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94화 (94/157)

00094 CHAPTER 8. 겨울비. 비애 =========================

*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자리에서 집사의 행동을 단속하고, 한 가지만 물을 생각이었다. 너희 출신지를 알고 있으니, 다시는 서류를 위조하지 말라. 그러나 어째서 서류를 위조하였나.

헌데 이건.

아, 세상에.

“……각하. 괜, 찮으십니까?”

오늘 쥰이 문을 등지고 앉지 않았더라면.

오늘 쥰이 나를 누나라 부르지 않았더라면.

오늘 쥰의 옆에 집사가 서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가 쥰을 보고 집사를 보고 방의 구석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을 토대로 조금의 기시감도 느끼지 못했더라면.

손을 떼었다가 이번에는 이마를 짚었다.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제라도 알아낸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숨 못 쉴 정도로 놀랐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충격을 받긴 했으나, 알드리히가 발리앙과 내 관계를 짐작했을 때보다는 나았다.

아무래도 집사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 정도로 미친 수위인지는 미처 몰랐으나.

그러나 차라리 이 정도 되니 간만에 증오 없이 정직한 분노가 올랐다. 아, 나는 화 나 있는 게 맞다. 울화가 쌓였다든지 뭔지 인정할 수가 없어 반박해왔으나, 가슴속에서부터 이 순간 무언가가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바비에르 따위가 감히 나를 기만해.

알드리히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그가 내 윗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 당황했었다. 집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나보다 수십 년을 더 살며 쌓인 경험들이 만만치 않을 것도 알고, 그가 내 약점을 쥐었을 것도 알아.

그러나 집사는 알드리히와 다르다.

알드리히 때와 다르게, 내가 그의 목숨을 쥔 윗사람이었다. 이 사실이 아랫사람에게 얼마나의 두려움을 끼칠 수 있는지 역시 알지만,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어디까지 미친 결심을 할 수 있는지는 더더욱 잘 알기에, 나는 점점 가라앉는 머릿속을 냉정하게 살폈다.

아무리 나이든 노인이라 해도 모두 죽음에 초탈한 게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한다.

아들이 죽은 이 사람은 그럼, 죽음을 두려워하려나. 고문이 효과가 있을 사람인가. 고문 받다 혀 씹어 자진할 만큼 지독한 사람인가. 신문 한 번을 할 때도 이렇게 살피고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들이 많았다. 따라서 준비되지 않은 이런 자리가 싫지만, 이미 닥친 일이다.

해낼 수 있다.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이고.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눈만 뜨고 입을 열었다.

“그대.”

나직한 부름에 내 앞의 노인이 움찔 자세를 바로 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평정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팔걸이 너머 내 시야에 들어오는 바닥을 뜻 없이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네. 믿을 만한 자에게 쥰에 대한 일을 일러두었으니, 자기를 죽이면 비밀이 퍼질 거라고 했다더군. 쥰의 모친이.”

좋은 감정이 일절 없음에도 그 여자를 존중하듯 말하는 건, 쥰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침을 삼켰다. 이후 잔잔하게 긴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서 손을 뗐다. 옆으로 구부렸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 집사를 온전히 눈에 박았다.

“외부인이 어쩌고 했는데.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여럿일 수도 있고, 외부인 한 명일 수도 있겠지.”

그 말을 하며 전연 웃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날 걱정하는 척 할 여유라도 있었던 집사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맞받아치는 중이었다.

나는 입가 근육을 움찔거린 끝에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만일 여럿이라 하면 그 믿을 자들 중 한 명이 그대인 것 같은데. 어떤가.”

“…….”

대답 않는 그에, 나는 무심하게 단언했다.

“그대군.”

“저는, 한 마디도……!”

“억울하면 대답하면 되는 거겠지.”

“…….”

그러나 집사는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닫힌 문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할리일 것이다. 나는 집사 뒤의 문을 보았다가, 아무렇지 않게 집사의 얼굴로 초점을 되돌렸다.

