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6 -CHAPTER 에본느. 끝으로 참수 =========================
에본느 외전
에본느에게는 제 모친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수천, 수만 번을 불러왔던 노래만이 그녀가 기억하는 모친의 유산이었다.
십대 정도 되어 많은 기억들이 쌓였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어릴 때의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더라.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이던 해의 기억. 요컨대 첫 기억 조각이다.
그리고 그 첫 기억이 부모나 친구가 아닌, 쥰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은, 에본느에게 참 사랑스럽고 애틋한, 몹시도 무거운 감정을 선사하곤 했다.
일곱의 어린 소녀는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가 라이네 공작과의 연애가 얼마나 길었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지금 영애에게 보이는 이 아이이며, 하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멀뚱하게 모두 들었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분별해내기 쉬운 나이가 아니었다.
에본느는 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 작은 남자아이가 제 남동생이라는 것만큼은 알아듣고 방긋방긋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남자아이를 제게 맡겨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동생을 살피고, 쪼물쪼물 만지고, 또, 묻기도 하였다.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너, 눈이 참 예쁘다아.
여자와 아이를 에본느에게로 안내해 왔던 부집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남자아이는 에본느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이내 와락 그녀를 안아왔다. 누, 나. 하고 떠듬떠듬 불러오는 목소리가 여리다. 품에 안겨든 작은 온기는 나비처럼 소녀의 마음에 찾아들었다. 팔랑, 팔랑.
너의 날갯짓.
아가구나. 예쁜 내 동생이야.
어린 아이가 가질 법한 질시는 한 톨도 있지 않았다. 퐁하고 태어난 마음은 오로지 애정. 에본느의 동공이 환하게 커졌다. 꾸물꾸물 일어난 에본느는 아가의 손을 꼭 잡았다.
어디에 가시느냐는 부집사를 물리치고, 두 아이는 방을 나와 쫑쫑 걸었다. 도착한 곳은 에본느 부친의 집무실이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평소와 다르게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대기하고 있는 집사와 시종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흐린 표정으로 있던 늙은 집사가 에본느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가씨. 어인 일이십니까? 그 아이는 누구고요.”
“내 동생이야.”
“……예?
“내 동생! 그보다 할아범. 문 좀 열어줘. 아빠께 드릴 말이 있어.”
그러나 집사는 소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집사의 옷을 흔들다가, 그래도 영 정신을 차릴 것 같지 않아서 제 손으로 문을 열기로 하였다.
문은 무거웠으나 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에본느는 안으로 꾸물꾸물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부친을 향해 방긋 웃었다.
“아빠.”
“……에본느.”
딸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라이네 공작은 부름에 늦게 화답했다.
에본느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이를 이끌고, 집무실에 완전히 들어섰다. 아이를 본 공작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에본느가 손님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관심 있는 사람에만 집중하던 아이의 시야가 한순간에 넓어졌다. 에본느는 아까 본 여자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엄마. 아빠랑 계셨구나!”
앙증맞은 인사에 여자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인사를 마치고 다시 부친을 본 소녀는 다시 웃었다. 공작은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에본느는 부친에게 다가가서 그의 무릎을 흔들었다. 공작의 시선이 거두어지며, 파랗게 질린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힐끔 여자를 보고 만 에본느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으나 부친의 목소리에 금세 주의를 거둘 수 있었다.
“오는 것을 몰랐구나. 무슨 일이지?”
마법처럼 항상 에본느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던 부친이다. 오늘은 마법이 아니네. 시무룩하게 손을 오므리다, 제가 잡고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에본느는 다시 꽃송이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아이의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공작에게 물었다.
“보세요! 제 동생.”
“그래.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누가, 저 여자를 네 어미라 했고.”
“엄마가. 아까 만났으니까! 봐봐요, 아빠. 귀엽지. 귀엽지요? 동생이야!”
아이의 손을 놓고 그 작은 몸을 와락 껴안았다.
라이네 공작이 손을 뻗어 에본느의 어깨를 휘어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 번도 손찌검을 당한 적도, 천방지축으로 까불다 위험에 처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힘으로 잡힌 적 없던 여린 몸이 흔들렸다.
남자아이에게서 팔이 풀렸다. 휘청거리는 에본느를 라이네 공작은 똑바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평소의 음성으로 말했다.
