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63화 (63/157)

00063 CHAPTER 6. 연꽃 =========================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누가 그런 의뢰를 한 건지 알 수 없는 것은 아쉽다.

라이네 영지민에게 의뢰할 정도로 머리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의뢰자에 대한 것도 숨겼을 것을 알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거 봐, 내 짐작이 맞았지. 괴물들의 무기에 독이 묻어있던 것과 사람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것.

나는 피를 씻고 나와서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도 피로치 않았다. 얼마나 정신이 생생하게 깨어있는지, 유심히 로드리게즈 백작을 보며 그의 나지막한 설명과 주장을 듣고 있다가도 피식피식 웃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야아, 이거 진짜, 어쩔 수가 없이 오늘 기분 참 좋다.

날 죽이겠다고 나설 영지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나는 영지민들도 경계해야 함을 알게 되었고, 산에 올라갈 명분도 얻게 되었고. 기분만으로는 좋은 일이 기백은 있었던 것 같은데 개수를 꼽아보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세 달을 끌어온 입씨름을 끝낼 때도 된 것 같았다. 이 좋은 기분을 이런 식으로 날려버리고 싶지도 않았고, 앞으로 며칠간은 이런 정치보다는 가문과 내 일에 무게를 두어야 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고르다, 손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노년의 백작이 눈치 좋게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다 씩 웃었다.

“좋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피차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군. 어지간한 사람한테나 웃음이 통하지, 그대에게는 그저 내가 설득 쉬운 바보로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해서 내가 다시 말함세.”

“각하.”

바보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살을 살짝 찌푸린 백작이 나를 불렀다. 힘준 목소리에 잔잔한 불만과 불편함이 가득했다.

이건 어쩌면 전 공작의 그림자다. 그와 내 스타일이 워낙에 다르게 보여야지. 전 공작이 나처럼 실실 웃으며 기행을 보이진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내가 더 쉬워 보이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의도했으되, 그러나 이 정도까지 오면 제재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부름을 묵살하고 말했다.

“세율은 건드리지 말게. 난 그대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도 않고, 그대가 내게 납세해야 하는 분량의 부담을 그대로 넘겨받을 그대의 영지민들에게도 가혹하고 싶지 않아. 조세율을 기어이 올리고 싶으면 그대가 알아서 이유를 찾게. 감히 내 핑계를 댈 생각은 결코 않는 게 좋을 걸세.”

“…….”

“여기 온 이후로 세 달을 너그러이 상대해주었으면 되었지 않은가. ……응? 아니 그런가?”

말을 이어가며 점차 사라져갔던 내 웃음은, 끝에 와서 되살아났다. 작은 불씨가 확 커지듯 부푼 웃음에 백작의 주름진 얼굴 어느 한 부분이 움직였다.

나는 이 노인보다 윗사람이고, 따라서 이 사람을 존중하는 건 이 사람이 내게 응당 보여야 할 존중과 경애를 보일 때에나 기껍게 해줄 수 있는 바. 이 세계에서 나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긴 하나 가끔 이렇게 젊은 사람을 휘두르려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은 지구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세계는 신분제가 있는 세계라 조심해야 했다. 내가 아니라, 내 아래의 나이 많은 자들이.

말을 마치고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자, 로드리게즈 백작은 내게 사죄했다.

“제가 각하께 지나치게 밀어붙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신분으로 찍어 내리면서 내 밥그릇 챙겨야 하는 의무가 부담스러워서 공작되기 싫어했던 때도 있었지.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자존심을 챙기는 것 같지만, 저 말 일부의 무례는 넘어가주기로 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네. 나도 내가 삼 개월이나 같은 말을 빙빙 돌려서 상냥하게 거절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거든.”

“…….”

음. 그다지 넘어가지 않은 것도 같지만.

반발을 감수하고 더 강한 말로 그를 더 내 아래로 무릎 꿇릴 수도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너그럽게 넘어가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씨근덕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편이 좋으리라. 나는 내게 인사하고 나가려는 백작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돌아보는 그에게 이를 보이며 의뭉스럽게 웃고, 말했다.

“데스챔프 공작에게 안부 전해주시게.”

“……후에 연락드릴 일이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있겠지.

이 사람은 내게도 납세하고, 지역상으로는 저 멀리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데스챔프 가에게도 납세하고 있다. 두 대영주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으나, 알게 된 게 벌써 십 년은 넘었다. 전 공작이 미리 알고 내게 공부토록 서류를 넘겨주었었으니까.