그리고 그를 가소로워하는 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의 입이 잘 열릴 수 있도록 좀 도와주지.”

“…….”

“지금 내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대의 일만 알고 있는 것 같나? 그래서 입 다무는 거라면 오산일세.”

집사는 도드라지게 동요했다.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적시는 것뿐이었지만, 충분한 반응이다. 나는 조금 더 이를 보이고 웃으며 기가 막힌다는 헛웃음소리를 냈다.

어쩌면 이 사람이 바비에르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혹은 누구의 손에 그리 되었는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용부에서 부리나케 가문을 삭제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그 가정이 내가 아는 선에서는 가장 설득력 있었다. 그 외에 가문의 이름을 지울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

그러나 바비에르의 일이 터진 후에 가문을 삭제했다면,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시기가 조금 기묘했다. 아버지께서 우리 가문에 그토록 오래도록 충성해온 집사의 가문이 바비에르라는 걸 모르셨을 것 같지 않아서.

그러나 그렇다고, 공작에 오르기 전부터, 공작에 오른 직후, 반드시 고용부를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만 해도 라이네 공작이 되고 수개월 후에야 고용부를 확인했었고.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전대 공작을 존중하며 물려받는 것들 중에는 사람들도 있는 탓이다. 나는 아버지를 존중했고,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버지를 존중하신 것뿐이다. 그리고 이 집사는 내 조부 대에 고용된 사람이었다.

용인들을 물갈이하는 건, 어지간히 선대와 마찰이 있던 가주가 아니고서야 하지 않았다.

하여 짐작하는 바.

바비에르가 멸문에 가깝게 쓰러지기 전, 그것도 오래 전, 이미 집사에게는 제 신상에서 바비에르라는 가문을 없앨 필요를 느끼게 된 일이 있었으리라고. 그리고 그 일은 현재 내가 아는 것 밖에 있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확실치 않은 지금, 너 설마 바비에르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묻는 건 긁어 부스럼.

이 자리가 파하고 난 후 할리에게 명령할 일이 하나 생겼다.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훅 뱉었다. 그새 빠르게 명치에 닿을 만큼 깊이 들어갔던 숨이 나오자마자, 써늘하게 식은 음성이 혀를 터치고 나왔다.

“하나 묻겠네.”

부러 짓고 있던 웃음은 칼로 저민 것처럼 지웠다. 나는 물었다.

“그대. 발리앙과 내통했나.”

그리고 집사는 온몸으로 대답했다.

이 상황, 이 자리만 보자면 맥락 없이 나온 발리앙에 그는 분명 충격을 받았다. 그러게 내가 미리 말했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대의 일만 알고 있는 것 같으냐고.

일개 집사의 입을 통해서는 쥰의 소문이 그렇게까지 퍼질 수가 없다. 힘 있는 가문의 도움을 받았을 테고, 당시도 지금도 라이네의 주된 적은 발리앙이었다. 물론, 쥰의 모친을 모신 시녀를 통해 흘러나간 것도 있기야 있지만. 잠시 그를 보다가 진심 어린 한숨을 흘렸다.

돌겠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쥰이 자기 손자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왜.”

새빨간 거짓말로 가려진 이야기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믿을 수도 있을 테고 그 누군가는 내 앞의 집사였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노인의 양 어깨가 약간 움직였다. 그의 두 손은 테이블에 가려져 있으나, 저게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부들거린 표시라는 것은 바로 짐작 가능했다. 조금 더 기다리자, 슬며시 그의 얇은 입술이 열렸다.

“……제 아들이 어찌 죽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해두지.”

“돌아가신 대부인 때문에 죽었습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머니?”

“예.”

“어머니께서 작고하신 날에 사망했다고 듣긴 들었는데.”

