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
이번 발리앙은 후계자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의 라이네처럼.
후계자를 공표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는, 공표하지 않을 시 장남장녀 밑의 서열들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게 된다는 것 정도일까. 다툴 여지가 ‘그나마’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첫째가 가문을 잇지 못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하여 전에 나는 그 이유를, 나의 사망으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 얼마나 재미있나.
전에 후계자 없던 라이네는 이번에 후계자를 공표했고, 전에 후계자를 공표했던 발리앙은 이번에는 후계자가 없었다.
나는 발리앙 영지로 내려가 소산식을 치른 삼 남매의 소식을 기다렸다. 전처럼 베르덴이 후작위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베르덴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것인가.
누군가가 베르덴을 독살할 시간이 충분히 있던 전과 다르게, 이번에 그는 라이네 저택에 있던 세월이 길었다. 이제부터 시간을 들여 독살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사고로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발리앙이 알아서 자멸하며 알아서 라이네를 흔든 범인을 드러낸다는 뜻이니까, 그건.
그러나 그 ‘누군가’는 여전히 영리하여, 베르덴은 무사히 후작위를 승계했다.
발리앙 후작이 비상시를 위해 안배해두었던 대비책은 라이네 공작인 나였으나, 결국에는 내가 베르덴을 지지한다는 둥의 쓸데없는 시선을 보내지 않고 일이 마무리 지어진 것이다.
좋은 일이지.
나는 소산식을 마치고 거의 곧바로 오드리나로 상경한 베르덴을, 황궁 연회에서 만났다. 죽고,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시신을 오드리나로 옮겨 오고, 발리앙으로 다시 옮겨 가고, 장례를 치르고, 귀경하기까지 2개월 남짓 걸렸다.
전 발리앙 후작이 죽은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아, 나도 설마 그런 식으로 갈 줄은 몰랐지.
나는 들고 있던 잔을 입술에 대며 새삼 올라온 비웃음을 삼켰다. 페레즈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조의를 받고 있는 베르덴을 멀찍이 서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미 베르덴에게는 조의를 표했고, 아리엘과 르네와도 인사를 나눈 뒤였다. 특히 쌍둥이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위로하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나는 베르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표정은, 전과 같다. 차갑고, 꺼멓고, 시리고.
부친이 작전 중 전사한 게 아니라 자진한 것이라는 짐작은 좀 했을까.
저 써늘한 얼굴 살갗 아래에서는 후회가 넘치고 있을까, 눈물이 넘치고 있을까, 지키고자 하는 굳은 다짐이 넘치고 있을까. 어디 좀, 절망은 했나.
어느 쪽이든 염려해주기에는 내가 당한 게 너무 많다.
기억을 찾기 전, 베르덴보다 훨씬 애틋하였던 헤르조를 버리고도 종국에는 멀쩡해졌는데 내가 베르덴을 보며 여전히 애틋해 할 이유가 없질 않은가.
“누님. 여기, 말씀 하셨던 과자입니다,”
“문제가 생겼다, 쥰.”
“예?”
내 옆으로 다가와 접시를 내민 쥰을 향해 눈을 들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말 때문인지 심각해진 표정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여전히 잔을 입에 댄 채로 웅얼웅얼 말했다.
“물에서 술맛이 나.”
잔 안에 쨍하고 부딪힌 음성이 꼬르르륵 새어나갔다.
쥰은 차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좋은 반응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침몰했고, 하여 내 옆에 서 있던 페레즈 백작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나섰다.
“각하께서 직접 섞으셨습니다.”
“뭐? 언제? 내가?”
페레즈 백작의 속삭임에 나는 화들짝 놀란 척 그를 돌아보고 물었다.
그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백작은 이내 조곤조곤, 평온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이렇게 섞으면 술에서 물맛이 날까 물에서 술맛이 날까, 궁금하다 하시면서 섞으셨습니다.”
“바보로군.”
“…….”
단언했는데, 말하고 보니 그 바보가 나더라. 백작의 침묵을 이해하기로 했다.
이 계산된 추태를 옆에서 지켜봐야했던 쥰이 작게 웃었다. 예쁘다. 나도 동생을 보며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년이 아직 들고 있던 접시를 남은 손으로 받아들었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이제 가서 네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구나.”
