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퇴근 도중에 잡혔나 보구나.”
“……예.”
문 앞에 서 있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장갑을 꼈다. 겉옷까지는 입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나는 지금 그 귀여운 여기사와 다정한 회합을 하러가는 게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일어난 건 마침 근시일내에 우연으로 맞닥뜨리거나 그녀가 날 찾아오길 바라고 있었기에.
아예 찾아오지 않고 정을 끊었다면 가장 좋았을 터이나, 션은 소문에 잡혀 사람을 판단하고 잘라낼 청년이 아니다. ……안타깝다.
오늘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얼마나 매섭고 차가울지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웠다.
오른 손 장갑의 손목 부분을 마지막으로 잡아당기며 쥰을 지나쳤다. 열린 문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나는 느닷없이 든 생각에 멈칫 눈을 찡그렸다가 입가를 짚었다. 아, 잠깐. 걸음이 멈추었다.
잠깐. 잠깐. 어디보자.
……션이라?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을 보았다. 정확히는 뒤따라오는 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이나, 몸을 돌리지 않는 이상 그를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알면서도 간단한 집중을 위하여 벽을 보았고, 자연스럽게 호를 그리며 떨어져 내린 고개는 도로 바르게 앞을 향했다.
“…….”
그러나 최후에는 멈춰 서서 결국 몸을 반 돌려 쥰을 보았다. 그는 선명한 미소를 짓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옅은 웃음을 흘리고 입을 열었다.
“경을 만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포르타경과 친해?”
“션, 말씀이십니까?”
아차 싶었다. 아아, 그렇다. 포르타경 하면 대체로 두 젊은이를 꼽게 되지. 나는 코웃음을 짧게 웃었다. 포르타라 하는 가문에 있어 유일하게 내게 가치 있던 사람이 시드니 한 사람이었던 때의 기억은 옛것이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 시드니는 시드니경이라 불렀으므로, 전이었다면 쥰은 내가 포르타경이라 말하면 션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았을 테지만, 음, 그렇군. 그때에 내가 션을 입에 담을 일 자체도 거의 없었지.
나는 방금 션에 대하여 물었으나, 이참에 다른 사람에 대한 것도 간단히 물어보고자 결정했다. 웃으며 질문을 특정했다.
“션경과 네 상사 둘 다.”
“션이야 만나면 대화하는 정도고, 단장님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
“워낙 무뚝뚝하신 분이기도 하고. 음, 그저 적당한 상하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쥰이 시드니에게 검술을 배우고, 쥰은 시드니를 좋아해 졸졸 쫓아다니던 기억도 옛것.
이 시간을 사는 쥰의 감상이 신선하다면 신선하여 피식피식 웃음이 새었다. 멋쩍어하는 기색이 있는 표정을 지은 쥰은 부드럽게 대답을 이었다.
“그래도 사려 깊은 분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요.”
“감사? 무슨 일이 있었어?”
“전에, 이번에 토벌에 다녀오기 전에, 제가 온갖 작전에서 반 년 정도 제외되고 있었습니다.”
“음.”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지만 나는 덤덤한 척 반응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하라는 뜻이다.
“킨들 라이네 작전부터였어요. 순서상으로 제가 참전했어야 했는데 명단에 오르지도 않았고, 이후에는 비정기 작전 명단에 올라갔다가도 제외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님께서 쓰러졌다 일어나셨을 때였을 겁니다. 누님이 깨어나신 후에 많이 바쁘셔서 제가 따로 말씀을 못 드렸었는데, 그, 연회가 끝나고 이틀 후에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전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셨었지요.”
“…….”
아버지의 죽음.
내 웃음이 본의 아니게 식었다. 부풀어 올랐던 가면이 푸시시 내려앉아 살갗에 닿는 기분이다. 내게서 떠나지 않는 동생의 눈길에 속히 되돌리기는 했으나, 보았을 것이다.
쥰이 고개를 작게 갸웃하듯 움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외가 되어도 제외 되는 합당한 이유가 때마다 있었기 때문에, 계속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었습니다만, 전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신 다음날, 절 따로 부르셔서, 음, 천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 배려를 받았습니다.”
“…….”
“누님께서 라이네령에 내려가 계시는 동안에도 작전에는 나가지 않도록, 되었고요. 그건 당연한 일이라 그다지 단장님의 배려는 아닙니다만.”
“…….”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미치겠군.
우러나오는 기막힌 한숨을 피식거리는 웃음으로 화하다 가까스로 물었다.
“하면 경이. 네게 호의를 많이 표했어?”
