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99화 (99/157)

00099 CHAPTER 8. 겨울비. 비애 =========================

“사랑하는 동생, 내 좋은 친구와 혼인할 수 있다면 좋잖아.”

“…….”

“아, 그런데 그나저나 그 사람. 설마 나랑 그대가 혼인하는 걸로 알고, 나이 비슷하다고 자기도 서두르려는 건가? 백작이 되자마자 아리엘을 빼앗아 가면 어떡해. 내가 얼마나 공들이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쥰과 아리엘의 혼담을 할 이유는 없어졌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가 씩 웃고 장난기 어린 말을 던지자, 베르덴이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설마요. 그 사람이 그럴 사람입니까. 저와 각하 소문을 믿을 리도 없습니다.”

옳다. 시드니는 그런 사람이다. 실로 신중한데, 그 와중에 다정하여 내가 빚만 지다 떠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걸 베르덴은 어찌 아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드니의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방금 뭐가 필시 익숙한 것을 말하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입 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 포르타경 관련하여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예?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부정하는 품새가 태연했다. 나는 오른 눈썹을 일순 찡그렸다가 폈다. 작은 움직임이라 그에게 보였을 꿈틀거림도 아니었던 데다, 베르덴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돌려 문 쪽을 보는 중이었다.

나 역시 기척을 느꼈지만, 보지는 않았다. 그의 눈길을 보고 의아해하는 척도 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굽혀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무예를 익히지 않은 자는 무예에 능한 자가 얼마나 기감 예민해질 수 있는지를 모른다.

비웃음을 내색하지 않고 삼키며 눈을 들었을 때, 그는 다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왜?”

“그저, 소문이 떠올라서.”

어색하게 돌려진 주제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내 표정을 본 베르덴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각하와 제가 결혼하기 위해서 제가 작위를 포기할 거라고.”

이런. 나는 재미있어하며 능글맞게 받아쳤다.

“그래. 내게 와. 잘해줄게.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잖아.”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그 과정에서 많이 맞고…….”

“우리 혼인하면 나는 작위 포기할 생각 없네.”

“생각해보겠습니다.”

“…….”

이건 또 뭐야.

나는 멈칫했다. 그에게 보여도 되는 반응이었다. 맞장구를 친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소문에 대해서 한숨을 내쉬던 사람이다. 기척을 느낀 이후 교묘해진 대화는 맞지만, 이건, 또, 새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검지를 세운 손에 턱을 기댔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 내가 주었던 실마리로 뭔가를 확실히 알아차리고 경계하고 있는 모양인데.

베르덴이 내 보좌로 돌아오고 나서 내가 차를 마시다 중독되었던 일에 대해, 베르덴과 나누었던 그 이야기들. 그 실마리들.

-누가 자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는 생각.

최소한 생각은 해보라는 뜻이었고, 당시에는 나 역시 막연한 짐작이라 하면서도 사실일지도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거, 진짜 뭔가 있네.

기억을 찾은 이후, 나 죽을 당시 베르덴이 중독되어 있었으리라 짐작했던 바도 수렴하여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 왔지만 이런 식으로 일부나마 실제로 확인하게 되니 우습다.

나는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질 수 없다는 웃음을 씩 걸고 툭 던졌다.

“긍정적으로?”

“최대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똑똑. 문이 두들겨졌다. 문밖의 사람이 입을 열어 저를 알렸다.

“형님.”

나는 킥 웃음을 흘렸다. 베르덴의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대답에 대한 반응으로 생각되어질 만 하게.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고 간다.

베르덴의 허락을 받고 르네가 들어오자 나는 장갑 끼지 않은 맨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그는 단정한 선을 그리며 고개를 까닥여 내게 화답했다. 베르덴은 무뚝뚝하게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언제 가실지 몰라서 이따 인사 못 드릴 것 같아서요. 미리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항상 그랬듯 무심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객쩍어 하는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르네. 이 사람 보고 싶다고 밤에 찾아와서 르네한테도 폐를 끼치네요.”

