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86화 (86/157)

00086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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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리의 보고를 듣고 턱을 괴었다.

“경. 말해봐. 누가 이러는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정말?”

“……발리앙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할리는 묘하게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말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 같으면, 거짓을 거두고 진실을 말한다든지. 나는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내 보좌로 삼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버지와 오래 함께한 기사가 아니니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내 기억이 돌아오기 전의 일이다.

그는 전에 나를 충성스럽게 보좌했던 바.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결국에는 나를 위해 스러졌다. 물론 그건 지난 일이고, 이번에도 그리 충성스러울지는 두고 봐야 하리.

나는 씩 웃으며 느른하게 눈을 떴다.

“물론 이 이해관계에 얽힌 다른 자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라이네 전 공작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라. 내용이 이토록 자극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순서가 말이지.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소문의 순서가.

발리앙 전 후작의 독살에 대해 소문이 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네 전 공작의 독살 소문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할리처럼 생각하게 될 터.

할리처럼, 생각하고, 있을 터.

발리앙의 일은 아직 할리를 거치지 않고 가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어, 할리의 짐작이 다른 많은 귀족들의 짐작이리라고 생각해도 된다.

기울어진 시야 속 할리를 담다 나는 다시금 킬킬 웃었다.

“라이네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발리앙은.”

“발리앙의 방계가 짧은 식견으로 저지른 짓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이런 짓은 안 하겠지, 직계는? 향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두지 않은 이상.”

“음…….”

“발리앙 후작은 더더욱 이런 일을 하지 않을 테고. 이건 잘못 걸리면 정치적 매장감이잖아.”

그런 미친 짓을 전에는 나 아닌 누군가가 했고, 이번에는 적어도 둘 이상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필시 비극적인 일이다.

손에서 턱을 떼고 고개를 바로 했다. 목이 영 칼칼했다. 찻잔을 끌어와 이미 차게 식은 차를 홀짝이자, 쩍쩍 말라 있던 아랫입술에 찻방울이 고이고 맺혔다. 뻐끔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덮어 그것을 거두어갔다.

그리고 슬슬 오는 신호에 입을 다물고 그르륵 트림했다.

격 없는 내 행동에 할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번 시간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그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이해하고 그의 반응을 모르는 체 했다.

더 귀족‘다웠’던 전에 외려 나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더 기품이 없었다. 연무장에서 뒹구는데 땀이 나지 않을 리 없었고, 시큼한 땀 냄새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뛰다보면 소화가 되어 자각 없이 트림하는 경우도 있었고, 훈련으로 괴로운 탓에 일그러진 얼굴로 침을 흘리기도 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척 지내온 이번 시간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땅을 기었던 시간이다.

“아니면 라이네와 발리앙 둘 다 엎드러지게 하기 위한 책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는 흙먼지로 검어진 땀을 흘리면서도 힘차게 뛰어다녔던 때를 떠올리다말고 눈을 들었다.

그렇지.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생각도 하고 있겠지.

어떤 생각을 하든 좋다. 둘 중 어느 쪽의 생각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라이네와 발리앙 둘 다 억울하리라는 인식보다, 라이네를 끌어들인 발리앙이 나쁘다는 인식에 무게를 쏠리게 하려면 작업이 더 필요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 놀랄 것 없었다.

애초, 나의 경우, 승작 1년 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문으로 사람을 죽음까지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은 소문 각 내용의 순서와, 퍼진 때와, 모든 걸 갈무리하는 쐐기가 교묘하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빙긋 웃고 입을 열었다.

“그런가. 두고 봐야겠지. 아, 그런데 이런 생각도 가능하지 않나? 발리앙 전 후작의 소문에 도니, 이때다 싶어 라이네에 대한 소문을 낸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이 소문을 낸 게 발리앙 후작이라는 소문을 또 내는 거지.”

“그건 그렇다면, 발리앙 현 후작을 끌어내리기 위해서입니까?”