페레즈 백작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쥰이 감히 끼어들 수 있었던 건, 내가 앞서 시킨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계산대로 분위기를 풀어야 할 때쯤 잘 와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쥰은 끝까지 웃으며 내게 인사하고, 백작에게도 인사한 뒤 떠나갔다.
베르덴과 전 후작에 대해 백작과 나누던 대화가 끊긴 지 수 분이다. 그럼에도 우리 대화의 주제는 다시 베르덴으로 돌아갔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지켜만 보고 계십니다. 스스로 무얼 하는지 모를 만큼 신경을 쏟고 계시면서.”
그렇게 생각하길 원했던 바.
이런 식으로 웃거나 바보짓을 하여 상황 아래의 배경을 꾸미고 덮은 게 한두 번인가. 나는 멋쩍어하는 척 픽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후작께서 얼굴이 많이 상하였네 어쨌네 하는 대화는 이미 나눴다. 여기서 또 한동안 이야기가 중단될까 하였는데, 백작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를 이은 친분이긴 하지만, 가끔은 신기하기도 합니다.”
“흠?”
아, 아, 거기까지 가면 안 되지.
무슨 말이냐고 소리를 내며, 먹어도 된다고 접시를 내밀자 그가 과자 하나를 집어갔다. 안타깝게도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심부름을 시킬 만큼 좋아해도 하필 이런 과자를 좋아하느냐는 표정이 되었다. 심지어 과자 자체도 잘 부서지는 과자라서, 그의 입에 들어가기 전에 반 정도가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역경을 거쳐 입에 담은 과자가 무슨 맛인지 느끼자마자 지은 표정을 보고, 나는 흐느끼듯 웃었다.
이 과자, 무진장 달다.
“……아무리 친해도 각하만큼 친구를 보살피는 사람은 가주 중에는 없습니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발음이 불분명해졌다. 욕지기를 참느라 그럴 지도 모른다.
나는 보란 듯이 접시를 들어 입 앞에 대고, 과자 세 개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호쾌하다 못해 예의는 말아먹은 싹쓸이에 백작은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지나가는 시종에게 빈 접시를 건네준 후에는 시간을 들여 우물우물 씹었다. 백작은 나를 한참 말없이 보고 있다 가만히 물었다.
“이거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겁니까?”
“내 마음. 맛있지?”
“…….”
“거 지나치게 질색하는군. 표정 관리 좀 하지. 그래도 먹으니까 정신이 확 깨지 않나.”
남아 있는 물로 입가심을 했다.
황제가 죽고 공작과 후작이 죽는 등 여러 일들을 겪고 새 시대를 맞이한 제국을 축하, 귀족들을 위로, 돌아온 토벌대와 앞으로 갈 토벌대를 위로하는 연회인지라 규모가 컸다. 그만큼 늦은 시간까지 버텨야 하고.
이제 막 시작한 연회였으나 하룻밤을 본의 아니게 새고 온 사람은 이미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피곤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피곤했다.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닌 데도 하루를 새는 게 힘들더라.
기이할 정도로 아침부터 몸이 축 늘어져, 또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느냐고 의사를 불러 올렸더니 내가 지나친 긴장 상태에 있다고 했다.
같은 분량 움직여도 몸이 두세 배로 힘들 것이라며.
하여, 긴장 상태에 있다면 오히려 피로를 느끼지 못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몸이 아니라……, 각하. 몸이 아닙니다.
-몸이 아니면, 정신이라고? 아무 것도 힘들지 않다. 전과 같아.
지독하게 불쾌하여 차마 웃으며 말하지도 못했다. 싸늘하게 의사를 내보내었던 오후를 떠올린 나는 이내 기억을 털어냈다. 그럴 법 하다고 생각하지만 온전히 동의치는 않는다. 차라리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을.
그러나 전문적인 소견에 무의미한 반박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집과 자존심도 아니다. 그저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내 정신이 긴장된 상태인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발리앙 각하와 혼인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
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 꼬리를 올렸다.
내가 앞서 말을 돌리고자 했던 부분은 부친 세대의 일과 내 세대의 일을 연결하는 부분이었다.
나와 베르덴의 혼인은 그럴 주제가 아니다. 여전히 잔잔하고 평온한 머릿속을 일부러 인지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을 그럼, 후작에서 내려오도록 한다고?”
