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
“누이와 나처럼 이라고 물었습니까? 바비에르 일과 기타 등등을 할 때의 누이와 나처럼? 아니야. 오늘의 일은요, 누이, 그렇게 기분 좋은 믿음 같은 건 조금도 없이 진행하는 겁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번 일은 필시 소란스러워질 터인데, 여차할 시에 알드리히는 포르타를 버릴 것이다. 바비에르의 일에 대해 황제의 비호를 조금도 받지 못한 내가 여기에 있었다. 하물며 시드니가 실각하길 원한다고 알드리히가 선언했다면. 나는 이제 웃지 않는 게 아니라 웃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여전한 황제였다.
“누이를 죽이도록 의뢰한 자들은, 말했듯이, 일단 가만히 두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경계하면서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
아주 자연스럽게 돌려진 주제였다.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한 주제. 나는 감각이 무뎌진 것 같이 저린 손을 올려 이마에 나와 있는 잔머리를 관자놀이 쪽으로 쓸어 넘겼다. 어제 새벽의 일로 생긴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 아픈 자극이 머리를 깨웠다.
시드니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황제를 섬겼는데……. 충성이 없다니 이 무슨 정신 나간 말이야…….
그러나 변호는 생각지 않는다.
방금 알드리히는 내게 경고했다. 제 눈을 항시 경계하고 염두에 둔 채로 움직이라고.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 지금은 몸을 적당히 숙이고 있는 게 나았다.
하여, 가만히 두겠다 하는 저 말을 듣고 방금 내가 떠올린 물음은 한 자락도 내비칠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약속했기에 가만히 두는 게 아니라, 후작가나 되는 발리앙 가문을 쉬이 건드릴 수 없으니 일단은 가만히 두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이죽거림.
흘러넘칠 것 같은 조소를 어떻게든 삼켰다. 뱃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라. 내려가, 죽어라. 나는 이런 대화에서도 냉철하게 버틸 줄 알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마비되어 지끈거리지도 않던 머리가 풀리고, 풀리기를 계속했다. 충직한 기사 하나가 버려지리라는 말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는다.
나는 무심하게 들릴 만한 음성으로 알드리히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여, 현재 수행중인 이 계획을 제게 말씀해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반응이 그것으로 끝입니까?”
이상한 질문을 한다.
나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멈칫했고, 황제는 눈을 살짝 찌푸린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그에 나 역시 비슷하게 보일 미소를 지었다.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
“폐하. 저는 그를 분명 친구, 혹은 옛 친구의 형제로 친근하게 여기고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느낌에 불과할 뿐 실제 사이는 아주 가까운 편이 아닙니다. 무얼 원하셨습니까?”
“……누이는.”
“…….”
“누이는……. 정말…….”
이번에는 이상한 반응이었다.
알드리히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와 사귀어 오며 처음 보는 반응. 분노인가, 부끄러움인가. 가려지지 않은 부분이 붉어진 것이 보였으나,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트렸다.
시드니와 나 사이에 대하여 사족이 길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알드리히가 바랐던 건 아무래도 나의 격한 반응이었을 것 같다.
아,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일을 중지하도록 달려갔을 수도 있겠지. 그리 가면 시드니는, 알드리히가 나를 이용하기 위한 인질이 되었으리. 그 사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황제에게 확인시켜 주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이미 황제의 설명을 들어 미로골목이 이 밤에 쓸릴 것을 알게 된 채였다. 유사시에 알드리히는 시드니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함께 엮어서 황제의 방패로 삼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혹시 모를 미래, 이대로 앉아 있는 게 발 뺄 수 있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턱을 들고 천정을 잠시 보았다.
-제게 사각은 없습니다.
일 년, 아니, 아니다. 일 년은 훌쩍 넘긴 전쯤, 알드리히에게 농처럼 한 말이긴 하지만 사각을 최대한 없애야 하는 것은 맞았다. 세상 어느 가문, 어느 사람, 어느 가주가 완전무결하겠느냐마는, 그럼에도 최대한 완전무결하고 고고하게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약점을 스스로 내보인다니 어불성설.
그리고.
“…….”
그리고 애초에 시드니는 내 약점이 아니었다.
쥰도 이용해먹는 지경인데 아무리 그가 중요하다 해도, 이성을 잃을 정도로 중요할까, 설마. 내 마음이……, 중요할까, 설마.
나는 수많은 사람을 날개 아래 둔 사람이다. 내가 지난 며칠간 선뜻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생각만을 거듭하였던 까닭도 내 손에는 수천수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빚을 졌다 하며, 옛 친구에 대한 사감만으로 움직이기에는 내 의무가 막중했다.