“예. 그 정도면 많이 표해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보일 정도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단장님께서 절 신경써주셨다는 걸 내내 모르고 있었고, 실은 전 공작 각하 때의 일 외에는 전부 제 짐작에 불과해서.”
그렇지. 시드니가 그런 신중치 못할 일을 했을 리가. 남들에게 보이며 쥰을 신경 썼을 리가 없다.
알았지만, 안도했다.
욕지기가 오르는 입을 손 마지막 마디로 누르고 침을 삼켰다.
“그래, 알았다.”
그냥. 내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듣게 되었지만, 그냥, 그래, 무언가를 알았고, 그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눈꺼풀에 눈썹이 붙어있는 그 가장자리 부분에 찬물이 닿은 것처럼 시리기 시작했다.
쥰에게서 몸을 돌려 본디 향하던 곳으로 걸어갔다.
션이 있을 응접실 앞에는 시종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손끝으로 이마를 짚고 잠시 문 아래를 흐리게 보았다. 이 안에 들어가서 내가 해야 할 일. 이 안에 있는 션이 나를 비난하기 위하여 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이 안에 들어가서 내가 해야 할 일.
-우리는 언니 편이야.
이 순간 전율을 주는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그 회상 위에 내 고백이 겹쳤다.
-다시 살아야 한다면, 나도 당신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말했던 바. 당신은 나를 비호하다 그 작위를 잃을 처지가 되었고, 당신이 져야 할 위험이 많아졌다고. 친구라는 게 이런 식으로 당신 삶을 망가트리는 관계라면, 차라리 친구가 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내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쥰의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나를 감쌌다. 나는 손을 내렸다.
이제 되었다.
“열어라.”
시종이 문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늘씬한 모습이 바로 보였다. 들어서며 간단히 그녀에게 인사했다.
“경.”
“언니.”
“…….”
아니, 더는 그리 불려서는 안 된다. 나는 쓴웃음을 삼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션은 나와 거의 동시에 착석했다. 기사가 공작을 대한다는 예의가 아니라, 그야말로 몹시 친한 친구의 앞이라는 느낌이다. 지난 세월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일단 그 일상적인 태도를 묵살하고, 묵직한 숨을 길게 쉬었다.
“오랜만이군.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였나.”
황제의 기사이니 넉넉히 하대하는 것은 무례다. 적당하게 경대하며 묻자 잠간 나를 응시하던 션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소문 때문에. 왔어.”
나는 픽 웃었다.
“황실 기사들 사이에 퍼졌다더군. 나도 오늘 보고를 들었는데, 대체 얼마나 퍼진 건가. 왜. 사실이냐고 물으러 왔나? 경이 아는 나는 다 가식이었느냐고?”
“그런 말 하지 말고. 언니가 그랬다는 걸 믿느니 쥰이 여자라는 걸 믿겠어.”
애꿎은 쥰이 화살에 맞았다. 이마를 짚은 쥰은 못 말리겠다는 한숨을 쉬었다. 일견 차갑게 느껴질 만큼 단정한 얼굴로 하는 농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러나 하릴없이 농담을 주고받기에는,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이 자리이기에.
사이가 나쁜 듯 좋은 두 아이를 둘러보고 건성으로 입 꼬리를 올렸다.
“허면, 어찌 하여 왔나. 소문을 이유로 무엇을 하러?”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용건 없이 왔다고?”
공작의 일정이 그리 한가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나, 아니면 무시했나. 다른 일 제쳐두고 자신을 만나줄 거라 생각한 건가.
내가 오른 입 꼬리를 더 올리며 이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결코 기분 좋아 보일 웃음은 아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션은 눈길을 내 무릎께로 내렸다가 도로 올렸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속삭였다.
“……언니가 우울하지 않았으면 해.”
이런. 나는 그만 사르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소문 때문에 내가 우울해할 거라고 생각했나?”
“무언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거라고 말하고도 싶었어.”
덤덤한 고백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눈이 시려 참을 수 없었다. 오른 눈을 꽉 감고 찡그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꺼풀을 누르듯 쓸었다.
손끝이 눈꼬리에 닿았다. 스르르 눈을 뜨자, 내 옆의 베르제르에 앉아 있던 쥰에게서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초점이 흐트러졌다. 눈꺼풀이 절로 파르르 떨렸고 시력은 다시 온전해졌다.
시종이 내 앞의 낮은 탁자에 찻잔을 내려두는 것을 보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션, 이 한결 같은 기사야. 기어이 이렇게 이 자리를 어렵게 만들어야 했나.
차라리 정말 전 공작 각하께서 독살을 당했느냐고 물어보러 왔었다면. 그럼 차라리 안타까움 없이 입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션이,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 문 밖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숨이 꽃 꺾이듯 꺾일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게 한 후. 그런 후에. 내가 할 말에 저 기사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 두터운 이불로 감싼 것처럼 답답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럼 더 할 말은?”
