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76화 (76/157)

00076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신전을 찾은 그녀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어떤 대응을 할 건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중앙 기도실에 놓인 모든 의자들을 지나쳐 맨 앞에 서서 앞을 보았다. 수십 분을 그리 서 있는데도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넋이 이곳에 없는 것처럼 머릿속은 거멓게 물들어 그녀를 삼켰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낮은 단상의 위, 높은 벽에 달린 이레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에본느의 눈동자에서 빛이 이지러졌다. 일순의 일이었다. 고개는 산이 무너지듯, 꽃줄기 꺾이듯 툭 떨어졌다.

가뿐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서 있어도 아주 조금 주춤하는 선에서 멈추었던 몸이, 눈을 감자마자 흔들렸다. 그리고 그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눈을 떴다.

“……경.”

그녀는 등 뒤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시드니였다.

그는 에본느가 몸을 제대로 가누고 서고 나서야 두 팔에서 손을 뗐다. 에본느는 당황했다기보다는 멍할 따름인 시선을 주며, 버릇처럼 웃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 왔냐고 물으면, 시드니는 무언가를 눈치 챌 지도 몰랐다. 일상적으로 지나갈 수 있는 질문인데도 에본느는 지레 염려하며 입을 다물었다.

숨기고 있어 거리끼는 바가 있는 탓이니, 이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 하는 것이다.

시드니는 나직하게 물었다.

“어디 미령하신 곳이 있습니까.”

같은 것을 물어도 알드리히 때와는 무언가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우습지만, 머리가 아프다. 무심코 손을 올려 관자놀이와 이마를 손끝으로 눌렀다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아니요. 졸았습니다. 경은 어쩐 일로? 기도하러?”

그녀가 알기로 시드니는 신전에 일부러 들러 기도할 정도로 독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조용히 들숨과 날숨을 쉰 뒤에 대답했다.

“라이네 저택에 들렀더니 산책을 가셨다기에.”

“……산책에서 신전을 떠올렸다고요?”

“마음,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습니다.”

에본느는 픽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나.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일상적이고 특별하게 중요치 않은 것들은 대화의 소재로 즐겨 썼으니까. 마음 정리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 다시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장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다시금 탁 풀렸다. 웃음기가 흩어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야 훨씬 의식이 있었다.

“…….”

치료를 받으며 기도를 한 적이 많지만, 아무래도 몸이 아프고 힘겹다 보니 전보다 더 신을 찾게 되더라.

신의 가까이에 가면 갈수록 실로 먹먹했다.

서른 되기 전이라더니, 오늘을 살고 있는 그녀는 스물일곱의 중반이다. 죽기 전에 다,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흠결은 남을지언정 쥰이 크게 움직일 일 없을 정도로 정리된 라이네를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현 라이네 공작의 의무다.

그리고 그런 망연한 생각에 누워 흘러가고 있는 그녀를 그가 깨웠다.

“각하.”

“……예.”

“실례지만, 얼굴에 닿아도 되겠습니까?”

잠긴 목소리로 늦게 대답하자, 낮지만 또렷한 질문이 돌아왔다. 예의바르기도 하지. 베르덴도 어느 정도를 넘어서서는 허락을 받지만, 그 외의 소소한 만짐과 닿음은 내키는 대로 한다. 시드니 역시 그 정도는 용납할 수 있는 사이인데도 그는 항상 말부터 꺼내고 나서 닿곤 하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느새 장갑을 벗은 차가운 손이 그녀의 이마에 지체 없이 올라왔다.

“…….”

그런 작은 힘마저 버티지 못한 몸이 뒤로 밀리자, 그는 왼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와 목을 받치고 조금 더 이마에 머물렀다. 그의 손이 조금씩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에본느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가운데 느껴지는 온기가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주었다.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숙여 그의 손에 기대었다. 시드니는 조용히 버텨주었다. 더는 열을 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십 초의 휴식의 끄트머리, 지탱하느라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자 에본느의 두 손이 올라가, 이마를 짚은 시드니의 손을 감싸고, 쥐고, 내렸다. 그의 두 손은 흘러내리는 것처럼 떠났다. 에본느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미약하게 남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푹 쉬며 웃었다.

옆에서 그 웃음을 보던 시드니가 가만히 물었다.

“미령하십니까.”

“예.”

이번에는 순순히, 거짓을 섞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높은 벽, 문장 위였다.

“내가 염려됩니까?”

“……어찌 답해야 하겠습니까.”

무뚝뚝하다 하면 무뚝뚝하다 할 수 있는 음성과 반문이다. 어쩌면 차갑다. 그럼에도 다정하고 상냥하여 위로가 됨이, 참, 좋았다. 에본느는 웃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깨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몸이. 점점 힘들어졌다.

“진심을 말하면 되겠지요.”

“염려 됩니다.”

“그렇게 상태가 나빠 보입니까?”

생기 있게 보이고저 하는 화장은 매일 빠트리지 않는다. 하여 당연히 그녀는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의 상태를 물었다.

시드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본느는 힐끔 그를 보고 손을 들어 턱을 쓸었다.

