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65화 (65/157)

00065 CHAPTER 6. 연꽃 =========================

나는 뜨거운 한숨을 쉬고, 더듬더듬 몸 옆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신관이 나를 도왔다.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지려 하자, 자고 있는 사이에 풀린 모양인 머리칼이 쏟아졌다.

침상 밖으로 두 다리를 내리고 망연하게 바닥을 보았다. 몸이 나으려고 열이 나나. 많이 다쳤었던 모양이다. 감염 같은 게 되었었던 것일 지도 모르고.

“…….”

일단 물어보기나 할까. 지금 제정신으로 날 깨운 거냐고. 아니면 한 대만 쳐도 되냐고. 진짜 기도하라고 깨운 거면 모르는 척 이 사람 발을 걸어서 넘어뜨려버릴까. 이 마음으로는 결코 감사한 기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얼얼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욕구들이다. 이 신관은 여느 신관들과 같이 잘 웃기는 하지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심으로 화를 내는 것은 정당치 않다. 심지어 내가 한 가문을 이끄는 공작일 때는 더더욱. 나는 끓어오르는 내심을 가라앉히고 일단 그를 내보냈다. 휘청휘청 일어나 간단하게 세안을 하여 조금이라도 더 정신을 깨웠다.

그리고 아마도 성의 누군가가 가져다 놓았을 내 깔끔한 옷 한 벌로 갈아입고 코트까지 제대로 여몄다. 어차피 신전은 그리 훈훈하게 데워진 곳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신전 내부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서늘했다.

차림을 정돈하며 달빛을 불빛 삼아 거울에 비춰본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어지럽게 구르는 눈으로 그 안색을 확인한 뒤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몰골이 어떤지 확인하니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객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관은, 내가 나가자 옅게 웃었다.

“편치 않으시겠지만, 조금만 어울려 주십시오.”

“…….”

이 사람 눈에는 내가 그다지 아파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뇌가 머리뼈 속에서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엄지로 짚고 이마를 쓸었다. 손도 뜨겁고 이마도 뜨거웠다. 뜨거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기묘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거듭 양해를 구하면 내가 더 짜증스럽다. 이미 나선 길, 염려치 않아도 된다. 내가 설마 죽이겠나.

나는 내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으니 앞뒤 서는 것은 염려하지 말라고 미리 배려한 뒤, 신관의 뒤를 느리게 뒤따랐다. 마법으로 만든 빛은 신전에는 없었다. 불이 흔들리는 어둠을 뚫으며 복도를 걷기를 일 분 정도 되었을까.

신관이 입을 열었다.

“어제, 산맥이 시작되는 곳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느꼈었습니다.”

“…….”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관은 그다지 머쓱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말 이어지는 어조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각하께서 부상당한 채로 이곳 신전에 오셨지요. 각하께서는 그 산에 들어갔다 나오셨을 겁니다.”

고요한 복도에 와앙 울리는 목소리는 내 귓가에서 진동했다.

기사들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나만큼 다쳐오는 것은 거의 괴물에게 습격을 당할 때에나 그렇고, 심지어 나는 행색 흐트러진 기사들과 함께 왔다. 추론은 어렵지 않았을 터. 놀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의아해한 것은 산맥이 흔들렸다 어쨌다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이 복도의 공기는 설산처럼 춥지는 않았으나 퍽 싸늘했다. 열이 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특히 오한을 들게 할 법하다. 슬쩍 소름이 돋는 오른 팔뚝을 느끼고, 짧게 질의했다.

“무엇이 흔들렸다고.”

“모르셨습니까? 킨들 라이네 산맥과 그 일대는 막혀 있습니다. 킨들 라이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 괴물들이 주로 서식하는 산은 그리 막혀 있지요.”

“……그랬나…….”

나는 한숨 어린 음성으로 수긍인지 무언지 명확하지 않은 것을 가만가만 흘렸다.

그러자 나에 앞서 걷고 있는 신관은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웃었다.

