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92화 (92/157)

00092 CHAPTER 8. 겨울비. 비애 =========================

*

나는 알드리히가 거기까지 추측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도. 아리엘이 내 뒤통수를 쳤을 때처럼 조금도.

그가 머리 좋은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전에 그는 아무 것도 몰랐었다.

……실마리 될 게 적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망 비슷한 것을 느끼며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을 진행하며 많은 것들을 알아두고 찾고 예상해놓고 준비해두고, 수많은 가정들과 수많은 상황들을 대비해두었으나 알드리히가 발리앙과 내 관련성을 아는 건 대비해두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이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는 도중에 머리가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훗날 발리앙의 일원이 죽게 되면 알드리히는 나를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을 텐데.

깊은 탄식을 흘리며 서랍을 열었다. 죽을 것 같다.

알드리히의 말이 맞다.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분명히 있고, 그는 나를 잘 안다. 내 친한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나와 닮았다. 그래서 나 죽기 전에 알드리히가 했던 말의 반 정도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이가, 조금만 더 멀었어도,

죽을 것 같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

빈 수면제통을 건성으로 흔들다 벽을 향해 던졌다. 조각조각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대고 손등부터 손목으로 이어지는 팔로 두 눈을 가렸다.

그러나 나는 괜찮다. 이 모든 일이 힘들지 않고, 감당할 만 하다. 지금 당장은 숨이 막혀도 잠시 후에 다시 멀쩡하게 웃으며 기사들의 보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의무가 많은 그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따라서 조금만 쉬면 곧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입을 조금 벌리고 연방 숨을 들이켜고 내쉬길 반복했다. 내쉴 때마다 명치에서부터 끌어올린 감정도 함께 버렸다. 허어, 허어, 하고 묵직한 숨이 공중에 섞였다.

막막해 하며 버릴 시간은 없다. 당장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나는 팔로 눈을 압박한 그 상태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나를 협박했던 바비에르 일원의 수기는 내 손에 들어왔으나, 이번에도 황제는 읽었다.

황제는 발리앙이 날 쫓고 아버지를 죽였으리라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여기서 내 머릿속이 초조한 절망으로 얽혔다. 나는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수십 번 반복하고 나서야 다시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하여 다음.

황제는 나를 경계하고 나를 방해하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죽일 것인가.

“…….”

끈적끈적한 피로가 나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다 온몸이 녹아내려 땅에 고일까. 눈을 가린 팔 끝, 그 손을 오므렸다가 폈다. 손바닥에 닿았던 손끝이 싸늘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덥석 믿고 마음 편하게 다스리기엔, 나는 알드리히를 알기에.

내가 라이네의 가주이듯, 그는 이 나라의 황제다. 친구 사이의 신의? 좋다. 지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신의를 지킬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의를 버려야 할 때가 있다.

베르덴이 친구와 가족 중 가족을 선택한 것처럼.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호흡을 갈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야.”

쩍쩍 갈라졌다. 파르스름하게 저미다 끝에는 오랫동안 물 못 받아 마신 것처럼 듣기 사나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의 질문을 잡아낸 이는 문 밖에서 대답했다.

“각하.”

“들어와.”

입실을 허락했으나, 누르고 있는 눈이 시려서 팔을 떼지 않았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조용히 걸어온 할리는 책상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미령하신 곳이 있다면 의사를 불러올리겠습니다.”

“……아픈 걸로 보이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쉬고 있는 건데. 허리를 세우며 팔을 거두자 눈꺼풀에서 찌르르 울리는 작은 통증이 일어났다. 감은 눈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손끝으로 눈까풀을 식혔다.

그는 나를 조용히 기다렸다.

미간 위의 머리가 약간 찌르는 듯 아프긴 했으나 일상적이라 무시 가능할 만한 통증이었다. 그때부터는 눈을 뜨고 감기를 여러 번 하여 시야를 닦아냈다. 부옇게 안개 낀 것 같은 눈앞이 지독히 짜증스러웠다. 앓는 소리를 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검지를 구부려 눈꼬리를 슥슥 닦으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포르타 영식에 대해서 보고 드리고자.”

“아.”

말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 베르덴과 헤어져 돌아오자마자 내가 명령했던 바. 약간 뜨끈뜨끈한 것 같은 얼굴을 오른 손으로 문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헌데 할리의 짧은 보고는 또 예상 밖의 것이었다. 나는 손을 멈추고 눈을 옆으로 굴렸다가, 다시 할리를 보았다.

아, 잠깐.

“내가 이해한 게 맞아? 헤르조가. 발리앙 저택에 가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고?”

“오드리나에 돌아온 직후의 두 번을 제외해야겠습니다만, 예, 알려진 바로는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심어둔 자의 말로는 전혀.”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왜. 베르덴이 이제 와서 왜. 발리앙을 저버리지 않을 그가 내게 이제 와서 이런 말을 왜. 혹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실마리 같은 것이었을까. 이 말로 자기 할 바는 다 했다는 그런?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큰 실마리다. 내가 이렇게 진실을 알면 그가 이리 한 까닭에 대해 기묘하게 여길 것을 알았을 텐데.

“…….”

내가 아리엘 외의 사람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걸 모르기 때문에 줄 수 있던 언질인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은 손으로 귓바퀴를 긁적였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참 발리앙이랑 나는 안 맞아. 그렇지 않나?”

“각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음? 뭔데?”

“발리앙 후작이 혹 경고하고자 한 게 포르타 영식에 대한 게 아니라…….”