나는 내심 기겁했을 백작을 완전히 내보낸 뒤에 시각을 확인했다. 열한 시 반. 비온 자작이 오기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반자유시에 거점을 둔 상단들과, 그들에게 주었던 특혜, 그 외에는 용병단에 대한 문제인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자유시는 라이네 중앙령인 레룩스에 있는 게 아님에도 라이네 직할령이라서, 반자유시를 영지 안에 두고 있는 자작과 상의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황제의 사람과도 예의상으로나마 상의를 해야 하고.

그리고 내일은.

내 시선이, 오늘 새벽 피가 묻었던 칼로 향했다. 직후, 허탈하게 움찔거리는 오른 손에 새삼 신경이 미쳐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무거운 것을 오래도록 힘주어 잡고 있었는데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 오른 손. 내일 있을지 모를 전투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

주먹을 쥐었다가 떨어뜨렸다.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 집무실에 드나들 수 있는 직급은 몇 되지 않는다. 기사인가. 아니, 그리 묵직하지는 않은데.

“각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허, 때때로 걷는 것도 힘겨워보이던 총집사가 달렸다고?

“들어와.”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하여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런 일이……. 아, 많지. 내 주변과 내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머쓱해졌다. 조금 불안해진다.

그러나 총집사가 급히 들어와 건넨 봉투는 오드리나, 그것도 황실에서 온 것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호흡하며 봉투의 봉인을 갈랐다.

“…….”

황제가, 죽었다.

짧은 급서를 전부 읽자마자 든 생각은 이 나라 머리에 대한 침통함 따위가 아니라, 내 사적인 안타까움이었다. 일이 꼬였다. 오늘 남은 접견이 한 건, 그 외에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내일 산에 올라가려 했더니.

국장의 본식에는 참여하지 못하겠으나 국장기간 중 시신이 소산되기 전에는 가서 예를 올려야 했다. 국장은 준비기간을 포함하여 셈하는데, 승하 다음 날부터 셈하여 삼 주간 지속된다. 여기 적힌 붕어한 날짜는 3월 11일. 국장이 끝나는 날은 4월 2일. 오늘이 18일. 이 급서를 준비하여 여기에 소식이 도달하기까지 닷새 이상. 내가 오드리나에 가기까지 닷새가 더 걸릴 터. 그렇다면 안전하게 오늘, 늦어도 내일 새벽 중에는 출발해야 할 것이다.

황제 시신의 소산식은 여느 귀족 가주와 다르게 사망한 지 2주 전후에 한다.

동북부 끝에 있는 레룩스에 서신이 도착할 정도면 거의 모든 지방에 소식이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옳고.

“…….”

빌어먹을. 서신을 잡지 않은 왼 손을 올려 두 눈의 양 눈머리를 짚었다.

이런 중요한 건 텔레포트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 같은 것으로 좀 어떻게 전해왔으면 어디가 덧나냐. 알드리히 이 자식아. 이 세대에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없으니 아티팩트가 귀한 것은 알겠지마는, 아, 좀.

짜증스럽지만 총집사가 보고 있으니만큼 표정 관리를 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엉킨 계획과 엉킨 기대에 대한 언짢음이 여간 큰 게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마침내 손을 내리고 낮은 목소리로 총집사에게 지시했다.

“4월 2일까지 국장기간이다. 성에 검은 조기를 걸고, 영지민들에게도 알릴 준비를 해.”

“예, 예.”

“나와 오드리나에서 온 기사들은 오늘 저녁……, 6시 이후 언제든 출발할 테니 준비토록 하고, 나가있는 기사들도 전부 불러들이도록.”

“알겠습니다.”

오드리나에서부터 나와 동행했던 기사들은 내일의 등반을 위해 아직 성에 있을 것이다. 다른 죄인 무리가 있나 조사하도록 했던 명은 그 이후에 이행하라 추가로 지시했으니까.

“…….”

집사가 나가자 나는 망연하게 허공을 보다 고개를 젖혔다. 입을 벌려 몇 번이고 한숨. 오른 손에 몰아 쥐고 있던 서신과 봉투가 손을 벗어나 툭 떨어졌다.

심장이 쿵, 쿵, 쿵쿵 뛰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등반을 위해 훗날 다시 라이네령에 내려올 시간만을 기다리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른 손을 들어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손목뿌리와 손바닥이 만나는 곳에 두텁게 쌓인 굳은살과 그 살갗, 뼈로 양 가슴의 가운데를 턱턱 쳤다.

턱.

턱.

퍽.

소화가. 소화가 안 되나. 답답해 죽을 것 같다. 고개를 바로 하고 턱을 당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퍽 때리자, 그제야 한결 나아졌다. 나는 후욱 길게 숨을 내쉰 후 내 차림을 확인했다. 봉신을 접견하기엔 무리 없는 차림이지만, 몸을 크게 움직이기에는 약간 답답하다.

