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81화 (81/157)

00081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베르덴이 멈칫 몸을 뒤로 빼고 나를 보았다. 믿을 수 없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느냐, 정말 그런 질문을 네가 했느냐, 그런 반응이다.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장차 후작 될 사람. 알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그는 장차 가주될 사람으로서 대답하게 될 터. 따라서 예의를 따진다면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나, 앞으로의 내 행보 중 어디까지 그를 배려하게 될지 미리 추리해놓고자 했다.

나는 웃으며 다시금 말해주었다.

“그래, 나는 장차 발리앙을 이을 자네에게 나를 대고 있네.”

“…….”

“내 보좌에게 묻는 게 아니야. 내 오랜 친구인 자네에게, 장차 발리앙을 이을 자네에게 묻는 것이네. 거짓이라도 좋아. 무엇이든 대답해 봐.”

어떤 말이 나오든 실은 무가치한 대답이다.

아, 나는 그가 종국에는 무어라 대답할지 알고 있다. ‘어떤 날의 연장선상’이라 함은, 질문의 내용뿐 아니라, 그가 어찌 대답할지 알면서도 묻는 행위 자체도 포함되었다. 그가 내 호위기사에서 내쳐지던 날처럼.

무어라 대답하게 될지 알면서도, 어쩌면 그가 다르게 대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고.

그럼에도 그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을 한다면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도록 몰고 가려 하는.

……아하, 그야말로 그날의 반복이다.

잠잠히 나를 응시하던 베르덴이 내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저와 각하 중 누굴 죽이시렵니까.”

응시하다 조용히 놓았던 그때와 다르나, 맥락은 같았다. 나는 막무가내인 것처럼 묻고 그는 그의 입장을 고려하여 대답할 터. 내게 돌아온 그 질문에 내가 내 입장을 고려하여 대답할 것과 같듯이.

나는 입 꼬리를 올렸다가 나붓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 나에게 질문을 돌려보겠다?”

“…….”

“좋아. 맞춰드리지.”

베르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웃으며 속삭였다.

“자네를 죽일 걸세.”

그렇기에 나는 너를 이해한다.

“명분이나 상황, 이유, 따져야 할 것들을 하나도 묻지 않으십니까?”

“내가 죽어야만 라이네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올 것 같지는 않군.”

“…….”

“따라서 내가 죽고 자네를 살려야 라이네가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항상 자네지.”

내 생각과 가치관이 이러하니, 그를 이해한다.

나는 은근한 어조로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자네도 그렇지? 괜찮으니 대답해.”

“예. 각하와 같습니다.”

내가 그러했듯 그의 목소리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우리는 당연한 것을 말하고 답했다.

내 입 꼬리가 비쭉 올라갔다. 나와 베르덴의 대답을 풀이하자면, 중요도의 첫째가 가문과 가문의 일원이요, 둘째도 가문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문과 가족이라는 뜻이었다. 설령 나는 나를 죽이기를 택하고 베르덴은 베르덴을 죽이기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문을 위해서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 받아왔다.

그럼에도 일찍이 내 호위기사가 되어 그 교육을 조금 덜 받은 이 시간의 베르덴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의 우리 우정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기대의 근거는, 이 시간선을 살고 있는 발리앙 후작의 말이었다.

-베르덴은 조금 다른 것 같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족을 우선 한다 하는데, 베르덴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하던. 어떤 아비의 말.

헌데 틀렸네, 발리앙 후.

나는 느긋하게 웃으며, 마음속으로는 발리앙 후작에게 대답을 보냈다. 그대가 틀렸어.

그리고 나도 틀렸어.

베르덴이 발리앙의 장남, 앞으로 후계자 될 이, 후계자 된 이후에는 후작 될 이로서 얼마나 자존심 높았는지 알기에, 그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기사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역시 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 않으며 기대했는데, 후작도 틀리고 나도 틀렸다.

말했듯, 전에도 그리했으니 이번에도 그리할 것이라 마냥 믿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의 선상에서 나는, 아리엘이 이번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놓아줄 생각이다. ‘않았다면’이라 하는 조건부 관용은 얼마나 재미있고 깜찍한 말장난인 것인지, 아리엘은 내게 잡힌 후에 알게 될 테지.

보라. 이미 아리엘을 죽일 생각이면서도 다른 자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간과할 수 없어 착한 척. 아리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척.

이는 신중함이다.

그리고 그 신중함으로 나는 베르덴을 판단했다. 이 순간 산산조각 난 기대의 근거가 아비의 말과 그가 버린 자존심이었다면, 이 싸늘한 배신감의 근거는 베르덴이 여태 내게 보여 왔던 언행이다.

그는 이번에도 라이네가 겪은 일의 배후를 아마 알고 있다.

베르덴. 경은 이미 나를 배신했을 것이다.

경은 나를 기만하는 중이다.

“그럼 그 마음은 자네가 내 기사일 때에도 동일했나?”

“…….”

“이 역시 거짓이라도 좋네. 아무 것이라도 대답해봐.”

“아닙니다. 기사가 된 것은 각하를 위해서였습니다.”

