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52화 (52/157)

00052 -CHAPTER 에스메. 백조 =========================

에스메 외전

-라이네 공작

개국 공신 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문. 천도를 하고 나서도 세력을 잃지 않은 가문. 어쩌면 현 황실보다도 더 순혈의 정당성이 있는 가문.

그 무게는 지독했다.

그것이 그가 오롯이 짐질 무언가였다.

에스메는 제 동생이 어릴 때부터 어리지 못했던 것을 보아왔다. 그가 목검을 가지고 으, 졸려, 따위의 느른한 기합을 넣으며 반 장난인 훈련을 받을 때, 그와 나이차 조금 나는 동생은 연무장에서 모래먼지 뒤집어쓰며 굴렀다. 그의 동생에게, 삶 어디에도 여유와 장난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그는 깨달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자리를 가져가기 위해서.

하, 이것 보게? 에스메는 조그마한 것이 발악하는 것을 어이없게 보았다. 누가 녀석에게 바람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랄 것을 바라야지 너무 큰 것을 바란다. 설마 저 어린 동생이 제 자리를 바랄 것이라 생각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깨달음이 늦었다. 동생이 부친에게 또랑또랑하게 하는 말을 듣지 못했으면 저 어린 몸 상할까 마냥 걱정스럽게 보고만 있을 뻔 했더랬다.

여섯 살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은 속내 검은 것을 어찌나 요망하게 잘 숨겼는지 모른다. 에스메의 앞에서는 그토록 착실하고 귀여운 동생은 세상에 따로 없을 것 같이 구는데, 이미 동생의 속을 알고 있는 에스메로서는 기가 막힐 밖에.

“아핫, 그 멍청한 얼굴은 또 뭐야?”

“……스완.”

동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 대련을 마치고, 잠시 서 있던 차였다.

상당히 멍하게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열아홉의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기척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으나, 다가온 사람이 스완이라 내심 납득했다.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동생에게는 격렬한 대련이었을 것임에도 불구,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이마부터 오른쪽 머리까지 쓱 쓸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몸은 피곤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유심히 보던 스완이 히죽 웃었다.

“표정 봐.”

“이봐요, 아가씨. 나보다는 당신 표정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한숨 어린 음성으로 익숙하게 퉁을 주고, 그녀가 건네는 겉옷을 받아 팔에 걸쳤다.

연무장을 사용 중이던 다른 기사가 다가와 그에게서 목검을 가져갔다. 다른 일로 내려왔다가 대련을 하게 된 터라 셔츠와 조끼차림이다. 접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기 시작하는데, 스완이 손을 뻗었다. 에스메는 팔을 가만히 내주었다.

소매를 가만가만 펴주는 손이 그의 팔 한 짝을 끝내고 다른 팔을 가져가려 하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다른 팔에 옮기고 또 팔을 내주었다. 그리고 달콤하게 물든 와인색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서, 무슨 일이지?”

“음……. 이번 황궁 무도회 때문에.”

“…….”

“나, 아마도르가 이번에 에스코트 해줄 거야.”

소매가 다 내려왔다. 팔을 거두고, 소매의 단추를 잠그며 그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응.”

특유의 짙은 적갈색의 눈동자가 그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빙긋 웃었다.

일주일 후에 열린 무도회에 에스메는 파트너 없이 입장했다. 거기까지는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제 친구가 어찌 웃는지 보았다.

부모들이 그들 어릴 적부터 친구로 붙여준 이들 중, 여태까지의 세월이 한 점 한 점 고스란히 남아 있도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스완 뿐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여전히 친구로는 지내되 그다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것 같지는 않은 가식적인 관계였고.

하여 스완은, 어찌 보면 마지막으로 남은 놀이친구이기도 하였다.

“…….”

그는 그녀가 발리앙 영식, 아마도르와 이야기를 나누다 수줍게 웃는 그녀를 잠시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스완이 얼마나 왈가닥인지는 알고 있기에, 저렇게 웃을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릴 때부터 '급이 맞는' 여아, 남아를 붙여둔 게 가문간의 교류 외에 다른 이유, 다른 기대 전혀 없었으랴. 커가며 상황이 급변하지 않는 이상 그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약혼할 것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면, 스완의 마음은 어쩌면 그에게 있지 않은 모양이라서.

스완을 위해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떠올리는 그의 검은 눈은 어두웠다. 캄캄한 무언가가 그의 숨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갑지 않은 부모보다도 더 익숙하고 더 가깝게 여겼던 이와 멀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아마, 아마도 그러했다. 예상치 못한 나약함이다.

그는 다가와 제게 말을 거는 한 영애를 언제나와 같이 정중히 물리친 뒤에, 테라스로 나갔다.