셔츠 위에 걸친 검은 조끼의 단추를 똑 똑, 풀어내며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왼 손으로 라이네의 검을 잡아 내렸다.

아, 준비는 지나칠 정도로 간단했다. 나는 간단한 흉갑이라도 필요치 않았고, 시간과 기회만이 필요했다. 단정한 조끼를 벗어 책상에 던져놓은 후에 코트를 걸쳤다. 장갑까지 끼고 나서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설산을 버티는 것은 이 정도로도 족했다.

이제껏 기사들과 함께 킨들 라이네에 들어갈 근거를 찾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 몸은 이제 나 혼자만 생각하면 되는 몸이 아니라, 수천 영지민이 살고 있는 라이네를 짊어지고 있는 몸이다. 내 부상은 나 홀로 질 부상이 아니라 온 라이네가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부상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이성.

“각하?”

“가엘 타르디프 경에게 오드리나의 기사들을 모두 데리고 ‘새벽의 약속 장소’로 오라고 전해.”

이것이 내가 이 순간부터 잠시 외면하기로 결정한 이성.

시종들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있던 총집사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자, 그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노인의 눈이 커졌다.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웃고, 마저 속삭였다.

“그리고 그대, 이 일은 나 돌아올 때까지 결코 발설치 마라. 자작은 적당히 돌려보내고.”

“각하. 지금 어디를, 어디를 가십니까?”

나는 그가 예의도 잊고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시간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 농담을 하며 놀려먹을 시간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떼어낼 시간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치고 도닥였다.

“좋은 게 있나 확인하러 가네.”

그리고 총집사의 손을 떼어냈다.

건물을 나온 나는 마구간으로 직접 가서 내가 이곳에 내려오는 길부터 함께 했던 말에 올라탔다. 마구간지기가 넘겨주는 고삐를 쥐고 힘을 주자, 가죽 구겨지는 소리가 마치 눈 밟는 소리처럼 났다.

나는 마구간지기를 간단하게 치하하고, 이랴! 소리쳐 말을 종용했다. 짐승은 나를 태우고 내 뜻대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정문 앞에서 내게 경례하는 자들에게 평소처럼 따사로이 화답할 여유가 있었으랴.

찬바람이 칼처럼 내 뺨을 베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드러난 맨 얼굴과 목 전부가 바람에 할퀴어진다. 으아아, 설산은 버티겠는데 말 달리는 시간을 생각 못했다! 나는 내 미련함에 실실 나오려는 허탈한 웃음을 참고 버텼다. 무려 삼십 분을 시달렸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킨들 라이네 산맥의 첫째 산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난 가끔 무지하게 멍청한 것 같아…….

“…….”

말을 자유로이 풀어두고 우울하게 산에 들어섰다. 이렇다 할 정보 없이 산맥의 온 산을 뒤져야 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새벽에 알아냈지 않나.

첫째 산이라고.

그러나 첫째 산이라 하는 것을 그들이 토설하지 않았어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들을 조합하여 알아내는 방법도 있긴 있었다. 기사 몇에 납치당할 정도의 역량뿐인 사람들이 설마 이 산맥의 먼 산까지 들어갔다 나왔을 것 같지는 않다. 사람에 버금갈 정도의 이지가 있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그저 살의뿐인 괴물도 있으니까. 그리고 사람과 거래를 할 만한 괴물이라면 토벌 시기를 제외한 때에는 사람들의 마을과 가까운 곳에 사는 게 이득이다.

따라서 셋째 산까지 갈 것은 없이 첫째 산과 둘째 산. 이었는데, 첫째 산이라 하니, 음, 첫째 산만 뒤지면 되리.

나는 그때부터 정말 산을 샅샅이 뒤졌다. 입구에서부터 봉우리 끝에 올라왔을 때의 시각은, 햇빛으로 판단하건대 아마 두 시에서 세 시 정도. 둘째 산으로 이어지는 면으로 내려가며 수색한 후에 입구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없다.

기사들은 다른 명령이 없으니 올라오지 못했든지, 아니면 나처럼 수색하며 올라와서 늦든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나는 땅에 주저앉아 수 분 쉰 뒤에 수색을 재개했다. 그때부터는 상당히 움직여야 했다. 괴물들이 거기부터 살고 있더라.

좋은 정보를 얻었다.

앞으로 킨들 라이네에 들어와서 안전하게 깐족거리고 싶어지면 저쪽에서만 깐족거릴 테다.

