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후작은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나야 지난 일주일 간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있었다지만, 그는 아니다. 곧 죽을 사람이므로 나와의 이런 자리도 이것이 마지막. 되도록 여기서 이 혼담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으려 들 것이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실로 아리엘을 쥰과 결혼시키기를 원한다면, 베르덴에게 위임하겠지만.
두고 봐야지. 내 내심의 반은 흥미가 차지한 중이었다. 정략혼이든 그 혼담이든 이용하는 방식은 제각각. 나는 가문간의 끈 운운하기 위하여 혼담을 건넨 것이 아니다.
기다리자, 발리앙 후작은 혼담을 사양했다.
“아리엘은 부족함이 많습니다. 라이네경은 그 아이 분수에 넘칩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당연히 아리엘이 부족하지. 그러나 진심을 내색할 수야 없다. 나는 살짝 아쉬워하는 것처럼 눈을 찡그리고 다시 살살 혀를 놀렸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생각해보게.”
“그 시간이라는 것이 제게는 없고, 저는 그 혼담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르덴에게 이야기라도 해두면 되잖아.”
어디, 이 ‘아비’의 양심이 얼마나 털 무성한지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우울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쥰이 그리 부족한가?”
“부족한 사람은 아리엘입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모르겠군. 나는 아리엘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는데. 그대 가기 전에 여식에게 좋은 사람을 짝지어주고 가는 게 더 마음 편하지 않겠나?”
내가 거침없이 그의 사망을 말했으나 후작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마지막 당부를 하기 위하여 부득불 마련한 자리다. 이 만남의 뜻을 나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대체로 약자는 그였다.
나는 계속해서 그를 꾀었다. 내가 진실로 아리엘과 쥰을 결혼시킬 생각이든 아니든, 난 이 대화를 통하여 이 사람의 머릿속 무엇이라도 읽어두길 원했다. 내 끈질긴 회유에 무언가를 생각하던 후작은 곧 깊이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라이네는 아닙니다.”
잘 가다가 삐끗했다.
라이네 따위는 발리앙의 급에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뒷목을 주물렀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발리앙 후작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음. 라이네 따위가 감히 발리앙에게 청혼한다고 노발대발하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예.”
“괜찮아. 오해하지 않았네. 그런 생각을 가질 사람은 이 나라에 아무도 없는 걸 내가 모르나.”
느긋하게 대꾸했다.
황가를 제외하면 이 나라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가문이다. 같은 공작인 데스챔프도 라이네에 쉽게는 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가문을 말아먹은 나.
도대체 얼마나 멍청해야 라이네 공작이나 되는 스스로를 그렇게 처참하게…….
계속해서 뒷목을 누르고 주물렀다.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게 된 시한부는 어느 부분에서는 겁이 많아지고, 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용감해지는 것 같다. 지금 이 후작을 특히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바로 그 때문.
어차피 죽을 거라 하여 그 죽음마저 이용했던 산 증인이 나였다.
나는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그대 의향은 알겠네.”
다시 오른 팔이 더웠다. 주섬주섬 외투를 왼 팔로 옮기며, 잠시 눈을 쉬었다. 옷을 내려다보며 한순간에 탁 풀렸던 초점이, 또 한순간에 모여들었다. 흐리게 흔들렸다가 깨끗하게 돌아온 옷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발리앙 후작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발리앙 후, 내가 아무 것도 모르기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덴을 보호하고자 하는 그대 뜻을 용납한 이유도 베르덴과의 우정 운운할 것이 아니고.
집안 단속 잘하셨어야지, 후작.
그대는 가문만이라도 성공적으로 지킬 수 있었다. 가족을 지키고자 욕심을 부려서 자네는 결국 죽게 되었고, 베르덴도 내게 맡겨야 할 정도가 되었지. 실패한 감상은 어떠신가.
아니, 이 모든 말이 의미 없도록 애초에.
……애초에 발리앙 따위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
그 모든 발악 어린 외침을 모아서, 삼키고, 태우고, 뱃속 깊은 곳으로 내려 보냈다. 잠잠히 가라앉으라.