알드리히가 나와 친구라 하여도 여전히 황제이듯, 나 역시 한 차례 억울하게 죽은 자이기 이전에 여전히 라이네의 주인이기에.
그래서 적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라이네가 흔들리는 일 없도록.
그리고 그렇기에,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응당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미로골목이 사라진다는 변수를 어떻게 메꾸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드니가 아니야. 포르타가 아니다.
그 때 알드리히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뻐.”
고요하게 숨을 들이켜고 눈을 내렸다.
그는 이미 손을 내리고 멀끔한 얼굴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누이가 포르타경을 당연하게 ‘버려서’, 참 기쁩니다.”
말하는 도중 한 단어를 꾹꾹 내리누르듯 말하였기에, 자연스러운 강세가 들어간 게 느껴졌다.
버린 게 아니…….
입이 반사적으로 뻐끔 벌어졌으나, 그 정도는 호흡을 위한 일상적인 움직임이다.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다물었다. 굳이 변명하여 어떤 여지를 줄 필요가 없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경련이 아니었던 탓에.
일견 선뜩한 느낌까지 있는 싱글거림을 마주하며, 나는 입 꼬리를 올렸다.
‘겨우’ 이 정도 써늘한 말에 동요하여 평정을 잃을 만큼 헛되이 교육 받은 적 없다.
얼굴이 다시 하얗게 가라앉은 알드리히는 키득거렸다.
“이런 데에서는 차별이 없네요.”
“차별 말씀이십니까?”
“상대가 나든, 포르타경이든, 누이에겐 라이네가 최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가문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가주가 도리어 드물 터.
내가 덤덤하게, 일상적으로 짓는 웃음을 씩 보이자 황제의 웃음도 묘하게 가벼워졌다.
“뭐, 이 정도로 하지요. 너무 오래 있을 수 없으니 슬슬 정리하겠습니다. 예, 오늘, 누이 떠보러 온 것 맞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른 귀족이었으면 미로골목 자객과의 접촉을 빌미로 이것저것 하려고 했는데, 누이라서 그냥 지나가려고요.”
그건, ‘지금 당장’은 그냥 지나가 주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후에는 황제가 어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적당히 걸러듣고, 자객과 나는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비죽 웃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그에게 달려 있는 반응. 눈금에 맞추어 길이나 용량을 재어가듯,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시선에 태연하게 대서가며 마침내 찻잔을 들었다.
잔을 들기 위하여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다시 등받이에 서서히 묻었다. 약간 식은 찻물이 혀에 쓰게 닿았다. 적셔져 간다. 내 목이 바싹 말라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저 일을 말한 건, 이유는 같습니다. 떠보려고.”
“……떠보기 위함이라는 이유 하나만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훗날을 위해 포석을 깔아놓는 거지요.”
훗날?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눈을 깜박거리다가, 침통해 하는 척, 걱정하는 척, 물었다.
“저도 함께 버리려 하십니까?”
“내가 누이를? 틀려요. 내가 왜 누이를 버려. 그런 게 아니라. 쓸지 쓰지 않을지는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은, 그런 일에 대한 포석입니다.”
아하…….
더 물을 수 없는 바.
황제는 내가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는 기색을 비치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물을 게 있어서 행차한 것이기도 합니다. 황궁은 워낙에 듣는 귀가 많아서.”
“하문 하십시오.”
“내가 전에 주었던 검. 기억해요? 나 아직 황태자일 적.”
검이라 함은.
나는 생각하느라 눈을 왼편으로 굴렸다가, 문득 떠오른 것에 다시 황제를 보았다.
“예.”
“포르타 영식과 절교한 기념으로 준 건데. 기억납니까?”
……야, 인마.
그러고 보니 시기가 그랬었다. 쥰의 생일 다음 날이었던가, 아마.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런 의미가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너무 하십니다. 제 불행은 폐하의 행복입니까.”
“아, 미안. 그런데 그건 진짜 기뻤거든요.”
“…….”
나중에, 알드리히가 누군가와 절교하면 기쁘게 무슨 선물 하나 바치기로 했다.
그런데 그와 절교하고 말고 할 만한 인물이 나밖에 없어. 이 무슨 지랄 맞은 상황인가……. 앓는 소리를 혀뿌리에서 부러트렸다.
정색하고 받아쳐야 하는 말은 아니므로, 져주어야 좋은 이 상황. 비슷한 권력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진짜 권력이 깡패다. 신분이 깡패.
“어쨌든, 본론은 그게 아닙니다. 그 검, 하나하나, 구석구석 다 잘 살폈어요?”
