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CHAPTER 8. 겨울비. 비애 =========================
“혼인하시기 전에 두 분과 전 발리앙 후작 각하가 여기에 오신 적도 있는데, 대부인께서 당신이 생성하신 진을 마법을 보이시고 그게 신기하다고 손을 대시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다치시는 일이 잦았습니다.”
“…….”
“전 공작 각하와 전 후작 각하께서 물벼락을 맞는 일도 잦았습니다. 심심하시면 그 두 분 각하를 골탕, 실례하겠습니다, 두 분 각하께 장난을 치셨으니까요.”
“…….”
“정말 다정하신 분이었습니다.”
구구절절 얼마나 활기 있는 분이셨는지만 늘어놓고 끝에 그렇게 짧게 다정한 분이었다고 덧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예의상 한 말 같잖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어머니께서는 설마 아버지를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실 분이 아니라고 마지막 쐐기를 박으려고 했는데, 들어온 정보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쓸모없다고 하기엔 미묘하게 쓸모 있을 것 같아서.
하여 끙끙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총집사가 불쑥 말해왔다.
“그래서 각하께서 아직 어리실 때에는 많이 놀라곤 했었습니다.”
“……나?”
얼떨결에 반문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대부인께서 살아계실 것 같아서 그분 생각이 자주 나곤 하던, 그러니까, 대부인께서 작고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일입니다만.”
“응.”
“각하께서 어릴 때부터 하시는 언행이 대부인과 많이 닮으셨다는 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
“대부인께서 돌아가신지 오래라 각하를 보며 대부인을 떠올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었습니다만, 그런데 오늘 이리 말씀 드리다보니 정말, 여전히, 많이 닮으셨습니다.”
총집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게 아마도 덕담이리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망아지의 여파가 거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조금 전 들은 정보는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팽팽하게 당겨졌다.
*
이런 시기에 오드리나를 길게 비우는 것은 좋지 않았으나, 나는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합하여 애초 넉넉하게 3주 일정을 잡았었다. 공작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여 내려오기 전에 할리에게 나 없는 새 경계해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에 대해 단단히 언질을 주었다.
그것의 결과물이다. 나는 급전된 서간을 여러 차례 읽고 나서, 차분하게 두 팔을 팔걸이에 걸쳤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결국.
쥰의 소문이 터졌다.
그러나 그전에 전 발리앙 후작의 소문이 하나 더 터졌으니, 뭐. 크게 놀랄 것도 열 받아 할 것도 아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을까. 이상하리만큼 쥰의 소문을 퍼트리지 않더니 발리앙은 결국 이번에도 늦었다.
요컨대 비슷한 일의 반복이라는 뜻이다.
발리앙 전 후작의 소문이 돌고 얼마 있지 않아 쥰과 관련된 라이네 전 공작의 추문이 터지면. 발리앙의 소문을 덮기 위해 또 라이네를 끌어들인 거라는 둥, 또 그 두 가문이라는 둥, 이 쯤 되면 두 가문의 적이 하는 일이라는 둥.
같이 떨어지는 나락이다.
같이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이는, 나락이다.
-그대가 내 모친과도 친했다고.
-예.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군요.
잠시의 침묵 뒤로 나온 전 후작의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때가 되면 퍼뜨릴 소문에 신빙성이 어떻게든 생기리라 생각해서.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살아있는 쥰. 살아있는 라이네. 살아있는 나. 살아있는 가문. 망자의 명예를 최대한 지켜드리려 하지만, 다시 라이네가 엎드러지느니 두 분께 죄를 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하다.
물론 어머니를 최대한 소문에 엮지 않으려 했다. 하여 총집사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당황스럽더라. 그러나 내가 내려오기 전 이미 할리와 가엘에게 당부해둔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택한 소문은 간단하다 하면 간단한 내용이었다.
발리앙 전 후작 아마도르는 다른 여인을 사랑했고, 부인과는 정략혼을 한 것뿐,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하여 발리앙 전 후작과 그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아, 부인이 오드리나가 아닌 영지에 머물렀다 하는.
정략혼 자체가 무어 문제인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소문이 돌면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밖에. 소문의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는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거 자칫하면 어머니가 지나치게 얽히게 될 것 같다고 느낀 건, 총집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구로 지냈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어머니와 전 후작이 그렇게까지 친할 줄은 몰랐지.
내가 원한 건 전 후작이 사랑한 다른 여인이 어쩌면 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수위에서 끝나고 발리앙에게 치욕스러운 배경을 깔아두는 정도였는데, 자칫 소문이 상당히 더러워질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이 확실하게 가능해지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조금이다. 더러워질 수도 있음을 전혀 가정해두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말했듯, 망자의 명예보다는 살아있는 라이네를 구하는 게 내게 우선적인 일이다.