하긴, 그렇군. 차라리 따로따로 오랜 기간을 두고 일어났다면, 약간 곤란해졌다는 웃음을 짓고 넘어갈 수 있었던 일들이다. 헌데 전부터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오니, 잠재된 영향력이 지독하게 커졌다. 상태가 나빠 보일 수밖에. 실제로도 어처구니없는 상태가 맞다.

“…….”

답답하다.

허탈한 한숨을 흘리고,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 성대에서 한 번씩 덜커덕 걸렸다가 나오는 싱거운 웃음의 끝은, 이 자리를 이만 마치기 위한 기도였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 대책을 세울 때가 되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눈 감은 앞의 어둠마저 아찔해질 정도로 긴 기도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에본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공중에 떠 있는 검 한 자루와, 그녀의 상태를 보러 정기적으로 상경했다가 내려가는 레룩스 신전의 신관이었다.

그날 밤에 기별 없이 베르덴이 찾아왔다.

잠들지 못하고, 영지에서 올라온 서류를 살피고 있던 에본느는 응접실이 아닌 집무실로 그를 들이도록 했다.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되도록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베르덴은 그녀를 보자마자 불쑥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째서 발리앙에 자객을 보냈느냐는 분노도 아니고, 정말 당신이 그리했느냐는 의심도 아니었다. 일단 그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겠다. 에본느는 서명을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르제르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내가 뭘요. 자객이 여기에 든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를 알면서도 먼저 가서 앉자, 베르덴도 맞은편 베르제르에 다가와 앉았다.

에본느는 심란해 보이는 그를 위하여 먼저 안부를 물었다.

“아리엘이야말로 괜찮습니까? 당신은 어디 다친 곳 없고?”

“저희는 괜찮습니다.”

“르네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기껏 물어주었더니, 그의 가족에게서 그녀를 배제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손등에서 이어지는 손가락 첫째마디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를 관찰했다.

저 심란함이 연극의 일종이라면 그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진심이라면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도통 입을 열지 못하는 베르덴을 보는 그녀의 눈에 싸늘하게 식은 경계가 섰다. 그러나 웃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묻는 목소리도 쾌활하고 부드러웠다.

“그 일을 저지른 게 나 같습니까?”

“……아닙니다.”

“어라, 정말?”

“각하를 의심한 적 없습니다.”

“그럼 범인이 누구인지는 짐작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각하께서 하시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과연.

문득 그런 감상이 들었다. 과연 그는 그녀를 믿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너를 믿고 있나, 베르덴.

친구랍시고 마냥 믿기에는 라이네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안이 중대하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너와 관련된 누군가가 이 일과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엄청난 무례다. 이런 시기에 베르덴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좋을 것은 없었다.

……점점 조각조각 부서져 나가는 두 사람 사이의 신뢰를 느낀다.

쓴웃음을 삼키고 물었다.

“허면 여긴 어인 일로.”

“……염려 마시라고.”

“염려?”

“어떻게든 밝혀낼 테니. 이번 일이 라이네와 관련이 없음을 어떻게든 밝혀 낼 테니, 제가 어떻게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믿는다, 너를 믿는다, 속으로 속삭이며 끌어낸 표정을 짓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너를 믿지 않으나, 너는 내가 너를 믿고 있다고 여기고 움직이라. 그 써늘한 말을 목 뿌리까지 일부러 올렸다가 가라앉혔다.

대답은 당연히 신뢰를 가득 담은 퍼담은 것처럼 들려야 하는 웃음기 어린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발리앙도 함정에 빠져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생각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나, 라이네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발리앙을 끌어내려야 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베르덴도 마찬가지일 터.

집무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입 꼬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묶었던 머리를 풀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었다. 뒤통수와 등받이 사이에 걸리지 않은 포도주색 머리칼들은 사락사락 내려와 흐트러졌다. 머리끈을 쥐고 있던 손이 팔걸이 끝에서 힘을 잃었다. 머리끈이 떨어져 내렸다.

에본느는 조용히 숨 쉬었다.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명정함을 잃고 흐려졌다. 눈꺼풀이 조금 내려가 시야가 좁아졌으나, 그녀는 그대로 피로에 잠겼다. 어째서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베르덴, 오래 전에 한 우리의 대화와 나의 약속을 기억하나.

-적어도 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드리지.

그때, 우리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천진했었다.

-나는 내 사정과 내 입장이 허락하는 한, 너희를 믿고 지킬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같은 날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멀었었다. 아니, 아예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었다.

“…….”

잠간 더 앞을 보던 에본느는 코웃음을 웃고 눈을 깊이 감았다.

그리고 수 분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발리앙 저택에서 라이네의 사람이 발견되었다가는 일이 커질 거라 생각하여, 그 저택에 심을 발리앙 영지민을 사 놓은 참이다. 발리앙을 살필 방법은 그뿐이다. 고용되길 바라는 수밖에.

그녀는 그 밤에, 다시 라이네 영지의 업무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틀 후. 라이네 공작은 간만에 모인 대귀족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 작품 후기 ============================

업무로 돌아갔다, 에서 끊을까 하다가, 다음편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나온다고 미리 한 줄......(=´▽`=)

그래도 쓰다보니 외전의 마지막에 조금씩조금씩 가까워지고는 있습니다.

'다음편이 외전의 마지막입니다'라든지, '이번편이 외전의 마지막입니다'라든지 후기에 꼭 쓸게요.

감사합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전개 위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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