나는 말하는 괴물들의 무리를 크게 힘쓰지 않고 몰살했다. 내가 찾는 괴물이 아니다. 핏비를 피하지 못해서 온몸이 젖은 탓에, 내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이게 식으면 추워질 것이다. 검을 잠시 왼손에 건네고 오른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약간 뻑뻑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시 오른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긴 수색의 끝이 왔다.

짧은 겨울의 해가 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찾아낸 동굴은 작았으나 깨끗했다. 나는 동굴 안을 두리번거리며 빈틈없이 살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우스워 소리 없이 웃었다.

검을 쥔 아귀힘이 조금씩 풀렸다. 나는 제단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에 훌쩍 뛰어올라 몸을 숙였다.

“…….”

……여기까지.

네가 누구든 너는 여기까지 이미 안배를 해 놓았나 보다.

나는 결국 왼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끅끅. 끅. 끅. 숫제 숨이 넘어가는 소리라서, 내가 아직 죽이지 못한 괴물이 있는지 흠칫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의 일이었다. 나는 내가 동굴입구부터 여기 깊숙한 곳까지 걸어오며, 이 동굴에서 쉬고 있던 족속의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 동굴 안에서 걸어온 길이 곧 수많은 시체 널브러진 길이며, 피가 웅덩이처럼 고이고 있는 길이었다.

똑. 똑.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주머니를 주워들었다. 기대하면서도 기대치 않았던 물증.

내 이름이 수놓인 이 주머니는 누군가 요구라도 했던 것처럼 잘 모셔져 있었다.

설마 내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정말, 조금도. 나는 몸을 일으키며 채 마치지 못한 웃음을 마저 흘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를.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나를 전 공작의 살인범으로. 찾을 확률이 낮을 이런 사소한 것에조차 혹시 모르니 내 이름을 심어두었단 말이지.

감히. 네가.

“흐……으.”

아. 답답해졌다. 정말, 정말 답답해서, 숨이.

숨이.

흐흐. 히히히. 꺽꺽대는 내 일그러진 얼굴에서 땀인지 눈물일지 모를 것이 뚝뚝 땅으로 떨어졌다. 젖는다. 숨이.

내가. 내가.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숨죽이려 했던 절망이 잇새로 새어나오고 말았다. 어흑. 윽.

허리를 젖혔다. 동굴 천정을 보는 내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태 떨어지고 있던 게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던 것을 안 건 그때였다. 부릅뜬 눈에서 흐르는 것이 뺨을 타고 귀에 닿고 있었다. 나는 앙다물었던 입을 열고 배에 힘을 주었다.

“…….”

그러나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주, 오래 참아왔던 바에 대한 비명을 지를 법도 한데, 그래도 목에서 검열이라도 한 듯 덜컥 걸렸다.

그럼에도 공기가 촘촘하게 다시 짜이는 게 느껴졌다.

이 산의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엿보고 있던 괴물들은 물론이요, 숨어있던 괴물들도 튀어나올 것이다. 킨들 라이네 산맥의 공기가 흔들린다. 어디에선가 느껴본 위화감이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소리를 아득바득, 끅끅 참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뚝 그쳤다.

내 찢어지는 숨소리가 멈추자, 사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왕왕 돌아오는 메아리도 없었다.

나는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뒤돌아, 내가 이 제단까지 오며 죽인 괴물들의 시체들을 보았다. 땀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내가 만든 피 융단을 보며 숙고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후.”

비명은 잘 참았다. 살의를 참지 못한 게 문제지만.

그리고 동굴 앞으로 모여든 괴물들을 보고, 눈썹을 쫑긋거렸다.

이제 그 속 풀어낸 대가로 여기서 살아서 빠져나가야 하는 게 남았다. 나는 그리 강하지 않다. 무기를 들고 휘둘러봤자 어지간한 라이네의 기사 정도밖에는 되지 않고. 그러니까, ‘아마도’ 그 정도 밖에 되지 않고. 마법은 평범한 마법사들에 비하면 강하지만 아리엘에 비하면 어떨지 모르고.

“…….”

음. 여차하면 텔레포트로 도망가기로 하자.

산의 입구까지는 가지 못하겠으나 이 자리에서 오륙 미터 떨어진 곳까지는 가능할 것 같다. 나도 지쳐서.

주머니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움직여도 결코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잘려 나가서도 아니 된다. 이것은 자칫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죽일 수도 있었던 증좌였다.

나는 목 뒤를 살살 쓸고, 괴물들을 향해 걸음을 시작했다. 이어진 것은 마음 가벼운 학살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죽이며 흐리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마, 몹시 정신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아마 나는 전 공작을 떠올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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