“각하께서 공작에서 내려오시든지.”
“음. 백, 그건 자네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내가 너그럽다고 선을 넘지는 말고.”
죽여 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뒷말은 잘라내어 삼키고, 싱글싱글 웃으며 부드럽게 일침을 남겼다. 심장이 일순 매섭게 뛰다 고요해졌다.
살롱 같은 분위기를 옮겨오되 오락거리가 더 많고 분위기가 더 자유로운 연회인지라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해진 분위기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의 가주가 내게 자세를 낮추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그래.”
사과할 것까지는 없다고 할 일은 아니다. 나는 가볍게 사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샐쭉 웃고 어깨를 으쓱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다. 내 너그러움. 나를 지키기 위한 그 모든 어릿광대짓.
“뭐, 어쨌든, 나도 혼인할 때가 되긴 되었군, 자네 말마따나.”
“올해 춘추가 스물여섯이셨지요. 그럼…….”
“그래서 혼담은, 어디, 좀 들어왔습니까?”
백작이 말을 흐리는가 싶더니, 곧 내 뒤에서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마주보고 있던 나와 백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누가 다가오는 건 알았는데 알드리히일 줄은 몰랐다. 나는 뒤돌아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폐하.”
“괜찮다면 백작은 이만 자리를 비워주지.”
“예, 폐하.”
중요한 것들은 넌지시 말해두었으니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다. 황제의 명령에 물러나는 백작을 나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알드리히는 나만 남게 되자마자 물었다.
“그래서 혼담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조용히 말하자, 알드리히는 동요했다. 일부러 내보인 동요일지도 모른다. 그는 대체로 입꼬리의 미세한 떨림마저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럼에도 이 순간 나는 그의 동요를 알 수 있었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경직된 침묵이 잠시 내려앉았다.
나비처럼 사뿐하게 내린 그것은 내 말소리에 깨어져 나갔다.
“제가 청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시야를 고치느라 눈을 깜박이는데, 그러면서 굴러간 눈에 거짓말처럼 시드니가 들어왔다. 여태 페레즈 백작과 베르덴만 보느라 눈 돌리지 않았던 곳에 그가 있었다. 알드리히의 어깨 너머, 내 오른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뻗어나간 어느 곳에.
그의 부친과, 어떤 영애와, 그 영애의 부친과 함께.
아, 그렇지.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내 혼인이야기가 나올 정도인데 시드니라고 다를까.
파격적으로 양자를 들일 게 아니고, 혹은 더 파격적으로 동생을 후계자로 삼을 게 아니라면 가주들은 응당 혼인을 하여 후계를 위해 아이를 두어야 했다. 나이 많은 포르타 백작이니 죽기 전 시드니의 혼인을 보고 죽고 싶을 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하여 자작에 불과한 시드니는 포르타 백작이 주선하는 혼담을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도 그에게는 많은 혼담이 들어왔었다. 가문도 나쁘지 않고, 사람 자체도 워낙에 좋은 사람이니.
어떤 가문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나 죽기 전까지 끝끝내 혼인치 않았던 나나 알드리히나 베르덴이나 시드니라도, 일이 평화롭게만 흘러갔더라면 그때로부터 일이 년 안에는 혼인을 했을 터다.
저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관여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
“…….”
나는 시드니와 그 앞에 선 여인을 잠시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알드리히는 변함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침을 삼키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황제가 입을 열었다.
“누이. 내가 일 년 전쯤에 했던 말, 혹 기억합니까? 누이가 포르타 영식을 마음에 두었던 것을 눈치 채고 있었을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수치사할 뻔 했던 그 자리라면 물론 기억한다.
“예.”
“그 중에 있습니까?”
나는 입을 조금 열고 옅은 한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연모, 은애, 사랑, 그런 걸 말씀하고 싶으신 거라면, 아닙니다. 저희 가주들은 반드시 은애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누이도 내가 앞으로 할 결혼과 같은 길을 걸을 겁니까? 마음 없는 결혼?”
당연한 말씀을 한다.
이를 보이도록 씨익 웃었다.
“결혼을 앞서 하고 마음을 그 후에 주면 되겠지요.”
“…….”
“폐하도 그렇게 행복해 지실 겁니다.”