“네 어미가 아니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아푸…….”
앓는 딸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공작은 차분하게 에본느에게 물었다.
“에본느. 스완은. 네 엄마는. 어디에 있다고 했지?”
“하늘에. 우리 에브, 어디 잘 크고 있나아, 하면서 에본느를 보고 있다고 했지. 맞지요?”
“그래.”
어깨 위의 손이 동그란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어설픈 토닥임이라도 에본느는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남자아이를 잊지 않고 다시 안았다. 어린 아이라도 어떻게 해야 자랑할 수 있는지를 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동생, 이었으면 좋겠느냐.”
“으응. 얘가 나, 나 안아줬어요. 꼬옥. 누나래요. 나보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이 담뿍, 소복소복 내렸다. 라이네 공작의 시선에 짓눌려 움츠리고 있던 남자아이의 손이 올라갔다. 저를 안은 에본느의 팔위에 살짝 닿자마자 파르르 떨리는, 진심.
에본느는 아이를 더 꼭 안았다.
라이네 공작이 천천히 물었다.
“……이 아이가 마음에 드는 것이야?”
“좋아요.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아. 아빠는 바쁘시니까 방해하면 안 되고……. 아, 아, 아빠! 제가 일 도와줄게요.”
에본느의 우선순위는 명명백백하다.
정신을 차린 것처럼 쫑긋 고개를 든 소녀가 호기롭게 외치자, 공작의 눈이 쓰게 가늘어졌다.
“괜찮다. 에본느, 지금은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나가 있으면 좋겠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사람 경매와 다름없었다.
아이가 제게 애정을 표현했다는 들뜬 말과, 나는 이 아이가 좋다는 천진한 말과,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시무룩한 말이 라이네 공작을 옭아맸다. 공작은 결국 에본느가 가족 외의 사람에게 처음으로 표현한 애정을 크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으리. 딸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기 위해 모든 것을 걸기에는, 라이네 공작위는 너무도 막중한 짐을 진 자리였다.
공작은 여자와의 어떤 논의 끝에 모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남자아이의 이름을 에본느가 짓게 하고, 쥰이라 이름 지어진 그 아이를 별관에 가두었다.
어린 에본느는 어째서 동생이 밖에 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불쌍해. 내 동생, 예쁜 동생, 불쌍해. 같이 뛰놀면 좋을 텐데. 침울하게 부친을 졸랐으나, 공작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단단히 당부했다. 어디에 가서도 저 남아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거라. 없는 아이처럼 해야 한다.
에본느는 그 말을 기억하고 꼭 지키려 하였으나, 그래봤자 아이의 입이었다. 단 한 번, 간식을 준비하는 시녀와 이야기를 하다 쥰과 관련하여 말실수를 하였다. 에본느를 지키고 있던 기사는 공작에게 보고했고, 그날 공작은 에본느를 데리고 쥰이 머무는 별관에 갔다.
그리고 쥰은 시종의 손으로 지독하게 매질 당했다.
그것은 쥰에게는 물론이요, 에본느에게도 학대였다. 쥰을 구하려고 몇 번이나 발버둥을 쳤지만 공작은 딸을 잡은 손의 악력을 늦추지 않았다.
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별관에서 나와서, 헤어졌다.
에본느는 다시는 실수하지 않았다. 아이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를 배웠다. 여덟 살의 일이었다.
이후로 에본느는 밝게 자랐다.
부친은 말이 없는 편이고, 주변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시중들거나 지키는 사람, 계모라 하는 사람은 에본느에게 그리 살갑지만은 않으며, 친한 세 친구 중 한 명은 황실의 일원이며, 한 명은 라이네 공작만큼 말이 거의 없고, 다른 한 명은 상당한 다혈질이라는 성장환경을 감안해 보면, 묘하게 수긍이 가면서도 묘하게 수긍이 가지 않는 성격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밝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기까지 했다. 자리를 가려가며 수위를 조절하는 영리함 덕분에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지만 그 괴짜 기질은 가려지지 않았다. 어리다고 귀엽게 봐주자니 십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이른바 규격 외의 여아였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설마 없으랴. 가깝게는 포르타 백작의 둘째 아들도 어릴 때부터 가출을 자주 하고, 멀게 보아 역사를 찾아보면 저렇게 독특한 행적을 보이는 몇몇 남자 귀족들도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소녀가.
