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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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간만에 쥰을 현관까지 나가 배웅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불러올린 사람은 참으로 드물게 저택에 들러 머무는 우리 가문의 마법사였다. 나는 그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물었다.
“보석 감별할 줄 아나?”
그러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건, 너무, 마법사를 너무, 진짜 너무 만능으로 보시는 거 아닙니까?”
“마법사가 만능이 아닌 건 알아. 해서, 모르나? 연구를 하니까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전 보석은 그다지 손대지 않았습니다.”
“쓸모없군.”
“상처입니다! 떠돌아다니며 온갖 말을 듣는다 해도 역시 상처입니다!”
상처 받았음을 주장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툭툭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유연하게 농을 이어갈 수는 있으나 상황이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오드리나에 보석감별을 하는 마법사는 둘 밖에 없고, 정확도는 마법사들에 비해 떨어지는 비마법사 감별사는 여럿이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쓸모없으므로 내게 필요한 건 마법사. 수요는 많은데 명백히 공급이 적은 상태라, 그들 두 사람이 사라지면 응당 티가 나고 응당 난리가 난다.
귀찮아졌다. 어찌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감별사를 부르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글쎄.”
아무에게나 존재를 인정할 이유였으면 처음부터 이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눈을 약간 찌푸리고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그에 입에 가득 바람을 부풀어 넣고 눈을 굴리던 마법사의 입술이 스리슬쩍 열렸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니까, 시간을 주시면 자료 찾아가면서 연구해보겠습니다.”
“……믿음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볼 때마다 알쏭달쏭한 사람이야, 자네는.”
“아, 진짜 상처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자네를 찾아 헤매야 하는 이쪽 입장도 생각을 좀 해. 때마침 자네가 여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죄송합니다.”
계면쩍은 얼굴로 사과하는 것에 끌끌 혀를 차고, 자물쇠를 연 상자를 그에게 밀었다.
“무슨 보석이 박혔는지 결코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네.”
“문제없습니다.”
“믿겠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해 줘.”
“존명. 받듭니다.”
애초에 외부인 한 사람이 이 검에 박힌 보석들 전부를 알게 할 수는 없었다. 이 검에 박힌 보석들에 의미가 있다면 그 무엇도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기에.
이 사람이 불가하다 한다면, 보석들을 반은 가리고 반은 보이는 식으로 두 사람에게 나누어 감별을 시키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맡아준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떠오른 바가 있어,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마법사에게 마지막으로 언질을 남겼다.
“그거 폐하께서 내린 하사품이니 조심히 연구하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자칫하면 네 목 날아가고 내 정신 날아가는 수가 있어.”
“……저저저저, 여연구 안 하면 안 됩니까?”
“그러게 본디 사람은 대답을 신중히 해야 하는 법이야.”
“아니, 이이이건 각하께서 명백히 절 낚으신 거잖습니까!”
“이런. 거기까지 깨달을 필욘 없었는데. 믿겠네. 잘해줘.”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울상이 된 그가 훌쩍이며 나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할리는 마법사와 교환하듯 들어왔는데, 그 표정이 영 이상했다.
“왜?”
“왜 각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남성들은 많이들 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영지에서 있었던 딱밤 사건을 말하는 건가. 참 진지하게도 말한다. 그러니 이쪽이 멋쩍어지잖아.
“그때는 육신적으로 타격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정신적으로 좀 타격을 주어서. 본의 아니지만. 미안하긴 하네.”
“그 거짓말, 진심이십니까?”
“아니. 재밌어 죽겠어.”
“…….”
눈썹 사이를 짚고 흐느끼듯 크흐흐흑 웃자, 할리는 어금니나 사랑니 같은 게 아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시드니가 한 것이 미로골목의 몰살이 아닌 것을 확인하였다는 보고와, 데스챔프와 알드리히의 배다른 동생인 3황자의 모친인 비가 만나는 것을 포착했다는 보고가 함께 올라왔다. 헤르조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졌던 터라 하던 일단의 업무를 마무리 짓는 참이던 나는 안도했다.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바. 갈림길까지 겨우 수개월 안이다.
