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그토록 베르덴을 죽이고 싶어 하던 자. 그토록 베르덴을 엎드러지게 하고 싶었던 자.
알드리히를 바라는 아리엘이 베르덴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기어이……. 결국……. 마침내.
나는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억누르기 위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렇군. 그는 좋은 친구지.”
나와 라이네를 소문으로 얽어 끌어내리는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리엘이, 단 한 번 전면에 나섰던 적이 있으니, 그게 바로 황제살해미수 때다. 나를 죽이기 위한 마지막 일이었으며, 가장 결정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 보만 삐끗 휘청거려도 위험해질 수 있는 일.
그때까지 일을 영리하게 끌고 왔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따위 짓을 했을지 옥에서 많이도 의아해했었다.
그렇기에 이번 시간,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나서, 아리엘이 나를 끝끝내 죽이려 했던 이유가 알드리히에게 보내는 사랑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간단히 확신하지 못했었고.
그래서 내 적을 아리엘 하나로 특정하지도 않았다. 특정하지, 못했다.
한 사람, 그녀, 그들, 발리앙.
나의 적.
너희 발리앙.
너희.
나는 낮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아, 과연. 이제는 확실히 궁금해 할 수 있겠다.
아리엘. 너는 내가 죽은 뒤에 과연,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황후나 황비 되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베르덴의 다음 승계 서열이던 너는 과연, 처리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허탈한 웃음이나마 터지고 말았다.
우스워서 이를 어찌해.
아직 아리엘이 주도한 건지 르네가 주도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겠으나, 이 정도 되면 르네가 주도한 것이라 생각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터다. 물론, 이쪽도 저쪽도 가정은 해두고 있어야겠지만.
“……각하?”
피식피식 웃다가, 헤르조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그 말을 언제 들었어?”
“십 년은 족히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는 말 못해주고?”
“……적어도 각하의 머리색이 다른 색이었을 때였다는 건 확실합니다.”
머리를 열다섯에 염색했었으니, 르네는 베르덴을 죽이려고 십 년도 더 전부터 준비해오고 슬금슬금 말을 흘려놓았었던 것이다. 내가 하는 차근차근, 이라는 건 정말이지 그에 비할 수가 없구나. 아직도.
그토록 오래 준비해왔던 일에 나는 끌어내려졌었던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내린 것이다…….
“…….”
손바닥으로 이마와 눈두덩을 눌러가며 쓸었다. 아, 이리도 끔찍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어쩌다 르네와 아리엘은 손잡게 된 걸까.
쌍둥이라서 서로를 향한 애정으로 당연하게 손잡았다는 둥의 짐작은 설득력이 거의 없다. 나를 그리 몰고 베르덴과 저희 아비마저 죽인 이들이 쌍둥이를 향한 혈육의 정이라고 특별하게 있을까. 피마저 싸늘할 것 같은 사람들이, 설마.
허면 어디보자. 르네, 르네는 아리엘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하니, 아, 제 쌍둥이 누나가 쓸 만 하겠다 싶어 아리엘을 도왔나. 그럴 확률이 차라리 높은 것 같다. 만일 이 추측이 옳다면, 르네는 아리엘의 입에서 결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안배를 해두기도 했으리.
내 이 짐작이 옳다면 그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래서, 더더욱 깨부숴야 할 사람이다. 내가 죽으면 쥰이 공작될 것은 자명했던 당시, 그리고 지금, 쥰을 이따위 추악한 계획에 포함시켰던 이유도 이제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를 갈지 않도록 애쓰며 웃었다.
바로 앞에 있으나 갖지 못하는 자리. 하여 비슷한 입장이라는 걸까.
감히 발리앙 너 따위가 누구에게 연민을 품어. 너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동질감을 느껴. 나는 다시금 짧게 웃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여전히 웃고 있는데, 고맙다 하는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다른, 생각을 하자. 그래, 예를 들면. 내 성공에 대해. 술 취해서 발리앙에서 나왔다는 그 소문이 어쨌든 쓸모가 생기긴 했다는 그런 성공에 대해. 헤르조가 큰 결심을 하고 내게 말하러 오게 만들었으니.
나는 내 책상 서랍에 있는 두 개의 청혼서를 떠올리고 복부에 손을 올렸다. 베르덴이 후작위를 내려놓고 내게 온다는 소문으로 희망을 키우고 키우게 하다, 청혼서로 터트리면 무언가 반응이 나올까 했더니, 그 반응을 보기 전에 이런 증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와 결혼하게 되면 후작위는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니까…….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돌아버려서 베르덴을 빠르게 죽이고 아리엘을 황후든 황비든 만들어 치워버린다면, 그렇다면 르네도 확실히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확신하려 했었는데.
이미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든 증언이 나왔다.
