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CHAPTER 8. 겨울비. 비애 =========================
“둘 이상이라 하기에는 방식이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확실히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긴 무슨.
나는 이 가증스러움을 잠시 감상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뭐야.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없습니다.”
퍽이나 없겠군. 나는 그러나 어휴, 하며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실은 나도 그래. 내 적이기도 한데 도통 짐작이 안 가는 건 왜일까. 내가 워낙에 착하게 살아서 적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우울한 척 말하자, 베르덴의 표정이 묘하게 더러워졌다.
그 얼굴을 보자 확실히 알겠다 싶었다. 그는 후작 되기 직전에 비하여 많이 짐을 던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우리가 큰 걱정 없던 영애영식 시절처럼.
혹은 어쩌면. 내가 그에게 가져서는 안 되는 신뢰를 가졌던 시간처럼.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그는 지금, 동생이 저지른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정돈을 이상한 방향으로 한 듯 보였다.
그러나 어느 쪽의 정돈이든 진창에 구르게 될 미래는 변함없다.
내 속을 모를 베르덴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음? 그런가? 그럴 지도. 불쾌하지만, 곧 사그라지리라 생각하네. 이런 근거 없는 소문에 라이네와 발리앙이 오래도록 시달리는 일이 설마 있으려고.”
“…….”
있을 것이다.
나는 물러나지 않을 테고 상대도 아마 그리할 테니, 폭로전 비슷하게 진행되지 않을까. 사실을 섞은 거짓 소문의 파급력을 나는 이론적으로도 알고 실지 겪은 적도 있다. 그리고, 나를 상대하는 자 역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알 것이다.
내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열기 섞인 여름의 바람이 약하게 불어오다 부러졌다. 장갑 안으로 땀이 차는 손을 어느 순간 자각하자 손끝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열이 올라왔다. 얼굴이 덥다. 나는 손을 올려 뒷목을 쓸었다.
우리 둘 다 네 가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냐는 질문이나 네 부친의 시신을 보았느냐는 질문 같은 건 조금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할 겸 베르덴에게 시간도 줄 겸 말없이 앞을 보며 걸었다. 움직이다보니 조금씩 어깨 뒤로 넘어가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어느 순간 뭉텅이로 넘어갔다. 아직 어깨 앞에 남아있는 가닥들은 고개를 슬쩍 오른 쪽으로 돌려 모두 넘겼다.
그때였다. 베르덴이 입을 연 건.
“포르타 영식.”
“……헤르조?”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불쑥 나왔다.
갑자기 이 이름은 왜 나오나. 헤르조라고?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해 눈을 찌푸렸고, 잠시 후 찌푸린 얼굴 그대로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다.
“그 사람이 왜?”
설마, 동생을 지키겠다고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를 팔아넘기겠다고? 이게 당 가문을 흔들 거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포르타는 건드려선 안 된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다. 라이네를 굳건히 유지하고 적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그 어떠한 가문,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끌어내리고 죽일 수 있으나, 포르타는 아니 된다.
내가 션을 왜 쳐냈는데.
내 물음에 베르덴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발리앙 저택에 들러서 르네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응? 응. 둘이 친하잖은가.”
“…….”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보았다.
무어라도 찾아내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에도 이리 천연덕스럽게 주먹을 부르는 바보 같은 언행을 해왔는데. 내 짧은 생만을 고려했을 때, 역사 오래 된 괴짜짓이라 할 수 있는 바.
심지어 이제는 죽음을 실로 앞에 두고서도 웃고 감추었던 내가 깨어난 상태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는 간만에 귀경했고……, 그간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에는 각하도 계십니다. 만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음, 글쎄. 그와 내가 만날 이유가 있나?”
베르덴은 헤르조와 내 관계를 염려할 사람 아니다. 다른 말을 하고자 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반드시 다른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우둔하여 모르는 척을 하며, 내심으로는 이 묘한 행태에 대해 숙고했다.
조금 전 그 말을 함으로써 할 일은 다 했다 하는 생각인가. 혹시.
……그럼 헤르조에 대한 경고라고?
