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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꽃 작가님-104화 (104/157)

00104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동생과 가문을 보호한 베르덴을 이해했듯, 알드리히를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어. 나만 해도 황제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면 지체 없이 움직였을 터. 손을 가만가만 거두며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방금 차를 마셨음에도 그새 말라 버린 입을 열었다.

“그들이 부탁한 사람이 다른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미로 골목으로 보내려 하셨습니까.”

“예.”

“후에 이용하시려고.”

“예.”

죄인들을 죽이는 것을 막는 모습을 보이게 하고, 그것을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하고자 한다면 죄인들이 살아있는 게 여러모로 좋다. 쓸모가 많아질 터. 나는 차분하게 예상을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작전은 말살이 아니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알드리히가 깊게 웃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포르타경에게 달렸지. 몇 명은 남겨두도록 말은 흘려놓았는데, 항명과 다름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내 말을 들을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그 다른 귀족에게, 포르타 백작이 실각할 것도 알리실 작정이셨습니까?”

“그건,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대답들이 그야말로 황제의 대답들인데, 나와 친하기에 해주는 황제의 대답들이다. 또한, 이 역시 나를 살살 떠보는 질답, 이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혹시라도 알드리히가 라이네에 악감정을 가져, 훗날 발리앙을 옹호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아까도 생각했듯, 황제와의 관계를 되도록 어그러뜨리지 말아야 하는데. 명치에서부터 나온 숨이 흐리게 흩어졌다.

알드리히는 작정했다. 캄캄한 새벽이란 시간은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도 하지 못하게 될 때가 생기고는 하지만, 황제에게 그런 미친 감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작정하여 나를 긁고 있었고, 그럼 내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도 예상을, 하고, 각오도.

나는 씩 웃었다가 단숨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각오도 응당 했겠지. 라이네나 되는 가문의 가주에게 이리 솔직히도 말을 했다면.

“칙서를 내리시면 어쩔 수 없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문서화 하실 명령이 아니라면, 라이네 가주로서 명 받드는 것을 거절하겠습니다. 이는 온당한 결정이며, 다른 대귀족가의 가주들이라 하더라도 이리 거부하였으리라 확신합니다.”

알드리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왜요?”

“나라가 있어야 가문이 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를 명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가문을 우선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말씀하신 바, 제가 직간접적으로 살펴야 할 이가 수만입니다.”

“해서요.”

“제가 난데없이 맞은 이는 예전에 알던 용병이었을 뿐입니다. 미로골목을 어찌 없애시든 저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포르타 가문은, 물론 옛 친구의 가문이긴 하지만 제 본가에 우선할 가치는 당연히 없습니다. 또한 포르타 백작의 결정에 대해 제가 가부를 논하며 명령할 권리 역시, 없습니다.”

듣는 내내 알드리히는 웃는 얼굴로 평온했다.

그러다, 어떤 감정들이 선명하게 뒤엉킨 눈으로 웃음을 새로이 고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을, 포르타 백작에게 내가 전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무심코 침을 삼켰다.

그 멍청한 반응을 스스로 깨달은 그 순간 또, 무심코, 자문했다.

나는.

이 질문에 동요했나.

그러나 뜨겁게 끓는 숨을 잔잔하게 코로 흘리며, 정중하게 웃었다.

“제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질 것을 항시 경계한 채로 나옵니다. 고르고 고른 말이오니 뜻대로 하십시오.”

“그래요.”

“그러나 폐하. 어느 한 가주가 당하는 모욕이, 저희 열 세 가문 가주들 모두가 당하는 모욕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가 협박하였으니 나 역시 정중히 협박하였다.

예전에 내 계획된 파국을 결국에는 막지 못하였듯, 황제는 만능이 아니었다. 우리가 있기에 황권이 억눌리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있기에 황권은 건재할 수 있다. 특히 나의 라이네.

건국 이래 이 나라와 함께 역사를 쌓아온 이 라이네.

그 가주가 젊은 황제와 친하다는 건 어떻게든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알드리히를 존중하는 것보다 더 내 가문의 가치를 존중했다.

따라서 써늘하게 가늘어지는 음성을 듣고도 거의 멀쩡할 수 있었다.

“그 말, 사이 나쁜 가주들이라 하더라도, 황권 앞에서는 하나로 뭉칠 수 있다……?”

“…….”

“누이 정말 라이네 공작 다 되었네요. 아, 모욕하려는 건 아닙니다. 우리 예전이 떠올라서. 나는 황태자, 누이는 소공녀일 때.”