“예. 아름다웠습니다.”
“감상 묻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하나 의미를 잘 살폈느냐는 말이야.”
“…….”
의미. 검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의미라 함은 아무래도.
나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 잘 벼려진 날을 보고 감탄했었다. 무게도 적당하게 느껴졌었고. 그러나 화려하기는 또 어찌나 화려하던지, 검집과 검병 끄트머리에 점점이 박혀 있던 색색의 작은 보석들은 놀라울 정도였던 게 기억났다.
허면 보석의 의미인가. 아니면 세공한 문양의 의미인가.
꺼내보지 않은지 오래인 그것을 떠올리다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자잘한 것에서 당연하게 의미를 찾습니까. 그냥, 내가 해주고픈 말은, 그 검 자체가 기회를 의미한다고.”
“…….”
“내가 누이에게 허락하는 기회입니다. 지금 당장 깊이 생각할 건 없어요. 호의고, 호감이고, 내 마음이에요. 누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며 주기에 좋았던 선물이야. 검보다는, 어쩌면 내 허락이 선물이라 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락이 선물.
무슨 말인지 도무지 가늠하지 못하겠다. 알드리히가 무언가를 알게 된 요즘에 준 것도 아니고, 벌써 2년 여 전이다. 당시 일어났던 일이라고는 헤르조와 나의 절교뿐. 전후 사정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으니 살짝 열이 받는다. 혹시 그와 절교할 기회를 허락한 건가.
그러나 그걸 직접적으로 물었는데 그게 아니면 분위기가 심히 민망해지리.
나는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무얼 윤허해주셨다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회요. 떠넘길 기회.”
“음. 여전히 이해치 못하겠습니다.”
“가서 일단 검을 보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내게 와요. 설명 해줄지 해주지 않을지는 그때 가서 봐야겠습니다만.”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알드리히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지도 모른다.
웃는 얼굴로 그러니 더 섬뜩하고 무서운 것이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구부려 잔이 놓인 받침을 테이블에 놓고 있는데, 알드리히가 부드럽게 내 머리 위로 속삭였다.
“할 말은 다 끝났으니, 가 봐요, 누이.”
나는 고개를 올렸다.
“가서, 막는 시늉을 해요. 약속했던 대로 죄인들에게 보여줘.”
뻐근하게 굽어 있던 척추를 폈다. 양 어깨가 절로 스르륵 펴졌다. 몸을 다시 세우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조금 전에 이 이야기는 제대로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는 내가 미로골목에 가는지 떠보려 하는 게 아니라 기어이 보내고자 한다는 말이다. 미로골목에 가고 말고의 여부, 더는 포르타와는 관계가 없다.
나와 관련하여 무언가 다른 의중이 있구나. 이 사람. 나를 기어이 이용하겠다는 속셈인가.
나는 그가 내게 한 것처럼, 부드럽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가길 원하십니까?”
“예.”
“폐하. 외람되오나, 무얼 진행 중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누이를 왜 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항하는 건 좋지 않다. 예의 운운할 이유가 아니라, 그게 대답하기 싫은 약점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 알드리히를 잠시 보다가, 나는 질문과 대답 중 대답을 하기로 선택했다.
“절 움직이셔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요. 정확히 말하면 누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고, 알아야 하거든.”
그가 말하는 저 사랑은 우정이나 충성 등으로 치환 가능한 사랑일 것이다.
이성의 마음을 고백하던 매 때와 여실히 다른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나는 웃으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알드리히가 보기에 나와 시드니는 깊은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고, 시드니의 충정에 의심을 가진 알드리히는 나와의 우정도 재고해보고 판단해 보아야 했으리. 시드니와 내 눈빛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이유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미안, 누이. 라이네의 약점을 잡아두는 게 나한테는 편한 거 알잖아요.”
“……이번 일에 제가 약점 잡힐 바는 호리만큼도 있지를 않고, 이미 폐하와 저는 많은 걸 함께 해 왔습니다. 어째서 새삼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누이는, 내게서 등 돌려서는 아니 되니까.”
내가 등 돌리려 하는 즉시, 알드리히가 나를 추락시키고자 들춰낼 일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 일들은 내가 알드리히에 대항하여 입을 열면 황제의 권위 역시 함께 추락할 일들이기도 했다. 이른바 양날의 칼이라는 것이다.
자객이 내게 온 이참에, 황권에 해가 가지 않을, 라이네의 약점만을 확보해두기를 원했을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는 손을 올려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가죽이 아닌 흰 색의 면장갑 안에서 손 살갗이 밀렸다.
이해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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