“음.”

“하지만 그러면 발리앙 전 후작에 대한 소문이 추후에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새로 후작이 된 그자가, 발리앙 전 후작을 독살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일을 잘 꾸며서 현 후작에게 독살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거지. ‘현 후작이 전 후작을 독살했다.‘”

“하지만, 그럼 현 후작이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정말 사형당할 수도 있습니다.”

“음……. 하긴. 그렇게 악독한 일을 설마 하겠나.”

나는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처음부터 경우의 수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 정도로 악독하지 않았으면 남의 가문을 그리 풍비박산 낼 것처럼 덤벼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내색한 적 없지만. 음.

나는 아리엘의 동기에 대해 몹시도 의문이었다. 사랑? 좋다. 그게 동기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리 영리하게 나를 몰고 가던 사람의 최종 목적으로 추정되는 것이 사랑 운운하는 것으로 실로 멍청하니, 아리엘이 정말 그 모든 일을 계획한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무어, 다각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나는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며 씩 웃었다.

“하면 각하, 어찌 대응해야겠습니까?”

보고의 주 내용을 잊지 않은 할리가 짚어왔다.

등골 한 가운데 어느 지점이 조금 뻐근했다. 자세가 좋지 않나. 어깨를 살짝 움직이며 대답했다.

“내버려두게.”

묵살하면 알아서 사그라질 거라는 오판을 반복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 할리를 통할 것이 아니라, 가엘을 통할 사안이다.

간단하게 명령한 나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데스챔프는 어떤가. 움직임은 있어?”

그들을 무리하게 끌어내리려 하다가는 라이네가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었다. 양 공작가 중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하나를 모든 대귀족들이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네가 무너지든, 데스챔프가 무너지든.

할리는 내버려두라 하는 명령을 잡고 늘어지지 않고 내 질문에 대답했다.

“아무 것도 포착된 게 없습니다.”

“황자는.”

“그렇잖아도,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자가 드나드는 쪽은 황자 쪽입니다. 조금 더 살핀 뒤에 일주일 내로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게.”

3황자의 모친이 라이네에 접촉하지 않은 건, 내가 알드리히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스챔프가 먼저 접촉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 공작이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지는 않다. 라이네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면 앞장서서 내게 거짓 혐의를 씌우는 일도 하지 않았을 터.

가문의 역사가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그도 가주이며, 공작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연세보다 너덧 살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스물셋 되던 해에 데스챔프 공작 위를 승계했고. 공작된 햇수가 나와는 2년 정도 차이 났다. 연륜에는 덤비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공작으로서 해야 하는 일과 한 가문을 책임지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더 능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음흉하게 웃었다.

“아, 그리고, 바비에르 가문이 가지고 있던 땅 말이지. 영지 말고. 그 나대지.”

“예.”

“폐하의 사람들처럼 보이는 자들은 없다던가?”

“연락 온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 보고는?”

“일주일 전입니다.”

바비에르의 수기를 찾은 게 그 땅이 아닌 건가. 어디 파묻는 수밖에 없는 나대지라 이곳저곳 파보도록 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나는 팔걸이 끝을 검지 손톱 끝으로 천천히 두드리며 고요하게 호흡했다.

불탄 영주성을 다시 한 번 뒤져야 하나, 결국.

그쪽은 알드리히에게 들키지 않기가 어렵다. 이번 시간, 알드리히와 나의 유대를 가늠해보았다. 전처럼 저만 읽고 내게 그저 건네줄 만한 관계인지.

아니면 그 수기의 내용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관계인지.

웬만하면 알드리히도 읽지 않았으면 싶지만, 어쩌면 그가 이미 찾아낸 상태인지도 몰랐다. 내게 넘겨주는 시기만 늦어졌을 뿐. 가엘을 위시한 기사들을 움직이자니 그들은 할 일이 있다.

손을 올려 입과 턱을 감쌌다.