내가 협박당한 이야기, 수기에 쓰인 이야기대로라면 어머니와 집사의 아들은 ‘함께’ 사망했다. 같은 날에 사망한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부위’에 치명상을 입고. 그러나 굳이 내 입으로 말해 인정하는 것처럼 여지를 줄 필요는 없었다.

집사는 내가 이 이야기를 아는 것에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으나, 금세 수그러졌다.

“어떻게 아시……, 예. 그날, 대부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사실이라면 라이네를 미워할 만 하되, 거짓이라면 실로 멍청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단언하는데. 나는 어머니가 쥰의 모친을 구하려다가 왈패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집사의 아들이 있었다는 건가, 지금?

아, 잠깐.

이런. 생각이 기묘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오른 눈썹을 찡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죽었는데.”

“살해당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아하. 더 이야기 않겠다?”

“살해당했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집사는 고집스럽게 말을 반복했다. 눈이 번뜩였다.

잠깐 그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그대 말을 믿고, 그대 행동에 당위성이 있음을 인정해 달라?”

“…….”

끓는 증오와 미움을 마음에 잠가놓고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는 입장에서, 그 미움을 이십 년 넘게 가려왔다는 말에는 오롯이 감탄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만일 쥰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면 이십 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하물며 아들이 살해당했다면.

살해의 여부가 진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차치해두고서라도.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감탄에서 그친다.

나는 목 뒤를 쓸다, 서늘하게 식은 목덜미에 그대로 손을 걸고 나긋하게 물었다.

“발리앙에게 쥰의 비밀을 알렸어?”

급선회된 주제에 집사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들의 죽음에 미안해하길 바랐나. 방금 던진 질의에 대한 답이 절실히 필요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쥰의 소문은 터지기 전에 막으면 참 좋겠지만, 처음부터 그게 터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던 고로. 이런 생각에 있어 내가 미안해할 사람은 쥰이다.

나는 다시금 물었다.

“누군가.”

“…….”

“그대가 알린 자가 누구야.”

“…….”

이 자리에서 달래고 다독여가며 답을 들을 생각, 없다. 진정 묻고 싶어진 것도 다른 것이었다, 이미. 어느 순간 번뜩 떠오른 것이다.

나는 얼음처럼 끓는 중이었다. 눈을 깊숙이 감고 거칠어진 숨을 떨며 내보냈다. 턱이 떨렸다. 이 악물었다가 놓기를 여러 번. 그 사이에도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이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죄인이었다.

아까 겁에 질릴 만도 했고, 응당 겁에 질려야 했다.

살의를 정돈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교육의 힘은 참 대단해서, 라이네 공작은 쉬이 자신을 잃어서는 아니 됨을 몸은 절로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꽉 이를 악물고 눈꺼풀을 올렸다.

그리고 눈이 시릴 정도로 노인을 보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대. 한 번이라도 날 죽이려 한 적 있나.”

-설령 독을 쓰더라도…… 침 쪽으로…… 주사하기엔 그만이잖아?

다 떠오르지는 않으나, 뜨문뜨문 기억이 이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가 보지 못하도록 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 있는 할리는 일순 놀란 얼굴이었으나, 다가오라고 검지로 손짓하자 문을 닫고 다가왔다. 그는 전부 들었을 터.

기사인 보좌라 그의 허리춤에는 검이 있었다.

나는 그 검을 빼들었다. 묵직하게 손에 실리는 무게가 족했다. 그것을 집사의 목에 겨누자 노인이 흔들렸다. 입 꼬리를 올리고 웃는 얼굴로 다시금 다정하게 물었다.

“미로 골목에, 한 번이라도, 간 적 있느냐고 물었다.”

-라이네 저택으로 들어갔어.

“작년 여름에, 내게 자객을 보내기 위해 미로골목을 방문했던 자가 그대인가.”

-그래도 고객님이 화내지 않을 만큼은 일해서 다행이지.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잠시 후 다음편으로오오오!

이번편 참고는 챕터4 미로골목에서 있었던 대화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