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CHAPTER 7. 당신을 잃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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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여독을 풀어야 했고, 여독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쉬어야 했다.
그러나 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 정도는 버텨도 괜찮다고. 그리 해도 죽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도 그게 거짓이 아닐 수가 있었다. 말년에 몹시 제한된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나는 피곤에 가득찬 그런 의욕을 보였지만, 쥰의 눈에는 내가 심각해보였던 모양이다. 일단 쉬시라고 간곡히 나를 '달랬다.'
그 달콤한 말에 동요했다.
죽어가고 있어도, 내색하지 않았고 내색하지 못했던 전. 이미 내가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고도 내 몸을 끌어안았던 쥰, 이 시간의 동생.
나는 턱을 들고 눈을 깜박여야 했다. 내심 전부를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는 달라져서 쥰은 내 곁에서 내 건강을 염려하고 있었다.
토해낸 오물로 더러웠던 나와, 그럼에도 나를 안고 울었던 어느 날. 보이지 말았어야 했던 모습이었음은 분명하다.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나의 기억이 내가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으나, 이제 다른 의미로 아팠다. 내가 쥰에게서 그 말을 들어본 것은 추포되던 아침이었나. 그랬던 것 같다. 그날 처음 들었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지구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쥰을 어여삐 여기면서도 선을 그어두었기에, 그래서 불안하게 만들어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
이제는 내 방이 된 공작의 방 앞에서 헤어지려 하는 쥰에게 물었다.
“괜찮다면, 내가 잠들 때 곁에 있어주겠느냐?”
이는 나의 어리광이 아니었다. 내가 받아들인 아이에게, 내가 응당 해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쥰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되찾은 이래 처음으로 가지는 안온한 휴식이었다.
그 새벽을 지난 아침에 바로 출발했고, 노정은 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노숙. 공작의 품위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몸은 하루라도 찬 이슬을 맞아가며 잠을 잤다가 언제 열이 오를지 모르는 몸이었다. 하여 나는 마차에 머물렀으나 마차가 방 안의 침대보다는 편할 리 만무했다.
정직하게 쌓여온 피로가 대단했다.
침대 옆에 앉은 쥰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니, 보이는 광경이 이래.
나는 잠시 쥰을 보다가 입을 다물고 한숨 쉬듯 웃었다. 예뻐라. 귀여워서 어쩌지. 미안해서 어째.
잠에 든 탓에 힘이 풀리긴 했으나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쓸어 보았다.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뼈. 뼈 사이 움푹 들어간 곳. 가만히 매만지다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테라스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서서히 밝아지는 새벽의 하늘이다.
“…….”
이 침대에 앉아 큰 염려 없이 테라스 밖을 볼 수 있던 때는 가마득하게 오래 전이었다. 이토록 평화로웠나. 이토록 마음이 잔잔할 수도 있었던 것을, 그렇게 치열하게, 나는, 나의 적은……. 마른 눈이 아파오기까지 멀거니 뜨고 있다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렇군. 나는 정말 돌아왔다.
빈손을 올려, 끈적끈적한 눈곱이 엉긴 눈을 문질렀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잡고 있는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쥰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가운을 쥰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쓰다듬었다.
쥰마저 멀리한다는 것은, 내가 이번에도 아리엘의 간계에 걸려 넘어질 것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 하지 않겠다. 대비해야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할 것이고, 대비는 해 두어도 이번에 엎드러질 사람은 내가 아니게 할 것이다.
아리엘은 내 손에 반드시 죽는다.
손을 확 움츠리며 거두었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을 주먹 쥐고 힘 주었다. 사람이 그리 미련하고 독하여 사랑이 어쩌고, 질투가 어쩌고 하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일을 꾸몄던 거라면 아리엘은 값을 치러야 할 터. 그 어리석은 질시로 파탄낸 것은 권력이나 재산뿐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다.
“…….”
내 삶은 라이네를 위한 삶이었으니 사람의 삶이라 따로 말할 것 없다.
그러나 여기 앞에 침대에 머리를 고이고 누워 있는 아이의 삶, 라이네 공작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명예를 잃은 내 기사들의 삶, 라이네를 섬긴 모든 용인들의 삶, 라이네와 상관없는 시드니의 삶, 그로 인해 어지럽게 되었을 포르타 가문, 라이네 공작이 스러짐으로 권세의 균형을 잃은 대귀족들간의 문제.