나는 헤르조와 관련해서는 어떠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내게 장난질을 하는 거냐고 기분 상해하기에는, 방금 베르덴이 입에 담은 사람은 헤르조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게 의미 있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다. 베르덴은 결국에는 발리앙. 우리 귀족, 우리의 입장에서 가문과 가족을 포기하고 친구를 택할 정도의 우정과 신뢰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가족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산 하의 일. 우정이 오롯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케이프 안으로 가려진 왼 손을 한 차례 주먹 쥐었다가 풀었다. 기사들이 있는 곳에 거의 다 와 가고 있었다.
땅을 밟는 오른 발 뒤꿈치에 힘이 들어갔다. 발등과 발목을 감싸는 부츠의 굽은 그리 높은 편도 아닌데, 일순 발목이 꺾일 뻔 했다. 부족한 수면 시간이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소공녀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가벼운 넘어짐도 웬만하면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은데.
나는 이마를 매만지는 척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떴다.
조금 아찔했다. 덥다.
더위로 인한 짜증을 가라앉힌 뒤에 싱글벙글 웃으며 한 가지 짚었다.
“그리고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만나지 않는 거지. 그렇지 않나?”
“교류를 피하시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그를 마음에 두어서?”
“…….”
대답이 없군. 손을 내리며 낮게 웃었다. 베르덴은 방금 동요했다.
-포르타 영식을. 사랑하십니까?
-좋아했어요.
아아. 어느 밤의 문답.
뾰족하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다시금 목덜미를 쓸었다.
“그런 게 아닐세. 만날 이유가 없으니 만나지 않는 거지. 이유가 생기면 만나게 될 테고.”
“…….”
“우리 대화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침 잘 되었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어느 정도 맥이 맞는군.”
“예?”
훈련 중인 기사들이 보인다.
하여, 그러니까, 이 자리, 인가. 목적지점에 다다르자 내가 먼저 멈춰 섰고, 한 걸음 더 간 베르덴이 이어 서자 나는 그를 끌어왔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 그가 금세 바른 자세로 내 옆에 섰다.
나는 검지로 내 발이 밟고 있는 땅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후작. 내가, 전에, 일 년쯤 전에 말일세. 이 자리에서, 내 기사에게 진심을 토한 적이 있었네.”
“…….”
베르덴이 나를 보는 눈에 감정이 물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그와 완전히 마주 보았다. 웃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말했던 바. 그 기사의 소중한 여동생이 황후가 되길 바란다고.”
“…….”
“그리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헤어졌네.”
내가 말하는 헤어짐은 우리가 갈라섰던 일이다. 나는 그를 내치고, 그는 그것에 반대하다 납득한 그 이별.
그날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그날에 내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베르덴의 서임을 부수고, 아리엘의 적의를 확인하고, 나도 몰랐던 내 동요한 감정의 편린 때문에 오드리나에는 괴물들이 일시나마 접근하였고, 나는 헤르조를 구했다. 쥰에 대한 내 알 수 없는 믿음을 깨달았고, 쥰과 대화했고, 장차 공작될 것과 아버지를 구할 것을 결심했다.
결국에는 쓸모없어진 일들만 가득했던 날.
그날의 결심 중 가장 중요했던 아버지는, 결국에는 돌아가셨다.
아, 공작이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공작이 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알드리히와 친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러면 전부 바뀌어서……. 그럼 전부 바뀌어서 아버지는 살아계실 텐데.
나는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또 이런 일에 대비하여야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근본적인 것부터 수색하기 시작해 본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 태생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러면 나는 쉴 수 있었을 테고 라이네도 이런 일에 말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쥰도 이런 일에 말려들 것 없이 늠름한 라이네 공작이 되었을까, 그럼.
나는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을 바꿔서 겸연쩍지만, 그 소중한 여동생, 괜찮다면 우리 라이네에 기회를 주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쥰과 아리엘이 혼인하길 바라.”
“…….”
그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읽어낼 수 없다.
그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치던 나는 씩 웃고 손을 들었다. 베르덴의 뒷목을 손으로 감싸고 푹 눌러 내 쪽으로 내렸다. 이 정도 장난이야 친구 사이에 흔하다. 단지 남녀 친구 사이에는 흔하지 않으니 내게는 잘된 일이며, 그렇기에 지금 이러지만.
“각, 하.”
나는 눈을 내려뜨고 그에게 입 맞출 것처럼 다가가다 고개를 틀어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라건대, 나는”
…….
