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CHAPTER 8. 겨울비. 비애 =========================
나는 스멀스멀 오른 헛웃음을 기어이 터트렸다.
“하.”
“…….”
“하하. 하. 미치겠네……. 하. 아, 정말. 내가 진짜. 하. 하.”
“…….”
“하…….”
한참을 이어지던 실없는 웃음이 어느 순간 뚝 그쳤다. 고개가 떨어졌다. 앞에 기사를 둔 것도 잊고 이마를 짚은 나는 눈 질끈 감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이 악물었다.
내게 아리엘이 마법사인 걸 알려주고, 쥰을 토벌에서 제외하고, 아리엘과 결혼을 추진하더니, 그것만 있던 게 아니었다고?
제발 그만.
도대체 얼마나 많이.
“각하. 괜찮으십니까?”
“…….”
이런 나를 처음 본 가엘의 급한 질문을 듣고 손이 가리지 않은 두 눈을 떴다. 시야에 가득 찬 건 짙은 색의 책상이다. 나는 이를 풀었다가 다시 악물었다.
입을 열지 않을 만한 기사들을 매복시켜두고 그들로 하여금 내 아버지를 지키려 했던 건가. 아니면, 아버지는 그대로 죽게 한 후에, 하산한 기사단이 보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먼저 그 시신을 치우려 하였던 건가.
……어느 쪽이든 소문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을 것은 다르지 않다.
“…….”
토할 것 같다. 욕지기가 솟았다. 이 정도 되면, 어쩔 수 없으니 물러난다, 어쩔 수 없으니 그의 희생을 두고 본다 할 수준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스스로는 물러서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 일에 얽히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는데. 당신에게 피해를 줄 바에야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한 내 말은 기억 못 하나. 나를 비호하다 당신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기억 못 하나.
왜 또 이런 일에 뛰어들어.
설마 다른 일도 한 건 아니겠지. 다른 일도, 진행 중인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는데. 또 이런 일에 깊숙하게 엮여서는 안 되는데.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반드시 발리앙은 엎드러질 거라고 자신하며 나를 다독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조금의 위험이 없는 게 아니었다. 자기암시를 걸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는 언제든 뒤틀릴 수 있는 줄 위에 있었다.
이 모든 게 실은 도망칠 곳 없는 배수진인데.
알아내야 할 것과 알아내고 싶은 것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감수한 위험인데.
왜 당신은, 스스로…….
다시 헛웃음이 새어나오려 했다. 그러나 이건, 이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다. 잃어서는 안 되는 평정을 잃어버린. 나 모르는 구석에서 시드니가 나를 도왔던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나는 기막힘조차 잠겨버린 눈으로 책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조차 잠겨 있었다.
“경.”
“예. 말씀하십시오.”
“이 이야기를 한 의도는 무엇인가.”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알려야 할 것 같았다.’라 함은, 시드니가 아리엘에게 청혼서를 넣은 이유가 라이네를 위해서일 지도 모른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뜻일까. 전에도 라이네를 도왔으니 이번에도 라이네를 돕기 위함일지도 모른다고?
만일 그렇다면 내게는 쓸모없는 의도였다.
이것저것 가정해 두는 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시드니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예.”
격려임과 동시에 돌려 말한 퇴실 명령이었다. 가엘이 경례하는 그림자가 책상 위로 비쳤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잠시 감고 있던 나는, 문이 닫히자 뒤로 몸을 묻었다.
따끔따끔하게 솟아있던 소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정신이 매끄러워졌을 때, 또렷하게 뜨지 못한 시선이 정면 벽과 연결된 천정 모서리를 향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오래도록 생각했다.
일을 그르칠 수도 없으며, 시드니를 이대로 다시 끌고 들어온 채여서도 안 된다. 그에게 받은 게 많으니 최소한 그 정도는 해주어야 했다. 모든 게 끝나고 나서 다시 친구가 될 수 없다 해도 밀어내야.
라이네를 지키는 중에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건 라이네인 내 결혼이 될 것이고, 결단코 피치 못할 시에는 라이네인 쥰의 결혼이 될 것이다. 시드니는 안 된다.
“…….”
나는 무심코 웃었다. 그렇군. 시드니는 안 된다.
시드니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 일을 진행하여 그가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으나, 그 얻고자 하는 것을 훗날 라이네에서 줄지언정 이런 일에 관계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않다.’