“그간 수고 많았어. 조금만 더 수고해주게.”
“예. 각하.”
경례는 항상 그랬듯 정중하고 힘이 있었다. 나는 웃으며 가엘을 내보낸 후에, 슬쩍 웃음기를 거두었다.
지난 시간에도 이번 시간에도, 알드리히는 저를 위협하는 2황자를 ‘내쳤다.’
따라서 2황자의 동복형제인 3황자와 그들의 모친은 당연히 경계하고 있었으나, 그랬음에도 데스챔프 공작과의 관계를 알게 된 시기는 상당히 늦었다. 아마……, 아마 바비에르에 대한 소문이 터진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
그러나 지금은 황제가 미리 알고 있을 것도 경계하고 있어야 함은, 시드니가 있기에.
내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 달갑지 않다. 변수가 없는 것을 선호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알드리히가 날 죽이려한 게 발리앙이냐 물었을 때의 감정이 아직도 선연했다. 등골 오싹하게 훑고 내려가던 긴장.
그러나 어찌 보면 시드니 입장에서는 아마 내가 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있는 것이리.
……언제부터 이리 너그러웠다고.
입가를 쓸다 나온 뜨거운 한숨이 책상에 닿았다가 내 얼굴에 확 퍼졌다. 축축하다.
몸을 세우고, 두 손을 들어 천정을 향해 쭉 뻗었다. 하품이 크게 나왔다. 어제 밤부터 쭉 시달리다가 두 시간 정도 잤나. 일찍 출근하는 쥰을 배웅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정도 잔 게 맞다.
오른쪽, 왼쪽으로 허리를 기울여가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피곤했다.
상처의 독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아 푸른 기가 도는 손을 기지개 켜던 상태로 올려다보는데, 문 앞으로 다가온 기척이 문을 두드렸다.
“각하.”
“……아아, 나가네.”
손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장갑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등받이가 앞으로 돌아오며 나는 소리다. 내게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빠르게 낡아가는 중이었다. 문으로 다가가며 넥타이 매듭의 자리를 조정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할리가 나지막하게 보고했다.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래.”
밤중의 은밀한 만남이 요즘 들어 어쩐지 잦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오늘 새벽에 있던 알드리히의 방문도 그렇고.
그러나 알드리히를 만나는 것만큼 비밀스러워야 하는 게 포르타 가문 일원과의 만남이다. 어떤 식으로 나와 엮이게 될 줄 알고. 응접실로 걸어가며, 뜨뜻하게 열이 오른 게 느껴지는 목과, 얼굴과, 평소 피로할 때와 약간 다른 피로로 아픈 눈을 한 번씩 손으로 쓸었다.
아침에 일어난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더운 한숨을 쉬다가 마른기침마저 시작되어 몇 번을 켈록거려야 했다. 아, 이거 오늘 쉬지 않으면 내일은 된통 고생하겠다. 할리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두어 번 더 잔기침을 했다.
옆에서 그가 무뚝뚝하게 염려했다.
“각하. 눈이 많이 붉습니다.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그럴 것, 케헥, 같았어. 느낌이 아주 그냥. 하필이면, 켁, 이런 날 이러나.”
“접견 동안 덮으실 담요를 준비해 올릴까요?”
“됐네. 그 정도는 아니야. 얼른 끝내고 쉬면 돼.”
만류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나는 손수건을 접어 할리에게 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기침하고, 그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응접실에 들어갔다.
헤르조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각하.”
“간만이야. 잘 지냈나?”
이렇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게 거의 2년만이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헤르조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헤어진’ 이래 몇 번 마주친 적도 없지만, 마주친 그 몇 번조차도 항상 멀리서 인사를 하고 받고 지나쳤던 사이 같지 않았다.
내가 먼저 앉고 나서 손짓하자 헤르조도 앉았다. 미리 준비토록 일러두었던 다과는 헤르조가 앉은 직후 할리의 손에 들려 와 차려졌다. 고생한다, 할리도. 이 저택의 용인들을 솎아내는 일이 미뤄지고 있어서.
