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베르덴은 그 시선을 모르는 척, 말라가는 땀을 손등으로 슥슥 거두었다. 막상 에본느의 눈에 띈 땀방울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목. 눈에 거슬린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뻗어 구부린 검지로 그 땀을 가볍게 거두었다. 검은 장갑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손을 거두며 그녀는 웃었다.
“농담이다. 나는 킨들 라이네가 없었어도 무술을 익혔을 거야. 음, 아니군, 반드시 익혔어야 해.”
“왜?”
진짜 이유를 답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어찌 말하랴.
그러나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훌륭하고 배포 넓은 가치관이라고 경탄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있었다. 포장하여 내어놓기 아주 좋은 이상론. 그럼에도 일부는 마음에 새기도록 배워왔다. 에본느는 땀 스민 손을 팔락거리며 대답했다.
“알잖아. 라이네는 황실을 제외하면 이 나라 최고의 가문이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 어떤 것이 무기가 될지 모르고.”
그러자 베르덴이 기분 상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짚었다.
“발리앙도 유서 있는 가문이거든.”
“내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베르덴, 너희 가문을 얕잡아 보는 것도 아니고 후작위를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닌데, 낮은 작위를 가진 가문이나 세력 약한 가문들이 권세 있는 대귀족들의 봉신이 되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 끈을 잡고 보호를 받아 보겠다는.”
“…….”
“비슷하게, 우리가 친구가 되도록 서로 소개받은 것도 우리 가문들끼리 더 끈끈하게 엮어보겠다는 거고. 물론 라이네가 발리앙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가, 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너희는 후작가문이고 우리는 공작가문이니까.”
같은 귀족이지만 서열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에본느는 그 설명을 함에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베르덴의 표정은, 이제는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무슨 꿈에 부푼 개소리냐는 것이다. 무슨, 정의와 이상을 좇고 있는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말이다. 알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금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열다섯의 소녀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이 귀족 중에서도 최정점에 서 있는 작위라는 건, 큰 세력을 가졌고 어떤 공을 세웠다는 영광과 명예의 뜻이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황실과 후작 이하의 귀족들이랑 그 이하 백성들을 지킬 의무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글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듣는 내내 거슬린다는 얼굴이던 베르덴이 마침내 그녀를 끊었다.
에본느는 그다지 멋쩍어하지 않았다. 말하는 화자 스스로도 이미 회의적이었던 탓이다. 의무를 가진 것은 맞지만, 제가 말한 것만큼 철저하게 의무를 지키는 귀족은 별로 없다. 황제를 제외하면 황실조차 권력보호를 우선하는 실정인데, 무얼.
하품이 나올 것 같자, 어깨 가까운 팔에 입을 묻었다. 눈이 축축하게 젖었다. 소매로 눈머리를 콕콕 찍어낸 그녀는, 졸음기가 부풀어 오른 음성으로 웅얼웅얼 화답했다.
“음,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의무는 어느 정도만 지키면 되지. 전국의 백성은 또 뭐야. 영주들이 다 알아서 챙길까. 라이네 사람들 챙기기도 바쁜데.”
말이 발라당 뒤집혔다. 결국 베르덴은 어지럽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럼 지금까지 한 말은 뭐야.”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이해가 아직도 안 되는데.”
“이 나라 모든 영주들을 돕고 지킬 생각은 없지만, 내 바로 옆에 있는 친구 정도는 도울 수 있다는 말이지. 네게는 차기 라이네 공작인 친구가 있다는 말이야. 끈이 있어. 발리앙 후작은 굳이 무술을 익히지 않아도 되는 자리이고. 나 같으면 기왕에 줄 잡은 거, 뼛속까지 빨아먹으려 노력할 텐데.”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열여덟 살. 곧 청년이 될 베르덴의 눈에서 어떤 동요를 느꼈다.
둘 사이의 정적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베르덴은 애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반문했다. 질문 자체를 음미하는 것처럼 느리고, 섬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필요하면 너를 써 먹으라?”
하여간 말본새 좀 보라. 에본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가 만사를 다 도울 것도 아니고.”
“적어도 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 역시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약속드리지.”
“…….”
“나는 내 사정과 내 입장이 허락하는 한, 너희를 믿고 지킬 거다.”
그러자 베르덴은 그녀가 재단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결코 감동 받아 저러는 것은 아닐 터. 그 역시 후계자가 될 사람이라 그럴까. 공작 될 사람이 기꺼이 위험을 부담하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어라 말을 하려고 저리 심각하나.
의아하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에본느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한동안 기다렸다. 그녀의 친애하는 친구는 입과 혀를 유리 다루듯 하며 천천히 물었다.
“네가 공작이고 나는 후작이기 때문에?”
이런.
그리고 듣자마자 픽 웃고 말았다. 베르덴이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이 우정은 외사랑 비슷한 것이 되거나 머지않아 그녀 쪽에서 끊어버릴 무언가가 되고 만다. 그러니, 조금 다르다, 베르덴. 그게 아니야.
입을 열었다.
“내가 공작이고 너는 후작인 상황에서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에.”