“언니를 염려하고 있어. 우리는, 언니를 염려하고 있어.”
“…….”
“…….”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중에 시종이 나갔다. 나는 닫히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좀처럼 뒷말이 나오지 않자 문을 보는 그대로 가벼이 물었다.
“끝인가.”
“…….”
“그래, 끝으로 알지. 그럼 묻겠는데, 경이 감히 무엇이관데 나를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말을 하나.”
내 태연한 말에 동요한 사람은 션이 아니라 쥰이었다. 문이 하필이면 쥰의 어깨 너머라서. 정확히 그를 보는 건 아니었으나 시야 가장자리에 번진 그의 어깨가 짧게 흔들리고, 굳었다. 보고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만큼 작은 흔들림이었다.
나는 눈을 조금 움직여 쥰과 눈을 마주쳤다.
그를 동석하도록 한 이유, 따로 없다. 내 말들을 모두 듣고, 부디 너도 앞으로 자중하라는 뜻이다. 쥰이 마냥 순진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다. 나를 만나겠다는 션의 용건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고 내게 데려왔을 리 없다는 것을 짐작하는 이유다.
션에게 하듯 차갑게 경고할 수는 없으니 이리 간접적으로라도 말하여야겠다. 나는 쥰에 대하여 응당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아.
내가 진정 신경 쓰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내게, 내게 여유는 많지만, 정말 전과 다름없이 여유롭게 일을 이끌어 가고 있지만, 무엇 하나만이라도 걱정을 덜 하고 싶고 무엇 하나만이라도 잠시 신경을 거두어 아주 조금만이라도 머리를 가볍게 하고 싶었다.
쥰을 앞에 앉혀두고, 살피고, 웃으며 ‘나는 괜찮으니 염려 마라’는 말을 하는 일만이라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일 하나만이라도 줄기를.
그러나 나는 지친 게 아니다.
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경이 오늘, 소문에 대해 라이네 공작을 함부로 판단하려 한 무례는 지난 정을 생각하여 용서하지. 그러나 자리가 이리 마련되었으니 겸사겸사 말하는데,”
잠시 멈추고 혀뿌리에 웅크려있는 감정을 다시 매끄럽게 정돈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더는 내가 경과 가깝게 교류할 일 없을 걸세.”
“…….”
정적이 흘렀다.
아, 정말 말하고 말았군. 어렵다, 어렵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해낼 것은 알고 있었다. 물에 뿌린 설탕처럼 공기 중에 사르르 녹아드는 침묵은 차갑고, 가벼웠다. 나는 콧숨을 흠, 쉬며 미소했다.
“이제, 끝났나.”
그러나 션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꺾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 여전히 나를 향하고, 여전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언니.”
“……이런, 경, 아직도 이해를 못한 모양인데,”
“언니.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
이번에는 내가 따끔하게 얻어맞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가 경을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 그 말은 또 왜 나온 건지 의문이군. 경, 선을 넘지 말게. 더는 사적인 관계를 내게 강요하지 마.”
싸늘하게 경고했다.
“오고가는 길에 만날 일이 있겠지. 경례를 하면 받아주겠네. 영애로서 하는 인사도 내 기꺼이. 그러나 그뿐일세. 경은 아직도 상황이 어찌 바뀌었는지 모르는 것 같군. 내가 경과 교류하던 일개 소공녀로 보이나.”
“…….”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말, 바로 해. 더는 좌시치 않겠네.”
“각하는. 저를 좋아하십니다.”
고집스럽게 무뚝뚝한 말이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욱여넣었다. 시드니와 닮은 얼굴로 그 묘하게 닮은 말투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뜬 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 정도로 내려치고 싶진 않았으나.
“내가 포르타 백작을 내 앞에 몸 낮추고 사죄하게 하지 말게. 이미 충분히 무례했다, 경. 언제까지 너그러이 참아줘야 하나.”
“각하.”
션이 단호하게 나를 불렀다. 물러날 때를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런 데서 이상한 고집을 부리나……. 묘하게 피곤해졌다.
나는 이런 소모적인 대화에 억지로 응해주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히 보일 만큼 떨리는 한숨을 부러 쉬고, 고갯짓했다. 말하라는 것이다. 션은 냉큼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저와 오라버니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고 어떤 태도를 취하시든 그게 저희를 위하여 그러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
“제게는 아직도 각하께서 보내주셨던 인형과 서신들이 있습니다. 제가 들를 때마다 손을 잡고 보듬어주시던 각하의 기억이 있습니다.”
