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54화 (54/157)

00054 -CHAPTER 에스메. 백조 =========================

일곱 살 아이의 박력이 대단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가 아이와 그를 번갈아보았다. 에스메는 여자에게 말했다.

“못 들었나.”

“각하…….”

가느다랗게 그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가주간의 대화도 아니었고, 그의 생각으로는 이 대화는 딸의 요구보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딸을 위해 아직 문을 잡아주고 있던 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이 여자를 지켜보고 있게.”

“예. 각하.”

찬 비처럼 떨어진 축객령을 맞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실의 행사에는 참여할 수 있되 라이네에는 미치지 못하는 가문의 영애로 살아온 세월, 오래도록 결혼치 못한 여자로 부모 밑에서 싸늘한 보호를 받아온 세월이 길다. 이 정도 눈치는 응당 길렀어야 마땅했다.

여자가, 에스메의 딸이 잡고 있는 남아를 함께 데리고 나가고자 손을 뻗자, 딸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부인.”

기실 부인이라는 호칭은 틀렸다. 정정해줄 마음이 들지 않아서 가만히 있지마는.

여자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에스메는 여자에게 다시 말하느니 차라리 기사에게 눈짓하여 한시라도 일찍 여자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다. 망설이는가 싶던 여자는 결국 기사의 정중한 압박에 못 이겨 아이를 두고 나갔다.

설마 딸 앞에서 아이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았을까.

그는 의도, 언행 하나하나가 다 거슬리는 여자에게서 눈을 돌려 딸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그리고 흐려졌다. 조금 전 스완에 대해 들어서 그럴까, 스완과 꼭 닮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그를 잠식했다.

“……무슨 일이지?”

참 덧없다. 딸을 향하여는 살가운 음성도 내지 못하면서.

그러나 어린 딸은 아이를 데리고 쫑쫑 걸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살갑지 못한 대응에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듯했다. 외려 상관없는 남아 쪽이 움츠러들었다. 에스메는 가만히 남자아이를 보다 딸의 작고 당찬 얼굴을 보았다.

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써는 저는 유일하게 후계자 될 것으로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하여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에스메는 애정 어린 웃음이 나올 듯, 기가 막힌 헛웃음이 나올 듯, 슬픈 듯, 화가 난 듯, 제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이 옳다. 친동생도 아닌 아이가 갑자기 동생이랍시고 나타나면, 현재 딸의 입장에 서 있는 귀족 가문 직계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딸에게는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이리도 영리하고 똑 부러지게 주장해 올 줄은 몰랐다.

겨우 일곱 살.

자신이 일곱 살일 적, 누군가가 제게 소름끼치다 했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했던 것은 이미 잊었다. 그의 눈에 비친 일곱 살 딸아이는 어렸다. 좀 더 뛰놀고, 좀 더 순진하게 까르르 웃고, 좀 더 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들 속에 파묻혀도 될 나이. 그래도 될 아이. 스완이 있었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스완이 살아있었다면 그의 세상도 여전히…….

“…….”

생각을 멈추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약간 돌렸다. 하, 하고 벌어진 입에서 물기 어린 감정이 나오고 말았다. 그는 천정, 창문, 책장, 바닥, 여기저기 눈을 돌리며 마음을 도로 잠갔다. 스완. 스완. 스완. 떠올리면 끝이 없다. 사랑스러운 웃음. 사랑스러운 눈빛. 사랑스러운 손짓. 사랑스러운 음성. 추억하면 무너질 뿐.

애초에 저런 여자의 입이 가볍게 담아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침으로 목을 적시며 딸에게 눈을 주었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허락했다.

“말해라.”

딸은 고개를 한 번 느리게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무얼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결정을 내리실 때 저에 대해 고려하실지 아닐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괘념치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아빠! 꽃이 피었어요! 꼬옷!

일 년여 전만 해도 까르르 웃으며 달려오던 아이가 겹쳐졌다.

에스메는 이 대화에 열중한 것 같은, 그러나 웃음 사이로 몹시도 날 세워 경계하고 있는 얼굴과, 표정, 눈빛을 보다 눈꺼풀을 아주 조금 내려감았다. 딸은 지금 웃고 있으나 저 웃음, 저것이야말로 그가 스완의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끼리 잡고 있는 손을 흘끗 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들어오고, 이 아이가 계승권을 가지게 되면, 훗날 이 아이가 공작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상당히 분석적인 대답이 나왔다. 예상치 못했다. 그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상황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

“가신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수 년 전부터 어떤 의혹을 받고 계시는지. 흠집이 모이다보면 결국 엉망진창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왼쪽 눈가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일단은 충격이었다. 날카로운 불줄기 하나가 머리를 후려친 것처럼 눈앞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딸에게 그 ‘다른 상황’이라 하는 것들을 전한 자들을 향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불처럼 솟구쳤다. 죽도록, 죽도록 매질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도대체 처신을 어찌 하고 다니기에 그의 어린 딸이 상황을 알게 되는가.

에스메는 손을 올려 이마를 짚으려다,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숨을 옅게 내쉬었다. 명치께가 흔들렸다.

딸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우선적으로 지키셔야 하는 게 가문이듯, 이 가문의 여식된 제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도 가문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조금도 불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결국 딸의 나이를 버렸다.

딸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흐뭇하지도 않다. 미치도록 절망적이었다. 에스메는 떨리려 하는 입가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리고 잔잔한 경련이 멈출 때쯤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 여자에게서 무엇을 들었느냐.”

“온갖 거짓을 들었습니다.”

“무슨 거짓.”

“이것저것.”

