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96화 (96/157)

00096 CHAPTER 8. 겨울비. 비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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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노환으로 앓아누웠다, 고 알렸다.

일어나면 먹고 마시고 기절시키고 일어나면 먹고 마시고 씻기고 기절시켰다. 약물은 조금도 투입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서 노환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내가 발리앙이라면 이 일을 경계할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집사가 발리앙을 털어놓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쥰에 대한 소문은 킨들 라이네 토벌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도 나지 않더라.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9월 초.

킨들 라이네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작전 명단에도 쥰은 포함되지 않은 고로, 라이네에서는 나와 기사들만 라이네령으로 내려왔다. 기사단을 이끄는 시드니와는 최소한의 인사만 하고 더는 대화하지 않았다.

요즘에 비하면, 나와 그는 내가 기억이 없었을 때에 훨씬 친했다 할 수 있겠다.

나는 킨들 라이네에 내려가서 몹시 약한 척, 몹시 긴장한 척 하며 첫째 산을 탔다. 내 명령을 수행 중인 가엘과 다른 기사 두엇을 빼고 이미 이 산에서 내 무용을 본 기사들과 그외 젊은 기사 몇을 데려온 탓에, 나를 아는 기사들은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으나 내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표정관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둘째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내 일행은 이만 하산하기로 했다. 검을 든 적 없는 사람으로 가장한 상태다. 그대로 더 가면 그거야말로 폐인데다, 그렇게 약한 모습을 오래 보이는 건 라이네 공작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시드니는 내가 이만 내려가 보겠다는 말을 했을 때 차분하게 동의했다.

지난번 윌리엄 용병단과 함께 이 산에서 내가 어찌 날아다니다 부상당했는지를 보았음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그의 신분차가 있어 대서기 힘들기도 하겠지만, 애초 라이네 공작의 토벌 동행은 어디까지나 격려를 위해서이므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도, 어디까지 함께 도달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감히 공작에게 그런 시선을 준다고 노발대발할 만한 시선이 아니다. 나를 친근하게 느끼는 시선도, 아니다. 그는 그저 나를 보았다.

나는 너그럽게 웃었다.

“왜? 할 말 있나?”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시드니는 덤덤하게 내게 사과했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경.”

작전단 기사들에게 하는 격려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여기서 더 해야 할 일이 없기에 나는 먼저 몸을 돌리다가, 도중에 불쑥 그를 부르며 음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그에게 향했다. 어느 날 황궁 복도의 재현 같다.

조금 전이 그의 시선이었다면, 이번에는 나의 시선이다.

잠시 시드니를 보다가, 씩 웃고 입을 열었다.

“수고하게. 몸 건강히.”

언제부턴가 이렇다 하게 거슬리는 느낌 없이 나아있는 손이 잠시 저린 듯 했다.

그의 반응은 보지 않고 완전히 돌아섰다.

내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의 기사들과 안내를 위한 라이네의 기사, 병사들과 황제의 기사들.

시선을 옮기며 가장 앞에 서 있는 이들만 자연스럽게 훑어졌다. 굳이 세세히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기사들이 뭉쳐서 있는 지점으로 다가가는데, 두 명 정도, 내 쪽을 향해 간단한 인사도 아니고 경례를 하더라.

내게는 할 이유가 없고, 내 뒤에 있을 사람은 시드니다.

……뭐지?

때마침 괴물들의 기척이 들려서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내가 가야하는 쪽이 아닌, 기사단이 전진해야 하는 쪽에서 오는 살기였다. 나는 나를 모르는 기사들의 걱정 어린 재촉에 등 떠밀려 빠른 걸음으로 하산했다.

일정이 이리저리 늦어지고 하여, 레룩스에 들어오고 나서도 곧바로 킨들 라이네로 갔던 탓에, 하산 후 블린성으로 향했다. 주인의 귀환이다. 식솔들은 뛸 듯 기뻐하며 나를 반겼다.

