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면꽃 작가님-51화 (51/157)

00051 CHAPTER 5. 사랑을 위한 사랑 =========================

내게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놀랍게도, 혹은, 놀라울 것 없게도, 아리엘과 르네였다.

나는 반색했지만, 그들에게 따로 다가서지는 않았다. 그들을 발견하고 나서는 우뚝 서서, 그들이 내게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 따라서 그들에 앞서 내게 인사를 건넨 포르타 백작과 먼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내 시선은 두 쌍둥이에게서 거두어졌다. 우리만 있을 때라면 모를까, 귀족들 사이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격조했던 백작에게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화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시드니와 베르덴이 같은 나이임에도, 포르타 백작의 경우 혼인을 발리앙 후작보다 훨씬 늦게 하여 현재 나이가 육십을 넘었다. 하얗게 샌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백작은 그 인상이 몹시도 따스한 사람이라, 대하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은 사람이다. 가장 친했던 헤르조의 부친인데다, 헤르조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오드리나에 있는 포르타 저택에 방문을 자주 해야 했고, 하여 나는 포르타 백작을 발리앙 후작보다는 자주 만났었다.

션이 여기사가 되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원해준 것만 봐도, 백작의 성정이 어느 정도 보이잖아.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고맙습니다. 내군內君은 여전히 포르타령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예. 그렇지 않아도 각하께 축하드린다고 말을 전해달라는 서신이 왔습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거기까지 소식이 벌써 전해졌나봅니다.”

백작가의 본성인 길롯성이 있는 포르타령은 오드리나로부터 서부, 내륙에 있다. 그러나, 그래도 결국 지방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도의 소식이 아주 빠르게 전해지지만은 않을 테고, 백작이 구태여 정치와 관련된 소식을 그의 부인에게 전할 리도 없을 텐데.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백작이 나지막하게 웃고는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이번에 영지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만, 저보다 앞서는 여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션이.

션은 그 무뚝뚝한 배려와 애정을 물론 내게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모친과 부친에게도 쌀쌀맞은 사랑을 표현하는 걸 보고 있자면, 그녀의 표정, 목소리와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모친에게 꼬박꼬박 안부 편지를 쓰는 건 션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다. 그 서신에 적어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납득했고, 조금 민망해졌다. 하여 내가 어설프게 웃으니 백작은 오히려 웃음기를 한결 덜어냈다. 배려일 것이다. 노인은 내가 소공녀일 때처럼 온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 꼬박꼬박 백작님, 백작님, 아버님, 아버님, 하며 인사를 하던 내가 이제는 그의 윗사람이 되었으니 어색해할 만도 한데, 작위의 변화에 대하여는 나도 그도 겉으로 보이는 어색함이 없었다.

백작처럼 나도 호의를 담아 그를 보며 나는 그의 자식들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포르타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시드니라면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늦게 오기로 했고, 션이라면 헤르조와 함께 있습니다.”

“…….”

헤르조가, 돌아 왔구나.

타이밍 좋기도 하다. 오늘에서야 떠올렸는데 돌아와 있었다니. 헤르조의 이름을 듣자마자 말문이 막혔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백작은 마치 내 속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원하신다면, 헤르조를 부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만나고 싶지만,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다. 그는 아리엘을 택했고 나는 그를 버렸기에 우리는 갈라섰다. 비슷하게 버리고 버려졌던 베르덴이 이상한 예를 만들었을 뿐, 헤르조는 내가 후작일 때에나 공작이 되었을 때에 무언가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웃으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앞으로 충분히 있을 것은 그가 다른 가문도 아닌 포르타 가문의 둘째 영식이기 때문이고, 그런 예의상, 체면상의 친근한 표현들을 나는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베르덴의 반응을 이해하는 것과 헤르조의 반응을 이해하는 것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건, 베르덴은 가족을 위함이고 헤르조는 이성적인 사랑을 위함이기 때문이리.

나는 헤르조를 이해했다. 그걸로 되었다.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될 일, 앞으로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럼 백작.”