“어지간히 예언서를 정독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저는 어쩐지 각하께서는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막의 성질은 수도를 보호하는 막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그쪽은 수도를 보호하고 그 주변에 괴물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이쪽은 산맥 안에 있는 괴물들을 무뎌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고들 합니다.”

“……해서 지금 그것들이. 끊임없이 내게 몰려온 게.”

“저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랬다면 막이 흔들려서 그랬을 겁니다. 아마도 말입니다.”

이 말이 믿을 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사실이라 해도 내가 뭘 했다고. 소리 지른 것?

눈을 찌푸리고 떨리는 한숨을 쉬자 신관이 거듭 짧게 웃었다.

“헌데 각하께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적이 한 번 더 있는 걸 기억하십니까?”

“…….”

이번에는 내가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그런 기억을 떠올릴 상태로 보인다면 그건 기적이다. 열이 점점 더 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몽롱하다. 멍한 와중 빈정거리지 않기 위하여 잠잠하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이 있는 복도까지 왔을 때, 나는 눈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두위의 그런 작은 변화에도 어지럽기가 상당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오드리나로 출발을 못했나. 날이 밝기 전에 최대한 회복하여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수도까지 달리는 것은 불가할 성싶다. 마차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회복을 위해 쉬고 싶은데, 이 느닷없는 밤 산책은 무언지 모르겠다.

설마 신관인 이 사람이 쓸데없는 이유로 환자를 불러냈겠느냐는 막연한 존중으로 따라나서긴 했으나 언제까지 장단에 맞춰주어야 하나. 걸음걸음마다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흘러 넘쳤다. 심장이 열 손가락 끝에 내려가서 뛰고 있는 듯했다. 예민하게 얼얼해진 손끝이 아팠고, 아니, 아니다, 온 살갗이 전부 아리고 아팠다.

열이 지독하긴 한 모양이다.

“각하.”

“…….”

“기억하십니까? 오드리나에 괴물이 접근할 수 있었던 날을.”

지나치는 창문들을 통해 바깥만을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바로 했다. 신관의 머리 뒤로 시선을 박았다. 미색의 머리카락에도 밤은 내려서 푸르고 흰 그림자가 져 있었다.

“오드리나가 흔들린 것도 킨들 라이네가 흔들린 것도, 신께서 기회를 주신 자가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

“그 두 자리에 공통적으로 있던 분은 누구셨습니까?”

나는 도통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런 대화를 바란 적이 없었다.

손을 올려 셔츠 아래의 복부를 쓸자, 아무 아픔 없이 편평한 살이 만져졌다. 이 신관의 기도가 나를 고쳤다. 그것은 고마우므로 기어이 이 밤에 내게 기도를 받아야겠다면 해 주겠지만, 신관이 보답으로 받아 기뻐할 수 있는 기도는 환자의 진심이 담긴 기도다. 나는 지금 당장은 그런 기도를 할 수 없었다.

내 휴식을 중단시킨 이 사람이 실은 상당히 노여운 탓이다.

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뱃속에서부터 열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또한 그와 반대로 머리 정수리에서부터는 얼음물이 부어지는 것 같았다. 뜨겁고, 차가웠다. 덥고, 추워.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눌렀다.

내가 제 뒤에서 앓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관은 결국 맥락 없는 말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가 나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돌아오신 분은 둘이지요.”

“…….”

……둘?

갑자기 웬…….

나는 그 특유의 상냥한 눈을 힘겹게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나를 보면서 미소하고 있었다. 나 아픈 것이 보이지 않나. 아니면, 참을 만 하게 보이는 건가. 그렇다면 이런 답답함은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은 여유롭게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일까.

하지만. 너무. 답답한데.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려 검은 앞섶을 잡았다.

피 토하듯 벌린 입에서 뜨거운 숨이 새어나갔다. 뱀이 등허리를 사악 훑은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지고, 끈적끈적하고 써늘한 무언가가 정수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기분. 또박또박 소리 나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팠던 몸에 갑작스러운 고통이 더쳤다.

