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예상했던 대로 라이네의 사람들이 끌려가 신문당하기 시작하였다.
황제가 부정하고 있는 죄. 엄연히 귀족들인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을 고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인과 하녀들 역시 끌려갔으나, 그들이 설령 고신을 이기지 못하여 거짓을 토설하게 된다 해도, 가주와 가까울 수 없는 자들의 증언이라 크게 쓸데는 없을 터.
버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에본느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저택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기사단에서 일단 제명되어 함께 감금된 쥰에게는 미안했다.
오드리나 가까이에 괴물들이 접근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었으나 그녀와 쥰은 저택 안에만 있어야 했다. 자유로웠어도 과연 전투를 굳이 볼 까닭이 있었겠느냐마는.
마법사들이 황궁에서 마법을 쓸 수 있음에도 그 사실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적었던 것은, 마법사들의 수 자체도 터무니없이 적을 뿐더러 그 힘도 몹시 약한 탓이다. 그 어떠한 마법이라도 기사들이 쳐내면 그만이다. 그녀의 친 모친이 마법사였음에도 맥없이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나.
“…….”
에본느는 읽던 서신에서 눈을 들어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이라는 것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친이 마법사였다는 것이 에본느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도 움직일 수 없는 지금, 알드리히가 매일 같이 바깥소식을 적어 보내 주는 서신은 그녀의 마음만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서신을 보내주시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에본느의 손은 조금 더 올라가 입술을 매만졌다. 벗은 손은 몹시도 차가웠다. 저리다. 그러나 신관은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고, 의사는 잡혀 갔다. 각혈이 시작되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
하여,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아침부로 그리 되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 대해 심적으로 무리한 게 유명 달리할 날을 앞당겼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제 죽을 준비를 해야 했다.
이 저택에서 그대로 사망하면 쥰에게 의혹이 이어질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독살 의혹은 그녀의 대에서 끊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 저택에서 자진을 하면, 모든 죄를 인정한다는 꼴이 되기에 라이네가 흔들린다. 따라서 저택에 감금된 채로 죽어선 안 된다.
에본느는 입 꼬리를 조금 올렸다가 떨어뜨렸다. 웃는 것조차 이제는 힘겹다. 정신이 아닌 아마도 몸의 문제였다. 감금되어 있던 지난 한 달, 많이, 많이, 너무 많이…….
무얼 오래 응시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 눈동자가 금세 흔들렸고, 그래도 버티던 그녀의 고개가 마침내 졌다.
떨어진 채로 한참을 있다 올린 얼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에본느는 앉아있던 의자에 오른 발을 올렸다.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치고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의자가 빙글 돌아가 창을 향했다.
그녀는 파묻혀, 조용히 하늘을 보았다.
덤덤한 체 하는 눈동자 안에 하늘이 떴다.
서신대로라면 라이네를 구하기 위하여 다른 대귀족들이 힘을 쓰고 있다고.
다른 모든 가문이 흔들려도 공작가는 흔들리면 안 된다. 단 두 개 있는 공작 가문 중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공작 가문이 지나치게 많은 힘을 거머쥐게 될 터. 그네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라이네 공작이 그럴 리가 없다며 그녀에게 죄를 묻거나 추국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뿐이리라.
또, 라이네령 자체는 아직 봉쇄되지 않았기에 주군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
모두 쓸모없다. 대귀족들이 그녀를 감금에서 풀리게 하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이는 미수로 그친 황제시해의 죄다.
“…….”
그녀는 상념에 잠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알드리히를 향해 마법을 쓴 사람은 아마 아리엘과 관련이 있으리. 아리엘 본인일 확률이 높았다.
에본느는 검지를 들어 눈앞에 진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었다. 쭉 밀려간 그것은 창틀 가까운 곳에서 독물을 쏟았다. 마법은, 이렇게도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마나를 크게 쓰는 마법이 아니면 마법의 발원지를 추정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아리엘도 애초에 이런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건조하게 마른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마법사라…….”
그러나 아리엘이 마법사라 해도, 에본느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잃어버린 지금이라 해도 단언할 수 있다, 아리엘은 그녀보다 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에본느 저 한 사람 정도는 도망칠 수 있다.
이후 라이네와 쥰이 얼마나 무너질지는. 막연하게나마 상상이 가능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이라도 발리앙 저택에 잠입하여 아리엘을 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텔레포트 두 번 정도 쓸 몸은 된다. 지금의 정황으로는 완전히 라이네가 범인이 될 테니 문제지.
에본느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감금이 시작되었던 한 달 전부터 이런 때를 위해 준비해왔다. 그래서 아침 이후, 그녀는 지난 한 달의 어떠한 날들보다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차단된 저택을 빠져 나와 알드리히를 만나러 갔다.