“…….”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르네에게서 어떠한 움직임이든 나오길 바라는 건 여전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이 자리가 파한 후에 생각을 이어가면 될 일이고, 지금은 앞에 있는 헤르조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내 고맙다는 인사에 오므리는 손에 잠시 시선이 미쳤다. 힘준 주먹이 아니라, 가볍게 쥔 주먹이다.
나는 시선을 올렸다. 헤르조는 제 친구의 이름이 어째서 내게 헛웃음 짓게 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혹은,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설마 하는 눈치였다. 내 눈이 가늘어졌다. 한숨 역시 가늘게 흩어졌다.
“헤르조.”
“…….”
“헤르조. 나를 봐.”
생각에 잠긴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선명하게 보이도록 빙긋 웃었다. 이렇게 된 것,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열로 버석버석 말라가는 입술을 열었다.
“나는 너를,”
아니, 아니다. 말을 고쳤다.
“너와 절교했다.”
버렸다 하는 말은 예의가 아니다. 그는 그때 당시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내 손에서 태어난 창작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나와 같이. 내가 그와 같이.
헤르조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너는 이 밤에 내게 와서 베르덴에 대하여 경고해 주는군.”
“…….”
“아리엘을 사랑해?”
대답이 없었다.
헤르조가 아리엘을 사랑한다 여겼던 건, 내가 글을 그리 썼기 때문이고, 그리 쓴 이유는, 이제 와 추측해보기로는 헤르조와 아리엘이 사이좋게 대화 나누는 걸 수차례 보았던 탓이리라 생각되었다. 그 괴짜 영식이 참 별일이게도 아리엘과 친하게 논다고 시드니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드니는 나의 그 짐작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같았다. 그리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던 것 같아.
나는 꽃송이 꺾이는 것처럼 한숨을 훅 떨어뜨렸다. 그리고 신중하게 물었다.
“그럼 나는, 어찌 생각하지?”
나와 아리엘 사이에서 아리엘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그날 밤 멀어졌다.
멀뚱하게 있던 헤르조의 눈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조금씩 커지는 그 눈에 대고 나는 다시 웃었다.
“우리 사이, 무언가가 남아 있기에 너는 내게 와 주었겠지. 그게 마지막 남은 의리든, 여전히 족히 남아 있는 의리든.”
“…….”
“헤르조.”
“…….”
“날 죽이려했던 사람은 베르덴이 아니다.”
그 말을 하고, 그가 아직도 내게 베르덴을 옹호하느냐 할까 하여, 곧바로 말을 이었다.
“둘째어머니께서, 아, 이제는 아니지, 쥰의 모친이 날 죽이려했던 건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부정 않아. 그런데 베르덴은 아니다. 베르덴은 아마도 그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럼…….”
“넌 알 수 있을 거야.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헤르조는 베르덴에게 좋은 감정이 특별히 없기 때문에, 르네의 말에 더 주의가 쏠려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싫어하는 사람과 친구가 있으면 그 중 친구의 말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않을까.
입술을 깨물었다가 푸는 그를 보며 잠시 생각하던 나는 불쑥 물었다.
“너는 내가 밉나?”
조금 전 물은 내용과 비슷하되 다른 질문이다. 헤르조가 뒤늦게 반문했다.
“……예?”
“네가 포르타경과 발리앙 후작을 꺼리는 그 이유로 나도 싫으냐고 물었어.”
“알고…… 있, 알고 계셨…….”
그는 제 실수를 깨닫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경어의 문제가 아니지. 싫다는 말을 그리 쉽게 인정하면 어찌하나. 답지 않게 어리벙벙한 모습에 내가 낮게 기침하듯 웃었다.
“간단히 대답하면 돼. 옛날처럼.”
“…….”
그의 가슴이 부풀었다. 크게 들이켠 숨이다. 설레설레 저어지는 고갯짓이 족하다. 밉지 않다하니, 미래를 위해 다행이었다. 나는 웃으며 부드럽게 그에게 화답했다.
“그래. 알았어. 고맙다.”
대관식이 있던 날, 오드리나로 돌아오는 헤르조를 보며 깨달았던 것은, 그도 있다, 하는 사실이었다.
라이네 공작의 반려가 될 만한 사람으로, 그도 있다고.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포르타에 청혼서를 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먼저 일어났다. 배웅하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자, 헤르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아니 된다. 네가 내게 해준 말도.” 그에 무뚝뚝하게 동의한 그가 응접실을 완전히 나가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혹 뒤를 밟는 자 없는지 라이네의 기사가 헤르조의 뒤를 따르며 확인할 것이다. 따라서 헤르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헤르조가 앉아있던 의자를 눈에 담다가, 팔걸이 끝을 감싸 쥐듯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르네. 아니, 조금 더 시간 흐름대로 생각해보자.