어라, 몹시 아팠다.

내가 하는 말없는 호소를 보면서도 신관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각하의 여태까지의 행보는 방어기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에녹의 검과, 당신의 그 순수했던 신앙과, 그렇군, 기도도 그렇지요. 실로 복합적이었지만, 그러한 것 역시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듣고 있다, 중간중간 뚝뚝 부러지는 마른 목소리로 묻듯 경고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네.”

“신의 사랑 말입니다. 이레님의 사랑.”

그런 걸 듣기 위해 물은 게 아니었다. 색색거리는 호흡 사이로 간신히 물었건만 동문서답이다.

확 솟아 오른 열의 까닭인지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참으려 했으나, 나는 기어이 이마를 짚고 말았다.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칼날 선 길을 앞에 둔 것 같이 살갗이 바짝 선 느낌마저 들어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칠 것만 같았다.

지나치게 빠른 악화다.

아까 가엘에게 업혀 산을 내려올 때보다도 더 빠른.

나는 허억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신관을 써늘하게 노려보았다. 내 몸에 혹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신관들 중에는 악한 자가 없을뿐더러, 그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이것은 그저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것일 뿐이리.

그럼에도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경계가 날을 세운다.

검을 가지고 있었다면 언제라도 발검하도록 몸을 긴장시키기 시작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관은 내 반응을 보고도 외려 미소의 짙은 기색을 더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에녹의 검이 가장 컸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이보게.”

“에녹의 검이야말로 이레님의 사랑 안에서 안배된, 사랑. 인간의 사랑. 전 이것 역시 감격스럽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뿐이다. 무어라 단호하게 내치고 싶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흐, 어지럽다. 진정. 어지럽다. 나는 혀뿌리까지 올라온 구토기를 막느라 애먼 침을 연거푸 삼켰고, 그 사이 신관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마음이 꽃 되어 피어나니, 그 위에 그대 죽은 시신이 누워있더라.”

내 턱이 떨렸다.

“흙가루 뭉쳐 그댈 만드니, 연모임을 그제야 알았더라.”

“…….”

“나비처럼 나비며 떨어지는 는개 있더니, 그것이 눈동자에 닿더라. 어서 오소서.”

목구멍이 피로 젖는 듯했다. 쇠를 삼켰나. 비릿하여 참을 수 없는 욕지기였다. 점점이 징 수십 개가 박힌 것처럼 눈알 표면이 아프기까지 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인내로 점철된 눈을 바닥에 꽂고 들지 않았다. 신관은 시구로 들리는 무언가를 마저 외웠다.

이 사람이 외는 시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심은 웬것인가. 그를 제지해야 할 것 같았으나 입을 열 수 없었다.

“돌아가시다 밀려오니, 환상마저 서글프더라…….”

“…….”

“안개 위에서 그대 지는 모습 보이더니, 아, 나도 그대 따라 졌다. 나는 그대에게 꽃이었습니까?”

토하, 토할 것 같았다. 그것이 끝나고 찬 정적이 내려앉자마자 나는 기어이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아픈 사람 붙잡고 조금도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그렇잖아도 짧아진 인내심이 아예 타들어갔다. 몸을 이겨낼 재간도 없었다. 붉게 핏줄 서 있던 두 눈이 구역질 몇 번에 젖었다.

조금 전 폭발하고도 남아있던 열이 명치 아래에서부터 마저 폭발해 올라왔다. 머리가 순식간에 몽롱해져서 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을 끔뻑여야했다. 그럼에도 신관은, 그는, 내 안부 한 번 묻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대화가 끝나면 이 대화를 모두 잊게 될 겁니다.”

“그대…….”

여기서 쓰러지게 되면 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이갈 듯 그를 부르자, 신관이 물었다.

“그러나 각하는 어찌하려 하십니까?”

내가 무얼 어찌해.

어지럼증이 심해져 휘청거리다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워 한결 나았다. 그럼에도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조용히 몰아쉬기 시작했을 즈음, 내 눈동자에 환상이 비치었다.