물론, 어째서 내 아버지께서 자진하셔야 했는지 발리앙 후작이 알기를 원한다. 죽더라도 알고 죽기를, 그리하여 경악에라도 잠겨 죽기를 정말이지 미치도록 원해. 그럼에도 내가 참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말하여 괜한 경계심을 심어줄 이유가 있나. 이 사람은 베르덴보다 훨씬 노련한 사람이다.
발리앙 후작은 내게 베르덴을 맡기면서 발리앙의 치부를 일부 드러냈고, 그의 정치 생명을 걸고 내게 부탁해 왔으며, 어쩌면 이제 와서는 그것을 약간이라도 후회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되도록 좋은 감정을 간직한 채로 얌전히 죽게 하는 게 나았다.
옅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다.
“어찌 가려 하나.”
“전 공작 각하와는 다르게 가려 합니다.”
“그래…….”
나를 떠보는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어라 해야 하나, 발리앙 후작은, 저 말로, 아버지께서 발리앙의 누군가 때문에 돌아가셔야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밝힌 것과 다름없다. 나는 방금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음에도 모르는 척 해야 하고.
한숨을 쉬면 절절하게 떨릴 것 같아서 그조차 요원했다. 뇌리에는 이미 이 후작을 칼로 미친 듯이 내려치는 상상이 가득했다. 이 분노를 참아야 한다. 참아야. 빌어먹게도 참아야.
이대로 죽이고 싶지만 참아야. 나는 갑자기 땅을 보는 척 허리를 조금 굽히며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리는 힘을 눈에 실었다가 풀었다.
정말. 이번 세대의 발리앙과 라이네는 왜 이리도 맞지를 않나.
이내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한가로운 눈으로 기사들의 훈련을 살피면서 살의를 죽였다. 살기는 손톱만큼도 보여서는 아니 된다.
만일 아리엘이 전부 이리 하였다면, 사랑이 죄다. 그야말로 사랑이 죄. 아, 제길, 한 가문의 가주가 이런 우스운 말과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모략이 사랑 때문이라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발리앙 직계의 다른 사람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더 좋으리라는 말도 아니었다.
발리앙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여지를 두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애써 발리앙의 악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이제 나를 위해서였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발리앙만을 쫓다 다른 자들을 놓쳐선 아니 된다.
라이네의 이익을 위해 용서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는 한, 나는 이 일을 파헤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개새끼들.
몹시도 자연스럽게 올라온 욕을 대신하여 나는 웃었다.
“베르덴은, 때가 되면 돌려보내겠네. 우리 협의에 따라 무사히 후작위에 오르는 것까지 보장할 테니 염려 마시고.”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는 그대 아들이지만, 내 친구이기도 해.”
“……폐하께서 행차하시는군요.”
그는 반쯤은 말을 돌리는 식으로 알드리히의 행차를 알렸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헤어질 시간이다.
알드리히가 우리 둘에게 도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편히.”
“…….”
편히 잠들라는 축복. 결코 진심일 수가 없다.
그는 아무 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다는 둥 화답을 하기에는 알드리히가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대관식을 앞둔 황제가 싱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두 분,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가?”
“폐하.”
그에 우리 두 귀족은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예를 갖추었다. 알드리히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해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후작은 나랑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치고. 누이는 왜 왔고?”
누이라는 호칭에 움찔 눈을 찌푸렸지만,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식 준비는 잘 되어 가는지 한 번쯤은 둘러보아야 했고, 쥰도 볼 겸 하여 입궁하였습니다.”
“음.”
“폐하, 윤허하신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리 하게.”
허락은 부드럽게 떨어졌다. 다시 한 번 인사하고 떠나는 후작의 뒷모습을 아주 잠간만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관식에서는 볼 수 있겠지. 그런 성대하고 중요한 식을 앞두고 자살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발리앙 후작의 죽음이 영원히 명예롭도록 둘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내 부친의 억울한 사망이 겪어야 했던 일을 저 자의 죽음도 반드시 겪게 하리라.