백작의 등 뒤, 아직 나를 보고 있는 아리엘과 르네를 힐끔 보고 나는 백작에게 운을 띄웠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나보다 키가 큰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애당초 그는 일부러 저 두 사람과 내 사이에 끼어든 감이 있었다. 백작은 손을 올려 가슴에 대고 약식의 예를 갖춘 후, 상냥하게 내게 말했다.

“각하께선 이제 저들이 사는 자리와 다르게, 저희가 사는 자리에 계십니다.”

긴 인사말이다.

나는 이를 보이고 흣 웃었다.

“저 없는 동안 쳐놓은 분탕질이 그 정도 입니까?”

“각하께서 체면이 깎이시면 이제 저희의 체면도 함께 깎이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계실 테지요.”

내 상황이 그토록 특수하다. 나는 아리엘이 영애, 영식들 사이에서 선한 얼굴과 선한 말을 가장하여 교묘하게 깎아내렸을 내 평판을, 내가 그들에게 직접 말함으로써 올릴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후계자 지위를 위해 승작한 자들도 있겠으나, 나처럼 대귀족의 작위를 승작한 자들은 없을 테니까.

나는 아직 가주가 아니나 어느 가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만한 지위에 있었다. 백작이 말했듯 이제 저들과 섞여 저들을 표적으로 하는 사교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가주들과의 사교를 해야 하고. 내가 해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건, 다시 말하여 저들이 내게 대놓고 기어오를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나와 저들은 격이 다르다.

나는 코웃음을 웃었다.

내가 설마 몰랐을까. 이는 호의가 반이요, 제가 포함되어 있는 가주들의 체면에 대한 염려가 반이다.

백작은 분명 내게 친절하지만, 그렇다 하여 가주가 아닌 것도, 귀족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다. 나 역시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나, 후작이 아닌 것도, 귀족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러니 호의와 선은 지켜야지.

백작이 사과하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적절치 않은 걱정인 것은, 백작도 알 테고 말입니다.”

백작이 후작에게 하는 말로는 약간도 적절치 않은 훈계조였다. 내가 지금 그를 존중하며 말을 어느 정도 높이고는 있으나, 그의 가문은 라이네 가문에 비할 것이 아니고, 우리 서로 가진 작위의 차이 역시 그랬다. 이건 내가 지켜야 할 라이네의 위치다.

내가 웃으며 한 써늘한 말에, 백작은 당황치 않고 내게 사과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다른 약소 가문은 몰라도, 포르타가는 작위도 백작이고 ‘대귀족’에 속하니 바비에르가의 일도 짐작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조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이긴 했다. 지난 한 달 하고도 이 주, 감히 라이네 후작을 돌려 까던 지식인들이나, 더 우아하게 돌려 까던 중장년의 귀족들을 대해왔기 때문에 그 소문도 퍼졌을 터.

음, 역시 그렇다면 포르타 백작은 체면 문제보다는 호의가 더 컸던 걸까.

내 허락을 구하고 떠나는 백작의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호의가 컸어도 내가 취했을 언행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분제가 있는 이 세계에서는 나이보다는 신분, 귀족의 경우에는 작위의 계급이 우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리엘과 르네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아리엘, 르네. 오랜만입니다!”

“에본느.”

아리엘도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그녀의 계획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일단 피식 웃고 넘어갔다.

지난번 티타임에서 르네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아리엘이 내게 요청했던 것과 황태자의 방문과, 언제 오드리나를 떠날 거냐는 바에 대해 나를 떠보았던 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쓸모가 없으니 잊고 지냈지만, 확실히 어느 정도 충격을 받긴 받았더랬다. 적정선에서 그녀가 물러나긴 했으나 조금만 더 갔으면 추궁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정하게 아리엘의 얼굴과 르네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를 만나 기뻐 보일 것이다. 그래야지.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내 대처가 조금만 미숙하면, 아리엘이 천사표가 될 것이다. 안다. 오드리나 사교계의 생리는 그래도 아직은 아리엘보다야 내가 더 익숙할 터. 반 년 만에 이십 년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지금 사교계의 내 평판을 모른다고 생각하려나. 음, 역시 그건 아니다. 아리엘이 얼마나 영리한데. 르네도, 물론 놀라울 정도로 영리하고.