그에 앞서 머무르고 있던 한 쌍의 젊은이들은 그를 보고 테라스를 나가더라. 쫓아낼 의향이 없었기에 멈칫했으나, 옅은 한숨을 쉰 에스메는 커튼 옆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 커튼을 닫으라 명령했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숨 쉬었다.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 드는 것조차 피로했다. 하여 조용히 호흡하며 먼 곳을 보다가, 눈을 내려 감았다. 열린 옆 테라스나 그의 뒤에 있는 커튼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음악은 적당한 음량으로 줄어서 귀가 아프지 않다. 침묵하는 그의 주변에 온전치 않은 밤이 내렸다.

고동이 귓가에 울렸다.

궁, 구웅 뛰는 제 소리가 묘하게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어 눈 감은 속 어둠만 보기를 한참, 뒤에서 커튼을 열었다 다시 치는 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로부터 훅 끼쳐온 바람이 그의 등을 치고 머리를 흩트리며 코끝에 불었다.

……스완이다.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와중에 에스메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잔잔하던 호흡이 한 번 길고 깊어졌다.

“많이 피곤해?”

바로 옆에 와서 선 스완이 물었다. 그제야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난간에 올리고 있는 작은 두 손이었다. 흰 실크장갑으로 가려진 저 손의 거죽에 신관의 힘을 거친 상처가 얼마나 많았는지, 심지어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마저 있다는 사실을 이 사교계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생기지 않아도 되었을 상처가 다수이지만.

생성된 불덩이가 신기하다고 손을 대었다가 데고, 비처럼 내리는 독물이 신기하다고 손을 대었다가 붓고, 녹아내리고. 에스메는 작게 눈을 찌푸렸다 펴며 대답했다.

“조금.”

“그럼 돌아가자.”

돌아가라 하는 권유도 아니고, 돌아가자?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내려다보자, 스완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너 없으면 재미없고.”

세상 이런 말괄량이가 없다. 그 역시 픽 웃고 말았다.

“재미의 문제가……. 발리앙 영식은 어쩌려고.”

“조금도 질투하지 않았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박혔다. 날아와서, 난데없이 그를 찔렀다.

에스메는 돌이 되어버린 인간처럼 서서 그녀를 보았다. 스완은 여전히 웃으며, 그를 밧줄로 칭칭 묶을 것만 같이 영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그시 누르는 시선에 그는 어째서인지 숨이 막혔다.

스완은 단단한 사람이다.

온갖 부드러운 베일로 감싸인 기둥과도 같아서, 그는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때가 많았다. ……아니, 아니다. 많은 게 아니라, 항상.

에스메는 제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알 것 같다. 알겠다.

……안다.

그의 추억에 꽃이 피었다. 빛바랜, 빛바래지 않은 모든 마음이 스완의 색채로 다시 피어났다. 어째서 이 순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아,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길 바랐어?”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물었다.

난간에 단지 닿고만 있던 손이 덜덜 떨고 있는 것에 시선이 미쳤다. 그럼에도 스완은 변함없이 단단한 가면을 쓰고 고개를 끄덕이더라.

그녀에게로 돌아선 에스메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질투의 여부를 물을 때부터 이미 떨고 있었다. 간단하게 내쉰 질문처럼 들리지만,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덕분에. 그는 제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마음 역시 알게 되었다. 놓아줄 일 없다.

에스메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 옆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흠칫 놀라는 스완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서,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웠던 그의 손길은 좀 더 신중해졌다. 머리카락을 다 넘긴 손이 그녀의 뺨을 엄지로 쓸었고, 꼭 다물렸던 스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에스메는 옅게 웃었다.

“아주 성공적이야.”

따라서 전하는 게 옳다. 부끄러움에 취하여 그녀를 놓칠 여지는 단 하나라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어 제 오랜 마음을 전했다.

“사랑해.”

“아…….”

그러자 스완은 움질움질 입술을 움직이다, 손을 올렸다. 에스메는 그녀를 일단 보았다. 곡선을 그리며 잠시 추락했던 손은 다시 올라와 그의 팔뚝을 쥐었다. 하나 남은 끈인 것처럼 움켜쥔 힘은, 안타까울 정도로 가녀리기도 하였고 또 강하기도 했다.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에스메였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추자, 스완의 동그랗게 뜬 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에스메는 그 눈을 보다가 입 꼬리를 올렸다.

“입 맞출 건데, 허락은?”

“…….”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눈동자를 가렸다가 도로 열렸다.

이어 쪽, 하는 앙증맞은 소리가 났다. 작은 새처럼 날아왔다 떨어져나간 온기에 이번에는 에스메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먼저 입을 맞춘 스완은 아직도 손을 떨고 있으면서도 새침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자, 허락하-!”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삼켰다.