나는 할리가 나가자마자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해서. 내 혼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발리앙 후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와의 혼담이 소문대로 사실이라면, 공식화되기 전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한 소소한 대화는 없었다.
나는 물었고, 헤르조는 대답했다.
우리 에브, 우리 에브하던 친근한 말씨도 없고, 웃음도 없다. 이 자식, 네놈 하던 나의 타박도 없다. 이 자리에서 전과 비슷한 것은 오로지 내 웃음뿐이었다.
그러나 주제가 베르덴인가…….
한 자리에 어떤 방식, 어떤 모습으로든 이번 시간의 우리 셋이 모인 것 같아서 나는 푹 웃고 말았다. 베르덴에 대한 이야기라. 심지어 그 이야기를 하려 하는 사람이 헤르조라는 게 재미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이 주제를 허락했다.
베르덴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도 내 혼인과 관련된 것은 거짓이 아닐 터. 자칫 내 권위에 도전하려 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겠지. 헤르조는 그리도 행실 가벼워보여도 어쩔 수 없는 포르타였다.
헤르조는 작게 숨을 들이켜고, 또, 작게 내쉬고 나서,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는. 각하를 살해하고자 노력해온 사람입니다.”
“…….”
내 숨이 웃던 그대로 박제되었다.
덜컥 멈춰버린 한 덩이의 숨이 목을 쥐고 놓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지금. 차마 깜박이지도 못한 눈이 아프게 시렸다.
무언가 반응을 하기 위해 벌린 입으로 공기가 빨려들어왔고, 그게 목구멍에 닿자마자 기침이 튀어나왔다. 케헥. 손가락들로 입을 가볍게 가리고 두어 번 더 기침했다. 방금 들은 게, 그러니까, 꿈이 아닌데.
“발리앙 후작이?”
입에서 손을 떼며 묻자, 헤르조가 긍정했다.
“예.”
“…….”
자못 황당하여 나는 그를 한참을 응시했다.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내 앞에 앉은 이는 헤르조다.
헛웃음을 웃지도, 놀라지도 못하고 이 상황에서 적당한 반응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그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아직……, 아직 친구였을 때.”
그는 단 한 문장으로 나를 고민에서 깨워냈다. 아직 친구였을 때. 입에 담기 그리 힘들어할 정도로 민망할까. 내가 버릇 같은 웃음을 짓고 눈썹을 움직였다. 헤르조의 시선이 잠시 내 턱 즈음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발리앙 후작이 각하의 기사가 된 이후에 특히.”
“…….”
“제가 각하를 제 여행에 함께 하시도록 종용한 일이 많은 것도 그 탓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더 가까이에 둔 건, 더 쉬이 죽이기 위해서라 생각하여?”
“예.”
덤덤한 대답을 듣자, 나는 결국 조금 곤란해지고 말았다. 샐샐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있었다. 일이 정말 재미있게 돌아가게 될 것 같다.
몸을 옆으로 기울여 검지와 중지 끝에 관자놀이를 기댔다. 턱을 받친 엄지 끝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웃지 말아야 한다. 너그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날 죽이려 든 걸 너는 어찌 아나.”
“겪었습니다.”
“겪었다?”
“발리앙 후작이 쥰 라이네의 모친을 연모하였음을 혹 아십니까?”
하. 이건 또 뭔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막장도 막장이 없겠다 싶어서 기가 차는데, 그 와중에 재미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더라. 눈을 굴리며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실실 보이다 뒤늦게 반문했다.
“뭐?”
“……후작의 본래 성격이 진중한 편이 아니었던 것은, 기억하십니까. 언제부터 신중해지려 노력했는지는 그럼, 혹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잠깐만. 그럼 지금 네 말은. 후작이 쥰의 모친을 사랑하면서, 뭐, 그, 뭐라 해야 하지……. 그렇군.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하다가 저렇게 됐다고? 저렇게 재미없게?”
“그 말을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후작이 그분을 어찌 대하는지를 살피고, 후작이 각하의 무사귀환을 질려했던 일부터 그를 살펴왔습니다.”
“무사귀환을 질려했던 일이라 함은.”
“각하의 첫……. 음. 처음으로 오드리나를 홀로 나섰다 돌아오셨을 때입니다.”