심지어 대귀족 중의 대귀족, 차기 라이네 공작이 될 영애가.
여기사가 되겠다는 영애든, 드물게 가주가 되는 영애든, 저렇게 묘하게 선을 넘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고상한 예의를 지켜가며 관행과 전통 안에 제 몸을 가두어왔다. 에본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싱글싱글 웃어가며 보이는 미친 털털함으로 속내를 감추었다. 저 나이에. 어지간한 배짱이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배수진을 쳐놓은 것처럼 그녀는 그 밝은 언행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시드니야.”
“…….”
고개를 한 번 끄덕하는 시드니의 머리에 목걸이를 올려놓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자리를 잘 맞춰준 뒤 뒤로 물러난 에본느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예쁘, 캬하하하하!”
“…….”
악동도 이런 악동이 없다.
에본느는 웃다말고 갑자기 줄행랑을 치려다 베르덴에게 뒷덜미가 잡혔고, 시드니는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손바닥에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시드니는 차라락 내려와 고인 그것을 들어 에본느의 목에 다시 잘 걸어주었다.
베르덴이 이죽거렸다.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이렇게 천사 같냐고?”
“미쳤군.”
에본느는 그 말을 하는 데 약간도 망설이지 않은 베르덴의 팔과 멱을 잡고 뒤집어 넘겼다. 막 열셋이 된 소녀와 열여섯 소년, 그러나 베르덴에게는 불행하게도 아직도 둘의 몸집이 비슷했다. 그래서 땅에 넘어진 그를 들어 올려 또 넘길 수 있었다.
시드니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에브. 맨손격투도 훈련 중입니까?”
탁탁 손을 턴 에본느는 씩 웃었다.
“응. 이거 완전 유용하네. 베르덴, 부디 매일 오렴. 매일 엎어 메칠 수 있게.”
“제길. 내가 오늘이야말로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만다.”
“그래. 복수하러 오기까지 십 년 정도 기다려 주면 되나?”
“……젠자아앙!”
업신여기는 표정이 훌륭하게 지어졌다. 분노에 차서 소리치는 베르덴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줌으로써 분노는 온전히 완성되었다. 씩씩 귀가하는 베르덴의 뒷모습을 보다 에본느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가 싶던 시드니가 에본느를 불렀다.
“에브.”
“음?”
“손. 장갑을 벗어 보세요.”
의아해하면서도 에본느는 장갑을 벗고 일단 오른 손을 내밀었다. 물론, 곱고 예쁠 수는 없는 손이다. 그럼에도 맨손을 보이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상대가 시드니인 것도 있었고, 그녀 스스로 손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탓이다.
오른 손을 잡고 유심히 살피던 시드니는 그녀의 왼 손도 살폈다.
“연고는?”
“바르고 있어.”
“붕대를 감는 게 좋겠어요. 기사들이라 해도 당신 나이의 여자를 가르쳐본 적도, 함께 훈련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은 당신이 챙겨야 합니다.”
“…….”
“……에브?”
에본느는 대답 없이 시드니를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훗날 시드니가 쥰을 만나면 어떨지 궁금해서. 이럴 때면 불쑥 그런 상상이 떠오르곤 했다.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베르덴은 귀족이라 하는, 차기 후작으로 유력하다 하는, 장남이라 하는 그런 권위의식이 있다. 겪다보면 알아. 그건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라다보면 자연스럽게 심기는 가치관이라, 고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베르덴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녀 자신만 하더라도 권위의식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하여간에 베르덴은 아마 쥰을 받아들이기 상당히 어려워할 터.
라이네 저택을 그 어떠한 귀족들보다도 자주 드나들고 있으니, 에본느의 계모에 대한 분위기를 느낄 만큼 느꼈다. 존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난 아들이라 해도 둘째 부인의 아들이니 적자는 적자. 그러나 다 자라서 나타난 것을 보면 사정이 있다는 것쯤은 알 수밖에 없다.
그럼 시드니는.
에본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참 시드니가 좋아.”
“…….”
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이면에 무얼 담았든, 이 말은 포장지일 뿐이다. 에본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시드니를 두고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진심이야. 이런 친구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지. 내가 무언가 값을 치러야 할 것 같다니까.”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기에 행운이라 하는 겁니다.”
