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1 CHAPTER 6. 연꽃 =========================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무언가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제 깊은 잠이고 얕은 잠이고, 밤에 잠을 아예 자지 못하는 중이다. 까닭을 모르는 탓에 나조차 답답했다. 마음 불편한 일도 없고, 내 마음은 전과 비슷하게 가볍다. 해서 마치 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몸이 멋대로 쌓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조금 나쁘기도 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내 사지육신마저 내 뜻을 벗어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니까. 음. 음.
점점 김이 흐트러져 사라지는 잔 안을 유심히 보다가, 남은 차를 꼴깍꼴깍 단번에 마셨다. 그리고 더 차를 따라드리겠다는 시종을 만류했다. 빠르고 짧았던 휴식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 막 이십 대에 들어선 청년 시종이 잔을 치우고 나가는 것을 너그럽게 기다렸다.
그리고 어떤 보고를 위하여 들어왔을 할리와 가엘을 향해 의자를 완전히 돌렸다.
나는 씩 웃었다.
“자, 그래. 오늘은 어떤가.”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에 나의 숨은 차분하게 폐로 돌아와 천천히 고였다. 이 영지로 내려온 지 두 달. 느렸지만 성과라는 게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불량했던 내 자세를 좀 더 바르게 고쳤다. 의자의 등받이가 부드럽게 내 허리를 받치며 올라왔다. 그럴 줄 알았어. 있을 줄 알았다니까. 아무렴, 아무리 넓어도 내 영지인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조리 알아야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든 가능한 것이든 상관없다. 나는 다 알아야 했다.
내가 오드리나로부터 데려온 기사들이 할리를 제외하고 모두 전 공작이 상당히 신임했던 중년의 기사들인 이유는 이곳에서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여야 할 일. 예를 들면.
“어디에 있던가?”
“반자유시입니다.”
“그러라고 번성하게 둔 도시는 아닌데.”
사람을 족치는 일 같은.
한가로운 문답을 마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기쁘게 웃었다. 전 공작이 한 번도 살인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쥰의 모친이 어찌 ‘자살’했는지를 알고 있으니 그리 순진한 생각은 못할 밖에. 하루아침에 미로골목의 대장들이 사라지고 세력이 교체된 것도 그렇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나를 노릴까 하여 두고 보았더니 정말이지 하루아침에, 하루아침에 사라지더라.
전 공작은 아마 항상, 평생을 냉혹했다. 글에서 쥰을 천것이라 경멸하다가 에본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전 공작을 실망시키자, 그제야 결국 쥰을 후계자 삼았던 사람이다. 그런 간단한 설정 하나로 전 공작의 평생이 결정되었다.
나는 그가 킨들 라이네 산맥의 산 앞에서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그 내막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죽는다고 글을 썼고 글에서 그는 죽었다.
글 속에서 전 공작이 크게 언급된 건 오직 그 두 사건뿐.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 와서 그를 겪었다. 이십 년 정도를 겪으며, 어느 구석에서의 공적인 믿음 정도는 가져도 될 것이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기사들이 전 공작의 보좌처럼 내 권위에 도전을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짙었다면 방법은 달리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전 공작과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십 년을 함께한 기사들이라서. 각자의 가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 하여도, 결국에는 충성스럽고 우직한 라이네의 기사들이라서.
나는 내가 겪은 전 공작을 믿으며 그 기사들을 쓸 것이다.
“…….”
음. 쓸……. 사용할……. 이용할……?
갑자기 새삼스럽게 내가 자연스럽게 선택한 단어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저들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을 하였나. 나와 같은 인간은 맞는가. 그러나 선을 긋고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전보다는 훨씬 유해진 생각이었다. 난 물끄러미 두 기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생그레 웃었다.
“수고했어. 그간 욕봤네. 여기로 출발할 땐, 설마 두 달이나 평민행세를 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나는 이들에 대한 나의 인식 따위를 심각하게 고민할 생각이 없었다. 적당하게 말을 돌리자 할리와 가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못한 것 같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리를 먼저 내보내고 나서, 가엘에게 찬찬히 말을 걸었다.
“경은, 경들은 조금만 더 수고해주게.”
움직이는 기사들은 가엘과 할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할리를 제외하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나는 웃었다.
“길게 할 것도 없고 깊게 할 것도 없어. 꼬리를 잡아낼 정도면 충분해.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팔게.”