아리엘이 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걸었던 무게가 바로 이것이다.
어디 이번에도 너는 나를 죽이려 할 것인지 한 번 보자. 어디, 이번에도 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걸 것인지 한 번, 보자. 내 눈 가장자리에 힘이 들어갔다. 옥중, 팔다리 떨어져 나가면서 갈릴 대로 갈린 웃음이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쥰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자는 체 하며 버티고 있는 동생에게 장난을 쳐서 무안 줄 이유가 없었다.
목도 뻐근할 텐데 빠르게 자리를 피해주는 게 차라리 낫겠지.
나는 밤을 새 가면서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목욕물을 부탁했다. 내 이른 기상이 알려지자 부랴부랴 달려온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아 목욕까지 마치고 나자 아침 식사 때가 되었고, 나는 간단하게 침실에서 아침을 들었다. 그리고 출근 전 인사를 하러 온 쥰을 맞이하지 않고 적당히 말을 전해 돌려보냈다.
내가 쥰에게 표현해줄 수 있는 바는, 어디까지나 라이네공의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한 후에 남는 시간과 남는 여유 안에서 이루어진다. 훨씬 살뜰하게 어여뻐할 수 있었을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아쉽고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가 공작이 된 후다. 그것은 전에도 그랬다.
우리는 이미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쥰은 이미 청년이고, 나는 이미 공작이었다.
나는 쥰이 전해 달라 했다는 인사를 베르덴에게서 전해 듣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등받이에 묻은 등을 좀 더 펴고, 어깨도 폈다. 이른 기상을 한 탓인지, 너무 오래 잔 탓인지 몸이 전체적으로 늘어진다. 목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좌우로 흔들자, 등받이에 고여 있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런 내게 베르덴이 물었다.
“각하. 식사를 거르려 하십니까?”
고개를 우뚝 멈추었다. 저 이를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라이네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이해이며, 마찬가지로, 라이네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가져야 할 감정도 그뿐이 아니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그럼 식사를 여기로 올리도록……?”
“지금은 됐어. 포만감이 들면 졸리잖아. 자네는 식사했나?”
“예.”
“좀 졸려?”
“아닙니다.”
“다행이군. 그럼 거기 아무데나 앉게.”
베르제르가 여럿 있는 쪽을 가리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베르덴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하여 내가 먼저 베르제르 중 하나에 다가가며 가볍게 말했다.
“자네와 이야기를 하려고 식사를 늦췄네.”
수 달간 영지에 머물다 어제 돌아온 사람이 이야기를 하자 하면, 떨떠름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무얼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표정을 본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이만 시선을 거두었다.
의자에 털썩 앉아 기다리자, 베르덴도 이내 다가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비스듬하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각도만으로도 분위기는 많이 유해진다. 대화를 하는 환경마저도 모두 계산상에 넣어야 함에, 이런 일들을 숨 쉬듯 해야 하는 이들이 평생을 멀쩡한 정신으로 살다 갈 수가 없었다.
의심병에 걸려 가족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모양이더라.
그리하여 누구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누구는 감정을 지우는 것이다. 누구는 가면으로 감정을 가리고, 누구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지키며 걸어간다.
나의 아버지는 감정을 지우신 편이었고, 나는 웃어 많은 것을 상쇄시키는 편이었다.
그리고 베르덴은 갈수록 감정을 지워갔더랬다. 그 변화가 어째서 이루어졌는지 이제 나는 확신에 가깝게 짐작하고 있다.
내 앞, 혹은 옆에 앉은 그를 불렀다.
“베르덴.”
“예.”
이 순간 오래 전, 대귀족들의 회의에서 스스로 구명하기 위해 보여야 했던 여유와, 해야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날 섰던 자리.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웃고 조롱하며 라이네를 지키려 애썼다.
궁지에 몰리면 못하는 게 없다고, 얼마나 미친 각오로 그 자리에 들어갔었는지 새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다시 그 자리에 앉으라 하면 스트레스에 잡아먹혀 자멸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자멸할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막상 닥친 일을 풀어나가기 위해 나는 또 다시 그 자리를 버텨내리.
제 목숨보다 중요하게 지켜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가끔 기묘할 정도로 담대해진다. ……그리고 몹시도 불합리한 일을 하게 되지.
수 달 전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긴장으로 빨라질 심장이 여전히 느긋했다.