이번에 발리앙 후작이 전보다 늦게 죽은 것은, 베르덴이 저택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리엘에게 뒤집어씌우자니 베르덴이 아직은 불안할 테니까. 아무리 작위를 포기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내 기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서임이 깨질 경우도 생각을 해야 했겠고.
그렇다고 아리엘에게 뒤집어씌워 아리엘을 미리 없애버리면, 혹시 베르덴이 돌아와 후작이 되었을 경우에는 독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아리엘을 아직은 남겨두었다.
그러다 베르덴의 서임이 깨지고, 발리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내 보좌가 되었다…….
“…….”
베르덴이 내 보좌로 돌아오기 전 발리앙 저택에 머무르기 시작하자 르네는 다시 발리앙 후작에게 독을 쓰기 시작했겠다. 그러다 베르덴이 내 보좌로 들어온 후에 멈췄을 테고.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발리앙 후작은 소생하기 힘든 상태. 결국에는 전 후작은 작전 중 사망으로 보이도록 자진했다.
르네에게 있어 좋지 않았던 점은, 전 발리앙 후작이 얌전히 저택에서 사망한 게 아니라 바깥에 나가 작전 중 전사로 보이게 죽었다는 점일까. 저택에서 사망했으면 어떻게든 훗날 베르덴과 아리엘을 죽이는 데에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죽었기에 르네는 여전히 아리엘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여차할 시 버릴 패를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뜻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또한, 발리앙 전 후작이 원했던 대로, 전 후작의 죽음으로 발리앙을 지켰다는 뜻이기도 했다.
독살당하는 중이라는 걸 아는 내 용인이 있었기에 할 수 있던 잠시의 수호.
나는 깊이 호흡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데스챔프의 일을 터트리면 바비에르의 일은 무마할 수 있다. 라이네는 거의 안전해. 마지막으로 피해야 할 것은 황제를 살해하려 한다는 그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건 여태 해왔던 걸 이끌어 가다가…….
이끌어, 가다가, 뿌리를…….
“…….”
내 눈꺼풀이 기나긴 잠에 들 것처럼 파르르 내려가다 멈추었다.
몸을 바로 하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새 식은땀이 찬 손이 추웠다. 나는 침을 삼키고 두 다리를 구부려 의자 위로 올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회의감에 차올라서 어쩔 줄 몰랐다. 알고 싶었던 진실, 인즉 내가 왜 죽었는지 거의 다 알게 되어서 그런가.
라이네가 어째서 흔들려야 했는지 거의 다 알게 되어서 그런가.
세상에 난 순서에 대한 일그러진 증오를 가진 남자와, 일그러진 사랑을 가진 여자가 손을 잡았기에 내가 죽었다.
겨우 발리앙 후작이 되고 싶어 하던 사람과 황제를 사랑하던 사람이 손을 잡았기에.
내가 생각한 게 옳다면, 나는 어쩌면 사후에 황제를 시해하려했다는 혐의가 풀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어, 아리엘이 어째서 나를 미워하여, 어떻게 내게 그 죄를 뒤집어 씌웠는지 알려졌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리엘은 죽고, 발리앙 승계서열이 아리엘의 다음이었던 르네는 마침내 후작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모든 짐작의 가정은, ‘내가 생각한 게 옳다면,’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게 옳다면. 그렇다면 나는 르네가 아리엘을 처리하기 위하여 죽은 것밖에 더 되나.
“…….”
이 치밀하고 치졸한 계획 앞에 라이네 공작이라는 사람이 이토록 무능할 수가.
극도로 허탈해진 탓에 실실거리는 비웃음이 터졌다. 사람을 믿고 믿다가, 겨우 그따위 이유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겨우 그따위 이유로 팔다리가 잘려가면서 죽었다니, 이 얼마나.
……얼마나.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감히.
“각하.”
“…….”
벌겋게 핏줄 섰을 눈으로 할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이, 라이네를 무너뜨려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정치계라지만 그딴 이유로 타 가문에 손을 대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라이네, 이 나라에 있어서도 의미 많은 이 가문에.
아, 그렇군.
정신을 차렸다. 잠시라도 회의감에 잠겨 있을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내 개인적인 일에 국한된 게 아니라 라이네와 라이네의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질을 한 건데 같잖은 회의감에 잠겨 있을 새가 있나.
두 다리를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뒷목에 오른 손을 걸었다. 장갑을 챙겨오라고 뒤를 손짓하자, 할리가 나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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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끝이었는데, 분명...... 후. 후후후. 독자님들의 사랑에 힘입어 한 편 더 투척하고 갑니다//ㅅ//
헤르조와의 대화는 헤르조 외전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