“아닙니다.”

르네는 듣는 사람이 무심코 평온해질 만큼 물 흐르는 것 같은 어조로 부정해 주었다.

그리고 바로 인사를 남겼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살펴 들어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잘 자요.”

베르덴에게도 가볍게 인사한 그가 나가자, 나는 베르덴과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어때?”

기척이 사라졌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그가 대답했다.

“……상냥히 보이려 노력하신 것 같긴 합니다.”

“나는 르네에게 항상 상냥했네.”

“결정권은 제게 있으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새 르네에게 옮은 듯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입에 대고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나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슬며시 웃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잔에 술을 더 따르고 있던 베르덴은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왜 그러시냐고 눈을 찌푸리더라. 그래서 자세를 잡아 주었다.

몸을 바로 세우고, 아주 어색해하는 것처럼. 헛기침도 한 번.

“어……. 아까 그 모든 것은 농담이었고……. 나, 난 그대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줄도 몰랐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도 마시고, 진심으로 대답하지도 마십시오.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떨떠름해하면서도 내가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나는 나 앉아있는 의자에 쑤셔 박아두었던 장갑을 들어 베르덴에게 던졌다.

“작위 떼고 결투하세. 이 자식아.”

“…….”

베르덴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체 않고 일어났다.

*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무 것도 아닐세. 그런데 혹시 몰라서 내가 하나 조언해주겠는데, 독한 술 마시고 격하게 결투하고 또 술 마시는 건 하지 마. 순서가 그래. 술, 격투, 술. 중간에 두드려 맞으면서 억울한 감정이 솟게 되면 더 심해지니까, 만약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맞지 말고 상대를 완벽하게 패. 맞지 말고.”

“…….”

끙끙 앓으면서 구구절절 조언해주니 가엘이 침묵했다.

바라던 대로, 내가 밤중에 취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마차에 올라 발리앙 저택을 나섰다는 소문이 퍼지긴 했으나, 후유증이 조금 있었다. 간만에 너무 뛰어다닌 탓이라면서 의사가 타박했다. 그렇잖아도 잠이 부족하여 무리하고 계신데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시는 거냐며.

어깨를 주무르는 것을 끝내고 나는 자세를 고쳤다.

가엘을 보는 건 두 달 만이었다. 임무를 받고 약 1년 전부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과, 오드리나에 남아서 움직이고 있던 기사들이 어제 전부 저택에 들어와 쉬는 중이다. 피곤할 테니 하루 간 푹 쉬도록 하고, 이제 간만의 직보를 받아야 했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환기하는 숨을 하, 하고 호쾌하게 쉰 다음 벙긋 웃었다.

“어떤가. 이번에는 찾았어?”

“찾지 못했습니다.”

라이네의 일원을 죽이라는 의뢰를 받은 적 있는 자객들을 찾는 게 이리 어려울 줄이야. 약 9개월간 이에 대한 수확이 전무했다. 워낙 교묘하고 워낙 조심성 많은 자들이라 잡아 족치지 않는 이상 입을 열게 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의뢰자로 가장을 했는데도.

“윌리엄의 용병단은 잘 있나?”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만나고 흩어졌습니다만, 정신적으로 지쳐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건강했습니다.”

“괴물들보다는 암살자들이 더 위험하니까. 피곤할 만하지. 경은. 경들은 괜찮고?”

“예. 괜찮습니다.”

가엘은 대답을 하기 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지웠다.

나도 또한 웃음을 보내고 등을 뒤로 기대고 양 어깨를 폈다.

“그럼 최대의 희망은 어쩔 수 없이 미로골목이로군.”

“…….”

가엘은 침묵으로 동의했다.

의뢰에 대해서 그나마 입을 열 정도로 나와 가까운 살인자들은 미로골목의 죄인들이다. 아무래도 적들은 미로골목을 많이 이용한 것 같기도 하고.

