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71화 (71/157)

00071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

몸 상태는 현상유지조차 참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혹시 기적이 일어나 더 오래오래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도 분명 존재했다. 에본느는 여전한 척, 여유로운 척, 태도의 변화 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변한 것은 많았다. 거의 소용없는 약이라도 수없이 복용하고, 운동도 멈추지 않았으며, 그녀의 식단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환자 본인, 공작, 신관 두 명, 의사 한 명, 주방장 뿐. 오랜 기간 라이네를 섬겨온 집사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시한부임을 선고받은 그해, 발리앙 후작이 사망했다. 베르덴의 나이 스물다섯.

“훌륭한 후작이 되실 겁니다.”

그가 발리앙령에 가서 상을 치르고 돌아온 뒤,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부친을 잃은 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을 고르려 했는데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와버렸다. 그녀는 제가 한 말의 문제점을 생각해보다가, 이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베르덴은 그녀가 봐왔던 중 가장 능숙하고 묵직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악수에 응했다.

“감사합니다.”

그 화답을 듣고 에본느는 씩 웃었다. 지금이야 베르덴이 그녀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었지만, 에본느는 공작을 승작할 사람인지라 대하는 태도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공작이 아마 되지 못할 텐데.

그러나 이 정도 존중 받는 것마저 세상에서 빼앗기고 만다면 그녀는 자존심에 극심한 타격을 입을 터. 그녀는 저를 알았다.

그리고 라이네 공작은 에본느가 부디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며, 설령 회복할 수 없다 해도 생의 마지막까지 존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녀가 받는 존중이 바로 라이네가 받는 존중이기도 했다. 그래서 후계자에 대해 아직도 말하지 않고 있으리.

에본느도 딱히 다른 이들에게 제가 죽을 날 받아둔 것을 말할 생각이 없었고, 후계자가 되지 못할 것을 말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이대로 가자.

생사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그녀는 덤덤하게 걸었다.

하루하루를 특별히 귀하게 여겨 무어 선행을 베푼다든지 새로운 것을 배운다든지 소원을 이룬다든지 하는 일도 없이, 그저 평소처럼. 그 평소의 일상이 이미 알찬 탓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크게 쉬어본 적 없이 내내 걸어왔었다.

그렇게 에본느는 삼 년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에본느 스물다섯인 해. 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

발리앙령에 주로 머물다 마침내 이번에 오드리나의 사교계에 정식 데뷔하게 된 아리엘을 에본느는 살뜰히 챙겼다. 생일연회에서 쥰을 처음 본 아리엘은 그녀에게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늠름하고 훌륭한 남동생이 있어서 행복하시겠어요, 에본느.”

아.

그 말에 기쁘게 답하려 했는데, 아리엘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르네가 어째서인지 휘청거렸다. 그를 붙잡고 있던 아리엘은 그 바람에 넘어지려 했고, 다급하게 에본느의 손목을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무엇이라도 잡으려 하는 본능이었을 것이다. 아리엘의 본능은 문제가 되지 않다.

문제가 되었던 건 에본느의 본능.

오래도록 갈고 닦은 기감과, 오래도록 시달리고 있는 암살시도들을 넘어오며 몹시 날카로워진 반사 신경과 경계심이 그녀의 반응을 조정했다. 아리엘을 잡아 지탱해주는 게 아니라, 그녀의 손을 쳐내버리고 만 것이다. 아차 싶어 바로 다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완성된 그림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묘하게 손을 들고 있는 에본느와 그녀 앞에 쓰러져 있는 아리엘.

에본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조금 더 숙였다.

“이런. 아리엘. 괜찮아요? 미안합니다.”

“맙소사, 필르 발리앙! 괜찮으세요?”

“필르 라이네께서 필르 발리앙을 쳐내시는 것을 보았어요.”

“아, 아니에요. 에본느는 저를 잡아주시려…….”