그러나 저 사람의 죽음은 내게 깊이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특별하게 새겨야 할 교훈 같은 것은 아니다. 부정을 제외하고 지금 후작이 느끼고 있을 감정이 무엇이든 나는 수 배로 느꼈던 일이 있다. 교훈은 직접 겪으며 이미 뼈저리게 받았다.
하여 문제가 되는 건, 죽는 시기.
전에 베르덴은 나보다 먼저 승작했었다.
그때 발리앙 후작의 사인이 병이었다면, 이번에도 그리했어야 했고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야 했다. 당시에는 찾지 못한 해약을 이번에는 찾아서 연명이 가능했다고 해도, 독을 섭취하여 얼굴이 묘하게 검은 빛이 돌도록 중독된 사람이 그 병을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따라서 아마 그때에도 발리앙 후작은 독살 당했을 터.
볕에 탄 것 같이 검어진 얼굴을 보고 중독된 내장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는 게 발리앙으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질리도록 독에 시달린 사람,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수상쩍게 여길 리가 없으리.
그래서 나는, 실은, 베르덴이 죽어가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옥 안에 있던 당시에야 확신할 수 없었으나 후작이 곧 죽을 지금은 확신에 가깝다. 베르덴은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야 어차피 갈 사람이고. 경은 계속 살아갈 사람이니까.
위선.
베르덴의 위선을 태연하게 맞받아친 나의 위선.
“…….”
부자가 똑같이 죽어가고, 죽어갔군 그래. 내심 이죽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야가 좁아졌다.
그러나 말했듯, 문제는 시기다. 어째서 이번에는 후작이 죽는 시기가 늦추어졌나.
어째서 후작은, 발리앙으로 돌아간 베르덴을 다시 내게 맡기고자 노력했나.
……어째서 베르덴은, 내게 다시 돌아오자마자 나를 독살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나.
“누이는 정말 라이네경을 아끼나 봅니다. 보기는 좋지만, 이제 나 좀 보지요?”
나는 알드리히에게 고개를 돌리며, 애매하게 피식 웃고 말았다.
쉽다. 아주 쉬워. 다시 살며 새로운 일도 겪은 것까지 함께 엮이니, 가정해내기가 아주 쉽다. 그러나, 소름이 끼친다. 저 가문 안이 얼마나 엉망이냐며 눈살을 찌푸릴 것은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런 싸움이 아주 많을 것을 알고 있다. 당장 아버지만 하더라도, 숙부와의 일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아리엘을 생각하되 아리엘만 생각지 않아야 하며, 발리앙을 생각하되 발리앙만 생각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다. 이미 다방면으로 손을 쓰고 있고, 수십 개의 가정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멀거니 황제를 보던 시선을 조금 내리고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정말 그 누이라는 호칭도 멈추셔야 합니다.”
“잠시 쉬고 있었는데 누이 왔다는 보고 듣고 왔습니다.”
……들어먹지 않겠군.
난 눈을 찌푸리며 한숨을 흘렸다. 알드리히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시드니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은 쉬웠다.
“대관식까지 특히 분주하실 텐데 족히 쉬시지 않고 행차하셨습니까.”
“누이를 보는 것도 쉬는 겁니다. 그래서, 누이, 어디 아직도 편치 않아요?”
“……예?”
생뚱한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알드리히는 손을 올려 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누이 눈, 핏줄 터진 것 같은데. 새빨갛습니다. 아, 경은 이만 가보게.”
“예, 폐하. ……각하.”
나는 시드니가 알드리히에게 예를 갖춘 뒤에 내게도 인사하는 것에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한 번 까닥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가 기사들에게 걸어가는 모습을 굳이 살피지 않았고, 그 역시 내게 따로 눈 두지 않았다.
평범하게 지나쳤다.
이 시간에서 우리가 대체로 그리했듯.
그리고 나는 어쨌든 마침 잘 왔다고 웃는 황제를 향해 멀뚱하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라이네경 편으로 보낼까 했거든.”
“……무엇, 말씀이십니까?”
“누이 생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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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부터는 글 쓸 시간을 하루에 십여 분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전에 많이 달리고 싶은데......(...) ㅇ<-< 부디 파바바박 쓸 수 있기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말 많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독자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