서서히 내려간 시선 끝에 걸린 건, 라이네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시종시녀들과 하인하녀들의 고용부다. 책상 위에 단정하게 놓인 그것의 표지를 내려다보다, 잠시 눈을 닫았다.

당황스러운 발리앙의 소문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라이네 전 공작의 이야기를 며칠 만에 퍼뜨리기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그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방증이다. 발리앙의 소문의 발원지가 라이네인지도 확실치 않음에도 저들은 라이네를 끌고 들어갔다.

이로서 나는 적이 누구든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으리라 결정하게 되었고, 그 무자비에는 베르덴도 포함될 것이며…….

나와 아주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람이 적으로 튀어나온다 할지라도, 가차 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려, 한다.

일을 진행하고 있으면서도 내 속은 대체로 평온해왔다. 저들이, 혹은 아리엘이 기어이 라이네를 끌고 들어왔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눈 떴다.

등받이에서 몸을 세우자 끼이익 등받이가 되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아랑곳 않고 오른 손 끝으로 고용부를 느릿느릿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전 정보의 유무가 이리도 중요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얻어낸 정보라는 걸 알게 되면, 누군가는 참담하기 그지없다고 여길 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래도 정보를 얻어낸 뒤 기회도 다시 갖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리라. 나는 후자였다.

살지 않고 그대로 죽기를 바랐으나, 이미 시간을 되돌아온 것, 어찌하나.

기적 같은 기회를 떠나보내기에는 내가 겪은 게 실로 기가 막혀서.

오른쪽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러지 않은가, 아리엘. 너희, 발리앙. 너희 라이네의 적과, 너희 나의 적들이여.

나는 일단 당장 닥쳐있는 일에 대해서만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나대지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을 그대로 영주성 쪽으로 보내게.”

“각하께서 염려하시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알아.”

걸려서 신문 당하게 되면 라이네는 숨겨져도, 찾고자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들키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의미 없네. 그들이 내 사람들이나 라이네 영지민들이길 해, 그들을 누가 고용했는지 알기를 해. 물론,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수색하라고 이르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바비에르와 내 연관성을 아는 사람들은 대귀족들, 그 소수 중에서도 소수다. 발리앙 전 후작 앞에서는 반쯤 시인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확실히 시인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터.

내가 무어라 했더라…….

내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당신이 짐작도 못하게 했어야 정말 훌륭하게 감췄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는 의미로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일에서 나는 일정 부분 드러났을지언정, 기어이 감춰진 사람이 있으니 바로 알드리히다. 당시 황태자였던 현 황제야말로 훌륭하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때도, 이번에도.

바비에르의 일과 알드리히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수고했다고 팔랑팔랑 웃으며 손을 휘젓자, 할리가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퇴실하였다.

나는 고용부 표지에 닿아있는 오른 손의 검지를 살살 움직였다. 손끝에 쓸리는 촉감이 거칠다.

알드리히, 황제 폐하.

전에 비하면 우리 둘 함께한 더러운 일들이 적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일까.

아니면, 함께 한 더러운 일들이 적어, 우리의 유대를 약간 불안해해야 하게 되었으니 나쁜 일일까.

실로 질척거렸기에 내게 좀처럼 은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하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진흙구덩이 속에 몸 담가 꽁꽁 얽매여있던 내게. 알드리히의 말.

사형 당일의 새벽.

“…….”

나는 코웃음을 치고 입을 벌려 허어, 깊은 숨을 내쉬듯 웃었다.

믿고 동행할 자 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건만 새삼 우스웠다. 사방이 다 내가 경계해야 할 사람, 내 날개 아래 지켜야 할 사람뿐이다. 동행은, 어깨를 같이 하고 걷는 동행은, 사람을 참 조심스럽게 골라야지. 설령 이 저택에서 벌써 수십 년 봉사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이는 나와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알드리히는, 참 많은 일을 함께 처리해온 나와 알드리히는, 서로 동행한 적이 없었다.