알드리히는 처음에는 몹시도 놀랐으나 이내 의자를 내주고 마주앉았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의심한 적 없어요. 누이가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와서 나를 괴롭게 만듭니까.”
“…….”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으면 곧 괜찮아졌을 텐데.”
그 ‘곧’이 문제였다. 기약이 없기에.
알드리히는 웃지 않고 물었다.
“누이. 마법사입니까?”
“예.”
“진짜, 잡아가 달라고 왔어요?”
“예.”
그러자 그가 물기어린 허탈한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렸다. 진정하고자 노력하는 황제의 얼굴에는 미처 삼키지 못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에본느는 입가를 쓸어내린 그의 손이 팔걸이 위에서 주먹 쥐어지는 것을 보았다.
“누이. 필르 발리앙이, 누이가 진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절 얼마든지 고신 하셔도 좋고, 그리고 끝내는 처형하십시오.”
아리엘과 무슨 일이 있어 이런 악의를 받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모른다. 하여 흐리게 웃은 에본느는 용건을 말했다.
아무리 알드리히라도 이 말에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치를 해야 하는 라이네 공작은 그를 보고 잔잔하게 말했다.
“데스챔프 공작이 3황자 저하와 그 모친 되시는 비전하와 긴밀한 관계인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2황자 저하의 죽음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지요. 제 죽음은 제가 요청한 것이나, 필요하면 그 죽음을 이용하십시오. 그들을 쳐내기에 족합니다. 그리고, 쥰과 라이네를 보호해주십시오. 그간의 정을 생각하여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이.”
“이것은 제 유언장입니다. 제 사후 일어날 일에 관해 쥰을 지키기에 충분한 힘이 될 것입니다.”
봉납된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받으려 하지 않기에 그의 무릎에 올려두었다.
그는 재차 그녀를 불렀다.
“누이.”
“라이네가 무너지는 데 이어 데스챔프도 무너지면 다른 대귀족들은 흡족해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 꾸몄는지 아는 겁니까?”
“모릅니다.”
“필르 발리앙 그 여자입니까? 아니면 발리앙 후작입니까?”
“모릅니다. 그러나 후작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아리엘이라 짐작만 할뿐.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스스로 죽여 달라고 찾아온 이 상황에서 아직도 발리앙을 믿습니까!”
알드리히는 그녀의 덤덤한 대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그가 이토록 웃음길에서 벗어난 모습을 처음 보았음에도, 에본느는 그저 앉아 있었다. 지금 그녀가 웃지 않듯 그도 웃지 않는 것뿐이며, 그녀가 거짓과 웃음으로 살아온 것처럼 그 역시 거짓과 웃음으로 살아온 것뿐이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에본느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믿지 않습니다.”
“……제발.”
“…….”
“제발 이러지 마.”
아주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속삭이는 그의 음성은 차갑기도 하고,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지내온 세월의 결과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드리히를 보았다.
베르덴이 여전히 친구인 척 그녀를 배신했듯, 알드리히 역시 그리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서도 그에게 제 사후의 일을 맡긴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인 탓이다. 그의 자리를 위협하던 2황자를 ‘내친’ 황제. 알드리히는 라이네가 없어져 장차 위협이 될 데스챔프의 권력을 누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 그것만으로도 쥰에게는 도움이 되고, 권세를 잃을 라이네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유언장에 관한 것은 그녀가 따로 다른 일로도 준비해둘 것이다.
그녀는 알드리히에 대해 믿어도 될 부분과 마냥 믿어서는 아니될 부분을 철저히 나누었다.
침을 삼킨 에본느는 마지막으로 웃었다.
“폐하. 죽음으로 완성될 자리라는 게 있다면, 그건 이번 대의 라이네 공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는 한 번이라도 왕림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누이, 제발. 왜 이럽니까.”
“내일, 체포해 주십시오.”
약식으로 예를 갖추고, 그의 앞을 떠났다.
다음날, 새벽과도 같은 아침, 쥰에게 앞날을 준비할 것을 이야기했다. 쥰은 그녀를 잡았다. 어째서 그녀가 그에게 전부이고 그의 세상인지, 어째서 그녀가 없으면 그도 없는지, 잡고 호소했다.
“저를 놓지 마세요.”
울어서는 안 된다.
“누님이 계시지 않은 라이네는 제게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저를 이런 식으로 놓지 마세요.”
“그만 해. 응? 그만 해.”
“제발, 제발, 누님, 대신 저를 바친다 해 주십시오. 제발. 제 목숨을. 모든 혐의를 제게 넘겨주세요.”