“세상에. 착하기도 하셔라. 그렇게 필르 라이네를 감싸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

에본느는 약간 멋쩍어 하며 손을 거두었다.

영애들의 발언이 아슬아슬하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면 좋겠는데. 상황을 악의적으로 상상하고 몰고 가는 것은 저들 마음이나, 에본느가 라이네의 후계자 될 사람임은 잊지 않는 게 그네들 가문을 위해서도 좋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일단은 여전히 후계자로 유력한 장녀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이때다 싶어 몰려드는 게 눈에 보였다. 후계자가 공표되어 라이네 후작이 되고 나면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칠 수도 없으니, 그 부러움과 질시를 이렇게라도 푸는 것이다. 아리엘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는 영애들을 보다 물러났다. 아리엘의 여린 성격에 저렇게 밀어붙이는 여자들 사이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기는 요원치 않을 터.

그로 인해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이라 해봤자 평판이 나빠지는 것 말고 또 있겠나. 이미 저 아가씨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에본느를 향한 악의가 대부분이다. 에본느가 이 사교계의 젊은 여자들 중 제일 가는 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남성귀족들과 결혼한 부인들 덕분이고, 젊은 아가씨들의 생각은 그들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에본느의 눈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찾아 머금었다.

훗날 공작위에 오른다면, 그러니까, 오를 수 있다면 상대해야 하는 가주들은 그녀를 제대로 보고 있으며, 저런 질시에 갈대처럼 흔들릴 만큼 미숙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는 차라리 급히 다가온 쥰에게 집중하기로 하였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요.”

“그래요. 에본느. 아리엘이 잡아채서, 손목, 놀랐을 텐데.”

르네는 아리엘을 살피기는커녕 에본느에게 다가와 거들었다.

에본느는 르네를 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으니 가서 아리엘을 챙겨요. 아리엘이야말로 놀랐을 겁니다.”

“……그러겠습니다.”

옅게 웃은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에본느는 그 순간부터 연회가 끝날 때까지 웃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쭈뼛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려 하다가도 다른 영애들에게 가로막히는 아리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리엘의 옆에 르네가 붙어있었지만 그도 별 수가 없는지 아리엘을 빼오지 못했다. 베르덴이 있지만 그는 이미 후작이라, 섣불리 젊은 영애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하여 무슨 일이 있다면 그녀가 대신 도울 내심이었다.

그래서 아리엘을 마침내 누가 돕는지 볼 수 있었다.

웬일로 참석한 헤르조를 보며 그녀는 피식피식 웃었다. 아리엘을 구해낸 뒤로 헤르조와 아리엘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르네도 물론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소문 자자한 헤르조가 아리엘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으니 신기할 밖에.

에본느는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드니. 포르타영식이 아리엘에게 마음 있는 것 같지 않나?”

“…….”

시드니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쪽을 보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들을 지켜보다, 나지막하게 반응했다. 반문이었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음. 글쎄. 저 사람, 나와는 여태 인사만 한……, 다섯 번 정도 했나? 나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나 꺼리는 기색 만만이던 사람이 저러니 신기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나도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항상 그랬듯 시원하게 훨훨 넘겼다.

무도회가 아니라 연회였지만, 그렇다고 무도장을 마련해놓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에본느는 다가온 쥰과 첫 춤을 추고, 베르덴과 두 번째, 르네와 세 번째, 시드니와 네 번째 춤을 추었다. 그리고 대부분 베르덴과 시드니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밤을 마쳤다. 짓궂은 웃음이 내내 끊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약해진 몸은 솔직했다. 그날 밤에 열이 올랐다.

라이네 저택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녀의 건강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소수다. 혹시라도 복도에서 용인들을 만날까 하여 아픈 걸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새벽에 의사를 찾아가 그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고백했다.

“나 아프다.”

“아가씨!”

그가 부랴부랴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맙소사. 갑자기 어찌…….!"