두 사람은 곧 약혼했고, 두 사람이 스물한 살 되던 해에 결혼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건 4년 후의 3월이었다. 제 엄마를 꼭 빼 닮아 색채가 붉은 여아는 예쁘지 않은 곳, 귀엽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막 태어나 목도 가누지 못하는 조카를 처음 만난 날, 에스메의 동생은 에스메에게 선고했다.

“나도 공작을 노릴 겁니다.”

알고 있던 일인데도 한순간에 지쳤다.

동생이 본관으로 돌아가고 난 후 에스메는 별저의 서재에서 창밖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너는 어린 조카를 보고 할 말이 그것밖에 없던가. 든 생각이, 그것밖에 없던가. 후에 스완이 그를 찾으러 올 때까지 그는 바깥 풍광을 보고, 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친은 이미 그를 후계자로 여겨 가내 문건들을 넘겨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모를 동생은, 아직도. 단순히 짐작에 그치는 것과 직접 입 밖에 내는 건 다르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형제의 정과 동생을 향한 내리사랑으로 모든 것을 ‘여전히 두고봐주고’ 감싸주기에는 이미 그에게는 지켜야 할 가정이 있었다.

에스메는 애초에 라이네 공작이 되기에 적합하게 부친의 손에 의해 성격을 가다듬고 세우고 깎인 부분이 있었다. 부친의 무정한 성정을 생각하면 놀랍게도, 적당한 부드러움과 유연한 웃음, 일견 하늘마저도 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보이는 자비심 등이 그가 배운 것이며, 에스메의 천생 성정은 냉철하며 무뚝뚝했다.

그는 동생이 섣부른 언행을 취할 시에 귀엽게 봐주며 넘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동생은 전과 같은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네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살롱에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부친과 사전에 의론을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부친도 상당히 노하여 동생을 다그친 모양이었다. 동생은 반발했다 한다.

에스메는 부친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콧숨을 쉬며 푹 웃었다.

부친은 그에게 일단은 좀 더 두고 볼 것을 다짐시켰다.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그를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그에게 후작위를 승작하도록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권력은 부친에게 있었다. 그는 존중하여 그 의견에 일단은 동의했다.

그리고 섭취하는 모든 것에 주의하도록 스완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사과했다. 스완과 아이에게 적어도 라이네 안에서만큼은 좋은 것만, 행복하고 기쁜 것만을 주고 싶었는데. 그러나 스완은 빙긋 웃으며 반문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당신과 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

“내게 미안해할 건 아무 것도 없어. 난 안도하는 중이야. 내가 없었다면 당신은 혼자여야 했잖아.”

에스메는 표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내가 그의 뺨을 쓰다듬자 쓸모없는 노력이 되고 말아서, 잠시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스완이 아가씨일 적과 그리 다르지 않게 씩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 아기한테는 사과를 해야겠다. 부모 잘못 만났지? 응? 태어나자마자 위험해지고 말이야.”

……응. 그래. 그러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을 안으며 속삭였다.

============================ 작품 후기 ============================

우리 독자님이 절 찾으시니 와야지요!♥

아버님의_과거(부제:어느 소설 남주).jpg

건조하게 쓰고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에브도 라이네 공작만큼 나이들 날이 올 테고, 에브는 젊을 때 절절한 사랑을 했지(앞으로 할 겁니다). 그럼 라이네 공작은 젊은 시절이 없었을까. 있잖아.'

이런 의식의 흐름. 녹지처럼 사실만 적고 넘어가려다 결국 이것저것 표현에 손을 대게 되고...

라이네 공작 부부가 상당히 달달한 커플이었다는 것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외전을 쓰면서 그 달달함이 형태를 갖추니까 이번편에서는 이런_남자_또_없나요.jpg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무뚝뚝, 적당히 부드러움, 적당히 농담.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이봐요, 아가씨. 표정 관리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게만 그런 농담. 상상력이 폭발합니다.

공작 외전은 아마도 3편-4편으로 나뉠 것 같습니다. 연재 주기도 느릴 것 같고요. 나날이 체력 떨어지고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쉰다고 말씀 드려서 시간 많으니 자세하게 써봐야지,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용량 늘어나서 죽을 것 같습니다...ㅇ<-< 이번편에서 밝혀진 것을 포함하여, 공작 외전에서 앞으로 밝혀질 게 몇 개 있긴 했지만, 그냥 뼈대만 세웠을 땐 조금 긴 한 편 예정이었습니다. 큽.

자유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D

추신) 그리고 음, 다음편은 어쩌면 조금, 뒷목...? 혈압...? 아니, 막, 헤르조 외전의 베르덴 같은 건 아니고요(다급) 어쨌든 힌트 몇 번 드린 것이 밝혀지는 거니까 괜찮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신2) 아마도르는 현 발리앙 후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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