할리는 내 표정을 보고 말을 흐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은근하게 웃는 중이었다. 그의 충성스럽게 다져진 눈이 잠시 나를 살피다 일그러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안다고 하기보다는 수많은 가정 중 하나지, 가정 중 하나. 아직 확정된 건 아무 것도 없잖나.”

“각하…….”

“그러니 그 짐작에 대해서는 입 다물어야 할 거야.”

가벼운 어조로 경고했다. 금방이라도 키득거릴 것 같은 어조로 하는 말을 듣고도 할리는 긴장했다. 입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반응 자체에 주목했다. 어쩌면 아까 알드리히의 앞에서 보인 반응이 저런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를 죽이려 한 게 발리앙이냐고.

다시금 생각해도 기가 차고 소름이 돋아서, 원치 않는 긴장마저 나를 다시 쥐었다. 아, 또. 심장이 명치에서 뛰는 느낌의 시작이다, 또. 나는 손을 내려 명치를 짚었다. 눈을 찌푸렸다가 펴고 입을 열었다.

“바비에르 영주성에서 사람들을 철수시켜.”

“예? 아. 예. 그리 하겠습니다.”

착실히 대답하면서도 의아해하는 할리를 위해 책을 불러왔다. 명치를 짚지 않은 다른 손 위에 나타난 책을 본 그의 눈매에 힘이 들어가 훨씬 선명해졌다. 온 얼굴로 묻는 그에게 내가 씩 웃었다.

“이거야. 찾던 게.”

“어떻게, 어디에서 찾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주셨어.”

“…….”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래. 이해하네. 민망하지. 죽어라 찾아 헤매면서 폐하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이미 폐하께서 가지고 계시면. 이걸 폐하께서 읽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나도 민망했어.”

“민망……,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안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할리는 모른다. 이것의 존재를 내가 어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음, 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입 안에 뭉친 공기를 입 안에서 이리저리 옮기다 터트렸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이야기이고, 그는 내 수하이기 때문에 수기의 내용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걸 내가 왜 찾으려 했는지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랑 이야기일세.”

“…….”

“조금 민망한 사랑 이야기가 두 개. 어느 두 명의 모친에 관한 거지. 정확히 말하면 거짓, 의심, 정황, 그런 것들에 불과하긴 한데, 터지면 곤란하지.”

할리의 눈과 눈썹사이의 거리가 짧아졌다. 나는 팔랑팔랑 수기를 흔들다가 없앴다.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다.

명치에 올리고만 있던 손을 움직여 배를 투박하게 문질렀다. 대화에 애써 집중하니 긴장은 다시 가셨다. 난 빙긋 웃었다.

“더 보고할 것은?”

“없습니다.”

“그럼 나가봐.”

“예. 아, 그리고 저것, 치우겠습니다.”

“아니.”

나는 할리가 가리킨 파편들을 향해 마법을 날려 보냈다. 따로 진을 생성하지 않고도 마법을 시동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그래왔기에 내게는 별다른 일이 아니지만, 할리는 볼 때마다 감탄하는 듯했다.

어차피 마법사들 대부분, 소소한 마법은 진 없이도 시동 가능한데.

그럼에도 나는 할리의 표정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좀 대단하네.”

“……그런 말씀만 안 하셔도 훨씬 대단해 보일 텐데요…….”

“쓸데없이 아련하게 말 흐리지 말고. 진심으로 들리잖아.”

“진심입니다.”

“쓸데없이 또렷하게도 대답하지 마. 속상해.”

할리는 더 대꾸하지 않고 내게 인사했다. 내 기사일 적의 베르덴도 그렇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적응하고 나면 참 재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깊이 속상해진 나머지, 몸을 돌리기 전에 버찌 하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의 혼돈이 이 순간 나의 기쁨.

바라던 대로, 버찌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는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

쥰이 나와 베르덴의 소문을 들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퇴근한 쥰이 나를 붙잡고 무어라 하려는 것을, 일단 씻고 식사한 후에 티타임을 가지며 말하자고 다독였다. 그 길다 하면 긴 시간을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보낸 쥰은 내 방의 티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웃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질문들을 듣고 있는데, 쥰이 모든 질문들의 끝에 말했다.

“기사단 내에서는 제게 가장 늦게 도달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까지 퍼지는데 꽤나 오래 걸렸다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하소연일 지도 모르는 것을 듣고 있다가 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째서?”

“누님의 이야기니까요.”

생략한 말이 두루뭉술하게나마 예상이 갔다. 나는 이 귀여움을 어찌하면 좋으냐는 생각 반으로 피식거리며 그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쥰은 또렷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만드는 다정함, 애정, 존중 같이 부드러운 것들이 덩달아 나마저도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외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쓰다.

나는 느긋하게 웃고 있던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쥰.”

“예.”

“네가 이 소문을 듣고 내게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말해줄 게 있어서.”

아직 차가 올라오지 않은 테이블 위에는 서로 엮여 놓인 쥰의 두 손만이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잠간 응시했다.

아무 의미 없이 내려간 시선이었으나, 그럼에도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길게 박인 굳은살, 뼈마디 굵은 손가락. 모양 좋지만 단정하게 짧은 손톱. 기사의 손이다. 앞에 앉은 쥰은 이미 다 큰 청년이었다. 강하고 단단하게 보이는 저 손들도 나보다 크게 자란 지 오래.

그래서 기억 없이 보낸 지난 시간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전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준 정에도 저리 변함없는 눈으로 나를 봐주기에, 생각나.

나는 그 손들을 보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네 혼인에 대해 상대 가문의 가주에게 운을 뗐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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