“이상한 걸 주워 먹은 건 아니야. 긴장하고. 어이가 없고. 뭐, 그러기만 했어.”

“열이 높습니다. 아가씨, 심적인 것도 아가씨의 몸은 크게 반응합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 급한 타박에 에본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살고 싶거든. 그런데 주변이 안 도와주는 걸 어떡하나.”

“그러니까 차라리 요양을 가십시오.”

“거 참 싫은 소리 하네.”

힘없는 음성으로도 따박따박 투덜거렸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오드리나에 남아있는 게 승작할 미래를 위해 더 좋고, 만약 끝내 죽어야 한다면 적어도 마음 내준 이들 옆에 있다 죽는 게 좋다.

요양을 가면 무엇이 반드시 바뀐다는 것도 아닌데 어찌 오드리나를 떠나겠는가.

부지런히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열을 식혀주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남성에게 몸을 보인다는 수치는 오래 전에 없어졌다. 그녀는 그 새벽으로부터 하루 온종일 끙끙 앓았다. 보는 눈들이 있어 방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정오 즈음에 거울에 비추어본 제 얼굴은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의 것이라서. 그리고 이 몸으로 계단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쥰이 퇴근하기 직전 방으로 올라갔다.

인사하러 올 동생을 물리치게 하더라도, 그러려면 시녀에게 명령을 내려야 했다. 거울을 보며 눈에 힘을 주고 방긋 웃어보았다. 눈에 빛이 있어야 한다. 유쾌한 생각을 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훨씬 덜 아파 보였다.

올라가시면 꼭 더 쉬셔야 하며, 새벽에 한 번 들를 테니 놀라지 마시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했다고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의사의 방을 은밀하게 빠져나왔다. 이후, 일찍 잠들었다는 핑계로 쥰을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 에본느는 그 거짓에 속지 않은 라이네 공작에 불려갔다.

이미 하늘은 깜깜하게 진 밤이다.

그럼에도 불 밝힌 초가 이십여 개 서 있어 환한 방.

공작은 말했다.

“사교활동을 줄여라.”

“…….”

“최소한의 활동만, 정말 필요한 활동만 하도록 해.”

아리엘과의 일이 있던 당시 회장에 계셨으니 그 일도 보셨을 테고, 아픈 것도 보고가 들어갔을 터. 에본느는 말없이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건만, 울음이 터질 것 같이 아래턱이 흔들렸다. 따다다다닥. 다문 입 안에서 위아래 이가 작은 소리를 내며 덜덜 부딪혔다. 하여 양 입꼬리에 힘을 주고 씩 웃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용건은 그것으로 다였다. 그러나 에본느는 그 자리에 서서 가볍게 물었다.

“희망을, 아예 놓으신 겁니까?”

“…….”

그녀가 살아남으리라는 희망. 대답이 없었다. 촛불의 색으로 장식된 정적은 건조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저를 보는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다,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그래, 알겠다.

공작의 음성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너는 살 것이다.”

에본느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움직였다가, 멈췄다가, 그 다음에는 주욱 돌아가 공작을 향했다. 책상에 기대듯 걸터앉아있던 공작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재차 입을 움직였다.

“살아야 한다.”

에본느의 기분이 애매해졌다.

그 나직한 어조와 강한 내리누름에 그녀의 입을 마르게 했다. 이것이 애정이든, 죄책감이든, 명령이든, 홀로 속삭이는 다짐이든 상관없다.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계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팠다. 희망을 놓지 않았으나 완치 없이는 그녀를 차기 공작으로 세우시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꺼풀이 깊이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

아. 알겠다. 이것은 아픈 게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에본느는 다리 옆에 늘어져 있던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코웃음을 칠 뻔 했다. 그녀는 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모두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퇴실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라이네 공작이 갑작스럽게 졸했다. 공표된 후계자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글 쓰는데 왜 이렇게 힘이 빠질까요.......ㅠㅠ

초고, 자유연재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