죽기 전에도, 죽었다 돌아온 후에도 그에게 많은 것을 받아왔다.
진정 나를 위한 것이었든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든, 어쨌든 나는 받아왔다.
“…….”
팔을 들어 두 눈 위에 올렸다. 왼 눈이 손목에 특히 짓눌렸다. 소매 천이 살짝 닿아있는 오른 눈만을 흐리게 뜨고, 마찬가지로 흐린 웃음을 흘렸다.
며칠 후 해가 바뀌고, 3월이면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잡힌다.
잡혔었다.
따라서 일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불과 수 달.
나는 앞으로 당연히 살아남겠으나, 그럼에도 앞으로 남은 일들의 위험도는 이제껏 해왔던 소문 퍼뜨리기에 비할 바 못되게 높았다.
바비에르의 일을 무마하고, 황제시해미수에 얽히지 말아야 한다.
이제 와서 아리엘을 비밀리에 살해할 수 없는 것은, 발리앙과 라이네가 소문으로 너무 많이 엮인 상태이기 때문에.
또한, ‘과연 아리엘을 죽인다 하여 모든 일이 멈춰질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회의적이었다. 뿌리를 뽑아야 했다.
승리할 시 받을 배당물이 라이네의 온전한 존립이기에 시작한 도박이다.
아, 나는 공작이고, 지켜야 할 가문이 있었다.
“…….”
크게 숨을 고르고, 우안도 이만 감았다.
허면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가며 시드니와 포르타를 어찌 빼낼 것인가. 내 계획에 상처 내지 않고, 어떻게 빼낼 것인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단호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며, 최대한 빠르게 방법을 생각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1월 1일.
시간과 발리앙은 내게 충분한 고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
나는 깔끔하게 반으로 접혀 각이 살아있는 종이를 매만지다가, 어느새 뽀얗게 자라 있는 손톱에 시선이 미쳤다. 이건 또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길어도 답답해서 못 참겠다 하는 성정에 용케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고, 바쁘기도 했고.
나는 책상서랍을 뒤져 칼날 박힌 반지를 찾아냈다. 원래 비상시에 쓰려고 의뢰했던 제작품인데, 전처럼 헤르조와 같이 여기저기 갇히거나 쫓겨 다니는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라 요즘에는 손톱 깎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반지를 오른 손 검지 끝에 매달아 잡고, 왼 손 검지의 손톱부터 신중하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지에 이어 중지 손톱을 깎아내다 때려 치웠다.
“못해 먹겠네.”
“…….”
반지로 하는 시도는 항상 이렇게 끝났다. 반지를 책상 서랍에 다시 던져 넣고 이번에는 종이 자르는 가위를 꺼내 들자, 할리가 결국 입을 열었다.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아, 응. 그래주게.”
내 허락 하에 이 방에서 보고서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내가 수신인인 서신이었다.
어제 헤르조가 션과 쥰을 통해 보내온.
접힌 골에 엄지를 집어넣어 힘을 주자 접혀 있던 종이가 다시 열렸다. 그리 짧지 않다. 그러나 이게 그의 넉살이 좋기 때문인 것은 아니리라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이토록 정중한 어구로 예의를 차리는 문장들만이 있으니.
만나고플 때 만나면 되었던 사이였기에 이것은 그에게 받은 첫 서간이지만, 그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나를 순간이나마 쓴웃음 짓게 한 건 그의 서명.
헤르조 A. 포르타.
영지명이 들어가지 않은 이름의 끄트머리를 쓰다듬듯 읽었다. 포르타. 나는 그리고 또 다시 쓰게 웃었다.
오늘 새벽 포르타 저택에 암살자가 들었다.
할리와 킴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서신을 다시 접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문진을 끌어와 눌러두고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무릎을 꿇은 아가씨에게 손을 맡기고 멀뚱하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손톱이 가리고 있던 몇 미리의 살갗이 공기에 닿자마자 시원하다.
“…….”
한 손의 손질이 끝나자 다른 손도 내밀었다.
헤르조에게서 온 편지로 힐끔 눈길을 주고 여상적인 깊은 숨을 쉬었다.
자객이 침입한 사실을 포르타의 누구도 모를 것이다. 아니, 아니다. 침입한, 이 아니라 침입하려 한, 사실이라 해야겠다.