울어서는 안 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이의 앞에서 울면 안 돼.
“널 진정으로 사랑한다. 넌 내 동생이야. 누가 무어라 해도 내 동생이다. 폐하께서 연좌하지 않겠다 하셨으니, 라이네를 부탁한다. 아니, 아니다. 라이네를 끝내 버려도 좋으니,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 훌륭하게 있어다오. 내가 미안해.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내가 미안해. 모든 게 내 탓이다.”
“무엇을요. 누님이 무엇을. 아무 것도…….”
“전부.”
에본느는 그를 끌어안았다.
“전부, 미안하다.”
결국에는 눈물이 올라왔으나, 쥰에게 보이지 않도록 꾹 참고 가라앉혔다. 어깨도 떨 수 없었다.
약 한 시간 후, 그녀는 반쯤은 알드리히가 보내고 반쯤은 선황의 비가 움직인 것과 다름없는 기사들에게 추포되었다.
준비했던 바이나, 옥에 갇히고 나서는 오히려 현실 같지가 않았다.
에본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고신 당했다. 그러나 마법사임을 토설했다는 것만 인정한 상태에서, 황제를 마법으로 시해하려한 적 없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꺾일 수 없다.
죄를 인정치 않은 상태에서 처형당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누군가가 그녀의 처형을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드리히가 먼저 말을 꺼내면 훗날 무엇이 그에게 걸림돌이 될지 모르니 다른 누군가가.
또한 알드리히가 황실의 두 사람과 데스챔프, 혹은 그가 걸리적거려 하는 다른 사람들을 함께 처리하기 위해서는, 처리할 근거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그 기반을 그녀가 마련해줄 것이다. 그녀가 비참해지고 처참하게 죽을수록 그들을 쳐내기가 쉬워진다.
알드리히는 체포 전에는 그녀에게 이러지 말라 했으나, 고신이 시작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였다.
그럼에도 자주 와서 에본느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날이 처참해지는 그녀에게 일의 진행 상황을 천천히,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포르타 백작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래서 결국 알드리히가 그를 기사단 단장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변호하니, 어찌 저런 사람이 황제를 지키는 기사냐, 어찌 저런 사람이 일국의 백작일 수가 있으며, 다른 가문도 아닌 대귀족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포르타 가문의 가주냐.”
“…….”
“자칫하면 그쪽도 누이와 얽어서 쳐낼 것 같습니다. 그럼 누가 대귀족에 포함되려나.”
“…….”
“설령 필르 발리앙이 이 일을 꾸몄다 해도, 데스챔프 공작이 참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그래.”
“역사 짧은 가문의 공작이니까…….”
“…….”
“라이네나 발리앙도 그렇고, 포르타도 그렇고, 유서 깊은 가문이 버티고 있는 한 데스챔프는 어찌되었든 현상 전복을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어 있었을 수밖에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하는 말은 알드리히도 전부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는 조용히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쥰에 관한 것이었다.
“라이네경이 누이를 보게 해 달라고 그를 지키는 기사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알아요. 그냥, 그렇다고. 누이가 살아야 할 이유도, 기회도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이번 기회에 귀족들을 쳐내야 할 사람이 잘도 말한다. 저 위선. 알드리히가 떠난 후 에본느는 벽에 기대어 짧게 웃었다.
어차피.
설령 이 옥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녀는 죽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사람이 진실로 아리엘이라면, 괜한 짓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적으로 스러져 없어져 주었을 몸인 것을. 죽어가는 과정 중 감각도 함께 죽어 고통에 무뎌진 몸은 다리가 잘려나가는 고통마저도 생각보다 많이 삼켜줄 정도였다.
“…….”
그녀는 온전치 못하게 남은 한 쪽 눈을 감았다.
저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어떤 자만심이나 교만 같은 게 있었기에,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사람의 내면을 좀 더 살필 수 있었다면, 사람을 조금 덜 믿었다면, 보던 것보다 더 먼 미래까지 보고 있었다면. 그녀가 해왔던 것 아무 것도 충분치 않았다는 진실이 실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지켜야 했던 라이네는 명목상의 이름이라도 이어갈 수 있을까. 쥰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이네 영지민들은. 줄을 잘못 선 게 된 라이네의 봉신가문들은.
건국 천 년에 가까운 이 나라, 태조부터 함께 해왔던 라이네.
나의, 라이네.
-약속을 하나 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따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 후계자 수업을 계속 받고, 나를 이어서는 네가 공작이 되어야 하며, 네가 마땅치 않으면 네 아이가 공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약속, 하겠느냐.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라이네를 끝내 버려도 좋으니, 너는 반드시 살아남아 훌륭하게 있어다오.