책상을 돌아 나와 베르제르의 등받이에 기대어 섰다. 가엘의 묵직한 시선에 드디어 흔들림이 보였다. 저것은 전 공작과 함께 헤쳐오고 겪어온 세월이 어린 것이다. 나 역시 이 세계에서 언젠가는 정상적으로 나이 들 테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저런 눈빛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런 게 낫지.
웃음으로 가리는 것은, 때때로 사람을 지치게 해서.
나는 픽 웃으며 팔짱을 끼었고 가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함을 사용하란 말씀이십니까?”
“내 이름뿐만이 아니야. 경의 신분도, 어쩌면 경의 명예도 사용해 주어야겠어. 그리고 나를 죽이겠다고 하게.”
“……각하.”
“나를 죽이고 싶다고. 전 공작께서 졸하신 뒤에 새로 오른 공작이 경을 영 중용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가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걸어야 하는 가장 큰 것은, 그의 명예가 아니라 내 이름이어야 한다.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나는 이 일에 할리와 같은 젊은 기사가 아니라 가엘을 필두로 하여 전 공작을 오래도록 겪은 기사들을 선택했다.
잠잠히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 자칫 각하께 정말 자객이 도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위험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할 수 있겠나.”
“예.”
대답은 순순히 떨어져 나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흐음 소리 내며 길게 뱉어냈다. 그리고 가엘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사의 명예를 생각하면, 어려운 명령을 내린 걸 알아.”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기사는 주군의 일신과 주군의 명예를 지킬 때 가장 명예로울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이 일을 마다할 기사는 라이네에 아무도 없습니다.”
……글쎄, 그 말은 고맙지만, 실로 그런지는 생각해 볼 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하군. 고맙네. 나가서 쉬게.”
그러자 가엘이 내게 예를 갖춘 뒤 퇴실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팔짱을 꼈던 오른 손을 올려 뒷목을 슥슥 쓸었다.
아, 정말 무언가 결과가 나오긴 하는군.
오드리나에서 데려온 기사들을 포함하여, 이 성에서 나를 지킬 기사 몇을 빼고 모두 휴가를 주었다. 그 중에서 내 명령을 따르고 있는 기사들은 오드리나의 기사들 전부와, 이곳 기사들 중 고르고 골라낸 셋이다.
레룩스를 포함하여 라이네령에 속하는 모든 영지를 속속들이 파헤쳐서 사람을 죽일 만한 자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내린 임무였다. 두 달 만에 어느 꼬리라도 잡아낸 것은 좋은 일이다. 미로 골목이 기묘한 것이지, 보통은 비밀리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집단일 테니까.
“음…….”
이제는 발리앙 중앙령과 그 주변 영지들에서 소식이 오면 되는데.
그쪽에 라이네의 기사들을 다수 파견하는 것은, 아, 그것은 그야말로 지독하게 멍청한 짓이라서, 레룩스 안의 도시에 머무르고 있던 용병 몇을 고용했다. 그들을 감독할 사람으로는 윌리엄의 용병단을. 내가 라이네 공작인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는 건, 내가 영애일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
또, 오드리나로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평범한 발리앙의 영지민들에게 금은보화를 던져주고 유혹했다. 그것의 급부로 바란 것은 그들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거래는 성사되었지만, 금은보화에 목숨을 그렇게 쉬이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과연 위기의 순간에 퍽이나 목숨을 걸겠다 싶더라. 발리앙의 영지민을 오드리나로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들으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숨이 아니었다.
입 다물고 성공적으로 오드리나의 발리앙 저택에 고용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
그런 일에 불쌍한 내 영지민들을 고용할 순 없잖아. 라이네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랬고, 좀 더 현실적인 입장에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들켰을 때 라이네의 영지민이라는 게 밝혀지면 내가 엿 된다 하는.
“…….”
나는 삐죽 입을 내밀고 푸우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목에 걸치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뒷목을 주물렀다.
그래서, 그들은, 제대로 저택에 고용되었을까?
하나가 풀리려 하니 다른 것들도 궁금해진다. 시간을 길게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내가 오드리나를 비운 새 아리엘은 또 무얼 하고 있을 것인지도 궁금하고. 베르덴은 또 어떨까. 발리앙 후작은 아직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지.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면 연락이 오리. 쥰에게서든, 내가 여기로 오기 전 따로 부탁해둔 사람에게서든.