……돌겠군.
“일단 뜻에 따르겠습니다만, 각하께서는 오드리나에서 제게는 어머니 대신이 되어주셨습니다. 오라버니보다도 오라버니 같으셨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내용이 중대하여, 라이네와 친분을 유지하는 저희에게 해가 갈 것 같다고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내치려 하시느니, 차라리 저희가 염려된다고 진심을 말씀해주세요. 제가 각하를 더, 능동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
나는 당장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고, 션의 곧은 시선, 그 시선 끝에 있는 밤하늘 같은 눈, 단정하게 달려있는 나머지 이목구비, 물끄러미 하나하나 살폈다.
션이 이렇게까지 말 많이 하는 건 간만이라는 감상은 둘째 치고, 정말,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션은 맞는……, 션이다. 당연히 션이지. 괜히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서. 내 눈이 가늘어지고, 장난기 어린 웃음이 올라왔다.
옥에 갇혀 팔다리 잘린 어느 죄인이 들었던 것 같은 저 말에 대한 대답.
해야지.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실로 주제넘군.”
“…….”
라이네 공작이 더 보일 배려는 없다. 이런 말을 듣고도 기사를 너그럽게 대할 가주는 오드리나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쥰과 션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몸을 돌리려다 말고 한숨 없이 입을 열었다.
“경. 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하지.”
웃음도 얼음장 같을 수가 있었다. 하물며 나를 죽이려 한 자들에게도 웃으며 달랬고, 내가 죽인 자들에게도 부드럽게 속삭였는데, 내게서 떨어뜨려야 하는 이들에게는 이토록 추울 수가 없다.
헤르조 포르타, 그를 떨쳐낸 것은, 그의 동생을 떨어뜨리는 지금에 와 다시 생각해 보아도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라’ 하는 말은, 헤르조와 션이 누구의 동생이기 때문임을 내심 알고 있었다. 생각지 않으려 해도 떠올라서 결국 외면하는 수밖에 없으나, 션을 앞으로 내가 감수할 위험 길에서 제외하려 하는 건 팔 할이…….
또 떠올라서 지워버렸다. 또 다시 외면이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천천히 말했다.
“어릴 적에 주고받은 꽃이나 기억 같은 것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말게. 사람은 변해.”
“…….”
“천진한 시절은 그 시절에서 끝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던 션이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한결같은 반응에 결국 쥰이 제 친구의 팔꿈치 부근을 잡았다. 내 눈길이 두 사람 잡고 잡힌 쪽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저 정도 닿음은 서로 용납할 정도라는 말이지. 좋은 일이다. 나는 포르르 올라오는 상당한 흡족함을 마음에 묻고, 션의 반항에 픽 웃었다.
일단은 뜻에 따라준다고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
오금에 닿은 베르제르에서 벗어나자, 어깨 뒤에서 션이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여전히 바보이고, 첫째오라버니가 여전히…… 바보이듯, 저도 바보입니다. 변하지 않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제가 보기에 각하께서는 절 여전히 좋아하십니다.”
교묘하게 다정한 말이었다.
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여전히 션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로 대체할 줄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염려와 상냥함뿐이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씩 웃었다. 이미 방을 거의 다 나온 지금, 뒤의 두 청년에게는 보이지 않을 속내였다.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문을 닫은 뒤 나는 킬킬거리듯 명령했다.
“쥰에게 포르타경을 배웅한 뒤에 내게 오라고 해.”
“예.”
그리고 집무실로 몸을 돌리자, 킴이 졸졸 나를 따라왔다.
느린 걸음을 걸어 도착한 집무실 안에는 집사가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목소리를 빠르게 가다듬고 날카롭게 물었다.
“여기서 무엇……, 아, 청소하러 왔나.”
누그러진 끄트머리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
“끝났어?”
“아직. 이제 막 들어왔습니다.”
“그럼 나중에 하게. 그대를 위해 더 어지럽혀 둘게. 고맙지?”
“…….”
집사의 눈동자가 떨렸다. 거기에 대고 씨익 웃어주자, 허으허하며 떨리는 숨을 쉬더니 나를 지나쳐 집무실에서 나갔다.
타악. 닫히는 문을 등지고 잠시 책상을 응시했다. 멀어지는 기척이 들린다. 그제야 슬슬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나는 앉아서 고용부를 한참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훅 웃었다. 날카롭게, 물었다고. 눈을 들어 문을 보았다. 그러다 실실 웃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기대었다. 장갑 속 두 손이 기막힌 감정으로 조금 식고 말았다.
쥰이 올 때까지, 생각에 잠긴 내 눈은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용량 빵빵하게 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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