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CHAPTER 8. 겨울비. 비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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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의 보고가 처음에는 그대로 귀를 지나쳐갔다.
무언가 어이가 없는 것을 들었는데.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아니, 이해가. 나는 눈을 올려 천장을 보았다가 시선을 내려 옆을 보고, 눈을 감고 입안을 적신 후, 다시 물었다.
“뭐라고?”
“포르타 백작이 필르 발리앙에게 청혼서를 넣었고, 발리앙 후작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스르르 눈을 내렸다. 할리가 오기 전까지 읽고 있던 예언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누렇게 바랜 종이와 검은 글씨가 어지럽게 엉키기 시작했다. 집중하고자 눈을 찌푸리고 읽던 부분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방금 들은 것을 잊고 말았다.
다시 눈을 들고 멋쩍게 웃으며 또 물었다.
“어, 그러니까, 뭐라 그랬더라. 영 집중이 안 되네. ……누구라고?”
“포르타 백작. 시드니 포르타경입니다.”
내 입술이 잠시 깨졌다. 아니, 웃음, 아니, 그것도 아니군. 평온이다.
그것이, 그것이 잠시 깨졌다가 돌아왔다.
얼굴로 올라가려하던 손을 깨닫고, 받치고 있는 책을 계속 받치도록 버텼다. 나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 상황을 가소로워하는 웃음을 보였다. 이런.
이게. 뭐야.
“…….”
여태 잘 읽고 있던 예언서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눈길이 걸렸다. 목적이 있어 읽은 것이긴 하지만, 머리를 비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 가라앉히기에 이만한 책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틀렸다. 머리를 비운 보람도 없이, 머릿속에는 폭풍이다.
손끝으로 예언서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다가 다시 눈길을 들어올렸다. 할리는 내가 아리엘과 쥰의 혼담을 빌미로 베르덴과의 소문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나는 때가 되면 청혼서를 넣어 아리엘에게 알릴 생각이었고, 황제와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점을 알게 된 아리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려고, 했다. 가장 주요하게 얻어내려 했던 정보는 그것.
시드니와 혼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아리엘이 알아도 결과는 비슷해질 것이다. 쥰이 알드리히가 아니듯, 시드니 역시 알드리히가 아니므로. 나는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이건. 경, 이건 아니잖습니까.
기어이 손을 올려 이마를 쓸었다. 다른 사람이 아리엘에게 청혼서를 넣었다면 떨떠름하게나마 납득하고 앞으로의 일을 수정하는 데에 돌입했을 일이, 나를 동요케 하고 있었다.
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내게 있던 일을 확실히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오래 전 내 손을 잡아주었던 시드니 그 사람이다.
믿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바가 무색하게도, 더는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여전히 내 친구였다. 내게 살아 달라 하던 기사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이마를 짚은 손 아래에서 입을 열었다.
“……발리앙에 기별을 해.”
“며칠 후로 해야겠습니까.”
침착해야 한다.
섣불리 움직일 정도로 시드니를 걱정할 것인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라이네를 우선할 것인가. 아리엘과 쥰의 혼담을 이유로 베르덴을 방문해왔기 때문에 베르덴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베르덴이 시드니를 선택했다면, 혼담이 이유일 수 있는 방문은 이게 마지막이다.
손이 떨어졌다.
“오늘. 저녁에. 가겠다고 해.”
급히 의론해야 할 게 많은 가주들 사이에서는 기별 없이도 방문하는 일이 왕왕 있다. 기별한 당일에 방문하는 일은 더 잦고.
일을 처리하러 나가는 할리의 뒷모습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덮은 책을 책상에 내려놓자, 턱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라. 소란스럽다. 위로 와 있는 뒤표지에 먼지 섞인 볕이 스몄다. 햇빛마저 진득한 오후 네 시.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책을 뒤집었다.
어떻게 보아도 닳아있는 표지지만 내 손으로 닳게 한 것은 아니었다.
책에서 손끝을 거두었다. 나는 쉬느라 풀어놓았던 셔츠의 단추를 잠근 뒤 집무실을 나섰다. 간단하게 요기라도 할 요량이었다.
겨울이라 일찍 지는 해가 오늘만큼 달가운 적이 없었다. 날 밝을 때 방문하는 것과 해 떨어지는 후 방문하는 건 회동한 사람들의 면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에. 하여 이는 어쩌면 미친 짓이다. 알면서도 감행했다.
베르덴은 당장이라도 괜찮으니 다른 일정이 없으시면 오셔도 된다, 혹은 내일 해 있는 시간에 만나자고 답을 보내왔지만 무시했다.