나는 새벽의 생각에 잠시 빠져 있다가 천천히 눈을 찌푸렸다가 폈다. 처치 후 부러 붕대를 감지 않은 손바닥의 상처를 킴이 잘못 건드린 탓이다. 그러나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자른 끝을 가볍게 갈아내는 것까지 끝나자 손을 거두며 웃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치하를 익숙하게 사양한 킴이 일어섰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손을 내게로 끌어왔다. 끝나기를 지켜보고 있던 할리도, 내게 손을 내주게 된 시녀도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걸 들으며, 시녀의 손을 살폈다.
킴을 잡고 있지 않은 오른 손으로 바지주머니, 베스트 주머니 여기저기 뒤졌지만 손수건이 나올 리가 없다. 평소 코트나 쥐스토코르에 넣고 다니니까. 당당하게 할리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가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나는 급한 대로 내가 마시던 차가 담긴 잔에 손수건을 넣어 적셨다.
더는 감출 수 없게 당황한 킴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각하?”
“가만있어. 고운 손에 피가 묻었어.”
젖은 손수건으로 킴의 손가락들을 닦아주었다. 내 손을 고정시키느라 힘을 주며 낫지 않은 상처를 건드렸으니, 피가 날 수밖에.
이 피를 어디에 가져다 넘기는 것도 경계해야 했다. 소량의 피라 마법사들이 연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이런 게 모이다 무엇이 어찌될지 모르거든. 내 피에는 아직도 해독되지 못한 독이 많이 흐르고 있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시녀인 킴은 내가 근신처분을 받아 이 저택에 갇혀 있는 동안 황궁에 끌려가 받은 신문에서 꿋꿋하게 입을 다물었다 했다. 알드리히가 보내주던 서신에는 그렇게, 적혀있었지.
그러나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게 아니라서 완전히 경계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피를 모두 닦고 눈을 올려 그녀를 보자, 킴의 얼굴은 이미 붉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손을 놓아주었다.
“수고했어. 가봐.”
“예, 예. 감사합니다, 각하. …….”
“……응? 왜? 무슨 할 말 있나?”
나가려다말고 내 눈치를 보는 킴에게 다정하게 웃었다. 뭘 그리 답지 않게 어려워하나. 하도 우물쭈물하여 할리의 눈이 불만스럽게 가늘어질 때쯤, 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사를. 불러올릴까요?”
“아. 이거? 됐네. 조금 쓸린 거니 괜찮아. 배추 뽑다 이렇게 된 거 알면 잔소리 할 걸. 알다시피 그 사람이 좀, 잔소리가 심하잖아.”
“…….”
킴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워라. 그녀가 집무실을 나가 문을 닫는 모습을 느긋하게 보고 있다가. 나는 할리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벽난로를 가리켜 보였다.
“새로 하나 줄게. 그건 버리세.”
“예.”
벽난로는 책상이나 책장들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손수건을 불에 던져 넣었다. 긴 환부를 따라 방울 몇 개의 모양으로 맺혀있는 피를 살폈다. 쓰리다.
라이네 공작의 건강은 공작의 개인사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서 의사에게 부리나케 보여야 하긴 하는데, 이미 그 사람에 잔소리 들어가며 처치를 받은 상태란 말이지.
붕대 감은 손을 괜히 용인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어서 약만 바르고 붕대는 마다했던 결과였다.
곧 멈출 만한 상처라 그나마 다행이다. 왼 손등을 팔걸이에 놓고, 피 맺힌 손바닥은 천정을 보게 했다. 불사르는 걸 마치고 돌아온 할리가 책상 너머로 내 손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역시 치료를 받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의사가 싫으시다면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아서. 이 작은 상처로?”
“의사도 말했지만, 그리 작지만은 않습니다. 해독 여부도 그렇고.”
내게 던져진 단검을 잘못 막아서 날이 스치고 지나간 것뿐이다.
언제 누가 거리에 나타날지 모르는데 크게 움직일 수가 없는 데다, 우리는 가린 얼굴을 실수로라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어둠 속이라 해도 길에 조금의 빛도 없는 게 아니라서. 동료의 시신을 밟아서라도 기어코 저택에 침입하려 할 자들이니 긴장을 놓아서도 안 되고.
결과적으로는 자객 다섯을 전부 잡아들일 수 있었으니 그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독에 면역이 없는 기사 하나가 사경을 헤매는 중인 게 뼈아팠다.
이럴 지도 몰라서 혼자 상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긴 했었는데……. 늦은 후회다.