나 역시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아마도 베르덴에게 언젠가, 이상론을 말하였던 우리 옛날.

공작의 할 일과 마음가짐, 이 나라를 위해 등에 진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설명하며 약간이나마 진심을 담을 수 있던 그 옛날.

이제는 한 번 죽어, 이 나라보다는 라이네가 당연하게 우선이 된 지금의 나와 몹시도 달랐던 모습이 막연하고 흐릿한 형태를 입고 떠올랐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사이, 먼저 추억을 시작했던 알드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문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할리가 빠른 걸음으로 먼저 떠났다. 황제를 전송할 준비를 위해서다.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내 인사를 받고 말에 오르기 전에, 내내 말이 없던 알드리히가 나를 보았다. 그의 기사들이 눈치껏 제 말들의 고삐를 잡고 물러났다.

“누이.”

“예. 폐하.”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흐트러지는 황제의 머리카락을 잠시 보다가 눈을 내렸다. 알드리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그레 웃었다.

“내가 여태 누이에게 말해왔던 것들. 아주 오래 전부터, 누이에게 말해왔던 것들의 많은 부분이 거짓입니다. 그리고 거짓이라 말하는 이 말 역시 거짓일 수가 있어요.”

“……예.”

“그러나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건, 누이를 향한 내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거고요.”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에 따라 쳐낼 수 있는 것처럼, 누이도 그럴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계속, 그렇게 남아 있어줘요, 차라리.”

돌아서는 알드리히에게 나는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

그는 나를 돌아보고 잠간 시선을 교환하다가, 슬쩍 웃음을 보였다.

조금 전 알드리히는 여러 가지를 말했으므로, 내가 한 말이 그 중 어느 부분에 대한 동조인지는 그 생각하기 나름이다.

떠나는 그들이 어둠에 잠겨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어깨 위에 겉옷이 올라왔다. 덕분에 윗배가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들 때까지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다 체한 것처럼 속이 뒤집혀 욕지기가 오를 즈음, 그제야 나는 현관의 계단을 올라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겉옷을 끌어내리고 다시 할리에게 건넸다. 문득 내가 알드리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저도 그렇습니다.

동조했던 바. 거짓에 대하여.

나는 끓는 한숨을 쉬고 뒷머리를 매만졌다. 내게 한 많은 부분이 사람을 대하며 거의 항시 거짓을 섞어 왔다. 웃음이 그랬고, 말의 내용도 물론 그랬다.

물론 나만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 하고, 이권을 지켜야 하는 수많은 귀족들은 때때로 크나큰 것을 걸고 치밀하게 거짓으로 치장해야 했다. 따라서 황제가 내게 항시, 언제나 진심만을 내보였으리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거짓인가, 저것은 거짓인가, 그것은 또 어떠한가, 하며 하나하나 판단을 해왔어야 했고.

나는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고, 아마 그 역시 내 말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알드리히가 내가 무엇에 대답하였는지를 바르게 깨달을 시의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이제 와 스스로에게 자문하건대, 오늘 내가 황제에게 한 말 중 거짓은 얼마나 있었나.

시드니에 대한 우리의 대화와, 매 문장마다 하나하나 해야 했던 상황 계산을 떠올리자 마음이 처참하게 식었다. 나는 차게 식은 오른 손의 장갑을 벗어 쥐고, 맨 손으로 눈꼬리부터 이마 일부, 관자놀이와 귀 일부를 눌렀다.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시종은 어찌 했나.”

“일단은 입을 단속하도록 경고하고 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귀찮게 되었군. 어디 가문 출신이더라.”

“타르디프 가문입니다.”

“……가엘경의?”

“예. 먼 조카뻘 되는 것으로 확인하고 온 참입니다. 둘 다 방계입니다.”

가엘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그 일족 모두를 신뢰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손을 내려, 얼어붙은 얼굴을 더듬더듬 쓸다가 쿨룩 마른기침을 했다. 할리는 그에 즉시 반응했다.

“각하. 몸이.”

“아니야. 다시 덮어줄 것까진 없고. 큼. 목이 건조해서 그러네. 일단 올라가지.”

집무실로 돌아가며 몇 번이고 헛기침 같은 마른기침을 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자마자 조금 아찔하더라. 나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끙 신음을 흘렸다. 할 리가 따라준 물을 마시니 육신이 그나마 평온에 잠기는 느낌이 들었다. 쉴 시간 없이 몰아치던 만남들로부터 해방된 머리도 조금씩 평온에 잠기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무슨 일이 이리 역동적으로, 그것도 연속적으로 일어나나 싶었다.