그리하여 오후 여섯시. 나는 약간 편한 차림으로 발리앙 저택을 방문했다.
“어, 겨, 후작, 나 왔네!”
“…….”
저녁 식사 시간에 쳐들어온 나를 보고 베르덴은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안내를 받아 홀에 들어서고 있을 때 성큼성큼 걸어 나온 그의 손에는 하얀 천 냅킨이 들려 있었다. 식사하다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다.
가져온 술병을 흔들어 보이자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천정을 보았다. 공작과 후작만 아니었으면 전처럼 결투하자고 장갑을 던졌을 법한 반응이었다. 베르덴의 뒤로 그의 가족도 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얼굴인 아리엘과 평소처럼 희미한 무표정인 르네를 보며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세 분, 식사 중이었나 보군. 이 저녁에 미안하네. 보고 싶어서 기별도 않고 놀러 왔어.”
“……한 십 분 정도만 작위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베르덴이 무뚝뚝하게, 그러나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에 장갑 자국이 생기면 며칠간 대외활동 못 하네.”
맞을 짓을 했다는 걸 알긴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대답을 들은 르네가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베르덴은 그러지 못하여 금방이라도 이를 악물고 싶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단하게 하고 왔네.”
“그럼 지금 같이 올라가시지요.”
“어? 아니. 괜찮아. 식사하고 오시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닙니다. 저도 족히 들었습니다.”
내 말을 사양한 베르덴은 뒤돌아 아리엘과 르네를 한 번 보고 내게 더 다가왔다.
지난 두세 달간 들를 때마다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여 다른 이야기도 잠시 하다가 떠나기만 하여, 응접실보다는 그의 집무실에서 주로 머물렀었다.
예의를 따진다면 당연히 응접실에서 접견해야겠지만, 내가 그렇듯이 베르덴도 응접실보다는 집무실이 더 편하게 느껴질 테고, 공작과 후작으로서 서로에게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 해도 이 정도는 우리 사이에서 용납 가능했다. 내가 그를 친구로 여기든 내쳤든.
그의 집무실에 들어가서 포퇴유에 앉자마자,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민망하여 여태 모르는 척하긴 했습니다만, 저희 둘이 혼인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설마. 들었네. 우리 둘이 같이 다닌 게 십 년이 넘고, 친구인 건 거의 이십 년인데 이제 와서 뭘 그리 소란들인지.”
“각하께서 전에 제게 하신 행동들이 증폭제가 된 걸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대답하려는 입을 다물었고, 베르덴은 입실을 허락했다. 시종이 들어와 우리 앞의 낮은 탁자에 안주와 잔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정갈한 상차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앉은 자리 가까운 곳에 있던 촛불 수어 개가 흔들리다 한 개가 꺼졌다.
시종은 조용히 사죄한 뒤에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에서 불씨를 가져다 다시 초에 불을 붙였다.
불붙는 소리는 자그마했으나 침묵이 고인 자리라 그마저도 소란하게 들렸다.
할 일을 마친 시종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그제야 장갑을 벗으며 늦은 대답을 했다.
“알아.”
“…….”
“늦었지만 휘말리게 하여 미안. 소문이 이리 날 줄은 당시에는 미처 생각 못했어.”
태연한 거짓이었다. 눈을 내리고 피곤해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조금 있으면 사그라질 거라 생각했던 소문들이 여전히 이렇게 기세 성하게 남아있을 줄도 생각 못했고.”
“…….”
베르덴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내 사과에 대한 한숨인지, 우리 소문에 대한 한숨인지, 그 외 심각한 소문들에 대한 한숨인지는 구별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피곤하게 느껴질 법했다.
전말을 알고 있어 이 모든 일을 예비하고 있었던 나조차도 가끔 기막히다는 감정이 불쑥 찾아오곤 하는데, 베르덴이라고 다를까.
부친의 독살과 관련되어 발리앙 삼 남매가 의심받고 있고, 라이네도 의심을 받고는 있으나 쥰의 일이 밝혀진 이후로 많이 정도가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중이다. 그 소문들도 아직 마무리가 덜 되었는데, 발리앙 전 후작의 연애 이야기가 터지고, 쥰의 이야기가 터지고, 내 어머니도 결국에는 전 후작과 조금씩 얽히고 있었다.
내가 물밑에서 다른 여자들을 후보로 퍼뜨리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엮이셨을 것이다.
이게, 돌아가신 분께 저지른 바에 대한 내 최선이었다.
