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당황스러운 급사였다.
에본느의 부친은 토벌 작전단을 격려할 겸 하여 몸소 한두 전투에 참여해 왔었다. 이번에도 그리하러 가는 중, 산맥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첫째 산의 입구 부근에서 괴물들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였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정신을 붙잡고 라이네령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렀다. 킨들 라이네 토벌작전단으로 이미 라이네령에 와 있던 쥰과 함께 에본느는 소산식에 자리했다. 쥰은 소산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소산식 보기를 약간 꺼려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지막까지 자리하고 기도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의 일이 문제였다.
공작의 자리는 일 초라도 빌 수 없다. 오드리나의 모든 귀족들이 아마 그녀를 공작으로 여기고 있을 터. 라이네 중앙령에 내려와 만난 모든 가신들도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후계자로 아무도 공표되어 있지 않았기에 에본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신관과 의사 둘 중 누구도 ‘이제는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수 해 안에 죽을 것이다. 가문의 주인이 자주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욕심이.
장차 공작될 사람으로 태어나 공작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공작이 되기 위해 자라온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과 겹친 욕심이.
“……어이가 없네, 진짜.”
에본느는 스스로 비웃었다. 또, 허탈하게도 웃었다.
그녀도 결국에는 인간이고, 한 가문의 장녀다. 자존심이 있었고 자존감이 있었다. 권력욕도 있었다.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여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억울했다. 그러나 공작이 되기 위해 자라오며 받은 교육에는, 라이네 자체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라이네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하는 그런.
그 마음은 이미 그녀에게 있어 당연한 가치관이 되어 있다. 에본느는 제 자신보다는 라이네를 위해야 했다. 그렇기에 쥰의 모친의 일도 말없이 견뎌오다, 이렇게 죽게 되지 않았는가.
그녀는 기회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네가 라이네가 되어라.”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쥰은, 뒤늦게 되물었다.
“……예?”
“네가, 쥰, 네가 라이네 공작이 되어라.”
그렇게 말해주었음에도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망연한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기다렸다. 수십 초가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연 쥰이 말한 것은 재차 반문이었다.
“예?”
이쯤 되면 귀엽다. 에본느는 픽 웃었다.
“이해했지 않아. 쥰, 네가 라이네 공작에 오르라 했다.”
“왜, 왜……. 누님? 왜……. 당연히 누님이 공작이 되셔야……. 이 무슨…….”
그는 진실로 황망해했다. 더듬더듬 늘어놓는 말에 두서가 없었다. 호흡이라도 가다듬으라고 등을 두드려주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잠시 쥰을 살피던 에본느는, 쥰의 눈에 또렷한 빛이 들어가자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가 그녀에게는 어린 아이처럼 보여도, 나이가 있는 데다, 제 실력으로 시드니가 단장으로 있는 최정예 기사단에 들어간 기사였다. 라이네 저택에서 겪은 찬 시선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겪은 일이 적지는 않다. 그리고 지난 삼 년, 그녀에게서 후계자 수업도 받아오지 않았나.
쥰은 조금 전과 다르게 냉정하리만큼 분명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
“어째서입니까, 누님.”
아, 그 질문에 대고 사실을 말하랴. 그녀는 순간이나마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은 말하지 않았다. 쥰의 시선이 더 차분해졌다.
“이리 말씀하시려고 지금까지 절 가르치신 겁니까?”
“…….”
조용히 침을 삼켰다.
“어째서입니까. 말씀해주세요.”
“…….”
“누님. 저 때문입니까?”
이건 또 웬 참담한 질문인가. 당황하여 입술을 움찔거렸다. 쥰 때문? 공작이 되라 하는 게 쥰 때문? 도대체 어떤 논리로 저기에 도달한 거지?
“저를 위해서라고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 아니요. 제가. 누님께 어떤 방해가 됩니까? 어떤 문제가 있는, 그런 거라면, 차라리 사라지겠습니다.”