고용부에서 눈을 거두었다. 그리고 책상을 손으로 짚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리하여 의자가 능히 뒤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그리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보는 바깥 하늘이 좋다.

“하, 이것 보게…….”

나는 감탄을 중얼거리며 몸을 깊이 묻고, 오른 다리를 세워 발을 의자 위에 올렸다. 쭉 뻗은 오른 팔은 무릎 위에 올렸다. 왼 팔은 팔걸이 밖으로 뾰족하게 걸친 채였다.

우편으로 비스듬해진 몸과 허리가 조금 뻐근해져왔지만 인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대로 바깥과 하늘을 보았다. 조급한 사람에게도 일순의 여유를 줄 만한 풍광이다. 한가롭고 평화롭기가 여간 평온한 게 아니었다.

해가 길어져,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음에도 아직 바깥이 하얗고 파랬다. 세상이 하늘처럼 물들었나. 실로 평온한 빛이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눈꺼풀 그늘에 가린 눈이 식어갔다. 곤하다. 갑작스레 피로가 턱하고 정수리부터 나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아, 이건 또 뭔가. 웬 무거운 피로야.

무릎에 걸친 팔의 끝, 그러니까 손끝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부러 흐음, 가벼운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가라앉아 가던 무언가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활기는 식은 적이 없다. 피곤하긴 하지만, 잡아먹혀 우울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는 아니 되지. 그럴 일도 없고.

“…….”

나는 비쭉 입 꼬리를 올렸다.

이 일에 스스로 파고 들어가면 파고 들어갈수록, 몸을 담그면 담글수록 상황이 날 웃게 했다. 베르덴이 오래 전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걱정하는 낯으로 발리앙을 찾아갈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누님.”

그렇지, 베르덴, 경. 아직은 아니잖아. 경을 이해하지만, 아리엘보다 경이 더 때때로 증오스럽다. 내 증오의 크기, 딱 그만한 크기의 증오를 경도 내게 가지게 되면 좋겠는데, 그런데 경은, 그리 노할 자격이 있나. 없음에도 전의 일을 아무 것도 모르는 경에게는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 날 증오하게 되면 그때에 경이 내게 어떤 위선을 보였는지 잠시라도 기억을 하게 되면 좋겠다. 실로 소중했던 친구여…….

“들어와.”

잠긴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흐리게 구름 낀 시야를 접었다 되돌렸다 접었다 되돌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금씩 깨끗해지는 감이 생겼을 때, 내가 어디에 대고 무어라 대답했는지를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쥰에게 내가 방금. 들어오라고.

아, 그렇군.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쥰의 음성이라도 구별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쥰은 입실을 위하여 시종이나 시녀 대신 대체로 제 목소리를 이용한다. 멍하게 헤쳐졌던 눈동자가 둥글게 초점을 잡았다. 단단해진 눈으로 비스듬하게 바닥을 보다 몸을 바로 했다.

아직 제 색을 찾지 못한 머리카락이 어깨 앞으로 쏟아졌다.

나는 의자를 반쯤 돌리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들어온 쥰을 보고 멈칫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이제 막 온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시국이 이러하니 쥰에 대한 사소한 것도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게 묻자 쥰이 유순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 까지는 아니고, 음……. 누님을 뵙겠다고 션이 왔습니다.”

아, 알겠다.

나는 그제야 키득거리듯 유쾌하게 웃었다. 서랍에서 장갑을 꺼내며 일어났고, 쥰은 내 기꺼운 기립을 보고 오묘한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 작품 후기 ============================

mqcetus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격조했습니다. 거의 한 달만에......(석고대죄) 건강하시지요?

그런데 한 달 만에 돌아와서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ㅠㅠ 달랑 공지만 올리기 죄송해서, 일단 한 편 더 연재하고 공지 올리겠습니다.

한두 시간, 늦어도 세 시간 안으로 한 편 더 올라옵니다. 이따 또 뵙겠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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