“오늘도 두 사람 정말 예쁘고 멋집니다.”

내가 발랄하게 말하자, 르네가 조곤조곤 내게 화답했다.

“각하께서도, 오늘 아름다우십니다.”

그 정중한 말에 아리엘의 손이 살짝 꿈틀거리는 걸 나는 확실히 보았으나, 모르는 척 했다. 보지 않은 척.

아리엘은 곧 화들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라.

“어머나. 죄송해요, 각하. 첫째 이름을, 저도 모르게.”

내가 호칭을 지적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흘렀다. 그러나 그 계획이 정말 없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르네를 보고 아리엘을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참, 무섭다.

“괜찮습니다. 내가 후작 되었다 해서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친구가 아니더라도 친구인양 남아있어야 하는 사이이지.

내가 두 주 전에 시드니를 어찌 대했는지와 비교해보면, 지금 내 언행과 태도는 나 스스로도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래도 이 적당한 존중이 아직은 필요하다. 아리엘이 여태 날 발판 삼아 꽃에 가까워진 것처럼, 나도 그녀를 오늘은 발판 삼고 싶어서.

내가 이 수많은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수년간 꽃이라며 추켜세워졌던 것을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건 비단 인성과 외모만이 아니라 가문의 급이 점수처럼 들어가는 부분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라이네다.

나는 아리엘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황궁에서 열린 무도회는 처음이지요? 무언가 힘든 점이 있으면 말해요. 이런 자리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날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으니, 염려가 됩니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지금 너는 내 밑이며, 너는 내가 후작이 된 덕분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꽃이 될 확률이 높아진 것뿐이라는 뜻이다.

꼬아 듣다못해 속이 뒤집힐 정도로 꼬아 들으면 그렇고, 평범하게 받아들이면 그냥 나는 아리엘을 걱정하는 거고.

나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꼰 뜻을 담아서 말했다, 물론. 웬만큼 성격 이상한 이들이 아니라면 거기까지 도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교계에서 성격 쿨한 괴짜로 소문이 났는데.

아리엘이 무어라 입을 열려 하자, 나는 그걸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일부러 탄성을 질렀다. 아리엘에게서 나온 말은 없었다. 그녀가 이 일에 대하여 나에게 기분 나빠하며 나쁜 감정을 가지기에는 뭔가 묘한, 뭔가 아닌 것 같은 그런 언행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나를 그녀가 아는 에본느로 여기고 있다며 배려해주는 건 오늘은 좀 접어두고.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회장의 어느 구석을 가리켰다.

“봐요. 저기 션과 포르타 영식이 있습니다.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두 사람도 같이 가겠습니까?”

헤르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놀랄 일 아니다. 나는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션에게 묘한 웃음을 보냈고, 션은 헤르조를 버리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마침 내게 오는 길이던 쥰이 방해된다는 듯 그의 등을 턱턱 밀어 치우기까지.

쥰은 멈춰 서서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션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녀를 따라왔다.

“각하.”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이 차가움. 강하다.

나는 나를 무뚝뚝하게 부르는 션이 재미있는 나머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작인 걸 알고도 언니라 부르더니, 여긴 사석이 아니라고 각하인가.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물었다.

“포르타 영식은 거기에 그냥 두고?”

“버려도 됩니다.”

“누님, 오셨어요?”

션의 말은 무시한 듯 쥰이 미소를 짓고 나를 반겼다.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아리엘과 르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자연스러운 광경을 보다, 나를 호위하는 것처럼 내 어깨 뒤에 딱 붙어 서는 션을 돌아보았다.

“경?”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신경 쓰이는데.

근무 서다 바로 왔는지 제복차림이라 더 신경 쓰인다.

그러나 아리엘이 혹시라도 마법을 쓸까 곤두서서 경계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적어도 등 뒤가 지켜진다는 사실이 상당한 위안을 준다는 걸 인정해야겠더라.