……아아. 그거.
그게 아마 축제 때 된통 당하고, 치료하러 떠났었던 그 일이지. 벌써 십 년도 넘은 일이다. 그 말은 곧 헤르조는 이런 의심을 십 년 전부터 해 왔다는 뜻이고. 내 속이 묘하게 써늘하게 식었다.
“라이네경의 모친이 각하께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라이네 내부의 일이었고, 각하께서는 저희에게도 결코 말씀하신 적 없이 숨겨 오시니, 제가 입에 담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건, 그러니까. 어디 보자……. 쥰의 모친이 나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
“더는 제가 각하와 함께 나갈 수 없게 된 날, 그래서 후작에게도 이만 각하의 기사를 그만두도록 말했던 바 있습니다. 그 다음 날, 후작의 서임이 깨졌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각하의 보좌로 들어가더군요. 제가 그의 악행을 알고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으니 섣부른 짓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은 보좌나 기사와는 정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
“저는 그가 이번에도 스스로 물러날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소문만 각하와 발리앙 후작에 관한 것일 뿐 내용은 필르 발리앙과 라이네경의 혼담이지 않을까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님과 필르 발리앙이 약혼한다는 말이 돌아도 각하께서는 계속 발리앙 저택에 방문하시는 고로, 정말 저 미친 자식이 에본느와 결혼하려나 보다…….”
마지막에 나온 비속어와 내 이름은 못 들은 척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의 맹점을 짚었다.
“하여, 그럼, 발리앙 후작이 나를 죽이려는 걸 직접 본 건 아니라는 거네.”
“……저는,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었던 겁니다. 그러나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던 게, 딱 한 번, 각하께서 쓰러지셨던 일로.”
“내가 쓰러졌다는 말이 밖에 새어나갔을 리가 없는데.”
“…….”
기대고 있던 관자놀이를 긁적이듯 쓰다듬으며 한 가지 짚자, 헤르조는 침묵했다.
쥰의 모친이 죽은 이유가 되었던 일이다. 그리고 후계자로 유력한 적녀의 건강에 대한 일. 아버지께서는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 그대로 새어나가게 하지 않으셨던 바.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손에 기대느라 기울어진 목에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침묵이 파고 들어간 식은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알았는지 말해.”
그의 입 꼬리 부분이 잘게 떨렸다.
나는 흣, 코를 울리며 코웃음을 짧게 웃었다. 이대로 넘어갈 생각, 조금도 없다. 헤르조의 침묵은 용납할 것이 아니었다. 손을 떨어뜨려 팔걸이를 잡으며 천천히 다시 물었다.
“너는 들었다고 했다. 말해준 사람이 누군가.”
“…….”
“나는 네가 들은 말을 쉬이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직감하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원해왔던 답을 이 자리에서 얻게 되리.
위험할 것을 알고 시작한 일이고, 빠른 길을 놓아두고 택한 길이다. 아무도 나와 발리앙의 관계를 모를 때 아리엘을 죽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내가 기억을 찾고 오드리나에 올라왔을 때만 하더라도 아리엘을 죽이기에 아주 늦은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기에.
기억을 찾기 전부터 의심스러웠던 바가, 기억을 찾고 난 후 옛일과 이리저리 맞물리니 그냥 아리엘만 죽이면 될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몸을 바로 세웠다.
내 느슨했던 자세가 달라지자 헤르조도 한 차례 자세를 고쳤다. 나는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의 범위를 계산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이 일들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일이고, 나는 네가 경계하고 있는 자가 아닌 다른 자의 손에 자칫 죽을 지도 모른다.”
“…….”
“누가 그것들을 네게 말해 주었나.”
어느새 긴장으로 경직된 침묵이. 장갑 안의 손끝이. 차갑고, 뜨거웠다. 베르덴을 고발하는 게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헤르조가 어째서 쉬이 고발하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잘, 알 것 같았다.
오래 전부터 확신에 가깝게 의심해왔던 사실이 증언되는 이 순간.
“……르네.”
헤르조가 마침내 대답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르네가 말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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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끝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