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55화 (55/157)

00055 -CHAPTER 에스메. 백조 =========================

여자가 데려온 남자아이는 일단 별저로 치워졌다.

라이네 가문의 사람을 빼닮은 남자아이였기 때문에, 실지 나이대로 계산하면 스완이 살아있을 때 에스메가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라는 말이 나올 게 눈에 보이듯 분명했던 탓이다.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세 살이던 아이는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언가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바뀌어도 아이의 존재는 바깥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이의 모친인 여자도 자주 둘러보지 않는 별저를, 그의 딸이 부지런히 살폈다. 남아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창문 바깥이 다였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은 그의 딸이 들려주는 세상이 전부였다.

에스메는 남아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다가, 딸의 일상을 전해 듣는 중에나 남아의 존재를 떠올리곤 했다.

그의 부인은 오로지 스완이었으며, 그의 자식은 오로지 한 아이뿐이었다.

그는 자랄수록 스완을 닮아가는 딸을 보며 기뻐했고, 행복해했고, 십 중 구의 지분으로 슬퍼하였다.

아이가 날이 갈수록 기품, 우아함과는 멀어져 갔기 때문에 스완의 언동을 떠올릴 새가 점점 많아졌다. 피는 속이지 못하여 그 얼굴에도 언뜻 언뜻, 죽은 아내가 보이는데, 상황과 자리를 가려가며 말괄량이처럼 행동하는 걸 보면 그저 스완이더라.

속은 괴로울 만큼 밀도 높게 차 있으면서, 겉은 시원한 웃음, 농담, 장난. 웃음. 항상, 웃음.

어리지 못했던 딸은 ‘유치하고 미숙함’을 가장했다. 스완을 겪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 수 없었던 건 딸이 구별하는 표현의 뜻이었다. 여자의 거짓을 ‘이해’한다 하면서도 남아를 향한 저 애정은 또 무엇이며, 여자를 향한 극진한 예의는 또 무엇인가. 딸은 날마다 두 이방인에게 몹시도 성실했다.

그 외에는 계획대로였다. 딸은 천진난만한 체하고 있었으나 잘 지내고 있었고, 여자와 남아는 제 분수를 아는 것으로 보였다. 딸이 열네 살 되던 무렵, 남아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태어난 지도 몰랐던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라이네 소공녀가 내 동생, 내 동생하며 살갑게 살피니 사람들의 경악이 상당했다. 황제는 에스메를 불러 친히 하문하기까지 했다. 계획대로 답을 올리니, 근엄하게 빙빙 꼰 ‘그렇게 내보일 줄은 몰라서 늙은이 심장 떨어질 뻔 했다. 네놈 그렇게 살다가 훅 간다’는 요지의 말을 들었다. 잘 포장한 욕설이었다. 아이를 내보이기 전부터 아이의 존재에 대하여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제의 휘하에 있는 밀정들은 가끔 보면 능력이 지독하게 좋았다.

남자아이의 나이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했다. 바라던 바다. 라이네의 그 누구도 그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딸이 스완의 색을 벗어났다. 붉은 색, 보라 색 한데 섞여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어디 가고 잘 염색된 가을이 있었다. 에스메는, 정말, 대노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뺨을 내리쳤다. 딸은 그저 웃었다. 머리색이 돌아오도록 가만히 두고 다시는 염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에도 대답 없이 웃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 첫 손찌검 이후로 딸은 다시는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보이는 웃음은 장난기 일색이었고, 종종 빈정거렸으며, 그의 뜻과는 반대로 행하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일인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하여 일어난 첫 가출.

에스메는 딸이 남긴 짧은 서간을 허탈하게 들여다보았다.

<바깥에 괴물이 있는 것도 알고, 얼마나 끔찍한 생김새인지, 얼마나 끔찍하게 사람을 죽이는지도 알며, 혹은 더 심하여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는 것도 압니다. 세상 물정 몰라서 겁 없이 홀로 나가는 게 아닙니다. 죽으러 가는 것 역시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두 달 정도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적 뚜렷하고, 기간 뚜렷하고, 귀환의사 뚜렷하니 사람 풀어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풍족하게 대접 받으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

죄송하다는 사죄도 없다. 바깥이 위험한 줄 알면 나가질 말아야지. 이래서야 아는 의미가 없지 않나. 게다가 끄트머리에는 농담을 놓치지 않았다.

여자를 들이도록 결정한 날 이후로 딸의 영특함을 의심해본 적 없지만, 염려는 또 다른 것이다. 그는 당연히 기사들을 풀었다. 라이네 영지로 전령을 보내, 사람들을 풀어 딸의 행방을 찾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그 명령에 대한 화답으로, 라이네 소공녀께서 그곳의 신전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어찌나 허탈했던가. 비밀리에 잘 감시하고 안전에 힘쓰라는 명령을 다시 보냈다.