황후나 황비가 아리엘이 된다면 내 말은 달라지겠으나, 어찌 되었든, 나도 알드리히도 권리만큼 의무도 큰 사람들이었다. 어깨와 등에 그러한 의무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놓인 나는 더더욱, 옆자리든 무엇이든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드리히는 아무 말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거절의 뜻을 나타내왔었다. 나를 한동안 눈에 담던 그는 곧, 재밌게 있다 가라고 짓궂게 웃고 몸을 돌렸다.
그날의 연회는 새벽까지 이어져,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세 시가 넘어있었다.
이렇다 할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새벽으로부터 이틀이 흐른 후였다. 오후 햇살 가득한 집무실에서 졸음을 참으며 일하고 있을 때.
“발리앙 전 후작이 실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보고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펜을 든 손은 여전히 가벼웠다. 놀란 것처럼 눈을 잠시 끔뻑이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근거가 있나?”
“출혈하여 고인 색에 문제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 보좌가 된 할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자진의 문제는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면 아니 되고 적당한 수의 사람들의 앞에서, 어두운 시각에,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할 만 하도록, 그렇게 자진을 해야 그나마 말이 적다.
그러나 편찮으셨던 황제는 이미 서거하신 뒤인 데다, 발리앙 영지에는 이렇다 할 심각한 문제도 없으므로 자연스러운 명분이 없으니 그는 명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토벌에 굳이 끼어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분명 죽기 전 바로 옆에 독이 묻은 무기를 던져놓았을 터. 그것 역시 일시적인 처방 밖에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피가 굳은 후에는 공기에 산화된 피 색이라 우길 수가 있다. 따로 채취하여 연구하지 않는 이상.
멍청이. 현명한 멍청이.
내게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나의 아버지께서 킨들 라이네에서 돌아가신 후, 그 시신 상태와 혈색에 의하여 라이네 일원이 의심받기 시작했으니까.
“그걸 본 이들이라곤 기사들밖에 없었을 텐데.”
“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입에 담은 범인은 특정 지어졌고?”
“아직 소문의 초창기에 불과합니다. 퍼지려면 하루 이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무얼 알려고 해도 며칠 더 있어야 한다는 건가…….”
차근차근.
옥죄기 시작한 무언가다. 차근차근, 인내를 가지고.
소문은 이미 뱀처럼 발리앙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 될, 것이다.
나는 할리를 내보내고, 쥐고 있던 펜을 손가락 위에서 돌렸다. 한 바퀴. 천천히 두 바퀴.
예전의 라이네가 당했던 시작과 비슷하게 보였다. 참 아무렇지도 않게 처참한 파국을 시작했었나 보다. 이런 걸 범인은 지금 나와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었을까.
내 숨죽인 웃음이 소리를 품고 피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어디, 앞으로 어쩌려나.
오드리나에서 사람을 죽고 죽이는 건, 결국엔 입과 머리로 하는 정치다. 뒤집어쓰고 나서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몸으로 체험했던 바.
돌리고 있던 펜을 바로 잡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여전히 피식피식 새어나오고 있는 웃음 끝에 시원한 악이 섞였다. 나는 웃고 있다. 다 읽은 서류 맨 뒷장과 앞장에 서명하며 내심 속삭였다. 도달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할 그 말은 별 다른 게 아니었다.
돌아온 이래 나는 내내 웃고 있다, 하는.
그러니 너도 웃으라. 웃으며 기다려. 라 하는.
사각사각. 종이 위 움직이는 펜 끝에서 누굴 갉아먹어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마치고 흘리듯 서명 옆에 점을 찍었다. 나는 그것을 옆에 쌓고 다음 문서를 폈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mqcetus님, 후원쿠폰 감사드려요!(=´▽`=)
슬슬 사이다 시작! 발리앙후작 소문은 에브가......큼큼. 당한 방식을 역으로 이용 중♥(깜찍한 하트)
에본느 외전 전체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모략은 설정하는 것도 어려운데 쓰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ㅠㅠ
챕터7부터는 시놉을 쓰고 뒤엎고 쓰고 뒤엎고 쓰고 뒤엎고 쓰고 해서 4개가 있는데, 내용이 서로 많이 달라서 취합해서 쓰는 중입니다. 뭔가 빠진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으으으. 부디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기를.
예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이 되는 코멘트들 감사합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