거짓을 택한 그를 향해 나는 씨익 웃었다.

그거 아는가, 베르덴.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어야 했다. 경은 위선적으로 나를 염려하고, 나는 경의 당연한 배신을 모르는 척, 위선적으로 경을 위로하며 경의 가문을 뒤집어엎을 방법을 생각하느니, 차라리 우리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었어야 했다.

경과 나는 서로를 망치는 중이고, 앞으로 망칠 것이야.

“베르덴.”

내가 질문으로 그를 놀라게 한 후 내게서 떨어진 적 없는 시선이 죽은 빛을 발했다. 내가 느끼기에 어둡다. 빈손을 주먹 쥐듯 오므리며 팔걸이 위에 팔꿈치를 대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 그토록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의 까닭이, 과연 그들을 등장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뿐이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마음의 이유에는 내가 당했던 바에 대한 경계도 있지 않았을까. 이른바 본능이라 하는.

그러나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스스로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앞에 있는 베르덴의 거짓 하나만으로도 내 기분은 이미 충분히 나쁘다. 나는 천천히 베르덴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던질 것은, 다시는 하지 않을 질문이다. 나는 스스로 붙잡고 얽매여 있던 내 목줄을 풀 준비를 했다.

차분하게 물었다.

“우리 사이에 우정은 있었나.”

그리하여 떠나보낸다.

오래 전에 우리 즐거웠던 시간, 더는 기억하지 않겠다. 이번 시간에는 하지 않았던 내 약속을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토록 아쉬울 줄이야.

-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드리지.

그 약속을 듣고도 발리앙을 감추고 지켰던 경을 이해한다. 그러나 용서와 관용으로 이어지지 못할 이해임에, 경의 이해를 구한다. 경 역시 후에 뒤를 돌아보면 나를 이해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내가 그랬듯 경도 가주가 될, 가주이지 않은가.

애초에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물음이 아니었다. 나는 쓴웃음을 웃으며 그의 시선을 다정하게 받아쳤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그와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베르덴.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군.”

나는 경이 가문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을 알아. 이해해. 그 과정에서 응당 있어야 하는 정치와 머리싸움에 음모와 모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이해한다.

“각하께서는 저와 각하 사이에 우정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러나 사사로운 이익과 마음을 위하여 역사 깊은 남의 가문을 흔들려 하는 것까지 용납할 마음은 없다.

베르덴이 가주가 된 이후에 아리엘을 쫓아내거든, 그러면 나는 좋은 친구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 사람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많은 걸 잃었다. 그가 그의 가문을 지키려거든, 이번에는 지키는 정도에서 그치면 좋겠다.

참 기껍고 참으로 소중하고 예뻤던, 실로 천진했던 우정에 대해서도 이제 거짓을 말하고 그것을 이용해야 함에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이미 그에게는 이런 거짓이 일상이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아마 그러할 테고.

시간을 되돌아온 나 역시 드디어 그 전철을 밟아 너를 죽

생각을 끊고, 나는 씩 웃었다.

“자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자네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드리지.”

여태 잔잔하던 마음이 갑자기 열을 분출해 내며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응당 가라앉혀야 할 것. 이제 와서 배신감에 몸부림칠 것 없다. 따라서 죽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그가 할 일을 했으며 앞으로도 할 것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다가 그 결과를 보면 된다.

그래서 혀끝까지 불쑥 올라온 말을 삼켰다. 천불이 나.

경의 여동생이 라이네 전 공작을 중독 시켜 살해하고자 괴물들을 이용했다고 말한다면, 베르덴이 어떻게 아리엘을 감싸며 내게 대들지 상상이 간다. 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렇다 할 물증도 없이 심증뿐이니까.

심증만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방법을 나는 전에 직접 체험한 바 있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해야 할 일이었다.

인내하며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차근, 차근…….

“당신이 공작이시고 저는 후작이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

차근차근이라는 단어 하나에 일순 빠져들었던 정신이 깨어났다.

나는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뜨며 그의 질문을 이해했고, 이해한 후에 하마터면 손을 말아 쥘 뻔했다.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너무 오래 전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저 어조, 단어마다의 어감, 혀끝을 쓰게 감도는 의미, 죄 나를 덮쳐왔다.

숨 막히는 기시감이다.

우리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분명 있구나. 그때도 혹 이 약속을 한 직후였던가. 그럼 나는 저 질문에 무어라 대답했었나.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건 어쩔 수가 없이, 제게 중요한 것을 주로 하여 기억하게 되는 모양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숨이 폐부에 고이도록 떨어뜨렸다. 툭, 툭, 공기가 몸속에서 종이 찢기듯 건조하게 찢겼다.

생각 끝에 나는 내 기억 속의 베르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선택했다.

“내가 공작이고 자네는 후작이 될 상황에서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유감이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만 있는 그를 한동안 맞받아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고 있는 내 얼굴에 무언가를 조각해 넣던 그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가 일어났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진정 유감이다, 베르덴.

============================ 작품 후기 ============================

다음편 연성 중입니다. 한두 시간 내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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