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CHAPTER 9. 악, 그 두 번째 =========================
문제가 일어난 건 저녁 11시 즈음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침실의 베르제르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붙이던 중이었음을 빠르게 파악하고, 발을 움직였다. 발꿈치로 쳐낸 검이 의자 밑에서 튀어나왔다. 몸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자마자 몸을 세웠다.
눈앞, 격돌했다.
끼긱. 혹은 킹.
찌르고 들어온 칼끝이 검집에 박혀 있었다. 나는 아직 움직이지 못했던 오른 손도 마저 올려 검집을 잡았다. 그리고 박힌 상태에서도 계속 나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 것을 힘주어 밀어냈다.
오락가락하던 힘겨루기는, 천천히 검병 쪽으로 움직인 오른 손이 마침내 검병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나는 그것을 뽑으며 검집을 휙 틀었다.
검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힘과 내가 뽑아내는 힘이 합쳐져 빠르게 검과 검집이 분리되었다.
뽑힌 검이 빠르게 자객의 허리춤을 찌르고 들어갔다. 아무도 당하지 않았고, 나도 공격이 성공할 것을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자가 물러난 덕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릎에서 책이 떨어졌다.
그런데 날아가듯 물러나야 했던 자객이 갑자기 말하더라.
“언니, 잠깐, 나야.”
“…….”
“항복.”
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는 목소리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내 웃음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둠 속에 있던 남자가 벽난로의 불빛이 닿는 곳으로 나오며 느긋하게 자기 상태를 주장했다.
“진짜야. 나 밖에 안 왔어.”
“……그걸 내가 모를 것 같나.”
머리가 아프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여차할 시에는 막을 자신이 있다. 나는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 개 켜 놓았던 초는 어느새 꺼져있었다. 방의 애매한 컴컴함이 설명되었다. 눈을 붙이기 전에는 이것보다는 환했던 걸로 기억해서.
타닥타닥 불티가 튀었다.
두통이 있었다. 뒤통수에서 어떤 줄기 다발이 투두둑 탄력 있게 휘며 끊어지는 느낌도 났다. 쌓인 피로도 이유일 것이며, 부족한 잠도 이유일 것이며, 이 빌어먹을 놈들이 독을 쓰기는 그렇게 강한 독을 썼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직 상처가 있는 왼 손이 문득 아렸다.
남자는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처음이네. 공작각하께서 머무르시는 방은 이렇구나.”
나는 짧게 헛기침하듯 웃었다. 이런 태연한 목소리를 듣고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잠시 미루어두긴 했으나 잊지는 않고 있는 바.
이 자가 나를 암살하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이 자의 수하가 나를 쫓았다.
이 자의 수하가 쏜 침에 내가 맞았고, 내 실수로 그 침이 아버지께 박혔다.
잊지 않았다.
잠시 숨이 막혔다. 입을 벌리고 숨을 쉬었다. 지난 일 년 간 지속된 이 호흡곤란은 정도가 약하여 묵살하고 사는 중이지만, 이런 가소로운 순간에도 이러면 내가 뭐가 되나. 울화를 어떻게든 쌓지 마시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호흡이 가다듬어지자 나는 몹시도 간만에 보는 남자를 향해 짧게 웃었다.
“하여. 여기서 죽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방금 그게 언니 농담 중에 최고로 재미있었어.”
“왜 왔나.”
한담을 해서라도 이끌어 내야 할 정보가 있기야 있으나, 정확히 말해 내가 필요한 건 정보 자체가 아니라 이 자들의 증언이다. 설득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설득해야 하는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이 자리가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탓이다.
라이네 저택에는 항상 나를 죽이러 왔으면서, 공격 한 번으로 물러나는 게 저자의 개념으로 가당키나 하나.
게다가 혹시 이 죄인의 출입을 적이 보고 있을 지도, 보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은 기회를 주자 남자가 씩 웃었다.
“거래하자, 언니.”
이해할 수 없었다.
웃는 얼굴로 눈을 찌푸리자, 그는 티테이블의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마주앉아 대화한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벽난로 불로 얼굴은 보이되, 공격당할 시를 대비했을 거리다.
이 밤에 찾아와서 하려는 말이 거래 어쩌고. 그럼 방금 한 공격은 또 뭔데. 의아해하자 남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전에 말이야. 언니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 적 있잖아.”