목소리는 또렷했으나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말을 흐린 것이다. 나이를 생각하지 않으니 제 앞에 어느 정도 큰 소녀나 성인이 있는 듯했다. 기시감에서 이어진 수십 년 전의 기억도 부상했다.

그는 어리나 어리지 않았던 한 여인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리도 닮았나. 어쩌면, 이리도, 너는, 당신은.

허탈한 웃음을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네 어머니가.”

“…….”

“……네 어머니가 너를 어찌 사랑하였는지 기억하느냐?”

딸의 웃음이 살짝 부서졌다가 돌아왔다.

“예.”

딸은 확신에 차보이도록 분명하게 대답하였으나, 그는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사랑했는지 기억한다면 그런 무감정한 얼굴은 지을 수가 없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문이 닫힌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활짝 열었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는 공작이 되기 위하여 나서 공작이 되기 위하여 자랐고, 그리하여 공작된 사람이다. 내뱉는 허망함은 이 정도로 되었다.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다시 불려온 여자를 앞에 두고, 그는 덤덤하게 물었다.

“어째서 내 동생의 여인과 자식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나. 그리하여도 너흰 라이네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 터.”

남부럽지 않을 만큼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다. 그것이 차라리 나은 방법이었는데, 어째서 그의 부인인가.

“그쪽으로 물러도 지원해 주지.”

“저는 각하의 옆을 원합니다.”

기회를 주어도 차는군. 에스메는 한숨을 삼키고 단언했다.

“무얼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인은 불가하다.”

“각하.”

“그러나 저택에 들어와 내 부인 행세를 하는 것은 묵인하겠다.”

여차하면 버리겠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바랐던 건 이것이 아니었는지, 여자는 다시금 차가운 협박을 내어놓았다.

“소문이 퍼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네가 진실로 라이네의 안주인이 되고 동생의 여자였던 자를 내가 안주인으로 들였다는 소문보다야 낫겠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헛소리.

에스메의 입매에 냉혹한 조소가 걸렸다.

“어찌 믿나. 소문을 퍼뜨리겠다 하는 말도 네 입에서 나왔다.”

동생의 여자를 제 부인으로 삼는 건 그가 가진 도덕심,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이 불가했다.

그리고 저 소문이 퍼지는 걸 막는다고, 이 여자를 공작가로 들인다면, 그렇다 하여 이 여자가 내막을 소문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없다.

인간의 혀는 믿을 게 못되는 것이었다.

동생의 여자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지금까지와 비할 수 없이 치명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동생의 아이를 내쳤다는 소문은 막을 수 있으면 막는 것이 좋다. 따라서 이것은 상책과 하책 사이의 중책 정도 되는 것.

일이 틀어질 시, 그와 라이네는 약간 더럽혀질지언정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었다.

‘동생을 가엾게 여겨 거두어주었더니 공작 모르게 안주인 운운하며 라이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그때 그는 모르는 척 하면 된다. 이 대화가 있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 마지막 안을 받아들이면 너는 그 소문을 차단시키고, 라이네에서 생활하면 된다.”

“…….”

“그리고 네 아이에게 계승권은 없다. 네 아이는 후계 위를 다툴 자격과 권리가 없으며, 후계는 반드시 에본느가 될 것이다.”

그가 아이에 대해 말하자, 여자는 그제야 아이를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 없다. 보통 이 정도로 수를 쓰는 것은, 아이가 계승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나 에스메는 내색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찌하겠나.”

잠시 생각하던 여자는 사서 번 모욕과 치욕을 받아들였다. 반쯤은 현명하고, 반쯤은 멍청한 선택이다. 에스메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바깥에 대기하고 있을 보좌를 태연하게 불러들였다.

그리고 바로 문서화 하도록 하였다.

보좌가 그가 불러주는 조항들을 일단 받아쓰고, 이후 문장을 다듬는 동안 에스메는 여자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딸이 모르기만 했어도, 그는 여자와 아이를 이 결정보다는 훨씬 거칠게 처리했을 것이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건, 누군가가 이미 이 음모를 알고 있다는 것이지만 아까도 말했듯, 여자가 동생의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더 끔찍하다. 둘 모두 동생과 부친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는 의혹을 심화시켜 줄 소문일 때, 그 중 하나를 반드시 짊어져야 한다면 차라리 전자를 짊어지는 게 타격이 훨씬 적을 터.

여자의 계획에서 누락되었던 건 에스메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배려심 깊은 정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이었다. 그의 딸만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여자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

스완의 유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그것은 알아낼 방도가 없으나, 스완이 죽은 지 어언 2년이다. 사실일지라도 어째서 이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스완에 대한 생각을 떨어냈다.

두 사람이 서명한 협의서는 그가 한 부 일단 가졌으며, 여자가 가져가야 할 나머지 한 부는 여자가 저택에 들어온 후에 주기로 했다. 문서를 바깥에서 ‘그새’ 잃어버렸다가 무슨 낭패를 보려고.

스완의 방을 요구하는 여자에게 준 것은 물론 손님방이었다.

방을 가볍게 재정비한 수일 후, 여자와 아이는 마침내 저택에 들어왔고, 그는 여자의 눈앞에서 문서를 봉인하고, 그것을 담은 상자를 여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비밀리에 문서는 바꿔치기 되었다. 하지 않아도 될 봉인을 왜 했겠는가. 훗날 문서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어도 그것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여자의 잘못이 될 뿐이라 여자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해야 마땅했다. 또한 그때쯤이면 여자의 일을 소문으로 퍼트리려 했던 자가 누군지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딸을 위한 안전장치였는데, 그것도 간단하게 해결 되었다.

스완이 사망한 이후 그가 맡고 있던 안살림은, 그 해부터 일곱 살의 딸에게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