나는 여기에 내려오지 않은 쥰을 간만에 떠올리고 한숨 쉬듯 짧게 웃었다. 생각이 맥락이 없는 건 여전하군. 결국 도달한 곳이 쥰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혀 비웃게 된다. 그러나 내 어린 동생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뜨뜻하게 데워서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이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돌려받을 길 없이 사랑만 옴팡 외치다 점점 더 지쳐갔던 일방통행의 우애라 해도 어쩔 수가 없겠는데, 하물며 나를 보며 제발 저를 놓지 마라 하는 안쓰러운 동생이랴. 그를 향한 이 애정과 염려가 마땅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손을 내렸다.
힐끔 시계를 보니, 앞으로 반시간 안에 석찬을 알리러 오겠다. 그러나 잠시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쉴 시간이 필요했다. 시종이 잘 걸어 놓은 겉옷부터 낚아챈 뒤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기사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지. 너희들도 내가 무얼 말할지 아는 거지. 나는 우울한 척 한숨을 푹 쉬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재미없구먼. 놀러 가세.”
그러자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파르르 떨었다.
음. 우울한 척은 그 정도로 하고. 나는 표정을 싹 바꾸어 싱글벙글 웃으면서 먼저 발을 떼었다. 긴 겉옷을 뒤로 펄럭 돌려 소매에 팔을 꿰자, 두터운 코트가 내 몸을 거의 휘감다시피 하였다가 풀렸다.
기사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나를 따라오는 게 들렸다. 결국 누군가는 내 뒤에서 간절하게 말을 걸더라.
“각하. 겨울은 정말, 정말, 매일 매시간이 위험합니다. 제발.”
“그래서 가겠다는 거 아닌가. 매번 이럴 거야? 재미없네.”
여차할 시 던져지는 목숨은 저희 목숨이고 각하 목숨은 아니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그것은 민간인의 생각이고, 주군을 모시는 기사라면 그럴 일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장한 선입관이나 조금 전 가엘의 발언을 고려해 보면 날 위해 기꺼이 생명을 던질 테지만, 음, 과연.
날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버릴 것은 그리 의심하지 않지만, 실로 그 마음에는 억울함 한 점 없을 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이이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아무래도…….
“아.”
갑자기 떠오른 것에 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자리에 멈춰 섰다.
“각하? 무슨 일, 혹시 가지 않기로 하신 겁니까?”
“장갑을 잊었네.”
“…….”
우리는 다시 내 집무실로 돌아갔다.
물론, 장갑을 핑계로 삼아 외출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놀러가자는 말 중 적어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농담이었던 적 없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땅에서 보내는 시간이라 해봤자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왕복 두 시간으로 말과 기사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말을 놓고 내려서 주변을 몇 번 빙빙 돌았다. 한가로운 산책처럼 보인다면, 그것도 좋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몸을 굽힌 나는 검지와 중지의 끝으로 가볍게 땅을 훑고, 훑고, ……훑는 것이다.
나는 소리 없이 길게 한숨을 쉬며 땅을 계속해서 쓸었다.
어째서인지 이 땅은 올 때마다 새로이 도달한 땅처럼 느낌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그 새로운 느낌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얼 말하는 건지 나는 안다.
새 단장을 하는 나의 살의다.
범인이 발리앙이든 생각하지 못한 어떤 정적이든 반드시 잡아내고 말겠지만, 아, 이 살의는 참 잔잔하고 늪처럼 끈적끈적했다. 한 주걱 퍼 올리면 끈끈하게 늘어져 뚝, 뚝 바닥에 고일 법한 것이었다.
“…….”
주변을 경계하는 기사들 아무도 나를 방해치 않았다.
이곳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전 공작 일행이 괴물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 장소, 결국 나 역시 끼어든 의미도 없는 것처럼 쓰러지고 말았던 이 장소.
나는 라이네령에 내려와 생활을 시작한 이후, 괴물들의 무기에 독을 바른 게 괴물들의 자의라고는 점점 생각지 못하게 되었다. 살의의 향방을 괴물이 아닌 사람에게 돌리고 싶어 하는 것뿐일 수도 있음을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마음을 거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 공작의 사망에 내 탓도 있으나, 에본느의 숙부 되는 사람 외에 누구 다른 자가 관여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잡아내리.
그리하여 네가 누구든, 함께, 지옥에 가자.
“…….”
나는 손끝 마디에 힘을 주고 땅에 대었다. 몸의 무게를 그리 버티며 고개를 들어 산 쪽을 보았다. 저 산, 괴물들이 내려온 산. 저 산에도 반드시 올라야 한다. 전 공작 일행이 그 괴물들을 몰살시켰다고는 하나, 습격한 괴물들의 수로 보면 무리에서 몇 개체 떨어져나온 것일 테고. 그 수가 그 족속 괴물들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살던 근거지가 있을 터. 나는 어느 하나라도 잡아내길 원했다.