나는 총집사와 시종 한 명, 시녀 한 명을 뒤에 두고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전 황제 폐하의 소산식에 맞추어 떠난 이후 반 년 만에 오는 블린성은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천 년에 가까운 수백 년을 서 있는 성이 설마 반 년 만에 뒤집혀있겠느냐마는, 그런 상식이 항상 통했다면 내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3층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은 내가 직접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에 서서 들여다 본 집무실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정갈하고 시원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소산하고 죄인들을 쫓고 색출해내고 죽이는 것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방 자체에 관심 가진 적이 없음에도, 기억 속 여기 집무실은 난장판이고 답답하다는 막연한 느낌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아, 그렇군. 그때에는 아버지를 전 공작이라 부르며 크게 애정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리 열심이었다.

온몸에 비치는 하얀 빛이 시원하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책 냄새 섞인 햇빛을 만끽하다가 손을 거두고 발을 디뎠다.

총집사는 여기까지 따라온 시종에게 소세를 준비해 오도록 이르고 있었다.

나는 쥐스토코르를 벗어 책상 위에 내려두고는, 문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집사만 잠시 들어와. 그대는 물러나고.”

시종이 준비하러 떠나면 시녀가 남는다. 시녀를 정확히 응시하고 말하자,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 그대로 정중히 몸을 숙여 보였다.

오드리나의 저택에 앓으며 누워 있는 집사보다 열 살 정도 나이 어린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라이네를 섬겨온 노인이라는 건 그리 다르지 않다. 아, 열한 살이던가. 승작하기 전 라이네령의 일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었기에, 내가 이 사람의 나이를 아는 건 지난 시간의 기억 덕분이다.

이번 시간에서는, 해독약을 위해 중앙령 레룩스의 신전에 퍽 자주 드나들면서도 블린성은 웬만하면 들르지 않았으니까.

가출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생각나면 한 번씩 얼굴을 내밀고 성을 만담이나 장난으로 뒤집어놓은 후에 훌쩍 떠나는 식이었다. 인즉, 여기 사람들을 신뢰할 정도로 부딪힌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어서.

내가 감금당해 있는 동안 이 성의 사람들, 내 봉신 중 몇이 나를 구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다. 특히 이 사람. 이 노인.

서류를 모아서 오드리나의 내게 보내는 일을 계속 맡게 했던 것도, 그런 기억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급한 일 없이 서서 그를 보자, 소산식을 하러 내려왔을 때 무릎을 꿇린 게 이제 와서 미안해졌다.

물론 사과할 생각은 없다.

나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집사를 보았다. 공사는 구분해야지. 그때 일은 이 사람이 꿇을 만 했었다. 내가 웃으며 보기만 하자 집사의 표정이 점점 어색하게 굳어갔다.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이 대치 아닌 대치는 내가 책상 위에 걸터앉는 소음으로 깨졌다.

바닥에서 떨어진 두 발의 발꿈치로 책상을 툭, 툭, 두드리다가 느리게 물었다.

“건강히 잘 지냈나?”

“염려해주신 덕분에 건강합니다.”

“잘 지냈냐는 질문에는 뭐라 대답하려고?”

“……그저,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살아 있기에 살고 있다는 그런 말.

전 공작이 돌아가셨는데 감히 잘 지내고 있느냐, 혹은, 이제 내가 공작인데 아직도 전 공작을 잊지 못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느냐, 는 둥의 벼락을 내릴 것은 아니었는데 대답이 조심스럽다. 나는 결국 낮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 나도 그저 지내고 있네. 시간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는군.”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건강이, 다시 나빠지신 겁니까? 설마 독이…….”

여태 조심스럽던 사람답지 않게 다급한 기색이 느껴진다. 나는 오른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멈추었다.

“이런. 괜찮아. 내가 말한 건 마음 내지는 감정일세. 아버지를 잃은 일에 대해서 아직도 마음 무겁다는 말이야. 그대도 그렇겠지만.”

“…….”

내 말에 그는 또다시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수달 전의 일이 총집사의 머리에 선연하게 새겨진 모양이다. 좋되, 좋지 않다. 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 가려운 귀 밑을 검지로 긁적였다. 이거야 원. 이렇게까지 숨죽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니었었는데.

씻고 난 후에 조급하지 않게 앉아 물어볼 것을 그랬나.

점점 미안해져서 나는 휘휘 손을 저었다.

“됐어. 그대를 떠보는 것도 아니고, 화내려는 것도 아니네. 이건 그만 이야기하지. 안부 주고받다가 서로 상처 입겠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물어볼 게 있어.”