직전에 들은, 정돈된 질문부터가 떠올랐다.

-그러나 각하는 어찌하려 하십니까?

나.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뻐끔거렸다. 내가. 어찌 하냐고? 소리를 실지 않은 움직임에도 신관은 내 음성을 들은 것처럼 다시 물었다.

“각하의 처참했던 끝과, 모든 것을 걸고 각하를 살리려 하셨던 어느 분들의 노력과, 배신자와, 연모를,”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누가 봐도 온당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방금. 무언가가.

“어찌하려 하십니까.”

-저야말로 당신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죄송합니다.

내 눈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어 일그러졌다. 스쳐 지나간다.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헉하며 숨이 잠시 멈추었다.

이게 뭐야.

이게, 지금.

둑이 터진 듯 거세게 솟구치고 떠오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며 들렸다.

혼곤했다.

더는 그의 맥락 없고, 영문 알 수 없는 말들을 밀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게, 지금, 무어야…….

뒤통수에 벽이 아프게 닿았다.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중이다.

떠오른 분량이 많아질수록 초점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기가 막히도록 나를 때리고 때리고 있었다. 입 꼬리가 떨며 올라가고 욱 악문 잇새로 헛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멈춰 나를 진정시킬 여유조차 주지 않아.

땀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윽…….”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 나갔다.

그러나 배려 없이 꾸역꾸역 토해지는 모든 것은 나를 이해시켰다. 그렇지.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의문들이 쌓여왔었다. 이들은 활자라 하던, 그리하여 나는 상처받지 않겠다던,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해왔는지.

언제부터 나는, 에본느의 적과 진정으로 싸워왔는지.

어째서 나는 전 공작의 사망에 대하여 글에 자세하게 쓰지 않았으며, 어째서 나는 에본느가 어릴 적 기억도 못하는 후계자 다툼에 휘말려있었음을 쓰지 않았는지. 나는 왜, 아리엘의 선함에 집착하고 에본느의 말로를 두려워하는지. 나는 어째서 권선징악의 흐름에 집착하고 또한 두려워하는지.

또, 어째서 이 세상에 왔는지.

나는 어째서 에본느가 되어야 했는지.

……애초에 나는 왜 이 세상을 썼었는지.

모서리 같은 하늘을 보는 눈에 가시라도 박힌 것일 지도 모른다. 부석부석하게 마른 눈이 아픈 데다, 흐, 흐흐, 불에 몸을 던진 듯 웃음마저 뜨거웠다. 그러나 내 몸의 고통과는 상관 없이, 전 공작이 사망하던 날, 결국엔 발리앙부터가 떠올랐던 그 첫 순간이 떠올랐다.

날 죽이려 들던 모든 일에, 쥰의 모친보다도 발리앙부터가 떠오르곤 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그 생각을 외면하고, 이런 일들을 저지를 다른 후보들은 또 누가 있는지 고려하고자 애쓰던 순간들. 그토록 외면하고 싶던 발리앙의 악.

-……하여, 다시 살고 싶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나는. 나는 죽어서.

-그래서 더더욱 당신과 베르덴과 쥰에게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지쳐서, 실은, 어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참 피곤하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다시 살 생각을 하면 더 피곤해져서요.

죽어서…….

-저야말로 당신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죄송합니다.

시드니가 든 검에 목이 잘려 죽어서…….

-시드니. 왜. 왜. 그냥 죽게 두지. 왜. 나 좀 이제 쉬게 두지. 왜요. 도대체 왜 그랬어. 왜.

지구에서 눈 뜬 갓난아기는 마구 울다가 점차 모든 것을 잊어갔었지. 아, 그랬다. 난. 난 시간이 흐르자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잊거나 잠가버린 기억으로도 아무 것도 모르고 글을 썼었다.

“아. 으…….”

숨죽인 흐느낌이 새었다.

잠가 두었던 진실이라는 것이 나를 쾅쾅 깨부수었다. 돌 같은 조각들이 부스러지자 나는 나의 근본을 이해했다.