마나를 아주 조금 쓰는 사소한 마법은 어지간히 예민하지 않고서야 눈치 챌 수가 없다. 내게 마법을 쓴다면, 내가 낌새를 눈치 챌 수도 없을 정도로 자잘한 마법이라서 또 당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어찌할지 따로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마법사인 게 아리엘에게 알려져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숨기는 게 좋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하잖아.

나와 쌍둥이들의 거리가 쥰에 의해 약간 벌어진 덕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처럼 내가 그녀를 민 것처럼 꾸미지는 못할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쥰이 쌍둥이와 대화하는 걸 들으며 주위를 휘이 둘러보았다. 대화하기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공작이 곧 돌아오겠지만, 없는 지금은 이렇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마침 알드리히가 들어오기 시작한 참이라, 우리는 즉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알드리히를 향해 예를 갖추어야 했다.

내가 멈칫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알드리히가 왔다면, 그럼 공작도 돌아와야 하는데?

허리를 세우며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준비되어 있는 옥좌에 황제를 대신하여 앉은 그를, 나는 뚫어져라 보았다. 공작은 실은 알드리히와 함께 들어오거나, 그보다 먼저 들어왔어야 했다.

“누님.”

아리엘이 있으니 알드리히에게 그다지 시선 주지 않는 게 좋음을 알면서 나는 지금 왜. 무얼 예감해서.

아니, 아니다. 아무것도.

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놀랍게도, 무언가 불안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내 뺨을 쓸었다. 웃음은 이상하지 않다. 왜 그러냐며 씩 웃으며 눈썹을 치켜 올리자, 쥰은 나를 좀 더 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싱겁긴. 그러나 나는 쥰을 보면서도 신경은 온통 높은 곳의 옥좌 쪽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눈꼬리 시야로 알드리히 근처에 무언가 변화가 있음을 곧바로 알았다.

고개를 돌리자, 알드리히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는 시종이 보였다.

그리고. 시종이 귓속말을 끝내고 몸을 세우기도 전에. 이미.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저 섞여있는 나였을 텐데, 알드리히는 나를 찾아내었다. 처음부터 나 있는 곳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나를 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평소 같지 않았다.

나는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그만을 보았다. 지독하게 집중하여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알드리히도 내게서 시선을 끊어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나는 지금, 무얼, 무얼 예감하여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회장 안의 비명, 외침, 웅성거림, 시선. 시선. 눈물. 내 피부에 닿고 있는 저 모든 것들. 그제야 나는 들었다.

“라이네 공작이 자진했어요!”

“그가 죽었어!”

그 비명은 내 양 귀를 일직선으로 꿰뚫은 뒤에, 나를 꿰뚫었다. 내 가슴을, 아마. 뚫고, 헤치고.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버티는데, 알드리히에게서 내게로 뛰어온 시종이 내게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

차마 바로 따라나설 수가 없어서 나는 그를 잠시 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이 상황, 나는, 이해를. ……이해를.

“…….”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저 먼 문 위의 천장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서 숨을 들이켰다. 간단한 심호흡이었다.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먼저 급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쥰을 힐끔 보고, 어렵지 않게 시종의 뒤를 따랐다.

내가 인도된 곳은 회장에서 나와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중앙궁인 솔체궁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이미 기사들과 시종, 시녀들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버텼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가장 엄격히 지켜져야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오 층에 올라가기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도 잔잔했다.

침착하고 차분하여, 이 상황이 지금 정말 꿈 속의 꿈인 것처럼.

5층은 이미 기사들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고, 기사들을 지나치자 드디어 고요함이 찾아왔다. 시종은 나와 쥰만 올려보냈다. 그리하여 푸른 달빛, 서늘한 은빛, 베일처럼 드리워진 복도에 서 있는 저 사람. 그리고 누워 있는…….

시드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일단 멈춰 섰지만, 쥰이 뒤에서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자 흠칫 놀랐다. 아, 그렇지. 나는 지켜야 할 사람이 많다. 무너지면 안 된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흐, 흐, 웃음을 흘렸다. 이마를 한 번 쓸었다.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마. 아마,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걸음을 시작하자마자, 혹은, 다가가는 도중에 나는 나를 잃었다.