나는 눈을 뜨고 시선을 오른손의 끝으로 내렸다.
할리의 필체로 쓰인 서신이 보였다.
“…….”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바로 쥰의 소문을 터트릴 줄이야. 얼마나 모욕적으로 받아들였으면 이러나. 그토록 발리앙의 소문을 빠르게 덮고 싶었나.
베르덴과 다르게 쌍둥이는 저희 모친과 함께 발리앙령에 주로 머물러 모친과 사이가 좋다고 알고 있었다. 발리앙령에 방문하여 내가 본 바로만 판단하기로는. 그러나 정말 사이좋은 모양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아. 어디보자…….
같이 상처를 받았으니 범인은 라이네가 아니라는 인식도 이 정도면 충분하게 흘러넘치게 될 테고, 훗날 혹시 모르는 주장에도 반박할 거리가 생겼다.
의자 뒤로 수 걸음 다가가면 있는 창문 앞에 섰다. 이미 바깥은 탁하게 파란 달빛 내린 오후였다.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을 지나서 주홍빛은 보이지 않았다. 반시간도 되지 않아 완전히 어두컴컴해질 터.
보고 있자니 호흡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있는 서신을 다리 옆으로 조금씩 흔들다가, 밖을 보는 그대로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잘 진행되고 있는 거겠지.
잘, 진행하고 있는 거겠지.
보이는 나무들 중 하나를 선택해 한참 말없이 응시했다. 심장이 명치에, 다시 가슴에, 목에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묘한 긴장이 천천히 사라졌다.
뒤돌아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촛불에 서신을 댔고, 그대로 태워 없앴다. 이후 총집사를 불러 차비하도록 하고 간 곳은 신전이었다.
나는 소산식 이후 단 한 번도 추모한 적 없는 아버지와, 살아오는 내내 단 한 번도 추모한 적 없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라이네의 많은 공작 부부가 잠든 땅에 있는 나무를 수 분간 바라보았다.
신전을 나오기 전에 만난 클레멘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선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나 역시 화답했다. 나는 신을 믿는다.
다음 날, 나와 기사들은 오드리나로 돌아가기 위해 말에 올랐다. 거의 쉬지 않고 빠르게 달린 덕에 엿새 만에 오드리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할리는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하더니 평정을 잃은 목소리로 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쥰의 태생과 아버지가 동생의 여인을 취했다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추문이 얼마나 거침없이 오드리나를 휩쓸고 있는지, 듣는 내내 웃다가 끝까지 웃으며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알았다. 예상한 범위 내.
이런 소문이 날지 몰랐으니 당연히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할리는 내 반응을 보고 걱정을 완전히 버려버린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곧바로 시중을 받아 예장했다.
그리고 잠시 모두를 퇴실토록 한 후에, 상자 하나를 불러냈다.
아버지와 쥰의 모친이 썼던 계약서 두 장이 담긴 상자다. 붉은 기 도는 장갑을 낀 오른 손을 그 위에 올리고 말끄러미 상자를 눈에 담았다. 망설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침착하고 냉정해야 했다.
잠시간 상자를 바라보다 깊이 숨 쉬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더라.
“…….”
나는 허리를 숙였다.
죽기 전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때를 놓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끝까지 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었다. 이미 쥰은 소문으로 그 정통성에 상당한 상처가 나 있는 상태였던 데다, 나는 죽을 몸이었고, 나 죽은 뒤에 쥰은 라이네를 이어받아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시간, 상황이 일정 정도 달라졌다.
아직 내게 아이가 없으므로, 위급한 시에는 쥰이 라이네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라이네가 내 대에서 휘청거리는 일은 결코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것을 쓸 것은 쥰의 소문을 아마도 막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처음부터 각오했던 바.
상자 위에 있는 오른 손 위에 내 이마를 댔다.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하나 모두 풀어가야 해. 이 의혹에서 바삐, 완벽하게 놓여야 한다.
“…….”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뇌었다. 쥰은 더는 내 친동생이 아니게 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납득할 때까지, 적어도 머리가 납득한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되뇌고 되뇌었다. 끝까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6개월이 넘도록 앓아왔는데도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기적이 일어날까.
이마를 떼고 허리를 세워 바로 섰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끝이다.
