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89화 (89/157)

00089 CHAPTER 8. 겨울비. 비애 =========================

CHAPTER 8

비슷한 추문에 휩싸인 두 가문이 대귀족 가문인 데다, 소문 자체도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기에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이었던 탓에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예상했던 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소문이 시작될 것도 예상하고 있다.

쥰.

쥰의 태생에 대한 소문.

소문이 나기 전부터 당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던 그 내용.

이번 시간에서도 쥰은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섣불리 물어볼 것이 아니기에 그저 그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둘 밖에.

그리고 소문은…….

나는 창문 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햇빛이 찬란하다. 선명한 녹색으로 가득 찬 7월의 여름.

“…….”

쥰에 대한 소문은 아마 막아내지 못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출처를 찾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고 짐작하고 명령했다. 그러나 결국 최후에는 쥰의 태생이 의심받고 나의 아버지께서 다시 불명예스러운 소문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상, 그런 가능성.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피해는 최소화하길 원하며, 아니, 아니군, 최소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길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불가능할 일이다. 일이 진행되며 쥰이 받을 상처를 ‘피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으나.

“……각하.”

나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바로 했다. 그리고 옆을 보았다.

가까운 복도, 베르덴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웃다가, 그가 내 옆에 서자 입을 열었다.

“자네도 부르셨나보군. 간만일세. 삼 주 정도 되었나?”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흠. 그런가. 아, 그렇네. 연회 있던 날에 마지막으로 만났었지. 거참 오늘은 행운의 날이로군. 간만에 만나는 친구와 솔체궁에서 신나는 회동이라니.”

“……진심이십니까?”

“진심일 것 같나? 내 눈에 눈물 고인 거 안 보여?”

“…….”

베르덴은 관록을 발휘하여,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베르덴을 보며 씩 웃었다. 황제가 추문, 괴소문에 휩싸인 두 유력 가문의 가주를 부른 것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 가문도 아니고 두 가문. 심지어 라이네는 황제의 유일한 막역지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 가주로 있으니 알드리히도 기가 막히긴 막힐 것이다.

전에도 그는 나를 불렀었다.

이번에도, 나를 불렀고, 전과 다르게 이번 소문에 함께 휘말린 베르덴도 불렀다. 하여 이 순간 우리 두 사람은 한 자리에 있었다. 마침 잘된 일이다. 조금 전 알드리히와 독대하며 베르덴도 오늘 솔체궁을 방문함을 들었던 바.

부러 발리앙 저택에 들르는 것보다는 이런 만남이 훨씬 좋다.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끝났네.”

“허면…….”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어. 다녀오시게. 그리고 괜찮다면, 같이 잠시 걷지.”

“알겠습니다.”

베르덴은 내게 가볍게 인사한 후에 나를 지나쳤다.

나도 그 자리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늘은 또 시간이 어찌 잘 맞았는지, 내가 알드리히를 알현한 시간에 션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베르덴을 기다린 까닭이다.

이제 내가 베르덴과 대화를 하는 모습도 그녀에게 보였으니 더는 여기에서 저 시선을 견딜 이유가 없었다. 온몸이 뚫릴 것 같아. 전 같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달려왔을 아가씨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치는 게 다행이다. 그간 호위조 회전이 교묘해서 나와 션이 잘 마주치지 않았었는데, 하필이면 이리 불편한 사이가 된 후에 딱 마주치게 되어서…….

계단을 내려오다 문득 큰 한숨을 쉬었다. 허,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나온 숨은 당연히 허공으로 섞여 들어갔으나, 의미 모를 착잡함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감정 스스로 생겨나 종일 내 속에 머무르고 있다. 나 자신으로서는 이 착잡함이 생겨난 뿌리를 파악해낼 수가 없었다.

아니군. 정확히 말하면, 파악하고 싶지 않았다.

세밀하게 파악하여 쓸모 있어질 감정인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 그러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계단을 내려와 1층 바닥을 왼발이 먼저 밟았다. 의도치 않게 통통 뛰듯 내려섰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이 한 차례 크게 흔들리며 내려앉았다. 계단을 오르려는 시종 시녀들이 인사하는 것을 웃으며 받아주고 걸음을 옮겼다.