스러질 라이네.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도 떨어져 나가고, 눈이 없어진 지 오래다. 남은 눈을 뜬 그녀는 알드리히에게 받아둔 독을 또 삼켰다. 그에게 고신 시작 되던 날부터 받아오던 약들은 종류가 각각 달랐으나 독인 것은 전부 같았다. 이것 역시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진통제로도 쓸 수 있는 독이다.
그렇게 추가로 복용하는 독 때문에 죽을 날을 앞당기면서도 아득바득 버텨 갔다. 그러다 정신이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침내 처형 결정이 내려졌다.
마지막 밤에 알드리히는 마음을 고백했다. 그제야 아리엘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자리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 말했다.
“그거 압니까, 누이. 우리 사이가, 조금만 더 멀었어도, 나는 오래 전에 누이한테 마음을 털어놓았을 겁니다.”
“…….”
“누이가 내 일에 관련하여 죄를 지은 게 몇 번입니까. 그런데 거기에 내 마음까지 더하여 누이에게 너무 많은 걸 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도, 자격이 없었지. 나는 황제를 우선해서.”
“…….”
“미안했습니다.”
“…….”
“미안, 합니다.”
에본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하늘 밝은 아래, 처형장에 앉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무능했다. 사람을 지나치게 믿었다. 곧 죽을 사람이었던 것도 죄다. 가문은 망가졌고, 좋은 친구에게 피해를 주었다. 마지막까지 눈을 마주쳐주고 있는 시드니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합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곧 검은 피가 쏟아졌다.
고문 과정에서 터진 피보다 훨씬 양이 많아,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였다. 그 고인 피가 지나치게 검다. 밀랍을 깨고 이미 그녀의 유언장을 읽은 상태였던 알드리히는 그 피를 보고 그제야 그녀가 부탁했던 그녀 사후의 쥰을 이해했다. 진통제라고 끊임없이 복용하던 독들. 이미 독에 당해있었을 지도 모른다.
황제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이제 잠시라도 독살 의혹을 감당해야 하는 쥰은, 에본느가 준비해둔 것들에 의해 그 의혹이 곧 풀릴 것이다. 죽음마저 그에게 이용토록 하고, 또, 스스로 이용한 에본느는 알드리히보다 더 냉혹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방금 죽은 라이네 공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버린 친구는 그랬다.
*
라이네 중앙령 레룩스의 신전, 나무 아래, 에본느 전 라이네 공작의 시신 소산.
이튿날 쥰 E. 라이네 드 레룩스의 시신 소산. 동일한 자리.
============================ 작품 후기 ============================
외전 끝입니다.
이번 외전은 32회와 33회를 참고해주세요! 특히 옥중에서 있던 대화!(+베르덴과의 대화는 후에 좀더 풀릴 거예요:) 그외 풀리지 않은 것도 차차ㅎㅎ)
지난편은 올린 직후부터 30분가량 약간 수정했으니, 수정 전의 그 (처참한)초고를 읽으셨던 분들은 다시 읽어주세요. 죄송합니다.
본래 지난편에서 회의와 시해미수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 시간텀이 있었는데, 고민 끝에 삭제하고 두 사건을 바로 이어 붙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우울한데 독자님들께서 뒷목까지 잡으시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깊은 배려/끌려감)
게다가 마법 관련해서는, 제가 스완외전을 에본느 외전보다 먼저 써서 마법 관련해서 조금이나마 이미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연재를 한 외전이 아니었지...... 정말 죄송합니다.(땅에 머리박기)
쥰은, 음, '누님이 계시지 않으면 저도 없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약속해달라 할 때 멈칫하기도 했었지요. 결국 라이네공작을 이어가달라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고요. 외전의 시작과 끝이 쥰인 이유는 에본느가 생각하는 중요도의 차이도 있고........ 음. 상상은 독자님들께 맡기겠습니다:D 어쨌든 저는 쥰이야말로 가면꽃에서 집착의 끝판왕을 담당한다고 생각합......(끌려감)
다음편부터 챕터7 시작입니다.
이번 외전은 특히 우울한 분위기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서 끝내려고 쉬지 않고 달렸지만, 다시는 이렇게 연참하면서 달리진 못할 거예요.......(아련/하얗게 불태움) 그간 긴 외전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며칠 쉬었다가 돌아오겠습니다.
외전의 전반적인 수정은 조금 쉬고 나서 시작하겠습니다:D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작은 선물 배달 : 스완외전은 천천히 완성해서 가면꽃 완결 후에 올릴까 말까(...?) 했는데, 음, 초고 1회 분량 정도 블로그에 올려두겠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감사합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