딸은 예고했던 두 달이 아니라, 한 달 만에 귀가했다. 알고 있던 에스메는 특별히 노하지도, 특별히 기뻐하지도 아니하며 덤덤하게 딸을 맞이했다. 그리고 딸이 돌아오는 길에 괴물들을 만나 물 만난 고기처럼 검을 쓴 사실을 보고 받고나서는 그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딸을 비밀리에 호위하였던 기사들의 입을 단단히 봉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는 공작이 되지 않겠다며 선언하는 딸을 보아야 했다.

에스메는, 처음에는, 멍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둘째로는. 분노였다. 스완이 죽은 이후로 이리도 분노하였던 적이 없었을 정도다. 딸이 염색했을 때와도 비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죽지 않았는데.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데! 감히 네가! 감히!

“너는 공작이 될 것이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말했다. 그러자 딸이 웃었다.

“쥰이 될 거예요.”

이후 딸은 수도 없이 오드리나를 떠났다. 딸이 사교모임에 모습을 보이다 보이지 않기를 반복하는 이유를 일단은 요양으로 지정하였지만, 그게 아닌 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어떤 자들은 친구인 헤르조의 방랑벽에 물들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에스메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딸은 그 아이만의 생각이 있고, 심지가 있었다. 딸이 얻고자 하는 이익과 헤르조가 얻고자 하는 이익이 맞물리기 때문에 함께 떠나곤 하는 것이다. 그는 일견 딸이 헤르조와 가장 친해 보이는 관계임을 알면서도 그 관계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가출을 종용한 적 없으나, 그렇다 하여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아이의 한때의 방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딸은 여행을 다녀온 후에 에스메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하는 모습도 보였고, 사교 모임에도 종종 참석했다.

그 정도만 유지해주어도 되었다.

에스메는 딸이 ‘미련한’ 짓을 하면 그때에 남아는 스스로 자진할 것을 약속받은 채였다. 여자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아는 제 분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아가 불순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그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된다면, 남아를 처리할 생각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부질없었음을 깨달은 건 딸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어느 날.

그는 일을 하다 잠시 한숨을 돌릴 겸 창밖을 보았다. 마침 그의 딸이 활기차게 나무를 오르고 있더라. 저기에서 베르덴이 달려오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도망친 모양이었다.

딸은 뛰어내렸고, 베르덴을 달고 쫄랑쫄랑 박자를 타며 걷기 시작했다. 사달이 거기서 일어났다. 그는 딸이 갑자기 멈춰 서서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숨이 껄떡껄떡 넘어갔다.

에스메는 집무실을 박차고 달려 내려갔다.

베르덴이 소리쳐 용인들이 모이고, 누군가는 의사와 신관을 외치며 달려갔다.

달려온 의사의 간단한 진찰 후, 마찬가지로 의사의 주도 하에 딸은 조심스럽게 방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다시 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딸의 몸을 살필 것을 요구한 뒤, 에스메와 함께 잠시 바깥에 나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봉신가문의 영애들이다. 어지간해서는 소리를 높이지 않도록 예법에 능숙한.

혼비백산하여 뛰어나온 시녀가 상황을 말했다. 에스메는 딸의 상태를 듣자마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불과, 천으로 잘 덮인 상체는 복부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확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가 그곳에. 자상 주위로 일어난 살덩이는 붉고, 검고, 꽃물이 든 것처럼 시퍼렇게 부어있었다.

이제 막 난 것 같은 그것은 아직 신관에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날 다 큰 딸의 몸에 얼마나의 상처가 있는지를 보았다. 신관에게 보인 것 같은데도 아주 미세한 흔적이 남아있는 걸 보면, 얼마나 깊이 다쳤었는지, 심하게 다쳤었는지 짐작이 갔다.

다 치료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상처도 있을 텐데.

설마 여행에서 이랬느냐고 하기에는, 아직 신관에게 보이지 않은 상처가 길어도 이삼 일 이내의 것이다.

이 무슨 일이냐고 베르덴에게 물었으나 기사는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근래 일주일 간 딸은 어디에도 외출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침부터 오후까지의 일이다. 혹 또 벽을 타고 내려가 몰래 외출했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유유히 저택을 빠져나가곤 하는 딸인지라, 선택지가 많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딸의 방에 암살자가 찾아들었다.

깨어나지 못한 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에스메에게는 마른하늘에 생벼락이었다.

그의 호위를 위하여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 들어와 암살자들을 제압했으나, 생포한 놈마저 곧바로 자살하고 말았다. 각 위치에서 시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사들도,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쳤다. 이것이 내내 일어나고 있던 일이라면.

에스메는 떨리는 숨을 쉬었다. 기사 하나가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각하.”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오드리나 안에서 이런 저급한 일을 하는 자들이 숨어있는 곳은 한 곳이다.

“기사들을 기상시키고 흑색 옷을 입히도록. 지금, 미로골목으로 간다.”

“존명.”