나는 항상 에본느였다.

나는 에본느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 이곳은 글속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세계였음을.

내 세계, 내 현실이 아닌 적이 없었다. 지구에서 쓴 글은 내게 있던 일을 각색하여,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글에서나마 온당한 이유가 있도록, 그렇게……, 그렇게……. 에본느, 나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다고…….

점차 잊어갔던 기억. 그럼에도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본능. 남아있던 내 원망. 남아있던, 소원. 전부 연꽃처럼 떠올라 봉오리를 열었다.

잊은 기억으로도 그런 것들은 그토록 강렬하게 깊숙한 곳에 남아있어서, 내가. 내가. 아, 나는. 나는 목이 잘려 지구에 온 뒤에는 결국엔 미쳐버려서, 아리엘을 원망하기보다는, 합당한 이유로 나를 죽이기 위하여 글을 썼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누가 봐도 온당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리엘은 이 세계에서 회귀한 적 없으며, 다시금 시간이 주어져 시간을 되돌아온 것은 나뿐.

눈꼬리에서부터 흐느낌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멍청하여 친구를 믿다가 죽임을 당한 것뿐이다. 악하여 죽은 게 아니야. 여긴 글이 아니야. 악행을 이유로 죽을 일은 없어. 권선징악의 악이었던 적이 없어.

환희에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주르륵 미끄러졌다.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은 나는 끅끅 웃었다.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노래가 들리고 있었다. 그것, 내가 지구에서 눈떴을 때 들렸던 노래이기도 했고, 이 자리에서 기억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어버린 노래이기도 했다. 예언서에 있던 애가.

그리고 이 사람.

벽에서 눈을 돌려 신관을 보았다. 이 사람도 떠올랐다.

검이 나타나자 그 애가를 처음 가르쳐주었던 이 사람. 대신관인 클레멘트가 내 기도로 탄생했던 에녹의 검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드니가 받아갔던 것이며……, 그렇게 나의 시간에 신의 힘이 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단 한 순간도 친구인 적이 없었을. 나의.

나의 착한 아리엘…….

-폐하께서 필르 발리앙을 사랑하셨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제가 폐하의 마음을 일찍이 알고 폐하의 곁에서 멀어졌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저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폐하. 폐하의 그 감정 때문에 제가 이렇게 죽습니다.

나는 떠오르는 기막힘에 흐느껴 웃었다.

아아, 이제는 알아. 아리엘. 사랑에 빠진 너는, 우리 서로 만났던 처음부터 선하지 않았다.

네가 선하리라는 집착은 그래야 내 죽음이 정당해질 수 있기에.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데도 본능 하나만 강했던 난, 참 멍청하지. 나는 너무 멍청해서. 다 내 탓인 줄 알았다. 다, 말이야. 아리엘.

나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주저앉아 한참을 웃었다.

아, 아니군.

나는 울었다.

-그리고 당신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매순간 행복하였던 저를 좀, 봐 주십시오.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누군가, 혹은 아리엘에게 나를 주장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 들어. 알아? 네 눈에는 그저 죽일 원수였을 나도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제발 살아주십시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세운 두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 손으로 두 눈을 누르고. 손목 끝에 연신 묻어났던 것은 눈물이었다. 차가운 손과 소매가 젖은 것을 깨닫자마자, 악물었던 이를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 내어 오열했다.

당시에는 흘리지 못하여 오래 묵어버린 눈물이다. 내 고개가 떨어졌다.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 숨결 하나하나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알아요.

연신 들리는 그의 음성에 나는 몹시도 늦어버린 대답을 전했다. 철창을 잡은 그에게 내가 말한다.

알아요. 이제는 압니다, 경. 나는 살아도 되는 사람이었어.

오래도록 나를 붙들고 있던 베일이 거두어졌다. 그리하여 이 밤. 이 세계에서 이방인처럼 살아온 지 이십일 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의 밤.

나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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