이후 상자를 들고 입궁한 나는 계약서를 알드리히에게 제출했다. 내일이면 쥰이 숙부의 아이인 것과, 쥰의 모친이 내 어머니를 죽인 것과, 그것을 빌미로 라이네에 들어온 것과, 아버지는 결코 쥰의 모친을 라이네 공작부인으로 인정한 적 없다는 것을 곧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 밤늦게 돌아와, 내 기척에 잠시 깼다가 도로 잠든 쥰의 손을 잡고 새벽까지 들여다보았다. 울지 않았다. 울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잘 해가고 있었다.
쥰의 모친이 자진하게 된 이유가 무얼까 하는 의문이 나오기도 했으나, 그 대답으로 현 라이네 공작을 증오하여 죽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던 것을 들켰기 때문이라는 말이 퍼졌다. 귀족들은 라이네를 속닥속닥 조롱하면서도 아버지를 나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자진하신 일이 독 때문인 걸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도, 쥰이 공작위를 욕심내어 그리한 것이 아니냐는 말은 아직 크게 나오지 않는 중이었다. 그 이유가 나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황상 그토록 쥰의 모친에게 시달려온 내가, 그 여자의 소생인 쥰이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면 그토록 우애 좋을 수 있었겠느냐며.
또한 나 있는 자리에서 그런 비슷한 말이 나올 시의 내 반응이, 마냥 곱고 다정하지 않기도 했었다. 화내며 터는 것보다 웃으며 터는 게 더 매섭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겪어야 했던 쥰은, 내게 제발 옆에 있을 수 있게 해달라며, 울다 죽을 것처럼 울었다.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잊은 모양이다.
나는 눈물로 흠뻑 젖은 청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양 엄지로 눈가를 쓸어주었다.
“넌 내 동생이야.”
쥰의 숨이 거칠어졌다. 조금씩 그쳐가는 것 같던 눈물이 다시 뜨겁게 흘러내려 내 손을 적셨다.
“사랑한다. 누가 무어라 해도 넌 내 동생이야.”
누이이기에 앞서 라이네를 살려야 하는 가주이기에 한 일이지만, 한 구석, 나 개인도 살아남기 위해 한 일이기도 하다는 자각이 이번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미안하다.
“수모를 겪게 해 미안하다. 네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 미안해.”
그래서, 쥰이 겪는 이번 수모는 내 탓이다. 일부라도 내 욕심을 차렸다는 건 사실이니, 내 탓이다. 미안해하시지 말라고,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눈물을 쏟는 쥰에게 나도 고개를 젓고 연신 속삭였다. 미안해. 사랑한다. 버리지 않아. 넌 내 동생이야. 미안해.
나는 절망, 두려움, 간절함이 섞인 그 눈물을 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이번 일에 있어서 마음 스러져서 울 입장도 아니었고, 쥰을 향한 미안함을 제외하면 나는 흔들린 곳 없이 괜찮아서 힘들어하며 울 이유도 없었다. 라이네 공작이 지켜야 하는 것과 지켜야 하는 이들은 여전히 내 어깨 위, 등 뒤에 살아 있었고, 하여 갈 길이 남아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내 괜찮아왔다.
쥰의 소문이 가라앉은 이상 사교계에서 가장 재미있게 도는 소문은 발리앙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내가 바라 마지않던 대로, 발리앙은 본격적으로 의심 받기 시작했다. 물론 발리앙과 라이네에 악감정을 가진 제3자의 존재도 의심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발리앙과 라이네가 엮인 혼담은 계속 되었다.
발리앙 저택 출입을 여태 자제하고 있던 나는 쥰의 일이 가라앉은 후부터 발리앙 저택을 몇 번 찾았다. 가서 베르덴에게 아리엘과 쥰의 혼담을 조르고, 담소도 나누다가 돌아오는, 그런 간단한 친목모임 같은 것이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달랐다.
베르덴이 후작위를 내려놓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힘이 실리고, 실렸다.
내가 짐작하고 예상하고 있는 게 옳다면, 그 추측은 발리앙의 누군가를 상당히 행복하게 만들고 있을 터.
이래서 베르덴에게 말만 하고 발리앙에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청혼서를 보내면 누구의 혼담인지 알려지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베르덴이 지나치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넉살 좋게 소문을 키워냈다.
그러나 그 해 11월 말. 포르타 백작이 사망.
12월, 소산식을 마치고 오드리나로 돌아온 시드니가 청혼서를 넣었다.
============================ 작품 후기 ============================
누구한테 넣었을까영!
나는, 한다, 연참을, 나흘 연속. 예이이이이>ㅁ//(셀프 쓰담쓰담)
선추코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독자님들 덕분에 힘내서 쓰고 있습니다♡♡ ...이러고 내일 잠적하면 안 되는데.......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