“…….”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집사의 자세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 내가 이 사람에게 한 것은 온통 질문이었다.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들. 이 순간 노인이 긴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오는 내내 바람을 맞아 버석하게 말라있는 입술을 가볍게 떼었다.

“그대. 어머니가 어찌 돌아가신 일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나?”

“……대부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난번에는 블린성의 방문을 아버지의 작고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의 작고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몸 양 옆의 책상을 짚고 있는 손들을 조금 구부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찾아도 특별한 건 나오지 않더군. 내가 아는 건 그분이 한 여인을 구하려다 사망하셨다는 것뿐이고, 당시에도 라이네에 있던 용인들 역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어.”

그 한 여인이 쥰의 모친인 건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다.

총집사는 눈을 내리고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아무 것도 없나?”

“아무래도 오드리나에서 돌아가셨고, 소식을 전해 받은 것뿐이라서……. 저택의 집사는 뭔가를 알지도 모릅니다.”

그 집사가 배신자라서 문제다.

착잡한 한숨을 쉬고 조금 더 물었다.

“소산식 때문에 오셨을 텐데. 그때도 뭔가 들은 건 없고?”

“……신전에만 머물다 올라가셨었습니다.”

“…….”

어둡게 가라앉은 슬픔 자체가 곧 총집사의 목소리였다. 끊어질 듯 목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음성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집사의 얼굴에서 조금 비꼈다. 이번에 어머니의 일을 알아보며 듣고, 듣고, 또 들은 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셨다는 점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 수십 가닥을 앞으로 끌어와 매만졌다.

그런 보고를 끊임없이 듣다가, 어느 날 초상화들을 걸어놓은 회랑에 걸음 했었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기에 보러 오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제야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그려진 그림.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머니.

그림을 보아도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의자에 앉아계시는 어머니는 당신 오른 어깨에 올린 아버지의 손을 오른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닿음 속에서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얼굴을 하고 계시더라.

염색했을 때 어째서 아버지께서 그리 노하셨던 건지 그렇게 깨달았다. 이제는 나도 선명하게 상상해낼 수 없는 머리카락 색이 어머니의 머리칼 색이었기에.

“그럼.”

손끝에서 굴리던 머리카락을 놓자, 사르륵 귓가를 스쳤다. 그래봤자 묶은 머리의 끄트머리다. 고개를 기울이자 알아서 뒤로 넘어갔다.

나는 내가 또 연 말문에 집중하는 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또렷하게 물었다.

“그대가 아는 어머니께서는 어떤 분이셨나.”

“제가 아는, 이라 하시면.”

“외양. 성격. 언행. 그대가 느낀 것. 무어라도 좋아. 그 어떠한 형용사라도 무례로 취급치 않고 용납할 테니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봐.”

아직 라이네의 용인들을 뒤엎지 않은 지금, 오드리나에서 이리 대놓고 묻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라서, 교묘하게 묻고 들은 것들을 이것저것 조합하여 어머니를 조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긴 달랐다.

내 허락에도 오래도록 잠잠히 있는 총집사를 나 역시 묵묵히 기다렸다. 노인은 수 분 후 크게 숨을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활기찬 분이셨습니다.”

“…….”

“항상 웃고 계시고. 많이, 많이 활기차셔서 붕어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그분을 망아지 같다고 하신 적도 있다고, 전 공작 각하와 대부인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망아……. 아, 잠깐만. 이 사람이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로 내 넋을 흔드네.

벌어지려는 턱에 힘을 주고 눈을 깜박이는데, 총집사는 배려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오오오!

사담(징징글주의/하소연주의)))) 공부가 열 시간. 글 쓰는데 6-8시간. 졸린 거 깨고 쉬고 밥 먹고 하다보면 일과를 다 마치는 데 20-21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 가면서 연참 중....... 머리가 핑핑 도네요OTL 글이 잘 진행되고 있는 건지, 쓰면서도 모르겠......

그래도 이미 시작한 연참, 어떻게든 이 챕터를 끝내고 사라지겠다고 노력하는 중입니당!!

집사 관련해서는.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놉을 쓴 건가@[email protected]'하는 생각도 들었고, 쓰다보니 에브보다 제가 먼저 배신감.......

제가 짜고 제가 썼지만, 배신감 쩔었어요, 집사님.(진지)(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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