“…….”
“라이네 저택으로 한 명 들어가고, 추적자가 있고. 그런 거, 내가 대답해준 거. 기억 안 나?”
“어떨 것 같은데.”
“난다고 치고, 그럼.”
“…….”
나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검을 잡고 있는 오른 손목을 돌렸다. 일단은 계속 들어보겠다는 거다. 남자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면 흥미롭다. 지켜보는데, 잠시 단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언니에 대한 악의를 크게 가진 사람이 있어. 분명히.”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악의일 텐데.
이미 알고 있는 바. 내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말을 하러 온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은 짤막하게 물었다.
“해서.”
“난 그 자가 누군지도 알아.”
“해서.”
“그쪽을 가지고 놀아줄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픽 웃었다.
“개소리를 하는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언니를 도울게. 대신 윌리엄 새끼의 용병단을 없애고, 죽이고, 나와 손잡자. 내 목숨을 보장해.”
“…….”
보장해 주라는 말도 아니고 ‘보장해.’
자기 입장을 잊어버린 것 같은 말이다. 그만큼 절박하여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아니면 아직은 평소처럼 여유만만하다고 말하기 위한 허세인가. 나는 돌리던 손목을 멈추고, 유심히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일 년 반 전과 다름없는 여유다.
조롱하고 싶은 말이 몇 개 있었지만 참아야 했다. 내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게 발리앙이라 이미 특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자의 입을 통해 발리앙 쪽으로 들어가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하다.
그러나 조롱할 거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결국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스운 건 우스운 거다.
“세상천지 무서운 게 없던 자가, 목숨을 보장해 달라? 손을 잡자고?”
“뭐. 그런 일도 있는 거지. 재미있잖아?”
헛소리가 나날이 발전해온 모양이었다. 목숨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목숨 보장 운운하며 재미를 찾는다고?
저쪽에서 무슨 낌새를 보았나. 아니면, 이것도 그쪽의 의뢰일까. 경계하고 생각하면서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름을 말하든지.”
“비상시에 나를 보호할 건 있어야지.”
거래를 제안하면서도 나에 대한 신뢰는 없다는 말이다. 나라도 그럴 터. 이해했다.
풀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연스럽게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두통.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깨질 것 같았다. 오래 전에는 당연한 것처럼 했던 일인데도, 이런 식으로 깨어난 게 간만이라고 몸이 적응을 못하는 걸까.
서 있으니 더 심한 것 같아서 앉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앉는 건 거래할 마음이 생겼다고 여겨질 수 있어서. 아직은 아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는 희대의 개소리로 들릴 질문을 일부러 던졌다. 용건에서 약간 방향이 엇나간.
“너는 네 무리의 대장이다. 네 사람들의 목숨은 말하지 않나.”
그러자 남자는 소리 죽여 낄낄 웃었다. 여기가 침입한 라이네 저택이 아니라 미로골목 안이었다면 죽어라 웃었을 것이다.
“그게, 크흐, 그게 말이 돼? 으하하. 나부터 살아야지.”
“네게는 네 사람들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너 스스로 말했던 걸 기억 못하나 보군.”
“아이고. 그럼 언니는 언니 부하들부터 챙겨?”
“나는 라이네의 주인이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구구절절 대답할 필요가 없다.
라이네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라이네 공작이 살아남아야 할 때가 있고, 마찬가지로 라이네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라이네 공작이 죽어야 할 때도 있다. 상황마다 다르나, 적어도 전자의 경우에는 저 남자가 하는 짓과 일견 비슷했다.
이쪽은 그 희생을 방관하는 것이 의무요, 저쪽은 방관하고 싶어 방관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지만.
부하들부터 챙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든지, 나는 공작이라 나부터 살아남는 게 당연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든지,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부하들부터 챙긴다는 쪽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뚝 웃음을 부러뜨린 살인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 시선을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눈을 부라려. 속은 파랗게 식었지만 일단은 웃었다.
잠시 후 그도 천천히 얼굴에 웃음을 퍼뜨렸다.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는 건 나나 그나 비슷하다. 코웃음을 치며 보고 있자 남자는 히죽 웃었다.
“이제 그만 하지.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많잖아.”