내 기사들의 생명을 괜한 이유로 때려 박아 넣을 수는 없으니, 근거가 하나라도 잡혀야 올라가겠으나…….
차라리 한 마리라도 지금 내려와 주면 좋을 것을. 어찌 된 게 전 공작의 일 이후로 한 마리도 내려오지 않나.
내가 그러니 더 의심하게 되지 않아.
등 뒤에서 칼바람이 불어왔다. 귓바퀴가 아플 정도로 시렸다. 잔머리가 앞으로 날다 이마 위로 흩어지는 것을 참으며 나는 비린 웃음을 소리 없이 지었다.
허기져 내려와 영지민들을 습격하는 것도 안 될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차라리 내려와 주길 바란다. 나 그때에는 거침없이 등반하여 괴물들을 도륙하며 그것들의 꼬리 하나라도 찾아낼 것이다.
“…….”
흙 묻은 끝을 떨어내며 손을 거두어 들였다.
땅에 대고 있던 무릎을 펴며 몸을 세우자, 찬 기운을 맞는 면적이 커져 점점 추워진다. 나는 뜨거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해 짧은 겨울의 오후. 저 먼 곳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은 어둑한 보라색, 연보라색, 짙은 남색이 번진 채다. 끊김 없이 길게 뻗어나가는 이 길이 종국에는 하늘에 뛰어들어 박힌 것 같았다.
찬 공기로 숨 막혔다.
나는 입을 조금 벌려 훅, 훅 호흡을 가다듬다가 손을 올려 목덜미를 쓸었다. 언제까지 영지에 머무를 수 있을지를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 두는 게 좋다. 시퍼런 의욕 같은 것이 새삼스레 슬쩍 머리를 드는 것을 느끼고 다시 수면 아래로 밟아 넣었다. 살의는 새롭게 하되 새로운 의욕은 쓸모없다. 나는 변함없이 지내며 일을 진행할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황제가 붕어하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올해의 언젠가.
그 전까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은 전부 해두고 상경하여야 할 터.
주어진 시간이 긴지 짧은지는 모르겠으나 인내는 길어야 한다. 사람들을 움직여 두었으니 언젠가는 보고가 들어오겠지. 조급해 하여 좋을 게 무어야. 아리엘에게서 내 목숨을 살리는 것은 오드리나에 올라가서 다시 맞닥뜨릴 일이고, 이곳에서 내가 눈을 두고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이미 절명한 전 공작에 대한 것.
손을 올려 허리춤을 매만졌다.
전 공작의 사망에 혹 아리엘이 관련되어 있다면 앞으로 내가 어찌 할 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된다.
내가 그때에도 아리엘의 선한 성정에 대해 집착을 놓지 못할 지는 그때 가서.
“음-흠.”
그러나 그런 염려도 빠르다. 아리엘이 아닐 수도 있으니. 발리앙이, 아닐 수도, 있으니.
그래, 베르덴. 나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재미있어하며 턱을 쓸었다. 하여간 오드리나에 무슨 변화가 있을 때 베르덴에게서 어떤 보고가 날아올지 실로 궁금하다니까. 아리엘을 어떻게 감싸고 포장할까 하여.
아, 이제 되었다.
나는 흐느끼는 것 같은 웃음을 접고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지.”
해야 할 일들이 많다.
============================ 작품 후기 ============================
nanakimono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글 열심히 쓰겠습니다!:D
이번 챕터는 2-4편 안으로 끝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외전으로 내용을 따로 뺄지 아닐지에 따라서 편수가 좀 더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음. 잘 모르겠습니다. 전개 관련해서는 제가 어찌할 방법이 없어 따로 피드백을 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문체가 헷갈린다는 말씀을 듣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가면꽃 수정을 거치며 가장 일순위로 두었던 부분이 문체와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가볍게 하는 것이었는데, 수정 후 다시 여기까지 오면서 또 무거워진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사용한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글이 많이 어려우시나요?ㅠㅠ
혹시 뭔가 짚어주실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짚어주세요. 하지만 요즘의 제 멘탈을 살피시어 부디 포장을 둥글게, 둥글게.......(덜덜/눈물)
반자유시는 아마도 이 글과 제 다른 글만의 독특한 도시 같긴 한데, 찾으면 비슷한 개념의 다른 단어가 나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시(free city)를 아주 많이 변형한 도시인데, 영어로 굳이 풀어보자면 half-free city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반자유시는 영주 직할+황제 직할이 섞인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자유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