그날 그는 미로골목을 조용히, 충분히 뒤집었다. 수백 정도가 살고 있을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다섯 수괴들을 납치했다. 물론 그 와중에 죽인 죄인들이 기십이다. 그와 그의 기사들은 기민하고 빠르게 치고 빠졌다. 이들이 범죄자들이라 하나 살해는 죄다. 라이네에서 왔다는 증거가 하나라도 남기 전에 깔끔하게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다섯을 라이네의 옥에 집어넣고 물었다. 라이네 소공녀에게 자객들을 보낸 자는 너희 중 누구며, 라이네 소공녀에게 암살을 사주한 자가 누구냐. 죄인들은 미친 것처럼 웃고 울었다. 고문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정보를 알아낼 만큼 알아낸 뒤에는 제 손, 제 검으로 목을 잘랐다.

피가 튄 얼굴로 잠시간 서 있었다. 함께 있던 기사들 누구도 이 새벽의 그를 막아서지 않았었다. 그저 그를 따랐고, 지금도 그의 주위에 있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들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참, 잘된 일이다.

이번 일에 자비는 없다.

그는 입을 열었다.

“잡아라.”

기사 둘이 뛰어가, 계단을 뛰어올라가려 하던 하인 하나를 잡아왔다. 죄인들에게 고발당한 하인이 벌벌 떨며 악을 질렀다.

“어, 어,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각하!”

에스메는 몸을 굽혀, 자객들을 딸에게 보낸 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러하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걸 주장하기엔 네가 여기까지 숨어 따라온 이유가 없으며, 네 주인에게는 동기가 있다. 죽여라.”

하인의 증언이 필요했다면 살려두었겠지만, 에스메는 여자를 살려둘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

즉시 발검한 기사 하나가 하인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기사들은 에스메의 명에 따라, 하인의 목을 제외한 나머지 몸뚱어리를 참수된 다섯 시신들의 옆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지상으로 올라온 에스메는 기사들 중 셋을 지명하고 나머지에게는 이제는 씻고 쉬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본관으로 걸어갔다. 동이 터오려 했다. 그는 새벽녘의 시퍼런 하늘을 등지고 여자의 방에 입실했다.

여자는 자고 있었다.

딸이 쓰러진 소란을 들었을 텐데도 암살 시도를 멈추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도달했다. 이 여자와 미로골목의 손발이 맞지 않은 ‘덕분’에. 에스메의 손짓에 기사들이 여자의 양 팔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비몽사몽간에 흐린 눈을 뜬 여자는 직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각하?”

에스메는 일순 이를 악물었다 놓았다. 제 무능함에 차마 아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비라 하며, 한 가문의 가주라 하며, 그러나 딸에게 살림을 맡기고 관리에서 손을 놓다시피 했더니 이 지경이다. 이는 딸의 무능이 아니라 그의 무능이었다.

딸은 잘 꾸려나가며 잘 버티고 있었다. ‘버티고’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너는 에본느를 죽이려 했다.”

짓씹어 뱉었다.

“죽……. 제가, 제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여자는 그제야 잠이 확 깬 목소리로 주장했다. 그에 에스메의 차가운 표정에 구김이 갔다. 여자의 눈이 그의 손으로 내려가려 하자, 그는 여자에게 좀 더 다가가 빈손을 들어 여자의 턱을 잡고 치켜들도록 했다.

피로 물든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게 된 여자가 떨기 시작했으나, 그가 안타까워 할 리 만무하다. 그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로골목의 죄인들이 토설했다.”

“그런 자들의 말만 듣고, 허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미로골목에 분명히 반응했다. 에스메는 코웃음을 웃으며 여자의 턱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그자들처럼 고문, 받겠나. 아니면 얌전히 인정하겠나.”

들고 있던 목을 여자의 앞에 던졌다. 그리고 다른 기사에게서 하인의 목을 받아 여자에게 똑똑히 보였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기사들이 팔을 놓자마자 주저앉고 말리라. 그러나 여자에겐 그런 자유도 없었다.

“사실을 고백할 때까지 손가락을 자를 것이며, 그 다음은 살가죽을 벗길 것이다.”

“아, 아니…….”

“거짓을 말해도 그렇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이어 번뜩이기 시작한 안광은 그의 것처럼 날카롭고 독이 올라 있었다. 여자는 소리쳤다.

“스완! 스완 그 여자만 항상! 당신은 항상!”

“…….”

“왜 그 여자는 죽여도 죽질 않는 건데! 왜 당신은 나를 보질 않아!”

기사들의 숨이 흠칫 놀랐다.

“왜, 왜……. 왜 자랄수록 닮아서……. 왜 스완만. 그 여자만. 그 여자만!”

펑펑 쏟는 고백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아, 그렇구나. 에스메는 이해했다. 그래서, 스완이, 죽었구나. 그의 입술이 가늘게 올라갔다.

네가, 죽였구나.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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