“나는 없어서.”
어깨를 으쓱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리고 차게 식은 손끝으로 툭툭 관자놀이를 두드리고 내렸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맑아지는 머리를 느끼며 통보했다.
“그러니 앞으로 삼 분 주지. 날 설득할 시간.”
“…….”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라고 입 꼬리를 올렸다.
적을 가지고 놀아주겠다는데도 심드렁한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다. 웃음 한 부분이 깨진 남자가 이를 금방이라도 악물 것 같이 떨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질 머리는 되는 남자인지라.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말했던 추적자.”
“…….”
의뢰한 남자는 라이네 저택으로 들어갔다 하던 이 자의 말. 그리고 라이네 저택으로 가는 남자, 이제 와서는 집사임이 밝혀진 노인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자. 그래. 그 추적자.
고개를 까닥였다.
남자는 내 반응을 보고 말을 이었다.
“누군지 알고 있어.”
“해서.”
“그리고 그 사실은 반드시 언니에게 중요할 거야. 내가 장담하지. 지금 내가 언니에게 붙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목숨을 보장해달라 하더니 이제는 내게 붙는다고 한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손을 주먹 쥐었다 풀었다.
“황궁 기사들이 입는 제복을 입었었거든. 이번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까지 내렸다가, 곧바로 올렸다. 제복? 황궁 기사?
“어제 말이야. 또 왔었어. 언니에 대한 의뢰. 추적자는 또 우리에게 들켰어. 그런데 이번에는 입고 있던 옷이.”
“제복이었다고.”
“응. 근데 더 재미있는 거 말해줄까? 며칠 전에는 다른 의뢰도 있었거든. 우리는 아니었고, 미로골목 다른 놈들한테. 물론 그 멍청하고 약한 놈들은 죽이러 갔다가 되레 죽었고.”
“…….”
“어딜 갔다가 그렇게 나자빠졌나 싶어서 알아봤었어. 그 알아본 거랑, 오늘 추적자가 기사인 거랑 조합해보면, 뭔가 있겠다 싶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꽁지 빠지게 달려왔는지 알겠다. 일부러 심드렁하게 외면하고 뒷목을 주물렀다. 아쉬운 놈이 네놈이지, 나냐. 저런 장단에 맞추어 알아맞히고 어쩌고 할 생각 없다. 이 정도 급한 일이면 알아서 술술 털어놓을 것이다.
그는 드디어 이를 갈았다.
“좋아. 이번에는 그 추적자가 어디로 들어가는지 봤었어.”
“그래. 해서.”
“…….”
“흥미를 끌려면 말을 해야지. 말해. 누군가.”
“이름이 션, 션 포르타라더라.”
“…….”
황궁기사 쪽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이 부분까지 태연한 척 가장 할 수는 없었다. 검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이 돌아갔다. 웃는 표정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충격 받는 정도가 전보다는 단연코 나았다. 그가 다른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후이기 때문이리.
한쪽 입 꼬리나마 웃음처럼 유지한 채로 나는 말없이 남자를 응시했다. 훗날 반드시 죽을 살인자는 위아래 관계 명확한 이 거래를 위해 밝게 웃으며 입을 조금 더 나불거렸다.
“방금 알아낸 거야. 그래서 당장 언니에게 붙는 거고. 여자라서 저건 또 뭔가 했었는데. 심지어 그 오라비가 최정예 기사단 단장이라 하대?”
“…….”
“문제는 그 미친 새끼들이 오늘 갔다가 죽은 곳이 그 포르타 저택이거든.”
“…….”
“자칫하면 기사들의 손에 우리도 쓸려나가게 생겼어. 우리 녀석들도 아닌 멍청한 놈들 때문에. 안 돼. 그럴 순 없잖아. 내 탓도 아닌데.”
“…….”
“살려줘. 언니는 위대하신 공작 각하잖아. 황제 폐하의 오른팔로 소문 짜하고.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목숨을 보장한다면, 누가 언니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주고, 언니 꼭두각시 노릇도 해 줄게. 원한다면 남한테 증언할 수도 있어.”
“……아아. 그렇단 말이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예상치 못하게 증언해주겠다는 말까지 얻어냈다. 예상치 못한 다른 것들도 잔뜩……, 얻어냈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언니 편이야.
