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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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본느는 의자에 앉아 바깥, 먼 곳을 보다 문득 망연한 숨을 쉬었다.
“…….”
잠시의 쉬는 시간이지만 정신은 쉬지 못했다.
아득하게 초점이 번진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이거야 원. 역대 라이네 공작 중에서 이 정도로 라이네를 더럽힌 사람은 없다. 착잡할 밖에. 돌아가신 전 라이네 공작께도 얼마나 죄송한지.
쥰과 그의 모친에 대한 것을 퍼뜨린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 나오기 전의 쥰을 알고 있던 자들은 대부분 죽었다. 쥰을 모셨던 시종은 휴가 중에 칼을 맞았고, 하녀는 동료 하녀들 간의 불화로 자살, 잔심부름을 하던 하인은 술집의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 남은 사람은 현 집사와 기사 몇과…….
에본느 자신부터가 무인이기 때문에, 라이네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기사들의 충직함은 잘 알고 있다. 뿌리 되는 저희 가문보다는 라이네 자체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바깥을 보고 있는 눈의 초점이 또렷해졌다가 풀렸다. 턱을 괴고 흐음, 소리 내며 콧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집안사람들만 족칠 수는 없는 게,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쥰의 모친이 바깥의 사람에게 비밀을 맡겨둔 모양이라서.
쥰의 모친이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의 행적을 쫓고는 있지만 한계가 있었다.
웬만해서는 라이네의 둘째 영식과 연결될 수 없었을 정도로 한미한 가문 출신. 그럼에도 황실연회나 무도회에 수차례 참석할 수 있도록 해준 뒷배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나, 지금은 존재치 않으니 쓸모없는 정보다. 그렇다고 출신 가문과 접촉하자니, 쥰의 모친과는 오래도록 연락이 끊겨 있었기에 쥰이 모친이 라이네에 들어오고 나서도 아무런 덕도 보지 못했을 정도인 데다, 온 시선이 라이네에 쏠린 지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전이 없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본느는 마침 입실 허락을 묻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그리하여 입실한,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기사는 그녀에게 예를 갖춘 뒤 보고했다.
“입을 열었습니다.”
“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에본느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기울여 손에 턱을 괴었다.
쥰의 모친을 모시도록 배정되었던 시녀. 가능성은 있다 여겼지만, 정말 알고 있었나. 결국 쥰의 모친은 계약을 어겼다. 비밀을 맡겨둔 사람의 입은 열려서는 아니 되며, 앞으로 추가로 알게 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조항은 괜히 들어간 것이 아니었을 텐데.
“해서.”
“다른 이에게 말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믿나.”
“……모르겠습니다.”
가엘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에본느는 짧게 웃었다.
명예로운 라이네의 기사들에게 여인의 신문을 맡긴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피를 흘리고 말았으니 어쩌면, 저 마음, 많이 약해져 있으리.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알아본 바로, 그 시녀는 라이네 봉신인 자작의 사촌누이이지만, 로드리게즈 백작의 조카딸과 친구인 사이이기도 했다. 로드리게즈 백작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 늙은 백작은 라이네의 봉신이기도 하면서 데스챔프 공작에게도 봉납하는 자였다.
시녀의 출신가문은 문제가 없으나 그 주변 지인이 문제라……. 그 부분만 보면 불쌍한 아가씨다.
한 번 신문을 시작하였으니, 살아서는 바깥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고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가씨가 라이네 봉신가문의 방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후에 혹여나 쓸모가 있을까 하여 여태 신문을 미뤄두었던 건데, 상황이 점점 수상해지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에본느는 몸소 지하 감옥에 내려갔다.
곱게 커온 여인이라, 약간의 고통으로도 토설하였는지 모습이 생각보다 엉망은 아니더라. 에본느는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는 시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녀린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아프지.”
“흐, 흐으.”
서럽게도 운다. 에본느의 입에서 옅은 짜증이 웃음의 형태를 갖추고 흘러나왔다. 그녀는 시녀의 손을 한 번 다정하게 쓸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지 않아. 장차 가주 될 사람을 죽이도록 미로골목까지 가는 것은, 주인을 잘못 모신 죄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울고 있던 시녀의 상체가 흔들렸다. 지켜보고 있던 세 기사의 호흡 역시 흔들리는 게 들렸다.
이런.
에본느는 한숨을 쉬고 상냥하게 미소했다.
“명령을 따를 게 아니라, 부인께서 이리이리 명령을 하셨다고 공작각하께 보고를 했어야지. 그렇지 않나?”
“끕…….”
“이걸 무어라 말해야 할까. 나는 오래 전부터, 그렇군, 십 년 넘게 너를 두고 보았지만, 왜 이리 끝까지 쓸모없게 구나.”
“…….”
“응? 내가 네 사촌오라비를 무너트리는 건 일도 아닌 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
오른 손을 올려 시녀의 눈가를 엄지로 가만히 닦아주었다.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여자의 얼굴이 딸꾹, 딸꾹, 여러 번 튕겼다.
그 모습을 잠시 보며 살짝 웃은 그녀는 다시금 물었다.
“말해 보아라. 말을, 전한 사람이 있나.”
“……어, 업, 없으, 없습니, 다, 읍.”
“살려줄까?”
장갑 끝에 눈물기 묻은 손은 그대로, 시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걸어주었다. 다정한 질문과 다정한 손길에 여자는 직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에본느는 안타까워하는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울면 내 마음이 아프다. 울지 말고. 천천히, 대답하면 돼. 그렇지. 심호흡하고. 예쁘다.”
그리하여, 말한 적이 있다 하는 것과 절절한 사죄와 그 외의 소소한 것들을 정신없이 털어놓는 것을 침착하게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독여가며.