솔체궁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복도에서 대귀족 아닌 수많은 귀족들 중 한 명인 백작을 만났으나,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요즘 어찌 지내시느냐, 자네는 어찌 지내나 하는 안부, 폐하를 내알현하고 나오는 길인데 이제 막 발리앙 후작도 들어갔다 하는 사실, 그럼 이대로 귀가하실 거냐는 물음, 그것은 아니다, 베르, 발리앙 후작과 잠시 걷다가 귀택하려 한다는 대답.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화의 시작부터 내내 호의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같은 귀족이지만 나와 백작은 급이 달랐다. 나 역시 빙긋 웃으며 물었다.

“헌데 자네는 왜 솔체궁에?”

“폐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어쩐지 제게 약속되었던 시각을 늦추시더니, 두 분 각하의 알현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런가 보군.”

“아, 혹, 그 장갑이 그, 폐하께서 하사하신 생신 선물입니까?”

……이건 또 뭔가. 뜬금없는 내용의 질문에 나는 은근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그런데 그게 또 알려졌나 보이.”

“아. 저도 어제 살롱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수개월 전의 일을 어제?”

“그러고 보니…….”

“날 사모하면 내게 와서 마음을 털어놓으면 되지. 사람이 너무 멋있어도 안 되는 것 같네, 역시. 하, 이 멋짐을 어떻게 가릴 수도 없고.”

“…….”

상대는 대화의 흐름을 쫓아갈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음흉하게 웃으며 뒷목을 문질렀다.

내게 보고가 들어온 게 없으니, 소문이 퍼진 것 같지는 않다.

알드리히는 내게 기사단 훈련장에서 선물을 건넸고, 그것은 많은 이들의 눈에 들어갔을 터. 선물을 하사 받은 게 알려지지 않았으려면 그런 곳에서 주고받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와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은연중에 그 일이 알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의식중에라도 그런 짐작은 하는 것이 옳고, 나는 그런 무의식중의 생각이 퍽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교육받아온 가주이니, 글쎄, 그게 특별하다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리엘이 알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건 자명. 아니면 이리 알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누가 말했느냐고 이 백작에게 묻자니 괜히 의심이나 심어주게 된다. 돌려 물어볼 방법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씩 웃음으로써 포기했다. 장신구가 선물이 아니었던 게 진짜 다행이지.

나는 내 언행에 그리 익숙지 않은 것 같은 백작에게 마저 말했다.

“뭐, 어쨌든, 나를 좀 보시게.”

“예? 예.”

“잘생겼지.”

“…….”

진지한 얼굴로 2연타를 날리고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백작에게 작별을 고했다. 떠들고 노는 것도 쓸모 있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대외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존중은 보였다. 띄워놓아야 할 운도 띄워놓았고.

솔체궁에 드나드는 이들이 주로 쓰는 입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건물 안과 바깥의 경계 같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비스듬하게 나를 비추었다.

나는 좀 더 바깥으로 나아가, 입구의 하늘을 가린 짧은 천정 아래에 섰다. 잠시 후에는 더 나아가 천정을 받치는 기둥 바로 옆에 서서 가만히 풍광을 살폈다. 의미 없는 시선이다. 시간 죽이기.

이십 분 정도 흘렀나. 베르덴이 나를 불렀다.

“각하.”

뒤로 돌았다.

베르덴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다른 사람과 먼저 눈이 마주쳤다. 기사였다. 솔체궁의 유동인구가 많긴 하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드나들게 하는 것은 아니라서 내 뒤로는 입구를 지키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빙긋 웃음을 보이고 베르덴에게 눈을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도 웃어 보인 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베르덴은 눈치껏 내 옆에 서서 함께 걸었다. 외복도를 완전히 벗어나 오후 태양 아래에 고스란히 노출된 몸은 조금씩 더위가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여름이라 더운데, 복장도 문제였다.

오늘 알현은 친교를 위한 대담이 아니라 정식 알현이었으므로, 예장을 하고 와서 움직임이 영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옷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열이 온몸을 감쌌다. 예복 위로 어깨와 팔을 감싸고 오금 부근까지 늘어뜨린 붉은색 케이프 탓이다.

그러나 덕분에 우리 둘은 더더욱 눈에 띄고 있었다.