저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를 멍하게 보던 에본느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저 말뜻은 알 수 없지만 방해라 하는 단어 하나는 그녀에게 박혔다. 난데없는 가시와도 같았다. 그녀는 턱을 들고 천장을 보았다가, 웃음기 어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렸다.
“외려 네게 방해되는 게 나구나.”
“예?”
“내게는 자격이 없어.”
그래, 그것이다. 자격. 건강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네 공작인데, 건강해야지. 입지가 잠시라도 불안해질 수도 있는 불안 요소이걸랑 최대한 배제된 사람이어야지.
그러나 그녀의 그 ‘무자격’을 쉬이 믿을 사람이 없을 터. 어릴 때부터 장차 라이네의 가주가 될 사람으로 자라온 사람이 갑자기 이리 나오면 누구라도 당황하고, 누구라도 기막혀 할 것이다. 쥰 역시도 그랬다.
믿지 않은 그는 한참 그녀를 들여다보며 잠잠히 호흡했다. 그 시선은 점차 나이 들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다에 잠긴 것처럼 깊이 흐려졌을 때, 쥰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제발 말씀해주세요.”
“이런. 아무 일도 없어. 그저, 내가 자격이.”
“그럼 제게는 자격이 있습니까?”
묻는 그 목소리가 덤덤했다. 그에, 당연히 있다며 대답해야 하는데 그 질문 자체에 사로잡혔다.
쥰에게는 자격이 있는가.
실은 그녀보다도 더 없다. 그러나 세상은 쥰에게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공작의 둘째자식으로 났으니,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순서뿐이라며. 그것도 사실 공작이 후계자를 공표했다면 쓸모없었을 순서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쥰은 제게 자격이 없는 것처럼 묻고 있나.
에본느는 웃으며 가만히 그를 두고 보았다. 라이네에 어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혹 아는 건가. 어릴 적의 일이라서 모를 텐데. 그보다 네 살 많은 그녀조차 잊고 있다 삼 년 전에야 안 사실이다. 물어야 할 필요, 있다.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고, 쥰의 부름에 잘리고 말았다.
“쥰, 너,”
“누님.”
“……응.”
“아시겠지만, 후계자 없이 가주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적장자가 물려받습니다. 보통 그 타당한 이유라는 것은 적장자의 사망이고.”
그 말을 하는 쥰의 얼굴은 차분했다.
“제게 공작위를 넘기기 위해, 어찌하실 작정이셨습니까.”
“…….”
“자진하려 하셨습니까.”
에본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누군가 벗겨가 버린 것처럼 웃음은 빠르게 죽었다. 에본느는 멀거니 그를 보았다. 보고 싶어 보는 게 아니라, 말문이 막혀서.
아, 그녀는 지독하게 당황했다.
다른 자의 기사가 되며 승계를 포기하는 방법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지금 누님, 당신이 제게 미리 알려주신 것에 신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쥰의 표정에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가, 다시, 일그러졌다.
그 소리 없는 괴로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보고 있는 그녀마저 섧게 만든다. 쥰은 이를 아득바득 악물고 눈을 꾹 감았다. 잠시 후 도로 뜬 눈에는 새파란 차분함이 고여 있더라. 이도 악물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공작이 된 후에 누님께서 제 곁에 계실 수 있다면, 누님이 종국에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제가 공작되기를 원하신다면, 그렇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쥰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그녀의 숨이 더 무참하게 흐트러졌다. 에본느는 결국 입을 조금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오래 전에 각하께 맹세 드린 바 있습니다. 누님께 방해가 된다면 자진하기로.”
“……어?”