모든 게 끝난 삼십 분 후, 에본느는 피 묻은 검을 가엘에게 돌려주었다.
혹시라도 후에 증언해야 할 상황이 온다 해도, 이 여자는 결국에는 라이네의 봉신 가문의 사람이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증언. 쓸모가 없었다. 시신을 거짓말처럼 없앤 라이네 공작은 기사들을 덤덤히 치하했다.
“수고했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봄, 바비에르가의 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크게 유력하다고는 못하겠으나 그래도 황궁의 행사에는 가끔이라도 참석 가능하던 한 가문이 사교계에서 재기 불가할 정도로 무너졌고, 결국에는 살아남은 직계가 없이 멸문. 바비에르가의 사람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드리나에 있는 저택과 영지의 영주성을 스스로 불태웠다는 것.
설명은 이리 간단한데 불타고 무너져내린 흔적을 눈으로 보면 끔찍하다.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꾸민 에본느의 성정이 얼마나 악한가, 얼마나 냉혹한가, 얼마나 교활한가, 말이 떠도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말이 떠돌면 아니 되었다. 철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바비에르가의 일인데다 아무런 물증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에본느와 바비에르를 단단히 엮었다.
그렇지, 물증이 없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악화된 시선과, 이것을 기회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누군가들, 조금 더 지켜보다 기회로 삼을 누군가들.
그래도 알드리히는 자신이 나서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에본느는 잠시 황제를 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바비에르의 멸문은 그녀 혼자 한 일이 아닐 뿐더러 알드리히와 사전에 의론이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도 제 앞에서는 인정이라도 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누이가 내막을 다른 자들에게 말하면 그때는 발뺌하고 누이를 몰아가겠지만요.”
“압니다.”
그걸 설마 모르겠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눈을 돌렸다. 알드리히는 어디까지나 수면 아래의 미친놈이다. 그걸 알아서 다들 조용히 경계하고 있을 뿐, 아무도 그의 미친 행적에 대해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에본느는 화장이 불가피했던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쓸었다. 수 년 전에 사라진 불면증이 다시 와서, 하루 두세 시간의 옅은 잠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밤에는 자지 못하고 일상 중에 수십 분씩 쪼개가며 잠에 들었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그렇잖아도 악화하는 몸에 잠마저 턱없이 부족하니 걷다가도 종종 아찔한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오늘은 이만 알현을 짧게 마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드리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누이.”
“예, 폐하.”
“미안합니다.”
재차 다가온 사과다.
알드리히는 미안해하고 있지 않을 터. 알드리히는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때에 투입하여 그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유능하고 철저한 황자였고, 황태자였고, 황제다. 이런 일이 있을 시에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도 계산했으리.
두 사람이 친구이기에 받아들여줄 수 있는 선은 넘었다. 이는 황제와 신하간의 일, 권력의 유지에 관한 일이었고, 따라서 에본느는 타인 대하듯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수 주 후, 에본느 스물일곱의 여름, 일 년 넘게 에본느를 괴롭힌 모든 소문의 발원지가 발리앙 가문이라는 말이 고개를 들었다.
“…….”
발리앙. 베르덴이?
아니, 설마.
에본느는 찾아온 베르덴을 맞이하며 반갑게 웃었다. 몇 주 만에 얼굴을 보는 그는 얼굴이 조금 상해있었다. 안색이, 얼굴빛이 나쁘다. 그녀는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안색이 어째 좋지 않습니다. 어디 아픕니까?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염려에 베르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떤 감정이 복받친 것처럼 보였다. 에본느의 눈이 약간 커지고 말았다. 모양 좋게 깎인 입술은 꼭 다물려 있으면서도 여러 번 움찔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각하.”
목멘 그 음성에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그렇지. 아무리 평소 같은 척 해도, 상황이, 허락하지 않지. 파르르 떨리는 눈까풀을 들었다. 그리고 애써 피식 웃었다.
“왜요.”
“…….”
“당신이 했다고 고백하려 왔습니까?”
그의 아래턱이 떨렸다. 가문을 변호하고 지키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고, 보일 사람도 아니었다. 정말 어디 몸이 좋지 않은가.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답을 기다렸다.
베르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발리앙이 하지 않았습니다.”
안다.
에본느는 씩 웃고, 그 주장에 상냥하게 화답했다.
“압니다. 당신이 하지 않은 걸.”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도 덧붙였다. 예의상의 위로다. 갑작스럽게 덤터기를 쓰게 되었으니 염려가 될 수밖에. 그러나 그렇다고 라이네의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라서, ‘친구끼리 사이좋게 헤쳐 나가자’고 농담도 건넸다.
베르덴은 다시 솟구친 무언가를 삼키는 듯 느리게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옅은 웃음 속에서 헤어졌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에본느는 내내 올라가 있던 입 꼬리를 떨어뜨렸다.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써늘해졌다.
실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창가로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관 현관을 나선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에본느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무정한 코웃음을 웃었다.
베르덴. 당신이 하지 않은 건 안다. 그러나 우정을 기반으로 한 그 믿음과 신뢰에 발리앙 전부를 포함시키려 하지 마라.
라이네를 우선해야 할 상황이지, 친구를 우선할 상황은 아니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라이네에 이어 발리앙인가. 베르덴의 기묘한 반응을 떠올린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발리앙. 발리앙이라…….
============================ 작품 후기 ============================
에브 사망 후의 일은 이번 외전에는 음, 간단하게 몇 문장만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전편을 몇 시간 전에 올리고, 이번편은 지금까지 타다다다다다다닥 쓴 거라서 따땃한 초고입니다ㅠㅠ 이제 다음편 쓰러 갈게요!
감사합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