예장을 한 사람들은 황궁에 많이 출입하나, 우리는 두 대귀족 가문의 가주다. 더욱이 추문에 휩싸여 있는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고.

나는 손을 올려 눈 위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감상했다.

“아아, 좋구먼.”

“…….”

“새소리. 햇빛. 나무, 수풀, 꽃. 자연이야. 일상적이지. 한결 마음이 자유로워지지 않나? 저택에 있을 때보다야.”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내 옆에서 조용히 숨 쉬던 베르덴은 천천히 내게 물었다.

“……답답하십니까?”

“음?”

의아해하며 힐끔 그를 보자 그가 덧붙였다.

“지난 수개월, 여행을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가출, 말이지?”

“…….”

가타부타 답이 없다. 나는 피식 웃었다.

공작이 되지 않기 위한 탈출이기도 했고, 저택에 있다 보면 답답하여 하던 탈출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나는 오드리나의 저택을 주기적으로 답답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베르덴이 아는 나는.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렇다.

저택에 오래 머물면 반드시 답답해지던 나는 어디로 갔나. 오드리나를 벗어나지 않고도 놀라우리만큼 잘 지내고 있었다.

새삼 깨닫고 씩 웃었다.

“그대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지나치게 잘 아는 것 같아서 조금 슬퍼질 정도입니다. 많이 밟히고 많이 맞았지요. 알게 되는 과정에서.”

“아, 잠깐. 나한테 다 떠넘기면 안 되지! 그 과정에서 내가 들은 그대의 독설들은 어떻고? 내 여린 마음도 많이 밟히고 많이 맞았거든?”

“여린……. 진심이십니까?”

“……아, 한 대만 날리고 싶다.”

말발이 녹슬지 않았다.

전 후작의 죽음을 보고 뭔가를 짐작했으면 충격을 받아서라도 조금 소심해지거나 더 진중해지거나 해야 했던 것 아닌가. 내 보좌가 되었을 때는 말을 많이 하지 않더니 내 기사였을 때로 돌아간 것 같다.

하여 지금 얼마나 그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냐 하면.

“…….”

나는 옅게 웃는 베르덴의 얼굴을 보며 내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얼마나 비슷하게 느껴졌냐고?

누굴 죽여 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을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에 대하여.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신뢰에 대하여. 이 시간의 과거가 아닌 옛 시간의 과거에 대하여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고 빙긋 웃었다.

이렇게 머리끝까지 오르는 화를 되살려내려고 산책을 권한 것 아니다. 우리 사이의 약간 더운 훈훈함이 마무리 지어질 쯤,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출한다 해도 전과 같은 종류의 자유를 만끽할 수는 없겠지. 입장이 달라져서. 나도 그대도 이제 다시는 전과 같지 못할 걸세.”

“그렇겠지요…….”

“한숨 쉬지 마시게. 나도 착잡해지니까. 뭐, 우리가 자랐다는 거겠지. 세월이 흘렀다는 거고. 이런 소문의 처리는 우리 선친들께 맡기고 우리는 더럽혀지는 가문의 명예에 조금 불쾌해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도 되었던 시간이 이제 아니라는 거야.”

순식간에 본론에 칼날이 쑤셔 박아졌다.

나는 뒤통수 높은 곳에 묶여 길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오른 어깨 앞으로 끌어왔다. 염색한 갈색 머리카락이 내 손에서 놓이자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문들이 미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있어도 나와 그대 빼고는 다 잘 살고 있으리라 하는 소회가 들어. 하다 못해 쥰도 나만큼은 골머리 썩지 않을 테고, 아리엘과 르네도 그대만큼은 염려하지 않을 테지.”

“…….”

“우리 주변 인물들도 그런데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 자는 또 어떻겠나. 아주 기쁘게 지내고 있겠지. 좋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으니.”

나 죽기까지, 베르덴은 발리앙을 나의 끝까지 수호한 가주다. 여러 번 되새기고 되새기는 바. 나는 라이네의 가주로서 그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해한다는 말은 어느 상황에서는 실로 교묘하고 웃긴 말이라서…….

피실피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는데, 베르덴이 조용히 물었다.

“공통된 적,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다음편으로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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