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 정렬하여 앉아있는 가주들을 보고, 그녀는 귀 뒤를 긁적였다. 기세등등하다. 어지간해서는 덤터기 쓰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저들이 가지고 있는 건 심증과 자객의 증언.
잘 돌아간다, 진짜.
탄식하면서도, 베르덴과 시드니에게 특별히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알드리히를 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황제는 그렇잖아도 굳어 있던 공기가 완전히 소요를 가라앉힐 때쯤, 입을 열었다.
“라이네공작. 이 회의가 어째서 소집되었는지는 알고 있으리라 믿네.”
“…….”
그에 에본느는 빙긋 웃으며 손을 가슴에 대고 몸을 숙였다가 폈다. 그리고 알드리히와 마주볼 수 있는 곳, 인즉 책상 끝에 앉았다. 반대편 상석이다.
그때부터 라이네가 받아야 했던 모든 의혹, 희미해진 감이 조금도 없는 소문들이 덤덤한 어조로 막힘없이 흘러 나왔다. 에본느는 웃고 있는 알드리히의 음성을 들으며 이를 갈지 않도록 계속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발리앙 저택에 침입한 자객들에게, 발리앙 후작을 살해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
“폐하, 그것은 의혹이 아니라 확정된 죄입니다.”
기요트 변경 백작이 알드리히의 말을 지적했다. 알드리히의 웃음기 어린 시선이 백작을 향했으나, 변경 백작은 표정의 별다른 변화없이 그 시선을 받아냈다. 이어 황제는 에본느를 보았다. 그녀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웃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내렸다. 아, 뭐, 그런가 보다, 하는 뜻이다.
기요트 변경 백작의 목소리는 곧 에본느에게 향했다.
“어찌 해명하실 겁니까?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글쎄, 해명이라 해도……. 전혀 내가 한 짓이 아닌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일상생활 중에는 자주 하지 않는 반응이지만, 다시없을 여유를 보이는 데에는 최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아무 증거 없는 소문에 미혹되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나? 내가 묻고 싶군. 왜 그러나, 도대체.”
혀를 쯔쯔 찼다. 또렷하게 뜬 눈과 매력적으로 올라간 입술에는 웃음이 가득하다못해 흘러넘쳤다.
그러나 차갑게 식은 손끝은 장갑 안에서 아릴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발리앙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드디어 베르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까닥했다.
“그 자객이란 놈들, 정말 저택에 침입했나?”
“……예.”
“사실이고. 그럼 자객들을 신문은 했고?”
“그렇습니다.”
“사실이고. 그럼, 그들이 정말 나를 고발했나?”
했겠지. 그러나 그런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베르덴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덤덤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에본느는 싱글거리는 웃음을 그대로 웃으며 다른 반응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대답이었다. 후에 베르덴에게, 잘 맞춰주었다고 악수라도 건네리.
저 대답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무슨 대답이 나오든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있기에 물었으므로 그녀는 빠져나가고 이 모든 일의 범인의 가닥이 잡혔겠지만,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베르덴이 저를 도왔음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에본느는.
베르덴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부터 가관이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라이네와 발리앙 사이를 이간질하고자 하는 것 같다는 가정을 놓칠 수가 없겠군요.”
자객이 침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새어나갔는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베르덴이 스스로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적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도 한 가문의 가주였다.
에본느는 웃으며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다시 변경 백작을 직시했다.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대귀족 중 유일하게 매일매시 전장에서 살며 이웃국과 괴물을 경계하고 있는 변경백. 킨들 라이네를 품고 있는 라이네 공작도 이 사내 정도로 뼛속 깊은 무골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인이라고 항상 기골 장대한 게 아니며 항상 호탕한 것도 아니듯, 이 변경백은 어쩌면 오드리나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대귀족들보다도 세련된 사람이다. 중년의 변경 백작은 자객에게 피해를 입은 베르덴에 의해 부정당했어도 그리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이곳에서 모든 말은, 의도와 내포한 뜻에 따라 다듬어서 해야 한다. 여유도 비난도 기정사실화하여 말하는 것도 추정하는 것도 모두 의도가 있었다. 그녀는 그가 라이네를 몰고 가기 위하여 말문을 열었던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고맙군. 그다지 라이네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라이네를 도와주고 있으니 잘 된 일이다.
에본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씩 웃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동생이 부상을 당했으니 실로 자객들이 나를 고발했다면 발리앙 후작이야말로 이 자리에서 나를 비난할 사람이지. 그런데 내가 아니라고 하네.”
“그러나 공께는 동기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페레즈 백작이다. 그녀는 무슨 동기를 말하는지 알면서도 되물었다.
“동기?”