자객을 맞이하고, 황제를 맞이하고. 그러나 내가 따뜻한 방에 앉아있는 이 시각 이 새벽, 시드니는 미로골목에서 피를 보았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일이었든지 간에, 이번 일로 얻을 어지간한 이득이 과연 있을까. 없다면 그는 미련한 짓을 한 것이나, 시드니를 보며 나는 정치적으로 미련한 사람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아니, 있기야 있으나 그건. 실로 오래 전의 일이라서…….

“…….”

옥에 갇힌 나를 비호하다 기사단장에서도 물러나고 대귀족 가문에서도 빠지기 직전까지 갔던 그를 떠올리고 침을 삼켰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할리의 가슴 정도까지 시선을 올렸다가 툭 내렸다. 나는 이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느리게 보좌를 불렀다.

“경.”

“예, 각하.”

목이 또 건조해졌다. 아직 손닿는 곳에 놓인 잔을 들고 뒤통수를 등받이에서 떼었다.

“한 가주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 못할 일을 하고 있네.”

마셨다.

“그 일로 그 사람이 얻을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기에 문제야. 내가, 어느 정도만 되어도 다른 가주들에게 알리고 함께 그와 그의 가문을 경계하겠는데, 아. 전부터 왜 이러나…….”

축축하게 젖은 목이 떨며 탄식했다. 아리엘이 마법사임을 내게 알려주었던 일, 가엘이 말했던 킨들 라이네에서 나와 아버지를 구했던 일, 쥰을 킨들 라이네 토벌에서 제외했던 일, 아버지 돌아가시던 밤에 제 피를 흘려 검은 피를 감춰주었던 일, 아리엘에게 청혼서를 넣은 일, 미로골목을 토벌한다 하는 저 일, 황제에게 약점을 잡혔다 하는 저 일. 모든 게 같은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확증도 없을뿐더러 확신도 없다.

설마 그리 미친 짓을 하였으려고.

설마, 그의 옛 친구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그런 목적으로 이 모든 미친 짓을 하고 있으려고.

설마.

나는 잔에서 손을 놓고 두 손을, 턱을 든 얼굴 위에 툭 얹었다. 설마. 한 번도 미련한 적 없던 당신이 그랬으려고. 아직 왼 손은 여전히 장갑을 낀 채였다는 걸 깨달은 건 오른 눈만이 손끝 냉기에 식어갔기 때문이다.

정신이 없다. 손을 번뜩 떼고 나머지 장갑도 벗어던졌다. 나 하는 모양을 보고 있던 할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응.”

“역시, 포르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또. 왜 당연한 것처럼 거기가 나와. 뭐 아는 게 더 있나?”

묘하게 포기하게 되었다. 피곤해. 힘없이 물으며 양 손으로 병을 기울여 잔에 무언가를 따르는 시늉을 하자, 할리는 유리로 된 작은 진열장에 가서 비상용인 술 한 병을 꺼냈다. 잔은 되었다고 손짓했다. 아직 남은 물을 한 번에 벌컥벌컥 마시고 내밀었다.

찻잔이 아니라서 그나마 품위 비슷한 게 유지되는 술자리로 남을 수 있었다. 내가 내민 게 찻잔이었다면 할리는 내 손짓이고 뭐고 따로 잔을 가져왔을 거야.

신중하게 술을 따르기 시작하며 그가 늦은 대답을 했다.

“각하께서 알고 계시는 것보다 더 알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그런가.”

샛노란 술이 멈추었다. 퐁, 하는 귀여운 소리가 나며 끄트머리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옅게 흐늘거리는 웃음을 웃으며 잔을 들었다.

“허면 왜 당연한 것처럼 포르타라는 이름이 나오나.”

“……각하께서…….”

서너 모금을 마시려 했는데 한 모금을 마시고 멈추었다. 나? 의아해하며 그를 보자 기사는 약간 흐트러진 당혹을 내보였다.

“각하께서 포르타 저택을 손수 순찰하실 만큼 신경을 쓰고 계시고…….”

“…….”

이제 내가 당혹스러워지고 말았다. 사레에 들려서 급히 잔을 내려놓고 기침했다.

“각하!”

“아니, 아니, 됐어. 내가 순찰한 게, 그게 왜?”

“……너무, 음, 각하께서는 포르타 백작이 무슨 의도로 청혼서를 넣었는지, 음, 그러니까, 아직은 정확히, 음.”

“모르지. 그냥 말해.”