가벼운 어조로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에본느는 저희에게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벤치에 끌어올렸던 오른 다리를 내렸다. 쥰을 바라보는 눈은 다정했고, 그 표정은 보드랍게 풀려있었다. 가족 사이에서라도 한결 같은 애정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앞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집안 외의 사람, 친구에게 이런 약속을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을 알기에 말하는 내내 신중했다.
생각이 음성을 담아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 쥰이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매질당한 이후로 에본느는 그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부친은 뼈저리게 가르쳐주었다. 베르덴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난 가끔 네 호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응. 그거, 네 머리가 나빠서 그래.”
산뜻하게 짚어주고 직후 쥰을 불렀다. “쥰.” 그러자 아이는 이제는 익숙해진 것으로 그녀를 지칭했다.
“누님.”
“아파?”
“아닙니다.”
야무지게 대답하는 쥰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리고 전보다 자란 오른 손을 두 손으로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도 쥰은 손을 빼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검을 잡는 것도 어느 정도 실력이 오른 다음에나 하는 일이라, 그녀가 만지는 것은 쥰의 맨손이다. 제법 굳은살이 박였다. 세상에 나온 지 일 년. 어린 아이의 열심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마저 감화시킬 정도였다.
실제 나이는 그녀와 네 살 차이. 바깥사람들에게는 여섯일곱 살쯤의 차이로 여겨지고 있는 이 아이. 그녀의 손 움직임이 잠시 느려졌다가 돌아왔다.
‘네가 나를 배신치 않으면 나도 너를 내치지 않는다.’ 베르덴에게 한 그 말은 쥰에게도 언젠가는 할 말이었다. 라이네의 역사를 배우며, 에본느는 부친 세대의 추태 역시 배웠다. 죽은 숙부와 부친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도 안다.
에본느는 손을 보던 눈을 들어 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씩 웃자, 쥰도 수줍어하며 방긋 웃었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웃다, 후에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경계를 아예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쥰을 사랑한다. 정말 몹시도 좋아하고 있어. 코를 울리며 푹 웃었다.
“수고했다. 들어가서 씻고, 쉬어.”
“누님께서는, 그럼…….”
“조금 더 이야기 하다 들어갈게.”
“예. 그럼, 포르타경, 감사합니다. 발리앙 영식께서도 살펴 가십시오.”
또랑또랑한 인사를 받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에본느는 발랄하게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고, 베르덴은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여태 훈련시키는 것을 겸하여 놀아준 시드니는 땀에 젖은 작은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에본느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피식 웃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포르타영식, 또 사라졌다면서.”
“미쳤군. 또?”
“…….”
시드니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그에 낄낄 웃음을 터트린 베르덴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드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한다. 동생 보고파서 어쩌냐.
그 말이야말로 최고였다. 에본느마저 웃음을 터트리자, 시드니는 웃듯 한숨지었다. 언제나와 같이 빠르게 사라져버린 웃음이었으나 그녀는 보았다. 에본느의 눈이 다정하게 가늘어졌다. 아, 이런 시간이야말로 좋지 않은가. 이들이 귀가하고 나면 다시 저 팽팽히 당겨진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겠지만, 이 시간, 이 가벼움. 숨을 쉬게 한다.
시드니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을 올리고 팔에 힘을 주니, 그가 가볍게 당겨 일으켜 세웠다. 피차 옅은 땀냄새가 났다. 땀을 뻘뻘 흘린 베르덴에 비하면 거의 흘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서로를 쥔 두 손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마구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아,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 건 마구간 앞, 마구간지기가 끌고 나온 말에 그가 올라타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너, 저하와 얼마나 친하냐.”
“어떤 저하. 저하가 한두 분은 아닐 텐데.”
“야.”
재깍재깍 대답하라는 부름이다. 에본느는 접어올리고 있던 소매를 내리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냥 차 마시고. 대담하고. 그 정도. 왜?”
“아니, 너한테 혹시 아리, 아, 음……. 아니다, 됐다.”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침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오히려 선이 분명했다.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굳이 캐물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나 예의 정도로 치환할 수 있는 선이다.
에본느는 눈썹만 치켜 올렸을 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베르덴이 등자의 발판에 발을 올리는 것을 보고, 시드니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말에 올라 있었다. 아직은 하인이 쥐고 있는 재갈끈과 고삐끈을 넘겨받은 그녀는, 그것들을 시드니에게 건네주며 그를 불렀다.
“시드니.”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그에게 장갑 벗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 기사단, 내일, 첫 출근.”
시드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 미소 지었다. 무표정이 사르르 녹아 무너지는 것처럼, 혹은 마법처럼, 혹은. 하늘거리는 베일처럼. 참 잔잔한 웃음이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은 단단하게 악수했다.
============================ 작품 후기 ============================
일단 여기서 끊습니당.
에본느 외전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본편에 설명되어있던 과거와 비슷하거나 같은 일이 일어나면서도, 사건이 일어난 나이가 다르다든지 그럽니다! 이제껏 본편에서 나온 과거는 에본느가 각색하여 기억하고 있던 것이니까요:D
뭔가, 에본느 외전 쓰면서, 본편에서 지금까지 에본느가 친구들이랑 가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와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전혀 자각이 없었는데, 제가 에브를 굴리긴 굴렸나 봅니다.(이제야 깨달음)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