“당신을 살인자로 몰고, 전 라이네 공작의 명예를 실추시킨 소문이 발리앙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실 것입니다.”
“알지. 그래서 그대 말은, 내가 그 소문을 믿었다고?”
“…….”
“부탁인데 나를 조금은 더 머리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주지 않겠나. 믿지 않네. 아까도 말했지만 의도 불순한 소문에 미혹된 건 내가 아니라 그대들 같은데.”
“글쎄요. 믿으셨을 지도 모르지요.”
“이런, 그대. 귀가 먹었나.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소공녀일 시절 사교계에서 그랬듯, 공작이 된 이후에도 그랬듯, 그녀는 짓궂게 싱글거리며 툭 말을 던졌다. 말 함부로 하는 멍청이로 여겨주면 좋고, 그래서 이참에 바비에르가에 대한 의심은 다 풀어주면 더 좋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겠지.
최악일 경우에는 일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을지 예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건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하는 일이다. 순수하게 행복할 수가 없고, 긍정적일 수가 없다.
마음 상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입술로만 빙그레 웃는 페레즈 백작은, 아무래도 더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려는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받아쳐 가다보면 언젠가는 이 자리가 끝나리라.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먼 곳 풍광을 보는 눈으로 긴 회의 책상, 특히 알드리히와 가까운 곳을 내다보았다.
잠시 자야할 것 같은데.
‘언젠가는’이란 단어 하나에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갑작스럽게 현실감이 없어졌다. 음, 여기는 꿈인가.
“그제 공이 미로골목을 출입하였다는 것을 보았다는 믿을만한 증인이 있소.”
“…….”
“이보오, 공.”
아, 아닌가.
눈을 들었다. 눈 뜨고 들었던 잠에서 깨었다. 눈을 멀뚱하게 끔뻑거리며 데스챔프 공작을 보던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그제? 언제 말이오?”
“8월 21일. 해진 후에.”
그녀는 빠르게 반응했다. 눈을 찌푸리고 상당히 불쾌해하며 대꾸했다.
“그때 나는 신전에 있다가 귀가했소. 누구요? 그 믿을 만한 증인이라는 건.”
“나외다.”
“거 참 믿음직스럽지 않은 증인이군 그래.”
딱 잘라 말했다. 세상에 이런 진실은 더 없다는 것처럼 단호하니, 듣고 있던 알드리히가 픽 웃었다.
저 증언에 데스챔프 공작이 힘을 실으려 할 경우, 이곳에 있는 가주들 대부분이 데스챔프 공작을 제지할 것이다.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가문이 힘을 잃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제 가문이 아닌 또 다른 가문에 힘이 실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기요트 변경 백작이 조금 전 라이네를 도운 이유도 그 일환이었다.
시드니나 베르덴이 그녀의 행적을 증명하고자 나서는 일이 없도록 두 사람을 향해서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 에본느는 데스챔프 공작에게 물었다.
“그리고 미로골목을 가서 뭐하오? 내가.”
“사람을 만나는 거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그러니까 공도 내가 그 소문을 믿고 움직였다고 믿나 보군. 발리앙후가 자객들이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음에도.”
“그는 공의 오랜 친구지.”
그 말에 에본느는 약간 멋쩍어하는 웃음을 웃으며 검지로 목을 두드렸다. 소문대로 자객을 움직였다면 발리앙이 아니라 저것을. 죽여도 되나.
“그래서, 나를 감싸기 위해, 가족이 다쳤는데도 거짓증언을 했다?”
“…….”
“이야아, 그게 말이 되오? 도대체 발리앙후를 어떻게 보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사람도 가주이외다. 후작에게 사과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지금 하시겠소? 내 공을 배려하여 잠시 입을 다물어 드리지.”
심각한 표정은 그 말을 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없었다.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조롱이 무어, 별 건가. 희롱이 무어 별 건가. 데스챔프 공작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는 말 몇 마디로도 잡을 수 있는 잠시의 승기다. 데스챔프 공작과 페레즈 백작을 제외한 나머지 가주들이 눈을 돌리고 조용히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몰려간 감이 있으나, 그래도 데스챔프 공작은 베르덴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이는 그가 잘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에본느는 데스챔프 공작이 그 이후 식은 눈으로 저를 보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격하는 입장이 아닌 이상 말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저쪽은 아직도 화살이 남아서.
“나는 공이 미로골목을 떠나는 것을 보고, 그곳에 직접 들어갔소.”
“하여?”
“물었소.”
물었다고? 어찌? 사람이 없을 텐데? 에본느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다 꺼졌다.
“하여.”
“그러니 공께서 거기 자주 들르시는 단골 고객이라더군.”
“……그리고 그걸 또 하필이면 공이 들으셨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증인으로 소환할 수 있소.”
