랐다는 걸 정상참작해줄 수도 있단 말이네.”

엄지. 뒹굴었다.

“예를 들면. 나는 너희에게 이리 말할 것이다. ‘남의 집사를 그리 죽이면 안 되지.’”

“…….”

“‘그럼 집사의 입을 막으려 한다고 보이게 되잖아.’”

“…….”

“‘누가 라이네 공작도 아니고, 라이네 저택의 집사에 불과한 자를 죽이고자 했던 것인지 알려주면 살려주지…….’”

공포로 마비된 머리라 할지라도, 죽어라 굴리는 게 좋을 것이다. 손목을 자른 검 끝이 서서히 올라가, 조금 전 검지에 맞은 자객의 눈을 가리켰다. 이해해. 이 상황, 이 말, 내가 너희에게 살 기회를 주는 것임을 이해해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누가 의뢰했나.”

대답은 없었다.

유감이다. 고통을 자처하는군. 나는 쓴웃음을 짓고 콧숨을 훅 쉬었다. 그러나 이름이 간절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필요했던 것은 침입 자체. 가장 원했던 것은 이루어졌다.

이제 본격적인 신문은 내려가서 시작하면 될 것이다. 포르타 저택을 습격하였던 자객들과 같은 무리 소속이라면 서로 정다운 재회도 가능했다. 손을 풀었다. 검이 떨어져, 반쯤은 시신에 걸쳐졌다.

바닥에 부딪혀 피가 튀었다.

“끌고 가게. 크게 반항하게 할수록 좋아.”

“존명.”

나는 오물에 묻은 상태로 끌려가는 자객과 얌전히 끌려가는 나머지 셋이 내 방을 나서자마자, 어디를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것에 픽 웃었다.

아아, 좋다. 그럼 혀 있으나 충성심 부족한 사용인들은 저 비명을 듣고 라이네 저택에 암살자가 들었음을 알려라. 입에서 입으로, 혀에서 혀로. 퍼지라. 떠들썩하게 온 수도를 휘감아. 라이네의 기사들이 그 소문 퍼지는 속도를 도울 것이다.

피 묻지 않았을 왼 손으로 두 눈을 짚듯 문질렀다. 차가워서 정신이 더 날카로워졌다.

눈두덩을 그렇게 식히고 있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난 내 기사들이 정말 좋다니까. 유연한 장난기가 있어.”

“각하…….”

“내려가면서 죽어라 패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목이 많이 잠기셨습니다. 물을 올리겠습니다.”

조금 전의 일을 보고도 할리가 하는 말은 이뿐이다.

나는 할리를 돌아보고 손사래를 쳤다.

“됐네. 난 집무실에 있을 테니, 여기 청소 시키는 것 좀 부탁하이. 그리고, 아, 그렇군. 집사…….”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집사를 돌아보고 침대로 다가가려는 것을 막아선 할리가 후다닥 침대로 갔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집사가 누운 방향을 바꾸었다. 침대 옆에 서 있다가 쓰러진 것처럼. 그리고 집사의 부상 부위에 맞추어 시신 위에 다시 이불을 덮었다. 찢어지고 피가 번진 이불이 어째서 시신 위에 있는지는 어떻게든 설명이 가능하다.

죽은 직후 이루어진 이런 작은 움직임으로 시반이 수상하게 변하는 일은 없을 터.

나는 할리가 신속하게 일을 마치는 것을 보고 방을 나왔다.

청소는 하인과 하녀 여럿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공작을 죽이고자 들어온 자객에게 고문을 가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피가 튄 저 방을 전부 보도록 두려 한다. 배신 후를 두려워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공포정치 같은 것은 원치 않았으나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자객의 습격이 있었다는 생생한 증언들도 필요하고.

집무실로 가며 기침과 섞인 웃음을 흠, 흠 하고 웃었다. 지난 보름, 사라진 것 같았던 기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르네, 너겠지. 베르덴이 너와 나의 혼인을 진지하게 고심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또 기침했다.

하여 나와 혼인하면 결코 가질 수 없을 후작위에 속이 조급해지더냐. 계획에는 강하여도 임기응변에는 강하지 못하나, 너는. 나는 이 미련한 짓을 기다렸으나, 어찌 되었든 너는 실로 미련한 짓을 했다. 내가 발리앙을 의심치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할 수 있던 짓일까.

너, 완벽하지 못하다.

피 묻은 손을 다리 옆에 늘어뜨린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완벽하지 못하듯 그도 여기에 이르니 무능하기 짝이 없어.

============================ 작품 후기 ============================

후기를 뭐를 쓰지.......하다가, 노래 가사로.

Musing through memories,

추억을 기억하며 사색에 잠겨

Losing my grip in the grey.

흐린 회색 속에서 통제력을 잃어가요.

Numbing the senses,

감각은 마비 되어가고

I feel you slipping away.

당신이 사라지는 걸 느껴요.

Digital Daggers-Still Here

선추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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