이 대화를 시작할 때 쥰이 그랬던 것처럼, 에본느의 입에서 멍한 반문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쥰이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그는 에본느를 보고 있었다. 감당하기 벅차다 싶을 만큼의 경애였다. 그는 나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누님, 당신의 친동생이 아님에도, 친동생처럼 아낌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
“이제껏 누님의 사랑을 받아 마시며 자라왔습니다. 누님이 계시지 않다면 저도 없었고, 앞으로 누님이 계시지 않다면 저도 없을 겁니다.”
쥰이 이 정도로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안의 자신이 어떤 의미인지 듣는 것도 처음이다. 그녀의 눈앞에, 그리고 뇌리에, 먼 옛날의 일기가 떠올라 스쳐지나갔다.
-누나는 내 전부입니다.
쥰은 이제 그때처럼 어리지 않다. 그럼에도 토해내는 마음이 그때와 한결같이……. 오히려, 어쩌면, 더 크게. 더 깊게. 더, 맹목적으로. 그녀는 왼손을 들어 입을 쓸어내렸다.
숨이 막혀.
“정확히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압니다. 누님께서는 제가 없었다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숨이.
“누님을. 평생 곁에서 보필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씀을 제가 먼저 드리는 것을 용서하세요.”
막혀.
“제가 떠날 테니, 차라리 저를 버리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웃음이 떠난 얼굴은 텅 비었다.
처결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의 형상이 그 위로 겹쳤다.
입가와 턱을 맴돌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에본느는 황망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솔직한 애정과 맹목적인 표현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숨이 막히도록 두터웠다.
그리고 숨 막히는 만큼 쥰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내가 무얼 했다고.
버릴 일 없다고 다독이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다독임 한 번이 쥰에게 또 어떤 무거운 애정을 지게 할지 모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정도는 이해했다.
“…….”
잠시 후 그녀의 눈이 힘없이 떨어졌다.
굳은살과 두꺼워진 거죽으로 덮인 오른 손을 망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저 아이, 이 손으로. 거둔 책임. 선친은 쥰과 그의 모친을 들이게 된 까닭 중 하나에 그녀가 쥰에게 표했던 애정도 있었음을 말했었다.
그렇군. 이 손으로. 거둔 책임.
“…….”
다문 입의 꼬리가 비쭉 올라갔다가 파르르 추락했다. 이제껏 죽여 온 자들이 기십임에도, 겨우 자신의 것 아닌 다른 이의 생명이 이토록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라이네 공작이 책임져야 할 생명. 수십 수백도 아닌 수천이다. ……무겁구나.
하.
에본느는 손을 오므리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쥰에게서 비껴나가 왼 편 허공으로. 입을 뻐끔 벌렸다가 다물었다. 물기 어린 한숨은 그 작은 틈으로도 새어나갔다.
그러나 적어도, 쥰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과, 공작위를 넘기기 위해 자진하는 게 쥰에게 얼마나의 충격을 줄지는 감이 잡혔다. 어차피 독에 잡아먹힌 몸 탓에 마지막에는 자진해야 하는 것, 더 일찍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에본느는 명치에 턱 걸리는 묵직한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 상태를 알릴 수는 없다. 이십오 년을 라이네의 적녀로서 살아왔다는 자존심과, 큰누이로서의 자존심과, 저 애정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약속을…….”
이 결정에 그녀의 상태를 아는 누군가는 경악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가만히 움직였다.
“약속을 하나 해주었으면 한다.”
손을 뻗어 기사의 손을 덮으며 그 내용을 말했다. 쥰은 처음에는 멈칫하였으나, 잠시 생각한 후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에본느는 이튿날부터 블린성에서 공작의 일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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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려던 게 아닌데.
쥰과 이야기를 하고 공작에 오른다.고 한두 문장으로 끝내려던 게, 왜.......(털썩)
앞으로 빠르게 전개하여 세네 편으로 에본느 외전은 끝날 것 같지만, 끝내고 싶지만, 두 편 안에 몰아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으아아ㅡ아ㅏ아ㅏ(멘붕)
어쨌든 화이팅! 독자님들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