제대로 된 속죄는 훗날 기회가 있다면……, 하리.
투명하게 빈 잔을 안에 두던 시야를 잠시 닫았다. 있는지도 몰랐던 시린 통증이 눈꺼풀을 덮었다. 달칵, 하고 병을 드는 소리는 그 직후에 났다. 나는 눈을 뜨고 잔 두 개에 차례로 담기는 샛노란 술을 바라보았다.
베르덴은 병을 내려놓은 뒤 내 앞으로 잔을 밀어주었다.
나는 그 잔을 잠시 내려다보다 여러 개로 각이 진 밑동을 잡고 들었다. 내가 가볍게 입술에 대는 본 베르덴은 제 잔을 들더니 몇 모금을 마셨다. 입에서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혀 밑에 고이는 술은 썼다.
음미하듯 두 번에 걸쳐 천천히 삼켰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홀에서 경쾌하게 시작한 만남이걸랑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가라앉아서, 나는 물끄러미 탁자를 보고 그도 술만 보았다. 내 손에 있던 잔은 점점 미끄러져 내려가다 마침내 잔의 동그란 입구가 다섯 손가락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나는 잔을 더 내려 보내지는 않았다.
팔걸이에 걸치고 옆으로 내보낸 손에서 잔 안의 술이 잔잔하게 출렁였다.
기어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쥰과 아리엘. 생각해 봤나.”
질문을 하고 나서야 베르덴을 보았다.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혼담 때문에 온 줄을 그는 내가 기별을 넣었을 때부터 알았을 터. 나도 모르게 긴장한 몸이 저릴 정도였다. 시드니를 택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아직 소문을 이용할 기회가 있는 것이며, 시드니는 이 기막힌 일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이미 들으셨겠지만, 포르타 백작을 승낙했습니다.”
나는 잠잠히 그 답을 듣고 잔을 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시드니를, 기어이 택한다고.
왜 이런 일은 일어났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쥰은 절대 안 되고, 그쪽은 넣자마자 승낙한 이유.”
내 말이 그는 의아할 것이다. 실제로도 베르덴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대답했다.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것 봐.
나는 피식 웃고, 술잔이 있는 팔의 손목을 슬며시 흔들며 대꾸했다. 대꾸해 보았다.
“가문의 급으로 따져 발리앙이 얻는 이득을 판단하기로는 단연코 라이네일세.”
“혼인. 하실 겁니까?”
“…….”
그러자 베르덴이 불쑥 물었다. 그 간접적이고 간단한 질문으로 그는 성공적으로 내 말문을 막았다.
내가 혼인을 하고 아이가 생길 시,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혹시라도 급사하게 되어도 쥰이 공작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베르덴은 그 부분을 짚기 위해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여기 오기 전부터 나도 생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어차피 가문끼리 혼인으로 단단히 묶여보았자, 도움 받을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이네로부터 더 질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범위 자체는 아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완전히 방계로 빠지게 된 쥰보다야 백작의 부인이 낫다는 판단은 논리적이다. 그것도 대귀족 회의에 참석 가능한 가문인 백작의 부인이니.
이런 좋은 혼처는 다시 찾기 어렵다.
알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이 결론을 내려 아리엘의 상대를 정한 이상, 나는 이 이상 참견할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 힘의 분배가 위험하고 불공평하게 뭉치게 되는 결합이라면 모를까. 이 결합은 나나 다른 가주들이 손대야 하는, 손댈 수밖에 없는, 막아야 하는, 막아도 되는 그런 결합이 아니었다.
나는 쓴웃음을 웃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쥰은 절대 안 된다는 거로군.”
“……어째서 이토록 라이네경과 아리엘의 혼담을 이루려 하십니까.”
그 질문을 베르덴으로부터 내내 여러 번 받아왔었다. 그에 대해 내 답은 항상 같았다.
나는 이번에도 잠간 그를 보다 빙긋 웃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오오오!
어...... 음.......
저는 당연히 아리엘을 예상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음.......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군요.......
......나중에 나 큰일났다(중얼)
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비행기 일정 좀 알아보고 있는 것뿐이에요.
리턴 말고 편도로(중얼)
총집사가 스완에 대해 말한 내용은 에스메 외전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고 지나간 장치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회수한 장치입니다:D
공작님이 에브 어렸을 때를 보면서, 스완과 성격이 닮았다고 한 부분.
지구에서 성인까지 자란 후에 온 에브의 성격이 스완의 성격과 닮았다는 건, 에브가 그저 작가인 게 아니라 스완과 유전적으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