에본느는 손을 올려 입가를 슬슬 쓸었다. 허탈해하는 표정 같은 것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미로골목에 가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러니 목격 증언은 거짓이라손 쳐도, 만일 증인으로 소환할 수도 있다고 공작이 장담하고 있는 자들이 라이네 공작을 모함할 수도 있음은 알고 있었다. 저 공작이 그들을 고용하여 말을 꾸몄든,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함했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함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유추가 가능하다.
미로골목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탓인데. 그럼 그들이 어째서 앙심을 품고 있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온다면, 그녀는 아무 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
그때야말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귀족이라 해도 멋대로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선친의 급사에 인간이 관여했다는 건, 그가 괴물의 독에 당하기 전에 이미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 오드리나에서 그런 독을 취급하는 죄인들의 거리는 한 곳뿐이었다. 에본느는 그 죄인들 수 명을 족친 끝에 미로골목에 찾아온 누군가가 킨들 라이네의 괴물에게 독을 넘기도록 의뢰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의뢰를 받아들인 미로골목에서는 킨들 라이네를 잘 아는 라이네 영지민에게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에본느는 미로골목을 마침내 조용히 쓸어버렸다.
쥰의 모친이 독을 공급받고 자객을 보내도록 할 때부터 벼르고 있던 이들. 이제 그녀의 명령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골목에 없었기에 살아남거나, 기어이 도망쳐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고, 그녀는 그들을 굳이 찾아 헤매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어차피 그 자들이 그녀를 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극도로 적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찾지는 못했으리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 후회할 이유가 없다.
후회할, 여유 역시 없다.
“말씀해 보시오. 증언을 들어보시겠소?”
“그런 죄인들의 말씀을 믿으시는 분일 줄은 몰랐군. 나는 데스챔프공이 나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내셨다는 증언을 해줄 사람들을 데리고 올 수 있소.”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이쪽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알아들었을 데스챔프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이보시오.”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지. 공 같으면 시선이 이렇게 좋지 않은데 자객들을 보내겠소? 공 말씀대로라면 놈들이 날 고발했다면서. 그렇게 입 가볍고 실력도 형편없는 놈들을 보내느니 차라리 내 기사들을 보냈겠지. 이러나저러나 잡히면 내게 화살이 올 텐데 성공률이라도 높여야지 않겠는가?”
“해서, 기사들을 보냈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같은 급인 공작이다. 그와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입을 다문 채로 설전을 듣고만 있었다. 에본느는 픽 웃었다.
“돌겠군. 안 보냈소이다. 그리고 한 번 말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본 에본느는 오른 손으로 책상을 탁 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어찌 자객을 보낸단 말이오.”
“…….”
“……음?”
사전에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 튀어 나오자 베르덴조차 움찔했다. 여태 웃고 있던 알드리히의 고개가 약간 기울었다.
“……사랑하는 사람? 누구 말입니까?”
디알로 후작이 어색하게 물었다.
“당연히 필르 발리앙이지!”
푸우웁! 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서넛 중 한 사람이 물을 뿜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멀쩡한 건 아니라서 격한 기침이 시작되었다.
멍하게 멈춰버린 노인 후작을 대신하여 베르덴이 더듬더듬 물었다.
“정말입니까?”
“아니, 농 좀 해 봤소. 뭐가 그리 심각하나 해서. 미안하네, 발리앙후.”
“괜찮, 괜찮습니다.”
전 같았으면 목을 조르고 털었을 것 같은 표정인데.
그러나 에본느는 모르는 척 싱글벙글 웃으며 자세를 조금 더 바로 했다. 이 정도로 아리엘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전해졌을 테고, 분위기도 가벼워졌다. 그 과정에서 아리엘의 이름이 팔리는 것은 그녀가 크게 마음 쓸 바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서 이 자리가 파하기를 바란다. 어떤 결론이든, 아니, 아니군. 좋은 결론이어야 하리.
데스챔프 공작이 일갈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거요?”
“몰라? 내가?”
세상에 저런 미련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두 어깨를 펴고 팔걸이 바깥으로 비스듬히 걸치고 있던 팔의 끝,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가 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소만, 필르 발리앙, 발리앙 영식과 나는 친구이외다. 확실치도 않은 무엇 때문에 나이 어릴 때부터 교류하던 친구를 죽이려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발리앙후와의 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친구사이보다는 훨씬 낫지. 나는 지금 어떤 분이 라이네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소.”
거기까지 말한 에본느는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데스챔프공. 발리앙을 이용하고 계시오?”
베르덴이 이 자리에 있었다. 발리앙은 유력한 대귀족. 유서 깊은 것만 따진다면 데스챔프 가문보다 더 깊다.