기절하거나 죽은 자객들을 업고 눈에 띄지 않게 신속하게 저택으로 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 누군가 우리의 뒤를 밟는 자는 없는지 쉴 새 없이 살펴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예상했던 어려움이다.
누가 보고 있을 지도 모르니 마법으로 사람을 숨기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자객이 들었다는 일은 시드니에게는 알려지면 아니 되니 어떻게든 자객을 포르타 저택 주변에서 없애야 했으므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그를 물러나게 하기는 더 어려워져서.
그리하여, 시드니에게 물러나라 전했던 날 이래 매일 밤 포르타 저택의 주변을 살피도록 명령한 게 옳았다는 결과는 둘째 치고, 발리앙은 이번에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결혼하기 싫으니 시드니를 죽이겠다니.
알드리히가 아닌 사람과의 결혼이라면 무언가 격한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쥰과의 혼담을 이용해 언젠가는 얻어내려 했던 반응을 오늘 새벽에 얻은 것이다.
나는 피식 웃고 오른 손을 휘저었다.
“이건 생각 말게. 정말 괜찮아. 보다보다 안 되겠으면 또 치료 받을 거니까.”
“…….”
“그보다는 이게 문제지.”
콕콕 헤르조의 서신을 찍었다.
나를 만나고 싶다 한다. 드릴 말씀이 있다며, 언제라도 좋으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으나,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묘했다. 내 혼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단다. 발리앙 후작과 의견을 조율 중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공식화하기 전에 만나기를 원한다고도, 그는 썼다.
할리는 아직 이 서간의 내용을 모르면서도 묻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서신을 내려다보던 나는, 그가 아직도 책상 앞에 서 있는 것을 깨닫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가서 마저 일 하게.”
“예.”
그를 종이 가득 쌓여있는 테이블 앞으로 보내고, 서간지로 쓸 수 있는 빈 종이 두 장을 끌어왔다. 그 종이를 앞에 두고서도 잠시 고민했다. 내 혼인에 대한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 설마 내 속내를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이 서신이 떨떠름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설마. 이건 내 측근들도 모르는 내심이다.
-원망하십니까.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또. 언제부턴지 우리가 옥에서 했던 대화가 불쑥불쑥 떠올라 나를 당황케 한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일정이 비는 날을 떠올리며 종이 하나를 들어 손을 닦았다. 피가 사납게 묻어 나갔다. 종이에 빨간 피가 선명하게 번졌고, 어느 정도 닦인 것 같아 확인한 상처에서는 피가 더는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게 작은 상처라니까.
부스럭부스럭 종이 구겨지는 소리에 이쪽을 본 할리에게 손을 흔들고 펜을 들었다. 나와 베르덴의 이야기가 공식화될 일은 없다. 공식화될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건 다른 이야기지.
교류하는 모습을 되도록 적게 보여야 하는 포르타의 일원.
그러나 만나야겠지.
고민은 완전히 갈무리 지었다. 나는 서걱서걱 답신을 써내려갔다. 이것은 오늘 쥰과 션을 통하여 헤르조에게 비로소 전달될 것이다. 지금은 아침 6시. 살해와 제압으로 시작된 하루가 아직까지는 평범함에 가까웠다.
머릿속에만 폭풍우가 칠 뿐.
시드니의 청혼을 안 직후부터 내가 경계하고 있던 일이 기어이 터진 오늘 새벽. 포르타를 이 일에서 어떻게든 빼내야 한다는 경각심은 더 형태 선명하게 내 머리에 박혔다. 시드니가 자객에게 쉬이 당할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그의 검은 괴물을 상대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어린 나이부터 내가 어떻게 아득바득 자객을 물리쳐왔는지 떠올리면, 이 염려는 가한 것이다. 내 몸에는 대신관의 기도로도 없앨 수 없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서명 없이 마무리 지은 답장을 내려다보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에서 또 뵙겠습니다:D)
벌써 봄이네요. 휴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ㅅ//...♡ 정확히는 아직 글에 시간을 족히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따로 공지 드리기 전까지는 되도록 매일 연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휴재 중 소제목을 정리하고, 전반적으로 가벼운 수정을 거쳤습니다. 한 편 삭제를 제외하면 가볍게 만졌으므로, 앞부분은 진행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챕터8 마지막 회였던 이번 편부터 챕터 9 초반까지 연재했던 부분은 삭제 및 대폭 수정하여 이번 편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완결까지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