“예. 모르시는데. 모르시니까, 그게 혹 라이네에 해를 끼치려 하는 의도일 수도 있는데도 각하께서는 당연하게 포르타 백작을 지키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음…….”

침묵이 어색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다가, 어느 한 군데에서 덜컥 걸렸다. 혹시 이건가.

떨떠름하게 정적을 깨부수었다.

“아니, 저기. ‘나 전부터 왜 이러나,’ 가 아니라 ‘그 사람 전부터 왜 이러나’였거든? 이것 관련해서 지금까지 말한 건가?”

“아.”

진짜냐.

한 모금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느리게 넘겼다. 그리고 그 느린 목 넘김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숨 막히게 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이 있다고 설명하고 싶었던 건가?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하려고?”

“…….”

“이야아, 이거 뭔가 신기하기까지 한데. 그래도 주제넘은 짓 했다는 건 알겠지.”

“예. 죄송합니다.”

“경도 나도 피곤할 시간이긴 하지.”

넘어가 주기로 했다. 도통 잠들지 못하는 나 때문에 이 새벽까지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정도 미덕은 베풀 수 있다. 씩 웃고 문을 향해 턱짓했다.

“괜찮으니 이만 가서 쉬게.”

“각하…….”

“화 난 것 아닐세. 가서 쉬어. 나는 조금 더 여기 있다가 잘 테니.”

“예. 각하.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래. 내 꿈 꾸게.”

“…….”

이 자식 순간적으로 질색했다. 분명 질색했어.

나는 그래도 싱글싱글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배웅해주다가, 그가 나가고 나서도 잠시 문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었을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에는 황태자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황제다. 그런 사람으로부터의 하사품, 귀히 여기고 보관해야 할 밖에. 그러나 남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 두어야 할 것은 분명히 아닌지라 상자에 넣어 잠근 뒤 이 집무실에 두었었다.

술 진열장 바로 옆의 큰 진열장, 그중에서도 가장 위의 선반.

조심스럽게 꺼내어 책상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두 손으로 받친 상자는 기억하는 것보다 묵직했다. 열쇠를 불러내어 자물쇠를 열었다. 알드리히가 주었던 상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 상자를 또 열고나서야 나는 목적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

질 좋은 천에 휘감긴 검을 꺼내어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발검했다.

번쩍거리며 선 날이 살기등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저 보아도 지나치게 멋지고 수려한 검이다. 내가 전처럼 무인임을 드러내고 다녔다 하더라도, 실전에 쓰기에는 몇 번이고 망설여질 만큼 화려했다.

피를 머금어도 괜찮도록 만들었으나, 그래도 전시용으로 추천할 만한 그럼 화려함.

검에 새겨진 넝쿨을 따라 핏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걸 막연히 상상하다가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일단 보아야 할 것은 검병과 검격이다. 조금 전 잡았던 검 손잡이와 그 주변에 더듬더듬 손을 대어보았다.

자잘하게 박힌 보석 중 하나에 검지 끝이 닿았다. 차게 닿았으나 아프지는 않다. 쥐고 검을 들 때도 약간 까슬까슬하기만 했던 바. 장갑을 끼면 거의 느끼지 못할 거슬림일 것이다.

심미안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정도에서 색색의 여러 보석들로 치장된 검은 대단히 호화로웠다.

……뜻인가.

같은 색의 보석도 아니고 색이 다른 보석들이다. 색이나 보석에 까다로운 사람은 보기 어지러울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심미안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눈, 내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꽃에도 말이 있듯이, 보석에도 말이 있다고들 한다. 크게 신경을 기울일 정도로 당연시되는 교양은 아니었기에, 외운 적은 없었다. 의미 있는 보석을 박은 선물을 해본 적도 없어서, 나는 흔히들 쓰이는 보석들만 몇 개 구별할 수 있도록 받았던 교육만 기억할 뿐이다.

검을 돌려가며 이리저리 훑다가 어느 붉은 보석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이, 붉은색의 보석은, 석류석 정도 될까. ……그 외에는 모르겠다.

나는 보석은 포기하고 나머지 부분을 살폈다. 검집의 세공은 검의 세공과 같이 그저 부드러운 넝쿨. 무언가 뜻이 있다면 보석이다. 전부 살피고 나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밤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보석 감별을 할 수 있는 마법사를 불러오는 수밖에.

상자 안에 검을 돌려놓았다.

새벽 네 시.

이미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할 시각이다. 시계를 보고 한숨과 함께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몇 번 기침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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