“음? 그런가.”
그럼 이것은 행복이라 하는 편이 옳을까. 행복에는 치러야 할 값이 있을 것 같냐고 묻자, 시드니는 그건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고 대답해주었다.
에본느는 그 말을 듣고 크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일견 평화롭고 즐거워 보이는 일상을 위하여 값을 치루고 있었다. 허면 이것은 삯과 교환한 행복이다.
그리고 그런 가볍고 즐거운 시간이 끝나면, 다시 본연의 라이네로 돌아가는 것이다.
에본느는 이미 진검을 잡고 훈련받는 중이었다. 땀에 쩍쩍 달라붙는 옷을 끌어올려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굴렀다. 그녀가 장차 지켜야 할 사람들은 수많은 라이네 영지민 전부다. 그리고 그들뿐만이 아니라 공작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펴야 할 사람들은 이 나라 백성들 전부. 그녀는 건강해야 했고 강해야 했다.
공부도 물론 한다. 소녀는 항상 바빴다. 그럼에도 부친과 계모에게 때마다 문안드리기를 거르지 않았고, 특히 별채에 갇혀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쥰에게는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왔다.
책도 부지런히 가져다주고, 무언가 물어오는 게 있다면 답해주고, 꾸벅꾸벅 졸 때는 사람을 시켜 침대 위에 바르게 눕혀주었다. 그럼 부리나케 눈을 뜨고 자지 않을 테니 가지 말라는 쥰을, 다정하게 안심시키며 다시 재우기도 했다. 때로는 자는 쥰의 손을 잡고 잠시간 옆에 있어주었다. 거짓인 생일이라도 축하해주고, 창문을 통해 보는 바깥 후원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작은 햇빛이라도 함께 맞고, 아주 가끔은 달빛도 함께 구경하였다.
쥰은 에본느와 함께 쌓은 추억을 양분 삼아 자랐다.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진 적 없는 에본느는 쥰이 그렇다 하는 내용으로 쓴 일기를 우연찮게 보고, 어느 문장 위를 한참 쓸었다.
누나는 내 전부입니다. 나는 누나를 지킬 거예요. 평생을 누나를 사랑합니다.
잉크가 번져 엉망이 될 때까지 쓸고, 또 쓸어야 했다.
소녀는 쥰에게 마음을 한 부분, 부친에게 한 부분, 시드니와 베르덴과 알드리히에게 한 부분 내주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에본느는 그들에게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있었다. 쥰의 존재를 아는 호위기사가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가씨는 이미 많이 바쁘신데 도련님을 살피시느라 더 무리를 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하지 않아도 될 희생을 하십니까.
“…….”
에본느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 새삼 코를 울리는 웃음을 웃었다.
희생한 적 없다.
하고 싶기에 하고, 지키고 싶기에 지키는 것이다. 이런 어설픈 마음이 가을꽃처럼 지고 나면 쥰도 적당히 멀리하게 되리. 쥰은 그녀가 지킬 사람이지만 가문에 우선할 수 없으며 영지민들에 우선할 수 없다. 그러니까 쥰, 너도, 내 동생아, 너도…….
마지막으로 글자로 더듬으며 떨리는 콧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너도 나를 이토록 애달파하지 마라.
손을 거두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이 허망하게 떼어낸 손길이다.
내려다보자 손끝도 종이도 거멓게 번져 있었다. 소녀는 뒤돌았다.
어린 동생의 일기를 본 무례는 다음날 쥰에게 직접 사과하였다. 소년은 에본느가 건넨 사과의 편지를 꼭 안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에본느는 그 말간 얼굴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외전 시작입니다.
에스메외전에서 보였던 아버님 언행과 여기 외전에서 보이는 아버님 언행의 온도차......ㅇ<-< 저기 외전과 여기 외전에서 일곱살의 에본느의 차이....... 청소년 에본느의 가면 쓴 발랄함.......ㅇ<-< 베르덴의 열혈.......ㅇ<-< 시드니....... 쥰.......
어서 에본느의 조용한 질투라든지, 질투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거라든지, 결혼 이야기라든지, 그래서 남주 멘탈 부서진다든지, 그런 거 쓰고 싶습니다.(진지)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