“도망을 치지 그래, 차라리. 내가 네놈을 살리는 걸 실패하면 어쩌려고.”
-내가 물리쳐줄게.
그러고 보니 이 자가 추적자의 성별을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남자라 말했던 건 라이네 저택으로 들어간 자뿐.
나는 내 말을 듣고도 어떻게든 웃음을 버티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웃었다. 그리고 훗날 반드시 죽을 자, 내지는 죽게 할 자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다.
“좋아. 살리도록 하지.”
알면서 왜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느냐는 원망을 할 수는 없다.
시드니가 정확히 무얼 알고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물러나라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그런 원망을 해.
바라던 대답을 얻은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계약서 쓰자.”
“안타깝게도 네겐 선택지가 두 개 밖에 없어. 계약서를 원하다 목숨까지 꺼지든지, 아니면 목숨 보장 받고 빈손으로 꺼지든지.”
게다가 정말 이 자가 확인한 기사가 션이라면, 그 여기사는 약하지 않다. 이런 경험 많은 자들과 붙으면 고전할지 몰라도, 아예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저번에는 추적자가 미로골목의 추적을 눈치 채자마자 추적을 따돌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포르타 저택에 들어갔다고?
기사제복을 입고 추적을 하다가?
말이 되나, 그게.
이 밤, 이자의 뒤를 밟았을 기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머리 아픈 것도 참아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준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 뜻에 따르는 일이 곧 그의 목숨줄이다. 결국 뒤돌아 테라스로 나가는 모습을 나는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길 준 것과 별개로, 머릿속에서 그가 사라진 건 이미 오래 전이다.
기척이 떨어지자 다시금 정적이 내렸다. 조금 후들거리기 시작한 다리에서 힘을 빼고 그대로 뒤로 털썩 앉았다. 푹신한 베르제르에 파묻히자마자 눈을 잔뜩 찌푸렸다가 폈다. 머리 아프다. 검을 의자 옆에 던지듯 내려놓자, 덜커덕하며 한 바퀴 구르고 멈추었다.
나는 거친 손길로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몸을 뒤로 기대었다. 뒤통수가 턱하고 등받이에 고였다. 타닥, 불티.
타닥.
“…….”
그 소리에 맞추어 눈을 깜박 감았다 떴다. 그리고 떨리는 한숨을 잇새로 흘렸다.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준비하고 움직이는 중인 건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리 해 온 거야.
그리고 알드리히는, 어디까지 아는가.
황제가 바비에르의 수기를 가지고 있던 것과 션으로 추정되는 여기사가 제복을 입고 움직였다는 것에는 필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손을 올려 두 눈을 짓누르듯 가렸다.
아, 맙소사…….
약간은 허망한, 약간은 고마운, 하여 나 갇힌 옥의 철창을 잡고 있던 기사를 볼 때 지었던 것 같은 그런 쓴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선 밖에서 진행된 일을 듣고도, 이번에는 놀라우리만큼 놀라지 않았다.
그저, 글쎄, 피곤했다.
며칠 새 너무 많은 것이 몰아쳤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쉴 시간이 없을 것이다. 팔 아래의 미간을 짜증스럽게 좁혔다. 저 영리하게 미련한 새끼. 기어들어오긴 어딜 기어 들어와서 이리 귀찮은 고민을 만드나. 꼬리, 필히 달렸으리. 내 적이 붙인 꼬리만 아니면 좋겠는데.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나는 결국 일어났다.
이미 잠은 다 깨서, 좀처럼 도로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리 시간을 낭비하느니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하여 수 시간 후 새벽. 달갑잖게 은밀한 손님이 오셨다. 나는 한창 일하다가, 자다 일어난 자국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시종의 보고를 듣고 급히 내려왔다.
손님이 싱글거리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 누이. 늦었는데 미안합니다.”
“…….”
이럴 줄 알았다.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 황제와 연관이 있을 수밖에. 미로골목의 남자가 움직이는 걸 모두 파악하고 있었겠지. 기막혀 하면서도, 일단 예의를 갖추어 영접했다.
그리고 그를 응접실로 인도하기 위해 몸을 돌리며 할리와 눈을 마주친 뒤, 황제의 행차를 알린 시종을 눈짓했다. 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