못 버티겠다는 고신을 견뎌가며 죽어간 시간을 비롯하여 나름대로 겪은 게 많은 강심장이라는 모양이다. 또한 공작이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오래도록 준비해 온 사람이기도 하여…….
흠.
구부러뜨리고 싶은 이런 회상을 하기 위하여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다. 나는 멀뚱멀뚱 뜨고 있도록 노력했던 눈에 웃음을 새겼다.
그리고 이 자리를 재미있어 하는 내심을 삼키고, 고심하여 골라낸 말을 툭 던졌다.
“자네는 왜 내 곁에 있나.”
“예?”
이렇게 마주 앉아 베르덴을 보자니 문득 드는 생경한 아쉬움이 있었다.
만일 내가 종국에는 죽어야 했다면 좀 더 나이든 후에 죽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하는.
경험과 연륜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두 번째 공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모든 게 낯설다는 감정에서 벗어났듯, 쉰 살이나 마흔 살 정도의 연륜만 쌓여 있었어도 모든 게 여유로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결국에는 스물여덟에 죽고 서른하나에 죽은, 스물여섯의 청년에 지나지 않는다.
죽지 않았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 이제 와서는 죽은 나이가 아쉬웠다.
그런 한숨을 굳이 억누르지 않고 목소리에 떠 담았다. 두 손으로 떠서,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아쉬움을 이것이 마치 날것 그대로인 것처럼 내보였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베르덴이 충심을 날것인 것처럼 보이고, 날것 그대로인 것 같은 우정을 내보이고, 그런데 실은 그것들이 모두 어떤 속셈을 감추어 정제된 감정이었듯이.
여기 앉은 나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베르덴의 오랜 친구가 되었다.
하여 부드럽게 다시 말해주었다.
“자네를 보좌로 들일 때 자네 부친과 내가 따로 대담한 것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거기서 발리앙 후작은 자네가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힘주어 주장했네.”
“…….”
들은 바 없었을 것에 대해서 베르덴은 표정 관리를 매끄럽게 성공했다. 눈까풀 한 번 흔들리지 않는 눈과 무감정한 입매를 보고, 나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뜬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지막지했던 여정과 선황께 갖춰야 할 예로 인하여 그대로 지나치게 된 내 스물여섯째 탄일이 엊그제였음을 생각하면 보이기 미안할 정도의 표정이다.
그래도 나는, 그대로 부드럽게 그를 종용했다.
“나는 자네에게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네.”
그러자 베르덴은 한 번 눈을 시선을 내렸다가 도로 올리고 가만히 대답했다.
“중요한 분입니다.”
“얼마나.”
“…….”
지금이야 후계자가 될 것이라 예정되어 있지만, 전에 내 기사로 들어올 때 베르덴은 나와 후작 사이에 사전 거래가 있었던 걸 몰랐다. 따라서 그때 베르덴은 모든 걸 버리고 내 기사가 되었던 것과 다름없다. 설령, 거래에 대하여 알았다 하더라도, 그 거래를 하기 전에 이미 베르덴은 내게 제 뜻을 표명했으므로 그는 발리앙 후작위를 포기할 것이라 확실히 각오했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혹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할, 베르덴을 대신해 내가 물었다.
“한때라도 자네 인생을 걸었을 만큼?”
“……예.”
“그럼 그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지?”
이제 우리의 눈길은 서로 얽혀서 떠나지 않았다.
“우정? 죄책감? 책임감? 무엇 때문이었나.”
“어째서 여쭈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자네가 내 질문의 이유를 왜 묻는 건지 모르겠고.”
“…….”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살랑살랑 웃으며 지적했다. 그러나 베르덴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비꼬아 지적했으나, 쉬이 대답하지 못함을 이해한다.
나는 진정 그를 이해한다.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그에 내민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빵긋 웃었다. 베르덴의 손이 머뭇거리며 내 위로 올라오자, 나는 그의 손을 감싸 쥐고 확 내 쪽으로 당겼다.
그가 앉아있는 베르제르, 내가 앉아 있는 베르제르 둘 다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약간 움직였다.
내 쪽으로 상체가 끌려온 베르덴의 눈이 커졌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코앞에 속삭였다.
“그럼 어느 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묻지.”
“…….”
“자네는. 자네와 나. 둘 중 한 사람을…….”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느릿느릿 물었다.
“죽여야 한다면. 누굴 죽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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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