내 입술이 소곤소곤 소원을 담고 움직였다. 억눌러 낮춘 내 말이 끝나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있던 귀 주위가 조금 입에서 멀어졌다. 그가 고개를 움찔 움직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말에 대한 반응이다.
고개를 약간 물리자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흐트러졌다가 무표정으로 재구성되었다. 나는 손을 떼고 물러났다.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많다. 많기 때문에 이리 했고.
우리가 입 맞춘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입을 맞췄을지 아닐지 갑론을박이 벌어지리.
상체를 세운 베르덴은 내게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내 기사였을 때라면 나보고 미쳤냐고 정중하게 물었을 법한 분위기로 한동안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개소리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그 개소리가 내 입에서 나온 바에 대한 양심의 가책인가.
싱글싱글 웃으며 답변을 기다리자 그는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어째서 입니까?”
“아, 이유는 많아. 좋으니까.”
“저는 이해가. ……인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람 자체를?”
“아니, 라이네 공작의 반려로 이만큼 적당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인데.”
“…….”
베르덴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금 쓰다 싶은 웃음을 얼굴에 걸고 조금 더 덧붙였다.
“우리 두 가문, 지금 이상한 소문에 휩싸여 있지만 곧 없어지겠지. 내가 그렇듯 그대도 지금 많이 어이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생각도 많을 터. 그래도 시간을 내어 부디 긍정적으로 고려해주게.”
그리고 베르덴의 손을 잡아 올려 그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공작이 후작에게 하기로 적당하지 않은 표현이다.
베르덴은 이제 정말로 당황했다. 표정 관리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아직 그의 손을 잡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내 기사가 내게 무릎을 꿇었었어. 답례일세. 내 기사로 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누이동생 앞에서 감수한 그 불명예를, 나는 존중하네. 고맙게 생각해.”
차마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살짝 무너졌다. 감추지 않은 죄책감. 감추지 않은 양심. 감추지 않은, 우리 사이의 감정. 전에 비해 덜 받은 후계자 교육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이것이 미처 감추지 못한 진심이 아닌 나처럼 쓴 가면이라 해도, 가주 사이에서는 보이지 말아야 했을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나를 친구로 생각할까.
조용히 기다렸다. 베르덴은 목에 물기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목멘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돌려받기 위한 게 아니었으니, 이러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픽 웃었다.
“알아.”
경은 그 모든 것을 숨기고서도 나를 아직 놓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도 낼 수 있고, 떨리는 목소리도 낼 수 있고, 화나서 찍어 누르는 목소리도 낼 수 있으나, 저런 목소리는 저토록 실감나게 낼 수 없었다. 그 어려움을 안다.
저것이 베르덴의 가면 쓰지 않은 진심이다.
그렇다 하여 변할 것, 아까도 생각했듯, 없다.
고개를 돌려 기사들 쪽을 보았다. 훈련은 멈추지 않고 있었으나 이쪽을 잠시라도 보는 기사들이 많았다. 나는 저택을 나서기 전, 미리 일러두었던 작업을 시작하도록 가엘에게 명령했다.
내가 남녀관계에 크게 관심이 없고 이성적인 감정을 서로 나누는 것에 관심이 없어도, 어떤 행동이 남들 보기에 묘하게 보이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혼인으로 얽히는 것만큼 쉽고 깊게 얽히는 방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혼담으로, 나는 생성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소문을 뽑아내려 한다.
어디, 우리 두 가문이 어찌 깊게 얽히고 어찌 자연스럽게 떨어져, 그 중 한 가문만 어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보자.
떨어지는 나락에 라이네를 끝끝내 끌고 들어갈 실마리조차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있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없어지리.
이 소문이 누군가에게 주는 일시의 희망이 되면 더욱 좋겠다. 그 후에 빼앗기고 만다면 더더욱 절망스럽겠지.
나는 베르덴을 힐끔 보고 입가를 매만졌다. 이 자리에서 나눌 용건은 더 없었다. 우리는 생각에 잠긴 침묵 속에서 부드럽게 헤어졌다.
그리고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나와 베르덴의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소문이 날카롭게 머리를 들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둘, 이미 친우 이상으로 몹시도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 역시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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