팔걸이 끝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라이네령에 내려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던 기사들, 인즉 가엘 타르디프를 위시하여 나의 아버지를 오래도록 모셔온 기사들이 전국에 흩어지거나 모이기를 반복하며 여러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미로골목에 머무르는 죄인들의 신상을 남김없이 파악하는 것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직은 그들을 살려두고 있으나 혹 후에 또 다시 몰살할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기 위하여.

내가 공작 되자마자 불완전하게 쓸어버린 골목은, 지독한 자들이 내게 악의를 갖게 하였다. 살아남은 자가 한 명도 없도록 하는 방도가 없는 이상 섣불리 손을 대서는 아니 된다. 그들만이 악의를 가졌으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겠으나 나와 라이네에게는 평민 아닐 자들이 적으로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쓸게 되었을 때에는, 그 살육장에서 살아남는 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놈들을 향한 살의를 잊은 적 없으며, 꺾은 적 없다.

나는 윌리엄이 이끄는 용병단을 미로 골목으로 유인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자칫 내가 연관되었다는 심증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거기 머무는 집단들 중 한 집단의 우두머리인 남자가 주변인에게 허튼 소리라도 한 상태라면.

하여, 이러나저러나 내게 연결될 거라면 나와 기사들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더 마음 편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안 쑤시는 곳이 없네.

그런 나를 그리 무례하지 않게 보던 가엘이 의외로 입을 열었다.

“각하와 발리앙 후작 각하의 소문이 상당히 퍼져, 어제 오드리나 근처에서 만난 행객조차 아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 일 전의 일인데도.”

“그래?”

“외람되지만, 그리 하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 아직 그 일은 모르나. 아리엘과 결혼한다고 나섰거든. 포르타 백작이.”

이런 걸 물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다. 그러나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간단하게나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인즉, 베르덴과 엮일 기회가 없어졌단 말이지. 아직은 나와 베르덴 사이로 장난을 좀 더 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희망이 이만큼 부풀었을 때 터지는 거랑, 이-만큼 부풀었을 때 터지는 건 느끼는 절망의 크기가 다를 테고, 취하는 행동 또한 다를 거라 생각했어. 그러다 격해져서 실수라도 하면 더더욱 좋고.”

두 손으로 작은 손짓까지 해가며 하는 설명이다. 내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가엘이 입을 열었다.

“각하. 전 공작 각하께서 잊으라 하시며, 결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하겠다고? 큰일 낼 사람이군!”

“…….”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탕 책상을 내리치자, 가엘의 표정이 변했는데 그게 영……. 음.

가끔, 놀린 후 후회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러나 태연하게 팔뚝을 주무르기 시작하며 말했다.

“농일세. 경의 충정을 내가 설마 모를까. 해서, 그 일이 뭔데.”

“작년 가을에.”

거기까지 말한 가엘이 잠시 입을 다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작년 가을. 아직까지는 그리 애쓰지 않고도 웃을 수 있었다.

기사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작년 가을에 킨들 라이네 토벌 작전을 수행했던 포르타경이, 실례했습니다, 포르타 백작 각하께서, 기사 넷을 킨들 라이네 산맥 첫째 산 입구 근처에 잠복시켜두었던 일이 있습니다.”

“…….”

나는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뭘 해? 중년의 기사는 또 입을 닫았다가 천천히 열었다.

“그날 그들이 없었다면, ……위험했습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라붙어서, 위아래 입술을 서로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침을 삼키며 눈을 잠깐 감는데, 눈꺼풀이 저절로 떨렸다. 그래도 다행이지. 반대급부처럼 입술이 열렸다.

나도 모르게 더듬더듬.

“나, 나는. 본 기억이 없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각하께서 쓰러지시고, 저희가 밀리기 시작했을 때 나타났습니다.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혀로 훑기도 했고, 다시 가엘을 보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뭘 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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