차분하게, 아니면 평소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입만 뻐끔거리게 되나. 어째서 입술이 계속 떨리게 되고, 어째서, 나는, 멍해서, 왜 그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하여서 왜 이런 일을, 결국, 왜.

왜.

충성스럽게도 곧 붕어할 황제에게 끝을 바친 모양으로 끝을 낸 공작의 시신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내 구두 끝은 그의 피를 밟았다.

소스라치고 싶었으나, 소스라치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나는. 그래서 멍하게 내가 밟은 검은 것을 보다가……, 보다가……. 온전하게 붉지 못한 그것을 보다가…….

아.

왜.

어째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실체 없는 것을 더듬는 것처럼 파들파들 허공을 더듬는 내 두 손을 잡은 어느 손들이 있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를 망연하게 보았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데. 잔뜩 일그러진 인상을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아니야. 아니야.

아니잖아.

눈물을 참으며 계속 고개를 젓는 게 내가 이 순간 할 수 있는 전부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아.

아.

“제발…….”

마침내 목소리를 토했다. 그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발. 제발. 아니잖아. 아니야. 아니야.”

“…….”

시드니는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계속 애원했다

“아니에요. 아니야, 경. 아무 일도 없었어. 아버지가, 아버지가, 또 아버지가.”

“필르 라이네. 절 보십시오.”

“내가, 내가. 내가!”

“필르 라이네.”

“내가 왜 살아서. 왜 또 이 꼴을 보고, 내가! 내가 왜…….”

“필르 라이네. 절 보십시오. 절, 보십시오.”

나는 격동한 마음 탓에 그의 손을 뿌리치려 버둥거렸지만, 시드니는 그래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포기치 않고 전에 없이 냉정한 말로 나를 내려쳤다.

“에본느. 절 보십시오.”

“내가, 내가…….”

넋을 잃고 반복했다. 그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 억누른, 억눌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요, 경.

조금도 괜찮지 않아요.

나 좀 살려줘요…….

맥이 탁 풀렸다. 두 다리도 풀려서, 마음에 이어 몸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쓰러지려 하는 몸을 시드니가 내 양 팔을 잡고 지탱하며 천천히 내려주었다. 그 와중에도 공작의 피에서 한 걸음 옆으로 피하도록 옮겨주더라.

나는 피와, 시신을 앞에 두고 번갈아 보았다. 이게, 그러니까, 꿈이, 아니라서. 아니, 아니라고.

그러자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몸을 앞으로 굽히고 웅크렸다. 드레스에 파묻히도록 구부렸다. 지금 내 속에 있던 모든 추억이 꺾였다. 내가 쌓아왔던 평정, 평온, 자부심, 아,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나의 역사. 나는 두 주먹을 얼굴 앞에 대고 오열했다.

공작.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내 탓에 가신 아버지.

발리앙, 너, 나의 적이여.

제발, 아, 아버지.

아버지!

============================ 작품 후기 ============================

약간의 각성.

-이라고 에브 멘탈 붕괴한 편에 발랄하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난편 이외에도 지난 챕터부터 공작이 독에 당한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몇 군데 있습니다. 공작과의 대화들이나, 미로골목 남자와의 대화나. 기타 등등. 에브가 발리앙으로 바로 화살을 돌릴 수 있었던 건, 일단은 공작의 피색입니다. [+에브가 지금 머리가 굳어버려서 외려 빠르게 결론을 내린 것도 있고요. 이것저것 조합해서 해오던 최악의 상상 중 하나.하지만 공작의 정적이 한 짓일 수도 있다는 것도 정신 차리면 염두에 두게 될 겁니다.(제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그냥 먼저 설명드리고 갑니다.)]

분량 조절 실패해서 두 편으로 나눌까 했는데, 애매해서 한 편으로 올립니다. 챕터 끝. 다음편은 외전입니다.

자유연재. 전개에 집중한다고 퀄리티가 점점 떨어져서 51회에서 최악을 찍은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모로 지쳤고 하여,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에 나왔지만,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D 발리앙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후작이 자진할 것을 에본느는 직감하고 있었고,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공작은 자진했습니다. 외전에서 간단하게나마 좀 더 풀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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