이것은 그녀가 평소에 보인 모습 덕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웃으면 된다. 그러나 두 가문을 모욕하는 이 질문은, 다른 대귀족들이 모인 이런 자리에서는 다시는 던지지 못하리라. 사람 눈이 있는 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경고였다.
이 회의의 끝.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였던 황제는, 알드리히는, 그녀의 근신을 일단 명령했다. 죄를 인정치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소문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품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게 그녀의 잘못이었다. 최종적, 실질적으로는 쓸모없는 처분이었으나, 라이네 공작으로서 부끄러워하고 기분 상해할 만한 처분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알드리히는 회의가 끝나고 그녀를 불러세웠다.
데스챔프 공작의 시선은 좋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친분은 잘 알려져 있다. 직접 발언하여 그녀를 도와준 가주들과 각각 악수를 하고, 마지막으로 베르덴과 악수를 한 뒤에야 황제와 라이네 공작만이 남을 수 있었다.
“잠시 걷겠습니까? 누이.”
에본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드리히는 산책을 하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에본느 또한 그랬으나, 알드리히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한다는 건 쉬이 알 수 있는 일이라 용건을 따로 묻지는 않았다.
이십여 분간의 침묵 속의 산책이 끝났다.
예를 올리고 헤어졌다. 그리고 한 삼십 걸음 정도 걸었을까. 모든 긴장이 풀린 탓인지 울컥 욕지기가 솟아서, 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각하……?”
그런데 갑자기 그런. 외침. 안 된다 하는 그런 외침.
“아, 안 돼요, 각하!”
앞에 서 있는 아리엘이 외쳤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눈을 찌푸렸는데.
눈앞에 보라색의 작은 진이 떴다.
진을 그리지 않고도 마법을 쓸 수 있어 간만에 보는 진이지만, 구별할 줄은 안다. 이는 독물의 진이다.
“폐하!”
그 다급한 외침을 들은 에본느는 지금껏 함께 있던 알드리히쪽을 돌아보았다. 알드리히의 눈이 커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에본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이게 지금.
……무슨?
아니, 아니, 아리엘이 어째서 황궁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허공에서 쏟아져 내린 작은 독물덩어리를 쳐내거나 갈라내고 알드리히를 지킨 기사들과, 알드리히를 한데 모아 보다가, 다시 아리엘을 돌아보고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아리엘의 등 뒤에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사람을 보니 무언가가 이해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에본느는 무얼 짐작하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
아하.
그녀가 웃자 베르덴이 그녀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나타내는 동요는 그것뿐이었다. 겨우, 그것.
알겠다.
네가 숨긴 것이 발리앙인가.
그녀의 눈이 다시 아리엘에게 내려갔다. 그렇다면 아리엘은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을 알았을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회의가 있고, 라이네 공작은 어떤 처분이든 받을 것이며, 아리엘은 라이네 공작이 마법을 쓴 것을 보았, 겠구나. 베르덴은 아리엘을 다시는 그녀와 만나게 하려 하지 않았겠지. 베르덴이 아는 자리에서 아리엘을 만난 적이 오래 되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중에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르덴은 덜덜 떨고 있는 아리엘을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에본느의 옆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가주다.
에본느를 추포하려하는 기사들을 막아선 사람은 알드리히였다. 그는 어의에게 몸을 보이려 떠나지도 않았고, 그녀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물었다.
“누이.”
“예, 폐하.”
“마법사였어요?”
차분한 질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마법사가 아니라 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리 없었다. 그리고 기사 몇은 이미 그녀가 마법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그녀가 아무리 발뺌해도 그저 지나칠 수 없다. 알드리히가 그녀를 믿고 넘어가주려 하고자 해도 목격자가 많아서.
그녀가 미로골목의 죄인을 족친 것처럼, 그녀의 기사들은 신문당할 것이다.
알지만. 라이네 공작은 지킬 것이 있다. 에본느는 베르덴이 아리엘을 선택한 후부터 웃지 못하고 있었으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일단 저택에 돌아가 근신해요. 따로 명하기 전까지는 저택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폐하! 폐하를 해하려 한 사람입니다!”
“해하긴 무슨. 그런 것은 어린 아이도 피할 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마법사가 아니라잖아.”
“손을 움직였습니다! 진을 그린 게 틀림없습니다!”
“뒤에서 그게 보이던가? 아, 경이 라이네 공작을 저택에 모시고 가게.”
당장 옥에 가두어야 한다는 말들을 건성으로 넘긴 알드리히는, 아무 기사나 하나 집어서 그녀를 맡겼다.
그러나 그날로 라이네 저택은 황제의 기사들에 의해 봉쇄, 라이네 공작은 공식적으로 감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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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이 외전 마지막입니다.
퀄리티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